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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추천 도서 (921) 소크라테스 회상 - 크세노폰






1. 책소개


인류 최초의 위대한 물음의 전문가 - 물음을 거듭하면서도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 사고(思考)의 사냥꾼 소크라테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배우는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가 인류의 온갖 문제, 예를 들면 선악(善惡)·미추(美醜)·정치가의 자격(自格)·친구의 의미·출세 방법·아테네의 기녀가 사내를 사로잡는 방법 등에 대하여 어떤 교묘한 방법으로 물음을 전개했는가를 회상과 전문(傳聞)의 형태를 빌어 소설처럼 기술한 책이다

| 편집자의 말 |

그리스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Memorabilia)≫은 소크라테스를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가장 귀중한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옛부터 사실(史實)의 소크라테스를 알기 위한 자료로서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 및 ≪향연≫,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특히 ≪형이상학(Metapysica)≫을 들고 있다. 이 작품들의 신뢰 가치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이 사실(史實)의 소크라테스를 가장 충실히 전하고 있는데 대해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크세노폰이 이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일반적이고도 전면적인 보고이다. 그의 책 중에서 소크라테스에 관한 것은 네 종류가 있다. 첫째가 ≪소크라테스 회상≫, 둘째가 ≪변명(Apologia)≫, 셋째가 ≪향연(Symposion)≫, 그리고 넷째가 ≪가정론(Oikonomikos)≫이다. ≪향연≫은 플라톤의 동명(同名)의 책보다도 뒤에 나왔는데, 여기서 착상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변명≫은 소크라테스의 고발에 대한 변명인데, 플라톤의 ≪향연≫과는 독립된 것인 듯하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회상≫의 처음 부분과 내용이 일치한다.
≪가정론≫은 자산 있는 일가(一家)의 주된 덕이 그려져 있다. 실로 유교적인 표현을 빌어 ‘제가편(薺家篇)’이라고 옮겨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플라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정 인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은 크세노폰 자신의 사상이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신들을 신봉하지 않고 새로운 신을 신봉하였으며, 또 청년을 부패시켰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이 죄과는 부당한 것이며, 소크라테스의 종교관과 청년 교육에는 털끝 만큼의 잘못도 없었다는 것을 전 시민에게 알리는 일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인 요청이었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6년 뒤에, 폴뤼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의 고발>이라는 글 한 편을 발표하여 더욱 절실하게 요청되었다.
폴뤼크라테스는 당시 상당히 알려져 있던 소피스트였으며, 아마도 변론술 연습의 작문으로서 소크라테스 고발인의 한 사람인 아뉘토스가 법정에서 읽을 고발문을 썼다. 그런데 실제로 법정에서 고발자의 필두 멜레토스가 한 고발 연설은 아무것도 발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폴뤼크라테스의 작품이 사실상 아뉘토스가 법정에서 읽은 고발의 초고라고 일반에게 믿어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 플라톤도 붓을 들었고, 또 크세노폰도 붓을 들었다. ≪소크라테스 회상≫도 바로 이 목적의 일부분을 위해 씌어졌으며, 제Ⅰ권의 처음 두 장(章)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변호’로 이루어져 있다.
제Ⅰ권 제3장에서 제Ⅲ권의 끝까지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는 제Ⅰ권의 처음 두 장(章)에서 다룬 내용을 다시 자세하게 실례를 들어가며 서술하고 있다. 제Ⅳ권은 모두 교육론에 할애하고 있으며, 이것은 ≪소크라테스 회상≫ 중에서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부분이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형태의 ≪소크라테스 회상≫은 이처럼 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게 나눈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이며, 크세노폰 자신이 구분해 놓은 것은 아니다. 장(章)과 절(節)의 구분도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 시대 이래의 것이다. 또 서명(書名)의 ‘Memorabilia’라는 라틴명도 16세기에 와서 붙여진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리스어로 ‘Apomnemoneumata’라고 불리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소크라테스 회상(Memorabilia)≫으로 통하고 있다.

|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대하여 |

소크라테스의 청년 교육의 주안점은 본래 전문적인 철학자의 양성이 아니라 유능하고 덕망 있는 사람(군자)을 시민 생활의 모든 분야에 걸쳐 양성하는 데 있었다. 그는 사람은 어떻게 통치자가 될 수 있는가를 논하고 있는데, 이것을 제Ⅰ권 1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 즉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제력(극기)이며, 자제력은 선악을 판단하는 데 오류를 범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며 근본이 되는 것은 지혜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지혜는 모든 덕의 근본이었다. 지혜 자체도 하나의 덕이며 이 덕에 도달함으로써 다른 모든 덕에 도달할 수 있다. 지혜는 단순한 학식이 아니다. 실천에 옮길 수 없는 지혜는 지혜가 아니다. 지혜에 의해서만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 지혜는 구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며 스스로 수학·연마함으로써 완전히 접근한다.
통치자가 되려는 사람은 우선 자기의 행실을 닦아야 한다. 자기의 행실을 닦은 뒤에 비로소 집안을 바로잡을 수 있고, 집안을 바로잡음으로써 비로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친구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친구는 모든 재보 중에서도 가장 귀한 보물이다. ≪소크라테스 회상≫ 제Ⅱ권의 4장에서 6장까지, 아니 오히려 최후의 장(章)까지 모두 우정론이다.
여기에는 또 효(孝)가 논해져 있고 형제애가 논해져 있다. 형제는 서로 화목할 때, 한 사람이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을 서로 도와 행할 수 있다. 낳아 준 은혜, 길러 준 은혜를 아는 자에게만 국가는 합당한 보상을 내리며, 불효자는 이 최대의 은혜마저도 분별할 줄 모르며 어떠한 호의에도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회는 이런 인간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 관계에 의한 설명은 소크라테스 논법 중 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은 저급한 목적 추구의 공지론(空知論)이 아니라, 고대의 윤리에 입각한 인간 행동의 도덕적 규범이다. 우리는 유용(有用)과 미(美)와 선(善)의 합일을 제Ⅳ권 6장에 의해 그것을 이해한다. 도움이 되는 것이 올바른 행위이며, 이것에 의해 사람은 행복해진다. 법(국법과 불문법)에 따르는 것이 정의이며 그리고 행복이다(제Ⅳ권 4장).
행복은 소크라테스의 철학 가운데 큰 위치를 차지한다.
삼라만상이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져 있으며,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경신(敬神)이다(제Ⅳ권 3장). 여기에 목적론은 세워졌다. 그것은 기독교에서의 신의 섭리의 관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것을 들은 ‘다이모니온’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신탁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온갖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며, 인간에게 전조(前兆)와 신탁(神託)을 부여하고 인간을 위해 가장 애쓰는 신을 오직 그만이 알고 있다. 그 이유로 해서 인간은 신에게 빌 때 ‘무엇을 주시옵소서’라고 빌지 않고 다만 ‘좋은 것을 주시옵소서’하고 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다이모니온’은 사실 심리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이렇게 윤리에서 시작하여 윤리로 끝난다. 그리고 그 근간(根幹)을 이루는 ‘지혜’는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가르침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격물치지’는 사물의 이치(理致)를 끝까지 연구하여 지식을 확실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자(朱子)는 해석했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법칙에 통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실 소크라테스도 정의란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해서 “법에 따르는 것, 이것이 정의이다”라고 정의했다. ‘법’은 국법은 말할 것도 없고 조상 전래의 도덕적 관습까지도 포함된다. 이것을 꼭 지키는 것이 정의요, 정의의 행동이야말로 지혜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출처 - 반디앤루니스


2. 저자소개


크세노폰

크세노폰(기원전 430/25년경~355/50년경)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 아테나이에서 태어났다. 플라톤과 동년배로 소크라테스의 친구이자 제자였고, 주로 군사·철학·스파르테에 관심이 있었다. 고대에는 철학자로, 그 후에는 역사학자로 알려졌다. 20대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로부터 페르시아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퀴로스(Kyros)에게 고용된 그리스인 용병대에 참가한다. 퀴로스가 전사한 후 적국 페르시아 제국 심장부로부터 그리스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모범적 지휘관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이때의 전기()가 그의 대표작 『페르시아 원정기』(Anabasis)이며, 이 책은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 길잡이가 되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되고, 몇 년 뒤에는 크세노폰도 반역자로 추방되었다. 그 후 스타르테와 가까이 지내며 중간적 처지에서 격변시대를 꿰뚫어보는 남다른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 역사와 관련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 달리 모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인기를 추측해볼 수 있다. 저서로 『소크라테스의 회상』, 『그리스 역사』, 『퀴로스의 교육』, 『변명』, 『향연』, 『가정론』 등이 있다.


출처 - YES 24 제공


3. 목차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제Ⅰ권
제Ⅱ권
제Ⅲ권
제Ⅳ권

해 설


출처 - YES 24 제공


4. 출판사 서평


인류 최초의 위대한 물음의 전문가. 물음을 거듭하면
서도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 사고()의 사냥꾼!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배우는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가 인류의 온갖 문제, 예를 들면 선악()·미추()·정치가의 자격()·친구의 의미·출세 방법·아테네의 기녀가 사내를 사로잡는 방법 등에 대하여 어떤 교묘한 방법으로 물음을 전개했는가를 회상과 전문()의 형태를 빌어 소설처럼 기술한 책이다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현대는 물음의 시대이다. 우주 개발의 문제에서부터 인간의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체가 물음으로 싸여 있다. 한편 교육과 정치마저도 문답, 다시 말해서 토론을 그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 삼고 있다.
물음에는 묻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 최초의 위대한 물음의 전문가, 물음을 거듭하면서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 이른바 사고()의 사냥꾼,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배우는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소크라테스가 인류의 온갖 문제, 예를 들면 선과 악·미추()·정치가의 자격·친구의 의미·출세 방법·집 짓는 법, 아테네의 기녀()가 사내를 사로잡는 방법 등에 대하여 어떤 교묘한 방법으로 물음을 전개했는가를 회상과 전문()의 형태를 빌어 소설처럼 서술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산파술, 즉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실례가 이 한 권의 책에 수없이 산재해 있다.
“친구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부정이냐?”
“부정입니다.”
“그럼 앓고 있는 친구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도 부정이냐?”
“부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거짓말하는 것은 부정이기도 하고 부정이 아니기도 하다. 거짓말하는 것은 옳으냐 그르냐?”
“이제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좋다. 자네는 지금껏 거짓말하는 것이 정의인지 부정인지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무지()를 자각하게 되며 마지막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교훈을 받게 된다. 그러나 무지의 자각이란 곧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것을 말한다. 자기의 무지를 깨달았다는 대답은 바로 또 하나의 물음을 잉태한다. 물음을 잉태한 대답은 대답이라고 할 수 없다. 철학은 여기서 비롯된다.
평민〔데모스〕이 무엇인지 모르고서는 평민 정체〔데모크라시〕를 알 수가 없다.
“평민이란 무엇이냐?”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란 무엇이냐?”
“필요한 돈이 모자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자라도 현재 돈의 부족을 한탄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자도 가난한 사람이냐?”
“그러한 의미에선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럼 데모크라시란 가난한 사람의 정체()냐, 아니면 부자의 정체냐?”
“모르겠습니다.”
이 경우 문제는 말의 애매성 때문에 일어난다. 말의 문제, 여기서도 철학은 비롯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가르친다.
“좋은 지식은 말의 덕택이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말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며, 학식 있는 사람일수록 말을 잘하는 것이다.”
즉 말을 잘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세노폰은 철학자가 아니었다. 소년시절에 소크라테스에게서 사사()했으나 그의 반생은 직업 군인이었다. 군에서 물러나 조용히 전원()에서 살며 기원전 354년 76세로 죽을 때까지 몇 권의 책을 썼는데, 그는 그 점에서 천성적으로 뛰어난 사색가였고 작가였다. 소크라테스의 애제자 플라톤이 몇 편의 대화편 속에서 보여준 그런 소크라테스 상()과 이 《소크라테스 회상》 속의 소크라테스 상과는 매우 차이가 많다.
《소크라테스 회상》 속의 소크라테스는 통속적이며, 그래서 이 책은 읽기가 쉽다. 읽기는 쉽지만 “현명한 사람이 한 말에 관한 어리석은 사람의 기록은 정확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크세노폰의 말이 철학상의 어려운 점에 관해 언급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트란드 러셀은 이 책을 비평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크세노폰의 이 책과 동시에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 회상》은 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청년을 부패시켰다는 죄로 문초를 받게 된 소크라테스를 위한 변명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격조 높은 《소크라테스 변명》과 《크리톤》에 비하여 너무나도 산문적이다. 만일 《소크라테스 회상》이 있는 그대로의 소크라테스를 그린 것이라면, 플라톤은 있어야 할 소크라테스 사상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에 관한 한 그 가장 값진 것이 70년 동안의 변론 생활과 극적인 죽음, 즉 그의 ‘인간’에 있다면 인간 소크라테스를 알기 쉽게 그린 이 《소크라테스 회상》도 고전적 기록으로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 책의 번역 원전으로 머챈트(E.C. Marchant)가 엮은 《Xenophon, Memorabilia (Leob)》 19판을 텍스트로 사용하였으며 펭귄 클래식 영역본(1974년판)을 참고하였다.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주()도 많이 달아 놓았다. ( - 옮긴이 최 혁 순)

| 편집자의 말 |

그리스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Memorabilia)≫은 소크라테스를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가장 귀중한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옛부터 사실()의 소크라테스를 알기 위한 자료로서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 및 ≪향연≫,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특히 ≪형이상학(Metapysica)≫을 들고 있다. 이 작품들의 신뢰 가치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이 사실()의 소크라테스를 가장 충실히 전하고 있는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크세노폰이 이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일반적이고도 전면적인 보고이다. 그의 책 중에서 소크라테스에 관한 것은 네 종류가 있다. 첫째가 ≪소크라테스 회상≫, 둘째가 ≪변명(Apologia)≫, 셋째가 ≪향연(Symposion)≫, 그리고 넷째가 ≪가정론(Oikonomikos)≫이다. ≪향연≫은 플라톤의 동명()의 책보다도 뒤에 나왔는데, 여기서 착상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변명≫은 소크라테스의 고발에 대한 변명인데, 플라톤의 ≪향연≫과는 독립된 것인 듯하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회상≫의 처음 부분과 내용이 일치한다.
≪가정론≫은 자산 있는 일가()의 주된 덕이 그려져 있다. 실로 유교적인 표현을 빌어 ‘제가편()’이라고 옮겨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플라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정 인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은 크세노폰 자신의 사상이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신들을 신봉하지 않고 새로운 신을 신봉하였으며, 또 청년을 부패시켰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이 죄과는 부당한 것이며, 소크라테스의 종교관과 청년 교육에는 털끝 만큼의 잘못도 없었다는 것을 전 시민에게 알리는 일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인 요청이었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6년 뒤에, 폴뤼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의 고발》이라는 글 한 편을 발표하여 더욱 절실하게 요청되었다.
폴뤼크라테스는 당시 상당히 알려져 있던 소피스트였으며, 아마도 변론술 연습의 작문으로서 소크라테스 고발인의 한 사람인 아뉘토스가 법정에서 읽을 고발문을 썼다. 그런데 실제로 법정에서 고발자의 필두 멜레토스가 한 고발 연설은 아무것도 발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폴뤼크라테스의 작품이 사실상 아뉘토스가 법정에서 읽은 고발의 초고라고 일반에게 믿어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 플라톤도 붓을 들었고, 또 크세노폰도 붓을 들었다. ≪소크라테스 회상≫도 바로 이 목적의 일부분을 위해 씌어졌으며, 제Ⅰ권의 처음 두 장()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변호’로 이루어져 있다.
제Ⅰ권 제3장에서 제Ⅲ권의 끝까지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는 제Ⅰ권의 처음 두 장()에서 다룬 내용을 다시 자세하게 실례를 들어가며 서술하고 있다. 제Ⅳ권은 모두 교육론에 할애하고 있으며, 이것은 ≪소크라테스 회상≫ 중에서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부분이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형태의 ≪소크라테스 회상≫은 이처럼 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게 나눈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이며, 크세노폰 자신이 구분해 놓은 것은 아니다. 장()과 절()의 구분도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 시대 이래의 것이다. 또 서명()의 ‘Memorabilia’라는 라틴명도 16세기에 와서 붙여진 것이다. 그 이전에는 그리스어로 ‘Apomnemoneumata’라고 불리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소크라테스 회상(Memorabilia)≫으로 통하고 있다.

|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대하여 |

소크라테스의 청년 교육의 주안점은 본래 전문적인 철학자의 양성이 아니라 유능하고 덕망 있는 사람(군자)을 시민 생활의 모든 분야에 걸쳐 양성하는 데 있었다. 그는 사람은 어떻게 통치자가 될 수 있는가를 논하고 있는데, 이것을 제Ⅰ권 1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 즉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제력(극기)이며, 자제력은 선악을 판단하는 데 오류를 범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며 근본이 되는 것은 지혜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지혜는 모든 덕의 근본이었다. 지혜 자체도 하나의 덕이며 이 덕에 도달함으로써 다른 모든 덕에 도달할 수 있다. 지혜는 단순한 학식이 아니다. 실천에 옮길 수 없는 지혜는 지혜가 아니다. 지혜에 의해서만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 지혜는 구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며 스스로 수학·연마함으로써 완전히 접근한다.
통치자가 되려는 사람은 우선 자기의 행실을 닦아야 한다. 자기의 행실을 닦은 뒤에 비로소 집안을 바로잡을 수 있고, 집안을 바로잡음으로써 비로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친구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친구는 모든 재보 중에서도 가장 귀한 보물이다. ≪소크라테스 회상≫ 제Ⅱ권의 4장에서 6장까지, 아니 오히려 최후의 장()까지 모두 우정론이다.
여기에는 또 효()가 논해져 있고 형제애가 논해져 있다. 형제는 서로 화목할 때, 한 사람이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을 서로 도와 행할 수 있다. 낳아 준 은혜, 길러 준 은혜를 아는 자에게만 국가는 합당한 보상을 내리며, 불효자는 이 최대의 은혜마저도 분별할 줄 모르며 어떠한 호의에도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회는 이런 인간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 관계에 의한 설명은 소크라테스 논법 중 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은 저급한 목적 추구의 공지론()이 아니라, 고대의 윤리에 입각한 인간 행동의 도덕적 규범이다. 우리는 유용()과 미()와 선()의 합일을 제Ⅳ권 6장에 의해 그것을 이해한다. 도움이 되는 것이 올바른 행위이며, 이것에 의해 사람은 행복해진다. 법(국법과 불문법)에 따르는 것이 정의이며 그리고 행복이다(제Ⅳ권 4장).
행복은 소크라테스의 철학 가운데 큰 위치를 차지한다.
삼라만상이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져 있으며,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경신()이다(제Ⅳ권 3장). 여기에 목적론은 세워졌다. 그것은 기독교에서의 신의 섭리의 관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것을 들은 ‘다이모니온’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신탁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온갖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며, 인간에게 전조()와 신탁()을 부여하고 인간을 위해 가장 애쓰는 신을 오직 그만이 알고 있다. 그 이유로 해서 인간은 신에게 빌 때 ‘무엇을 주시옵소서’라고 빌지 않고 다만 ‘좋은 것을 주시옵소서’하고 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다이모니온’은 사실 심리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이렇게 윤리에서 시작하여 윤리로 끝난다.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는 ‘지혜’는 수신()·제가()·치국()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대학()≫의 ‘격물치지()’의 가르침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격물치지’는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지식을 확실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자()는 해석했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법칙에 통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실 소크라테스도 정의란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해서 “법에 따르는 것, 이것이 정의이다”라고 정의했다. ‘법’은 국법은 말할 것도 없고 조상 전래의 도덕적 관습까지도 포함된다. 이것을 꼭 지키는 것이 정의요, 정의의 행동이야말로 지혜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 저자 크세노폰에 대하여 |

크세노폰은 대체로 기원전 430년에서 354년까지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생활과 의견 및 저작 목록≫(10권)에는 크세노폰이 아주 잘생기고 극히 겸손한 소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알게 된 경위를 싣고 있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좁은 길에서 크세노폰과 마주쳤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청년의 길을 가로막으며 그에게 음식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면서 그것을 살 수 있는 장소를 물었다. 크세노폰이 그것에 일일이 대답하자, 이번에는 “그럼 어떻게 해야 인간은 선해지고 훌륭해지느냐?”고 물었다. 크세노폰이 대답에 궁해 있자, 소크라테스는 “그럼 나를 따라와서 배워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제2권 제48장).
그는 아마 기병으로 군에 복무한 듯하다. 기원전 401년 봄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쿠세스의 동생 퀴로스는 태수()로서 부임하고 있던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의 용병() 1만 3천 명과 자기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바빌론을 향하여 원정을 떠났다. 크세노폰은 그리스 용병 1만 3천 명 중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그가 퀴로스의 ‘친구’가 된 경위는 그의 저서 ≪아나바시스(Anabasis)≫(제3권 제4장 이하)에 서술되어 있다. 그것은 철저한 친구 프로쿠세스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 친구는 테바이인으로서 보이오티아의 용병을 이끌고 퀴로스의 궁정()에 와 있었다. 궁정은 사르디스에 있었다. 사르디스에서 그는 크세노폰에게 편지를 보내어 “퀴로스가 군대를 일으키고 있다. 추천할 테니 오지 않겠느냐? 퀴로스는 나에게는 조국(보이오티아) 이상으로 귀한 존재이다”라고 말했다. 크세노폰은 이 편지를 소크라테스에게 보이며 조언을 구했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최후 4년 동안 스파르타가 퀴로스로부터 받은 원조를 생각하여, 퀴로스의 편이 되어 아테네의 국가로부터 어떤 비난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므로 어쨌든 델포이의 신탁()을 받아 오라고 조언했다. 크세노폰은 델포이에 가서, 원정()에 성공하고 무사히 귀환하기 위해서는 어느 신에게 희생을 바쳐야 좋으냐고 물었다. 신의 대답은 희생을 바쳐야 할 신들에게라는 것이었다. 크세노폰은 돌아와서 이 말을 소크라테스에게 보고하자, 소크라테스가 가는 게 좋은지 어떤지를 먼저 물어야 했다고 꾸짖었지만, 크세노폰 자신은 갈 결심으로 물은 이상 신의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크세노폰은 출발했다. 사르디스에 와 보니 이미 군대는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 중에서 이것이 바빌론 원정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총사령관 쿠레아르호스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프로쿠세스도 몰랐고 더욱이 크세노폰 자신도 몰랐다. 키리키아까지 진군했을 때 겨우 그 목적지가 어렴풋이 알려졌다. 그러나 일동은 서로를 경계하고 퀴로스를 경계하며 묵묵히 진군을 계속했다.
사막지대의 통과와 양식의 결핍 등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전군()이 바빌론 근교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여름이었다. 대왕의 백만 대군을 맞아 싸운 쿠나크사 평원의 싸움에서 그리스군만은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여세를 몰아 너무 적진() 깊숙이 진군한 탓으로 퀴로스는 전사하였고 이어서 전군()도 패하고 말았다. 이윽고 1만의 군대를 지휘하던 장군들이 적장() 티스사페르네스에 의해 희생되자, 크세노폰은 친구 프로쿠세스를 대신하여 보이오티아의 병사를 지휘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1만 군사를 이제 사면에 적을 맞게 되었다.
“이제까지 누구를 인솔해 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도 인솔되지 않았던 크세노폰은 살아 남은 그리스인의 장군에 뽑혀 스파르타인의 장군 케이리소포스를 부장()으로 하여 군사를 이끌고 추위와 눈보라가 몰아치는 아시아의 오지()를 온갖 위험과 간난()을 겪으면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흑해()의 연안 토라페초스에 당도한 것이 기원전 4백년 초였다. 그리고 일부는 해로로 또 일부는 육로로 비잔티움을 빠져 나왔다. 1만 군사는 적지않이 감소되어 있었다. 아마도 6천 정도밖에 남지 않았던 것 같다.”(≪아나바시스≫ 제7권 제7장)
그의 ≪아나바시스≫ 7권 중 제2권에서 제6권까지 이 전쟁에서 그가 겪은 어려움이 묘사되어 있다. 전쟁에서 승리와 많은 돈을 안고 돌아오려 했으나 수포로 돌아가 길에서 헤매는 퀴로스군의 일부, 군단()이라고 하나 소속이 없는 오합지졸이었고 헬라스로 돌아갈 비용도 없었다. 약탈 이외에는 양식을 얻을 수 없었으나, 그것은 그 지방의 정권과 적대 관계를 초래한다. 그들의 곤란은 장군으로서의 크세노폰이 더욱 심각하게 느꼈다. 그는 이 용병 군단을 이끌고 한때 트라키아의 왕족이었던 오도뤼시아 세우테스를 도와 그의 조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해 주고 병사에게 무사히 겨울을 넘기게 해주었다.
그러던 중 스파르타의 장군 티브론으로부터 원병을 청하는 사자(使)가 왔다. 티브론은 소()아시아에서 팃사펠네스 및 팔나바조스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원병을 청하러 온 두 사람의 사자(使)가 세우테스를 만나 크세노폰 장군의 성격을 물었을 때, 세우테스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병사들 편을 들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세우테스의 집사() 중에 헤라클레이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리스인이었으나 병사들의 봉급을 속였기 때문에 크세노폰으로부터 봉급 지급 관계를 요구받고 두려운 나머지 세우테스에게 크세노폰을 자주 모함하고 있었다.
세우테스는 무일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 군단의 덕분으로 나라를 얻고 왕이 되었었다. 크세노폰은 세우테스에게 봉급을 지불하지 않으면 신도 용서치 않을 것이며, 그 평판이 널리 퍼지면 장래 화근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병사들은 봉급을 받지 않고는 이 나라에서 한 발도 떼지 않겠다고 농성했다. 크세노폰이 절충 끝에 병사들의 미불 봉급을 받아 내어 병사들에게 나눠 주었다. 일행은 소아시아를 건너 펠가몬에 도착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티브론에게 도착하여 전군단()은 그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것이 기원전 399년 초의 일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처형되었을 때, 크세노폰은 퀴로스군을 이끌고 티브론의 군대에 있었다. 그 해 가을에는 티브론 대신에 데르퀼리다스가 장군이 되었다.
≪그리스 역사(Hellenika)≫에 ‘퀴로스군의 지휘자’로 있는 것은 크세노폰 자신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는 데르퀼리다스 밑에 잠시 있었던 셈이 된다. 기원전 396년에는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가 소아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도착하였고, 크세노폰은 이 사람의 신뢰와 우대를 받아 양자 사이에 깊은 우정이 맺어졌다. 기원전 394년 아게실라오스가 군대와 더불어 그리스에 불려갔을 때 크세노폰도 동행했다. 이 때는 물론 ‘퀴로스 군단의 지휘자’로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코로네이아의 싸움에 참전하였고 아테네 및 테바이 연합군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이 현명하고 충성스러운 군자()가 조국 아테네에 대항하여 왜 싸워야만 했을까? 그러나 크로와제의 말처럼 그것은 쉽사리 설명할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당시의 애국심은 오늘날의 그것과 달리 자기 조국에 속함과 동시에 당파()에 속하기도 했다. 어떤 도시든 정치 망명객이 있었고 그들은 같은 정치적 주의가 행해지고 있는 도시의 동조자가 되었다. 같은 민족이 각기 다른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쉽사리 일어날 수 있는 경향이었다. 크세노폰은 아테네의 평민 정치자들의 미움을 사는 존재였다. 그러나 크세노폰으로서는 그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아시아에서 돌아와 이렇다 할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자기를 3년이나 줄곧 후한 정의()로써 대우해 준 아게실라오스의 우정에는 더할 나위 없는 은의()를 느끼고 있었으며, 게다가 스파르타가 진짜 적으로 삼은 것은 아테네가 아니라 테바이였던 것이다.
394년의 늦여름이라고 생각되지만, 크세노폰은 스파르타와의 관계 때문에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추방과 동시에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 때에 그는 이미 스파르타에 와 있었고 처자도 스파르타에 도착해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게실라오스는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지난날의 공도 보답할 겸 그에게 엘리스의 올림피아 근처에 있는 스킬루스의 광대한 장원()을 제공했다. 크세노폰은 식구와 더불어 이 아름다운 전원에 정착했다. 이 때부터 그는 직업 군인의 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한 전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독서와 저술을 하는 한편 사냥도 하며 평화롭게 활기찬 나날을 보냈다. 그즈음 그는 ≪소크라테스 회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스킬루스에서의 생활은 30년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기원전 371년경 스파르타와 싸움을 일으킨 엘리스인이 스킬루스 지방을 탈환했을 때, 그는 식구를 거느리고 엘리스의 도시 레프레온으로 옮겼으며, 다시 코린토스로 옮겼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후 그는 줄곧 이 곳에 거주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의 또 하나의 명저 ≪퀴로스의 교육(Kyros Paideia)≫(이 퀴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시조 대[]퀴로스이다)은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369년경,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화해했을 때 크세노폰의 추방령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그는 코린토스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두 아들을 아테네에 보내 기병으로서 군무에 복무케 했고 자신도 가끔 아테네를 방문했으리라고 본다. 362년의 만티네이아의 싸움에서 그의 두 아들은 아테네 편의 기병에 가담하여 참전하였고 그 중 한 아들이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보이오티아군의 명장() 에파미논다스도 부상을 입고 죽었다.
아들의 전사 통지를 받았을 때 크세노폰은 마침 희생을 바치고 있었는데, 그가 머리에 쓰고 있던 가시 면류관을 벗었을 때 아들이 용감히 싸우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다시 가시 면류관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죽을 몸임을 알고 있었다”고 대답했다고도 전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생활과 의견 및 저작 목록≫ 제2권 제54장).
크세노폰이 사망한 해는 불명확하지만 그의 역사서 ≪그리스 역사≫에는 기원전 359년의 사건이 기재되어 있으므로 그 해보다 뒤일 것임에 틀림없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