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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추천도서(392)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 김호동



 

책소개

 

오늘날 기독교는 무의식적으로 서양의 종교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기원한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수용되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정통’ 교단이 형성되면서, 이단으로 몰려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 교단들도 있었다. 에집트의 콥트 교회나 카프카스의 아르메니아 교회도 이런 부류에 속하지만, 무엇보다도 네스토리우스파는 일찍부터 동방으로 전파되어 천 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했다. 서방교회는 16세기 이후에야 동방에 얼굴을 드러냈을 뿐, 그 이전의 아시아는 사실상 동방 기독교의 독무대였던 셈.

이 책은 ‘중앙 아시아’와 그 주변을 연구영역으로 삼아온 김호동 교수는 오랜 결과물로, 기독교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포괄적으로 다루어 대부분 피상적으로밖에 모르는 네스토리우스교(경교)에 대해서 독자들이 좀 더 깊이 알 수 있게 구성한 책이다. 전문가의 눈에도 흥미로운 풍부한 도판과 삽화, 지도를 활용하여 동서간의 문화교류에서 동방 기독교의 역사적 역할을 밝히고 동서문명의 활발한 교류의 증거를 찾아볼 수 있게 했다. 정통으로 인정받는 서방 기독교의 전파보다 훨씬 덜 알려진 동방 기독교의 전개와 부침을 통해서 소수의 관점, 이단의 시각, 주변부의 상황을 돌아보고, 동서문명 교류사의 연구범위를 확장하는 단초를 마련해주고 있다.

 

저자소개

 

김호동

 

저자 김호동(金浩東)은 1954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79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THE MUSLIM REBELLION AND THE KASHGHAR EMIRATE IN CHINESE CENTRAL ASIA, 1864-1877"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 해부터 현재까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근대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황하에서 천산까지』『유라시아 천년을 가다』(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는 『유목사회의 구조』, 『칭기스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슬람 1400년』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사제왕 요한
최초의 소식
야율대석
사제왕 요한의 친서
다윗 왕의 출현
몽골의 공포
'지옥'으로
요한 왕의 사망소식
루브룩의 선교여행
마르코 폴로
사제왕 요한의 최후
제2장 동방으로
네스토리우스
박해와 교단
아무다리아를 넘어
경교비
중국 경교회 150년의 역사
아라본 문서
경정의 역경사업
경교의 쇠퇴
실크로드를 따라서
제3장 초원의 십자가
올론 숨
투르크 유목민의 개종
웅구트족의 기원
기독교를 믿은 몽골의 왕후들
신하와 대칸
몽골의 종교정책
종교회의
오르두의 사제들
카라코룸의 부활절
마르 세르기스의 일곱 교회
기독교의 분포
제4장 꺼져가는 불꽃
야발라하 3세의 즉위
랍반 소마의 유럽여행
교단의 몰락
마씨 일가
가톨릭의 도전
흑사병
잊혀진 교단

 

출판사 서평

 

오늘날 기독교는 무의식적으로 서양의 종교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기원한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수용되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정통' 교단이 형성되면서, 이단으로 몰려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간 교단들도 있었다. 에집트의 콥트 교회나 카프카스의 아르메니아 교회도 이런 부류에 속하지만, 무엇보다도 네스토리우스파는 일찍부터 동방으로 전파되어 천 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했다. 서방교회는 16세기 이후에야 동방에 얼굴을 드러냈을 뿐, 그 이전의 아시아는 사실상 동방 기독교의 독무대였던 셈이다. '중앙 아시아'와 그 주변을 연구영역으로 삼는 김호동 교수는 동서문명의 교류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연구반경을 넓혀왔으며,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은 그 연구의 일환이다.

이 책의 기획의도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 쓰여졌다.
첫째, 동방 기독교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포괄적으로 다루어 대부분 피상적으로밖에 모르는 네스토리우스교(경교)에 대해서 독자들이 좀 더 깊이 알 수 있게 구성했다.

둘째, 전문가의 눈에도 흥미로운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풍부한 도판과 삽화, 지도를 활용하여 동서간의 문화교류에서 동방 기독교의 역사적 역할을 밝히고 동서문명의 활발한 교류의 증거를 찾아본다.

셋째, 정통으로 인정받는 서방 기독교의 전파보다 훨씬 덜 알려진 동방 기독교의 전개와 부침을 통해서 소수의 관점, 이단의 시각, 주변부의 상황을 돌아보고, 동서문명 교류사의 연구범위를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 책의 주요 내용
지금부터 약 천 년 전, 중세 유럽인들은 동방세계에 거대한 기독교 왕국이 존재하며 요한이라는 강력한 사제왕이 그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다. 당시 지중해 동쪽 레반트 지방에서 무슬림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던 십자군은 동방의 기독교 군주 요한이 어서 빨리 와서 '사라센'을 물리쳐주었으면 하고 고대했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고 매달렸던 '요한의 왕국'은 한낱 허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기독교도들이 동방에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다. 그들은 아시아 내륙지방의 초원과 사막, 인도와 중국 등지에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다만 서구인들이 희망했던 것처럼 '사라센'을 일거에 쓸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강력한 왕국이 아니었을 뿐, 당시 서구인들이 동방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이 근거 없는 환상이라고만 말하기는 힘들다.

동방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경교)는 중세 서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단이었다. 431년,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몰려 파문에 처해진 뒤, 그의 교리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동방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그들은 놀라운 열정을 발휘하여 아시아 각지에서 개종자를 확보해나갔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박해와 순교가 페르시아 지방에서도 100년 이상 계속되었고, 그것을 견디어낸 장본인들이 바로 동방의 기독교도들이었다. 기독교도의 박해와 순교라고 하면 폭군 네로와 콜로세움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페르시아의 군주 야즈데게르드의 박해와 하루 아침에 15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낸 키르쿠크의 참상 또한 엄연한 역사적 진실이다.

물론 동방 기독교도들의 생활이 언제나 열정과 헌신에 찬 '이상적인' 모습만은 아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동아시아로 전래된 뒤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아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바뀌기도 했다. 예를 들면 영락없는 보살의 모습을 한 예수의 보습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기도 하고 도교나 불교에서 차용한 개념으로 교리나 십계명―십원(十願)이라고 불렸다―을 설명한 경전들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근본 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군주나 권력자의 호의를 얻고 포교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결코 이단자나 타락한 교인이 아니라 동방에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며 다양한 서구문화를 전달해준 문화의 전령이었다.

 

책속으로

 

이렇게 해서, 431년에 정통 기독교회로부터 파문되어 이단으로 낙인찍혀버린 뒤 동방으로 진출하여,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선교의 근거지를 세우며 복음을 전파하던 네스토리우스 교회와 신도들은 마침내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동서문명의 교류와 만남에서 기여한 ㅇㄱ할과 사명은 망각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와 함께 서방의 문화가 유라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 및 동아시아 각지로 전파된 것, 혹은 암흑에 갇혀 있던 중세 서구사회로 하여금 동방으로 눈을 돌리게 한 데에는 그들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추천평

 

지금부터 약 천 년 전, 중세 유럽인들은 동방세계에 거대한 기독교 왕국이 존재하며 요한이라는 강력한 사제왕이 그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다. 당시 지중해 동쪽 레반트 지방에서 무슬림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던 십자군은 동방의 기독교 군주 요한이 어서 빨리 와서 ‘사라센’을 물리쳐주었으면 하고 고대했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고 매달렸던 ‘요한의 왕국’은 한낱 허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기독교도들이 동방에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다. 그들은 아시아 내륙지방의 초원과 사막, 인도와 중국 등지에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다만 서구인들이 희망했던 것처럼 ‘사라센’을 일거에 쓸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강력한 왕국이 아니었을 뿐, 당시 서구인들이 동방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이 근거 없는 환상이라고만 말하기는 힘들다.

동방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경교)는 중세 서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단이었다. 431년,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몰려 파문에 처해진 뒤, 그의 교리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동방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그들은 놀라운 열정을 발휘하여 아시아 각지에서 개종자를 확보해나갔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박해와 순교가 페르시아 지방에서도 100년 이상 계속되었고, 그것을 견디어낸 장본인들이 바로 동방의 기독교도들이었다. 기독교도의 박해와 순교라고 하면 폭군 네로와 콜로세움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페르시아의 군주 야즈데게르드의 박해와 하루 아침에 15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낸 키르쿠크의 참상 또한 엄연한 역사적 진실이다.

물론 동방 기독교도들의 생활이 언제나 열정과 헌신에 찬 ‘이상적인’ 모습만은 아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동아시아로 전래된 뒤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아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바뀌기도 했다. 예를 들면 영락없는 보살의 모습을 한 예수의 보습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기도 하고 도교나 불교에서 차용한 개념으로 교리나 십계명―십원(十願)이라고 불렸다―을 설명한 경전들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근본 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군주나 권력자의 호의를 얻고 포교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결코 이단자나 타락한 교인이 아니라 동방에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며 다양한 서구문화를 전달해준 문화의 전령이었다.

 

출처 :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