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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6월의 추천도서(479) 말테의 수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책소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일한 장편 소설 <말테의 수기>는 한 젊은이가 홀로 대도시 파리에서 보고 느끼는 체험과 사색 등을 일기체로 그린 작품이다.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시작을 열면서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 작품은 불연속적이고 다양한 구성으로 '존재의 불안'이라는 실존주의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질보다 양이 판치는 대도시의 공포스러운 체험에서 우러난 이 절망의 기록을 통해 독자는 어찌할 바 모르고 빈곤과 죽음과 공포의 주위를 끊임없이 맴도는 인간상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저자소개

본명은 르네 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 187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하던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릴케는 죽은 딸을 잊지 못한 어머니에 의해 일곱 살까지 여자아이로 길러졌다. 1886년 아버지의 권유로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고 1890년 육군고등실업학교에 진학했지만, 몸이 허약하여 이듬해 그만두었다. 릴케는 이 시절의 좌절과 외로움을 견디려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894년에는 자비로 첫 시집 [삶과 노래]를 출간했다. 이후 1895년부터 프라하의 칼?페르디난트 대학, 뮌헨 대학, 베를린 대학에서 예술사, 문학사, 미학, 철학, 법학 등을 공부했다. 릴케의 삶은 1897년 뮌헨에서 작가이자 평론가인 루 살로메를 만난 후 완전히 달라졌다. 릴케에게 루 살로메는 바깥세상과 온전히 접촉할 수 있게 한 안내자였고 마음의 병이 있던 모친을 대신해 어머니 같은 사랑과 라이너라는 이름을 선사해 준 여인이었다. 그는 루 살로메 부부와 떠난 두 번의 러시아 여행에서 대문호 톨스토이와 화가 파스테르나크 등 여러 예술가들과 만나 교제했다. 1901년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했고, 1906년에는 조각가 로댕의 전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아 잠시 그의 비서로 일했다. 릴케는 [기도시집], [형상시집], [신시집] 등의 시집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말년에 발표한 [두기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등은 보들레르를 잇는 서구시의 정점이라고 평가받았다. [말테의 수기]는 릴케가 1910년에 발표한 소설로, 덴마크 시인인 말테 라우리드 브리게가 20세기 초 파리라는 대도시에 와서 체험한 충격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몽타주 기법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릴케의 이러한 서술기법은 문학적 모더니즘의 효시가 되었으며, 대도시적 인식 구조를 문학으로 형상화시킨 최초의 소설로 일컬어진다. 1926년 백혈병이 악화되어 발몽 요양소에 머물며 치료를 받으면서도 시를 쓰고 발레리를 번역했던 릴케는 그해 12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서평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일한 장편 소설이자 대표작인 『말테의 수기』가 민음사에서 재출간되었다.(기존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 대신 『말테의 수기』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번이 되었다.) 국내 첫 출간 당시 독일의 괴테 인스티투트 인터 나치오네스와의 정식 계약을 통해 번역 지원을 받았으며 독일어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는 번역으로 주목을 받았던 『말테의 수기』는 세계문학전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더욱 깔끔한 문장과 편집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삶의 본질과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 
『말테의 수기』는 릴케가 파리 생활의 절망과 고독을 통해 29살부터 쓰기 시작해 6년 뒤인 1910년 출간한 일기체 소설이다. 덴마크 출신의 말테 라우리치 브리게라는 28살 청년의 눈으로 써 내려간 이 작품은 훌륭한 소설인 동시에 시인으로 다듬어져 가는 릴케의 내면을 반영한 고백서이기도 하다.
1902년 릴케가 파리에 첫발을 디딘 것은 「로댕 연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탓이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이 대도시의 빈곤과 침체에 아연했다. 이곳에서 그는 무의미한 것, 타락과 암흑, 그리고 만연해 있는 악을 관찰하고 체험했던 것이다. 이러한 체험과 고독한 하숙 생활을 바탕으로 릴케는 탁월한 일기체 소설인 『말테의 수기』를 썼다.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자면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인 이 작품은 체념 의식과 개개인의 고유한 삶이나 죽음은 아랑곳없고 질보다 양이 판치는 대도시의 양상에 대한 공포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절망의 기록이다. 이 안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똑같은 핵(核)의 주위를, 다시 말하면 빈곤과 죽음과 공포의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인간상이 그려져 있다. 
거리는 너무나도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가 지루해하며 내 발 밑에서 걸음을 빼앗아갔다. 그리고는 나막신을 신은 듯이 이리저리 딸가닥거리며 돌아다녔다. 여자가 그 소리에 놀라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켰기 때문에 얼굴이 두 손안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손 안에 비어 있는 얼굴의 틀을 보았다. 시선이 손에 머물러 있는데도 손에서 떨어져 나간 것을 보지 않는 데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노력을 필요로 했다. 얼굴을 안쪽에서 보는 일도 소름끼쳤지만, 얼굴 없는 적나라한 상처투성이 머리통을 보는 일은 훨씬 더 끔찍했다. ―『말테의 수기』 중에서 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여자를 그린 이 장면에서 릴케는 비참한 인간상을 주도면밀하게 그려내는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밖에도 살기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죽기 위해서 자선병원을 찾아가는 인간의 군상, 죽음조차 대량생산되는 대도시의 비정함을 물기 어린 필치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책속으로

아버지의 유해는 뜰을 마주한 방에 안치되었고 양쪽으로 촛불이 높게 켜져 있었다. 꽃 향기가 한꺼번에 울리는 여러 가지 소리처럼 섞여서 무슨 냄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은 아버지의 말끔한 얼굴은 무언가 조용하게 회상하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버지에겐 수렵관의 제복이 입혀졌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푸른 띠가 아니고 하얀 띠가 매여 있었다. 두 손은 마주 잡혀 있지 않고 비스듬하게 포개어져 있어, 부자연스럽고 무의미하게 보였다. 몹시 고통받았다는 이야기를 간단히 들었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모습은 손님이 묵다가 떠나가 버린 방의 가구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죽은 모습을 그전에 이미 자주 본 듯이 느껴졌다. 

엄청나게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지만, 얼굴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 누구나가 여러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2

아, 그러나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되면,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와 감미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26

나는 여기 앉아서 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 열람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책에 몰두해 있다. 그러면서 마치 잠을 자다가 두 개의 꿈 사이에서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듯 책의 쪽수 사이에서 몸을 뒤척인다. 아, 책 읽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게 너무도 좋다. 왜 사람들은 늘 책을 읽을 때와 같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가까이 가서 그를 살짝 건드려보아라. 그는 조금도 그걸 느끼지 못하리라. 일어나면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 살짝 부딪히고 사과를 해도,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려 고개를 끄덕이긴 하나, 상대를 보지는 못한다. 그의 머리카락은 잠자는 사람의 머리카락 모양과 같다. 그것을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지. 그런데 나는 여기 앉아서 한 사람의 시인을 앞에 두고 있다. 이 무슨 운명인가. 지금 열람실 안에서는 대충 삼백 명의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다. 그러나 이들 하나하나가 시인을 앞에 두고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5-46

운명은 여러 무늬와 형상을 고안해 내기를 좋아한다. 232

 

출처 -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