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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추천도서 (453) 로마사 논고 - 마키아벨리



 

  

책소개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의 처음 열 권에 대한 마키아벨리가 쓴 논평서. 1913~19년에 씌어진 이 책은 로마 공화정이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로마사」첫 10권에 대한 논평에 근거하여 로마의 정치적ㆍ군사적 제도와 대외정책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 군주정보다 인민의 자유와 정치참여를 존중하는 공화정이 위대한 국가에 이룰 수 있는 정치체제라고 주장하며 공화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의 신념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저자소개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탈리아의 외교관이자, 정치철학자, 음악가, 시인 그리고 희곡가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운동이 최고봉에 달했던 15세기 중반, 1469년 5월 3일. 마키아벨리는 ‘유럽의 꽃밭’이라 불린 피렌체에서 법학자인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와 바르트로메아 데 네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98년 약관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 주로 외교업무를 담당했다. 1500년 7월에 처음으로 외교사절의 임무를 띠고 프랑스 루이 12세의 궁정에 파견되었던 그는 3년 뒤에 로마로 파견되어 체사레 보르자의 도움으로 교황에 선출된 율리우스 2세가 무모할 정도의 단호한 행동으로 세력을 직접 확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1512년 스페인에 의해서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의 군주정이 복원되자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해 메디치 정부를 몰아내려다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돼 고문을 받고 투옥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메디치 가의 조반니 추기경이 교황 레오 10세에 즉위하자 특사를 받고 석방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유명해진 계기가 된 것은 실제 정치 이론을 반영 묘사한 그의 단편 The Prince [군주론]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그의 사후인 1530년대 초반에 인쇄되었는데,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친구들에게 작품을 돌렸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16세기 이후 사람들에게 가장 어필을 하면서도 동시에 비판을 받는 등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던 책, 군주론으로 인해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은 후대에 냉혹한 정치, 술수 그리고 권력 추구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위대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며, 군사전략가이자 사상가이며, 저술가이자 문학가였다.
정치가로서의 그의 명성은『군주론』을 통해 형성되었다.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프랑스의 루이 1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 교황 율리우스 2세,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를 직접 만난 그는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가 이탈리아의 내부 분열을 종식시키고 조국의 안정을 찾아 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기대를『군주론』이라는 정치사상의 고전으로 탄생시켰다. 무릇 정치사상이란 그 사상가가 살던 시대적 배경을 모르고는 올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살던 피렌체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가 살던 시대로 돌아가, 그가『군주론』을 서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 즉 혼란했던 당시의 이탈리아 반도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의 질서가 차츰 무너지고, 근대국가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군소 국가들 간의 대립, 외세의 침략 등 어지러운 상황에서 메디치 가문이 강력한 군주로 등장해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 피렌체를 구해 줄 것을 염원하는 바람이 마키아벨리의『군주론』에는 담겨 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문예의 토양을 바탕으로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그의 대표적 문학작품인 희곡 『만드라골라』를 통해 부패한 지도층을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만드라골라』는 이탈리아 연극 사상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내 영혼보다 조국 피렌체를 더 사랑했다.”고 고백한 그는 관대하고 열정적이며, 정직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며, 성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마키아벨리는 1520년 『피렌체사』집필을 시작하여, 1527년 메디치 군주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복원되었으나 6월 21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는 이탈리아가 여러 나라로 분열되고 외세의 지배를 개탄, 강력한 군주 아래 통일되기를 열망하며 『군주론』, 『전술론』, 『로마사론』등의 명저를 남겼다.

 

목차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과 '로마사 논고' / 강정인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차노비 부온델몬티와 코시모 루첼라이에게 드리는 인사
제1권
서문 - 역사의 가치
제1장 도시 일반의 기원, 특히 로마의 기원에 관해
제2장 얼마나 많은 종류의 국가가 있는가, 그리고 로마는 어떤 종류의 국가에 속하는가
제3장 로마에서 호민관을 창설하게 된 경위 - 국가를 더욱 완벽하게 만든 사건
제4장 평민과 원로원의 대립이 로마 공화국을 자유롭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제5장 인민과 귀족 어느 편이 더 확실하게 자유를 보호하는가, 그리고 새로이 권력을 얻고자 하는 자와 기존의 권력을 보유하고자 하는 자 가운데 어느 편이 분란의 원인인가
제6장 로마에서 인민과 원로원 간의 대립을 소멸시킬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는가
제7장 공화국에서 탄핵권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제8장 탄핵이 소중한 반면, 중상은 해롭다
제9장 새롭게 공화국은 창건하거나, 구제도를 철저히 혁파하여 공화국을 쇄신하는 일은 한 사람이 단독으로 해야 한다
(이하생략)
제2권
서문
제1장 로마인들이 제국을 팽창시킨 것은 실력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운이 좋았기 때문인가
제2장 로마인들은 어떤 민족들을 상대로 싸워야 했으며, 또 이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완강히 저항했는가
제3장 로마는 주변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외국인들을 고위직에 쉽게 받아들임으로써 위대한 도시가 되었다
제4장 공화국은 영토를 확장하기 우해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해왔다
제5장 홍수 및 흑사병의 발생과 더불어 종파와 언어의 변화가 역사 기록들을 파괴한다
제6장 로마인들은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였는가
제7장 로마인은 식민지 이주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땅을 주었는가
제8장 왜 민족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다른 나라로 흘러들어가는가
제9장 통상 어떤 이유로 강대국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가
(이하생략)
제3권
제1장 한 종교나 공화국이 오래 존속하기 위해서는 종종 시초로 되돌아가야 한다
제2장 적절한 시기에 실성한 체하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다
제3장 새롭게 회복한 자유를 유지하기 위하여 브루투스의 아들들은 죽음을 당해야 했다
제4장 왕국을 찬탈한 군주는 찬탈당한 자가 살아 잇는 한 안전하지 않다
제5장 왕들은 어떤 이유로 세습한 왕국을 상실하게 되는가
제6장 음모
제7장 왜 자유상태에서 노예사애로, 노예상태에서 자유상태로 변화과정이 어떤 때는 유혈사태를 수반하고 또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은가
제8장 한 국가의 정부를 변혁시키려는 자는 먼저 그 질료를 고려해야 한다
제9장 항상 행운을 얻고자 하는 기대하는 사람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
제10장 적이 온갖 수단을 사용해 전투를 걸어올 경우 장군은 전투를 회피할 수 없다
(이하생략)
마키아벨리 연보
옮긴이의 말

 

책속으로

오랫동안 동맹을 맺고 있던 로마인과 삼니움인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는 다른 강대국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의 원인처럼 일반적인 것이었다. 통상 전쟁은 우연한 계기에 의하거나 아니면 전쟁을 도발하고자 하는 강대국에 의해 계획적으로 일어난다.
로마인과 삼니움인들 사이의 갈등은 우연히 시작되었는데, 왜냐하면 연이어 시디키니 인들 및 캄파니아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삼니움니인들로서는 로마인들과 싸울 하등의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리한 사태에 몰린 캄파니아인들이 로마인과 삼니움인들의 예상을 뒤엎고 로마에 원조를 요청하는 일이 일어났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캄파니아인들이 자신들의 세력에 의탁해왔기 때문에 캄파니아인들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명예를 위해서라도 전쟁을 기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로마인들은 동맹인 캄파니아인들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동맹인 삼니움인들과 싸우는 것을 당연히 거부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캄파니아인들을 그들의 속국 또는 보호국으로서 방위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방위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오고자 하는 모든 민족들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로마는 자신의 목표를 평화가 아니라 제국과 영광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험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제 1차 로마-카르타고 전쟁(포에니 전쟁)도 동일한 종류의 원인에 의해 발발했는데, 이 역시 로마인들이 우연히 시칠리아에 있는 메시니아인들에 대한 보호의 임무를 떠맡았기 때문이다. ---pp. 300~301

출처 - 예스24,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