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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3월의 추천 도서 (759) 사생활의 역사(1~5권) - 조르주 뒤비 외


 

 

 

1. 책소개

 

일반인을 위한 역사서. 각 시대의 남과 여, 그들의 사고와 감정, 몸, 삶의 태도와 관습, 코드 체계, 흔적, 기호들을 관찰하고 양피지 문헌들, 비단옷과 승려복, 그리고 저택의 돌에 새겨져 있는 사적인 것의 이미지들을 추적하여 역사적인 주제를 끌어냈다. 아울러 어떤 하나의 단일 주제와 방법론에 의한 하나의 체계적인 종합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과 다양한 주제, 다양한 접근 방법과 다양한 방법론이 하나의 거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로마제국부터 천 년까지의 역사적 기록을 관련 사진자료와 함께 상세히 해설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2. 저자소개

 

필립아리에스

조르주 뒤비콜레주 드 프랑스 중세사 담당 교수와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을 역임했다. <중세의세 위계> <중세의 결혼 : 기사, 여성, 사제> <12세기의 여인들>등을 비롯해 중세와 관련한 많은 명저가 있으며 <프랑스 농촌의 역사> 와 <프랑스 도시의 역사>등을 책임 편집했다. 그리고 필립 아리에스와 함께 <사생활의 역사> 를, 미셸 페로와 함께 <여성의 역사>를 책임 편집했다.

필립 아리에스
소르본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도서관, 열대농성 조사기관, 출판사 등 아카데미즘 밖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일요 역사가'로 활동했다. <앙시앵 레짐 하에서의 아동과 가족의 삶>과 <죽음 앞에 선 인간>등을 통해 새로운 역사학의 영역을 개척하여 심성사를 근본적으로 혁신시킨 역사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1979년에는 학사학위만으로 <사회과학 고등연구원 EHESS>에 초빙되었다.

로제 샤르티에
생-클루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사회과학 고등연구원 교수로 있다. 아날학파의 제4세대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저서로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 <독서의 문화사>등이 있다.

 

출처 - 엘리트 2000

 

3. 목차

 

1부 로마제국 ...47
1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53
2 결혼 ...85
3 노예들 ...109
4 한집안 식구와 해방 노예 ...137
5 공적 생활이 사적이었던 곳 ...167
6 `일`과 여가 ...195
7 세습 재산 ...223
8 여론과 이상향 ...251
9 즐거움과 무절제 ...279
10 마음의 안정 ...313
2부 후기 고대 ...351
1 소수의 `명사들` ...355
2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서 바라본 개인과 집단 ...373
3 교회와 지도자들 ...395
4 사막의 도전 ...419
5 동방과 서방 : 새로운 부부 윤리 ...433
3부 로마 제국 시대 아프리카 지역의 사생활과 가옥 구조 ...455
1 지배계급가옥 구조의 성격 ...467
2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 도무스의 구성요소 ...505
3 도무스의 기능 ...545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4. 출판사서평

 

<가장 위대한 역사가들과 재능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조화를 이루어 그려 보이는 대하 드라마>
그리고 이처럼 엄청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학의 혁명을 연 아날의 노장 세대와 소장 세대, 그리고 각 국의 대가들이 다 함께 참여해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에스와 뒤비와 함께 40여명에 달하는 국제적 대가들이 다 함께 참여하고 있는 이 시리즈는 자칫 지엽말단으로 흐르기 쉬운 이 주제가 장강처럼 유유히 흘러가면서 역사의 미지의 영역들을 촉촉이 적시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고대→중세로 이어지는 역사 분류법을 고대→후기 고대→중세라는 분류법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할 정도로 뛰어난 역사학 성과를 내고 있는 피터 브라운부터 시작해 『고양이 대학살』이나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 등을 낸 린 헌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40여명의 전문가들의 이력만으로도 이 책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기획이 될 수 있는지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국내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유행하고 있는데 로사마 연구의 일인자인 폴 벤느의 글을 보면 이를 좀더 심층적이고 너른 맥락에서 즐겁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기를 것인가 버릴 것인가'(이 시리즈의 1권에 나오는 첫 제목임)부터 시작해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종교와 신이 어떤 의미였는가를 탐구하는 그의 빼어난 글은 최근 국내에서 불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바람을 단순한 이국취미에 그치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자극제로 만들어주고도 남는다. 예컨데 이미 『그리스 사람들은 신을 믿었는가』라는 명저를 통해 이 세계를 파헤친 바 있는 그는 신과 저승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던 이 세계의 상상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날카로운 통찰로 매우 거시적으로 보여준다.(1권의 내용)

<눈()을 위한 화려한 축제>
학문적으로나 생활 면에서 국가와 정치로부터 개인과 인간으로 주된 관심사가 이동한 것이 지난 80-90년대의 유럽의 기본적인 양상이고 지금의 우리의 삶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여기에 이미지의 시대의 도래를 또 다른 주요한 역사적 변화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스펙타클의 시대니 이미지 시대니 하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들려오고 '문자 문화의 종말'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80년대에 선구적으로 이미지와 문자가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이며, 아니 절대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눈을 위한 화려한 축제"라는 명성이 따라 다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각종 도판과 이미지들이 텍스트의 이해를 돕기 위한 무슨 부속물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사생활을 무의식적으로 가장 은밀하고 정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낙서와 일기, 그림 등이었다는 정황을 고려해볼 때 역사학을 비롯한 인간과학에서 종종 사료로서의 가치를 망각해온 인간의 삶의 이면의 자료들은 충분히 역사적 조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눈을 위한 화려한 축제"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역사학적 방법론의 요청이 이 시리즈에서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는 평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독자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놀라운 분야를 빼어나게 조명해 들어가는 텍스트 외에도 역사의 이면과 진실을 동시에,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각 장의 도판들을 통해 역사와 인간의 진실을 통찰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고대 편을 다루고 있는 1권에서는 로마 사회부터 비잔틴 사회를 마치 5폭의 병풍처럼 펼쳐 보여주었다가 근대의 탄생과 함께 근대적 인간의 등장을 보여주는 근대 편에서는 삶을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다채롭게 연주하고, 거리와 도시가 삶의 주요한 무대가 된 4권에서는 이것을 마치 하나의 무대에서 전개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편집 솜씨는 이 책이 얼마나 빼어나게 구상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이탈리아, 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 등 각 국의 수많은 편집자들이 이 시리즈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인 것 또한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시리즈는 어찌 보면 우리의 삶과 역사를 어떤 권에서는 예술품처럼(1권), 다른 권에서는 음악회처럼(3권), 그리고 또 연극처럼(4권) 보여준다.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학문이 다채롭게 퓨전된 풍성한 이야기상>
이 시리즈는 역사책이지만 동시에 통상적인 역사책의 범주를 넘어선다.
오히려 시대에 관한 거대한 박물지()에 가깝다. 즉 이 책은 각 시대의 남과 여, 그들의 사고와 감정, 몸, 삶의 태도와 관습, 코드 체계, 흔적, 기호들을 관찰하고 양피지 문헌들, 비단옷과 승려복, 그리고 저택의 돌에 새겨져 있는 사적인 것의 이미지들을 추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어떤 하나의 단일 주제와 방법론에 의한 하나의 체계적인 종합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과 다양한 주제, 다양한 접근 방법과 다양한 방법론이 하나의 거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어떤 면에서 보면 '풍속의 역사'가 되기도 하고, 다른 면에서 보면 '예술의 역사'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심성의 역사'가 될 수도 있다. 또 이념의 역사가 될 수도 있고 심층에 있는 대중들의 심성의 변화를 통해 '혁명'의 동력과 함께 혁명이 실제로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도 역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요리에서도 '퓨전' 요리가 새로 주목받듯이 다양한 주제와 방법론을 종합해 놓은 삶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 일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입장을 고수하는데, 이것은 이제까지 획일적인 삶과 일치된 시선을 강요받아온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출처 - 예스24

 

5. 책 속으로

 

성과 죽음을 갈라놓는 경계에 과부가 있었다. 중세 초기 사회의 홀아비들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사적인 폭력은 물론 공적인 폭력의 제물이 된 탓에 남자들의 사망률이 아주 높았던 만큼 홀아비는 별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르만 족의 법률은 과부가 재혼할 수 없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했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여성의 '리비도' 는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과부는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지참금과 첫날밤을 지낸 뒤 남편이 순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준 선물을 그대로 지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르군트 족은 홀어미와 자식이 결혼할 때 어머니가 비참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아버지 재산을 3분의 2만 갖고 가도록 정해놓았다. 그래서 과부 중에는 남편이 죽은 뒤 가족 감독권을 물려받아 한 집안을 지배하는 세력을 가졌던 사람도 있었다. 물론 재혼하면 다시 새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랑크 족은 특별히 재혼한 남편이 새로 얻은 부인의 친족에게 금화 3수를 갚도록 규정했다. 이러한 돈은 '장년기의 금화(reipus)' 로 불렸다. 이러한 사실은 여성들이, 심지어 과부들이 세력 있고 존경 받는 사람이 될 수는 있었겠지만 결코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혼자서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여인은 자기 이익을 위해 힘을 행사하려면 언제나 남성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으로 무르익고 확실한 재산을 가지 여인은 더욱 존경 받았고 인기와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중세 초기에 폭력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만연해 있었다. 그리고 치고 받는 싸움과 그로 인한 상처는 종종 죽음까지 몰고 오기도 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남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신물이 나는 듯 무관심한 표현이나 오를레앙의 주교인 테오뒬프나 랭스의 대주교 잉크마르가 진저리를 치면서 항의의 뜻을 담아 발표한 글, 시, 설교를 읽어보면 폭력이 얼마나 일상적인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속인들이 치고 받는 싸우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주교에게 반란을 일으킨 성직자들에 대해선 뭐라고 말하겠으며 또 푸아티에의 생트 크루아 수녀원의 수녀들이 수녀원장과 주교를 홀대하고 공의회를 중단시키고 이를 해산 시킨데다 "살인자, 마법사, 간음자" 들을 모아서 자기네 수녀원을 공격하기까지 한 것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피에르 시셰는 9세기 르망의 주교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자기 밑의 성직자들에게 불만을 느낀 그는 그들을 거세 시켰다는 것이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샤를마뉴가 이 사건에 개입해 이 미친 사람을 해임시켜버렸다. --- pp.689~690

로마인의 탄생은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었다. 신생아는 태어난다기보다는 차라리 가장의 결정에 따라 사회 속에 받아들여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피임, 유산, 자유민으로 태어난 아이를 버리는 일, 그리고 여자 노예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일은 늘 있고 또 완전히 합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도 새로운 윤리, 좀더 쉽게 말해서 스토아 학파의 윤리가 널리 퍼진 뒤부터 바람직하지 않고 법에 어긋나는 것이 되었다. 아무튼 로마에서 시민은 아들을 '낳지' 않았다. 아들을 '잡고', '쳐들었다(tollere).' 아버지는 자식이 태어나면 곧 아기를 친자로 인정하고 버리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하기 위해 산파가 땅에 내려놓은 아기를 들어 올리는 특권을 행사했다. 어머니가(남자는 볼 수 없는 곳에서 특별한 팔걸이 의자에 앉은 자세로) 아기를 낳거나 또는 출산 도중에 죽는 경우에는 배를 가르고 아기를 꺼내기도 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새 생명이 적자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쳐들지 않은 아기는 문 앞이나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그러면 누구든 원하는 사람이 데려다 기를 수 있었다. 만일 출타중인 아버지가 아이를 낳은 아내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이집트인, 게르만인, 유대인들이 자식을 모두 거두고 하나도 버리지 않는 사실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리스에서는 사내아이보다 계집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기원전 1년에 어느 그리스인은 아내에게 이렇게 썼다. “만일 (나는 액운을 막기 위해 나무로 만든 것을 만지고 있소!) 아기가 생기는 경우 사내아이면 살리고 계집아이면 버리시오.” 그러나 로마인들도 이처럼 편파적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들은 기형아를 낳으면 버리거나 물에 빠뜨렸다(화가나서 버렸다기 보다는 버리는 것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세네카는 말한다. “훌륭한 아기와 아무작에도 쓸모 없는 아기를 구별해야 한다”).

또한 '일을 저지른' 딸의 아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합법적인 아기를 버리는 경우는 가난 때문이거나 아니면 후손들에게 얼마간의 재산이나마 제대로 물려주기 위한 방책에서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를 수 없는 아기를 버렸고, '빈민들'(고대에 사용되던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데, 오늘날의 용어로 옮기면 '중류 계급' 이 될 것이다)은 “아이가 지위와 자질을 갖출 수 있는 훌륭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나서 결국 타락하게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아이를 버렸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쓰고 있다. 그저 이름만 명사()였을 뿐인 중류 계급은 가족의 야망을 위해 소수의 자녀만 잘 기르는 데 노력과 재산을 집중했다. 동방에서 농민들은 아주 우호적으로 아이들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 pp.53~54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타르수스의 안티파트로스에 따르면 조국에 새로운 시민을 낳아주기 위해, 또 인류의 번영은 우주의 신성한 계획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해야 했다. 무소니우스에 따르면 결혼의 근본 목적은 자식을 낳고 부부가 서로 돕는 데 있었다. 에픽테투스에 따르면 간통은 도둑질이었다. 이웃의 아내를 가로채는 일은 마치 식탁에서 제공한 돼지고기를 빼앗아 먹는 것과 같은 부도덕한 일이다. "여자들을 위해서도 똑같은 몫이, 즉 남자들이 분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네카에 따르면 결혼이란 의무를 주고받는 일인데, 아마 이러한 의무가 불평등하다고 하더라도 아니 차라리 서로 다르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의무는 복종하는 것이다. 스토아파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후에게서 '아주 순종적인 아내'의 면모를 발견하고는 너무 기뻐했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 모두 윤리적인 존재였으며 계약은 상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남편의 간통도 아내의 간통만큼 심각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함께 결혼에서 요구되는 것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도 엄격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결혼은 우정이기 때문에 부부는 아이를 갖기 위해서만 사랑을 나누어야 하고, 그러한 경우에도 지나치게 애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애첩처럼 다뤄서는 안 된다고 세네카는 단언했으며, 성 히에로니무스도 후일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땅히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 p.103

 

출처 - 예스24

 

6. 추천평

 

이 책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부터 샤를마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콤네노스 왕조가 수립될 때까지의 시기, 즉 800년에서 1,000년 정도 되는 시기의 사생활을 다루고 있다.

어째서 로마인들로부터 시작하는가? 왜 그리스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어째서 로마인들인가? 이들의 문명이 근대 서양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과연 그럴까. 근대 서양의 기초가 로마 문명일까(기독교, 기술 공학, 인간의 권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기초이다). 문명의 기초라는 주제에 대한 토론이 결국 정치적 또는 교육적 저의가 가득한 객설만 늘어놓은 것으로 귀착되지 않으려면 이 기초라는 단어에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한단 말인가. 어쨌든 벼락 출세자들이 자기네 혈통에 대해 갖는 환상을 강화시켜주는 일이 역사가의 사명일 필요는 없다.

타인을 향해 떠나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학은 우리가 우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를 둘러싼 경계들 내에서 우리를 확인해주는 기능 못지않게 정당한 역사학의 기능이다. 로마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와 달랐다. …이것이 바로 로마인들로부터 시작한 첫번째 이유였다. 어떤 차이를 주의깊게 보려고 하는 것이지 벌써 미래의 서방 세계가 모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1권은 우선 이 제국, 말하자면 어떤 사람은 로마 제국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 제국이라고 부를 이 제국의 사생활을 다루고 있다. 사라진 과거의 제국, 이것이 우리 이야기의 토대이다.

 

출처 -  예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