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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1월의 추천도서(325) 대장경(금강경 등 선택불경 독서) (大藏經, 三藏. Tripitaka) (B.C.1200~이래 2500여년 동안 성장발전)

 

 

 


 

1월의 추천도서(325) 대장경(금강경 등 선택불경 독서)

(大藏經, 三藏. Tripitaka) (B.C.1200~이래 2500여년 동안 성장발전)

 

 

정의

 

부처님의 설법[經]과 부처님이 정한 교단의 규칙[律], 그리고 경과 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한 논술[論]을 모두 모은 것.

 

내용

 

대장경은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집대성할 필요를 느껴 제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의 방법에 의하여 이른바 ‘결집(結集)’이 이루어 진 것이다.

제1차 결집이 라자그리하에서 이루어진 후 4차의 결집이 있었다고 한다. 서기전 3세기에 아쇼카왕 때 제3차 결집이 이루어졌고 소위 ‘팔리어 삼장’이 완비되었다고 한다. 이 팔리어 삼장이 아쇼카왕 때 스리랑카로 전해졌다. 그러나 스리랑카로 전해진 팔리어 삼장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암송에 의한 구전의 방법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불교언어로서의 팔리어(pali)를 사용하였지만 문자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서기전 1세기 경에 스리랑카에서 비구들이 보수와 진보로 나눠 파벌싸움이 계속되면서 정법의 왜곡을 막기 위하여 스리랑카 문자로 표기함으로써 문자로 된 팔리어 삼장이 정비되었다. 이 전통이 미얀마, 캄보디아, 타이랜드, 라오스 등으로 확산되어 팔리어 삼장이 각국의 문자로 표기되어 소위 남방지역에서는 팔리어 성전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팔리어 삼장은 기원 전후에 형성된 대승경전 등이 포함되지 않은 소위 소승불교의 한 부파의 성전으로 그 양도 한역 대장경의 10분의 1 정도이다.

이 팔리어 삼장은 19세기 초기부터 서양인들에 의해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1882년에는 영국에서 Pali Text Society가 설립되어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도 번역하여 남전 대장경(南傳大藏經)이라 하였고, 현재 인도에서는 범어를 표기하는 데바나가리로 출판하고 있다.

이 팔리어 삼장과 함께 원본(original text)이라 할 수 있는 범어대장경이 고대 인도에서의 표준어인 범어(梵語, sanskrit)로 표기된 것이다. 범어 경전은, 그동안 소멸되었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네팔을 비롯하여 티베트, 돈황석굴 등에서 탐험가들에 의해 수집되어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이 범어 경전은 한역의 토대가 되었던 경전이라서 중국에 전래될 법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역이 끝나고 고의로 소멸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범어 성전은 소위 북방불교 권에서 중국어와 티베트어로 번역되었고, 다시 몽고어, 만주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서장대장경은 대장경을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로 범어를 직역하였기 때문에 대승불교 이해를 위해 중요시되고 있다. 이 대장경은 특히 8세기 이후부터 번역되어 14세기 초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판본이 아니라 사본(寫本)이었다.

최초로 인쇄한 것은 티베트가 아니라 1410년에 중국 북경에서 이루어져 북경판 또는 영락본으로 불리는 깐규르(경·률)이다. 이 대장경은 한역 대장경에 없는 밀교 경전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범어 원전이 소실된 현실에서 범본에 가장 가까운 내용을 전해주는 대장경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 유통되고 있는 대장경은 기원 후 1세기부터 범어 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한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이다. 이 한역대장경은 중국 각 왕조의 황제들의 후원으로 인도나 서역에서 온 승려들과 중국의 역경 승려들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이 한꺼번에 수입된 것도 아니고, 번역 역시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일이 걸려 이루어졌다.

또한 필사(筆寫)의 방법으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중복이 생기게 되고 체제도 통일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번역된 순서대로 적은 목록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지승(智昇)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이 가장 정확하고 내용이 훌륭하여 후대에까지 모범으로 삼았다.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을 중심으로 최초로 간행한 대장경(大藏經)이 북송 관판대장경(北宋官版大藏經)이다. 이 대장경은 송 태조가 발원하여 971에서 983년까지 새긴 세계 최초의 목판 대장경으로 개보칙판(開寶勅版) 대장경이라고도 한다.

이후에 고려초조대장경(高麗初雕大藏經)·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북송(北宋)의 동선사판(東禪寺版) 대장경 등 20여 종의 대장경이 간행되었다.

 

한역 대장경 가운데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서기 67년경에 가섭마등(迦葉摩騰)이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최초로 한역한 ≪42장경≫ 등의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에서 ≪42장경≫ 등의 ≪개원석교록≫의 입장록에 수록된 1076종 5048권의 경전을 중심으로 싣고 이외에 서기 1054년∼1064년 사이에 일칭(日稱)이 한역한 ≪부자합집경≫과 1090년경에 희린(希麟)이 편찬한 ≪속일체경음의≫ 등 11세기에 한역된 경전까지 1496종의 경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후에 편찬되는 대장경은 수록되는 경전의 양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내용이나 대장경에 싣는 것이 아니다. 대장경은 사찰이 주관하여 편찬한 사찬(私撰)도 있지만 대체로 역경 및 저술의 위작을 막기 위해 황제의 흠정(欽定)에 의하여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간행된 대장경이 모두 고스란히 전래된 것이 아니다. 최초의 대장경판인 북송관판 대장경도 전체 5,048권 가운데 9권 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고려초조대장경은 현재 2,000여권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세 번째로 간행된 거란판 대장경은 그동안 전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74년 7월에 산서성응현불궁사(山西省應縣佛宮寺)의 석가탑(목탑) 4층에 봉안된 주존 불상의 복장에서 12권이 발견되어 거란 대장경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북송의 동선사판(東禪寺版)이나 개원사판(開元寺版)도 온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해인사에 있는 고려 대장경판은 그 판본이 상당 수 전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목판까지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앞의 [표]에 나타나 있듯이 만력판(萬曆版) 이전에 간행된 중국의 대장경보다 그 수록 경전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고려대장경은 판각할 당시 수기법사 등에 의해서 대교가 철저히 이루어져 그 내용이 정확하기 때문에 유명하다. 당시 대장경을 간행하면서 국내본과 송본·거란본을 대교하여 선본을 실었으며, 그 내용을 기록하여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을 남겨 놓고 있어 현재 거의 전래되지 않는 북송 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대장경이다.

그리고 다른 대장경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續一切經音義)≫·≪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은 고려대장경에만 수록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은 조선조 초기에 일본의 요청으로 대량 수출하였다. 일본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받아들인 이후 대장경 연구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 결과 20세기에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간행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을 간행하게 되었고, 이 대장경은 불교 연구의 기본서로 세계적 명성을 지니게 되었다.

일본에서 제일 먼저 대장경 간행을 시도한 것이 종존판(宗存版) 대장경이나 간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 대장경은 천태종(天台宗)의 종존(宗存)이 경도(京都) 건인사(建仁寺)에 있는 고려대장경을 보고 1613년에 대장 목록을 간행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때 데리고 간 인쇄 기술자에 의해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이 대장경은 간기(刊記) 표시를 “갑인세 대일본국대장도감봉칙주조(甲寅歲大日本國大藏都監奉勅雕造)” 등으로 ‘고려’ 대신에 ‘일본’으로 바꿔 사용하는 등 판식(板式)이 고려 대장경을 그대로 답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대장경은 당시 천황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천황이 죽자 간기에 ‘봉칙조조’란 글자가 지워지고, 1624년 종존이 입적하자 이 사업은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이후 1637년에서 1648년까지 동경 관영사(寬永寺)에서 일본 최초로 대장경이 완성이 되는데, 왜장(倭藏)이라고 일컬어지는 천해판(天海版) 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은 덕천가광(德川家光)의 후원으로 천해승정(天海僧正)이 관영사에서 남송의 사계 자복사판(思溪 資福寺版)을 저본으로 목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이후 중국 황벽 희운(希運)의 종풍을 계승한 황벽산 만복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대장경이 있다.

이 대장경은 황벽산 개산조인 은원(隱元)의 제자인 철안(鐵眼)이 주관하여 1668년에서 1678년까지 서민의 시주를 얻어 스승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만력판을 중심으로 번각한 것이다. 이 황벽판은 일본 전역에 염가로 널리 보급되었으나, 내용에 오류가 많아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토종의 승려 인징(忍徵)이 황벽판 대장경에 오류가 많음을 알고 1706년부터 경도 건인사(建仁寺)에 있는 고려 대장경과 내용 대교를 시작하여 1710년에 모두 마치고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완성하였다. 그 후 진종 대곡파 정승사 순예(眞宗大谷派 淨勝寺 順藝)라는 승려가 명장(明藏)에는 없고 고려 대장경에 있는 500권을 건인사 본으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대장경이 일본에서 중국판 대장경보다 월등히 뛰어난 대장경으로 여겨졌음을 확실하게 밝혀 준 최초의 예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19세기말부터 대장경도 신활자로 간행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가 역시 일본에서 1880∼1885년에 축쇄판(縮刷版)으로 간행된 <대일본교정대장경 大日本校訂大藏經>이다.

이 대장경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직후 불교 부흥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인데 인징이 고려 대장경과 대교한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본 것이 동기가 되어 고려 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원·명의 대장경을 참고하여 차이가 나는 부분에 두주(頭註)를 달아 금속활자 5호로 간행한 것이다.

이 판본은 일본 최초의 독창적인 판본이라 하겠다. 이 대장경은 1911년에 상해의 빈가정사에서 4호 활자로 다시 배열하여 인쇄하였다. 그러나 활자가 커서 보기에는 편리하나 두 주를 생략한 것이 흠이 되고 있다. 1902년에 경도에 장경서원(藏經書院)이 설립되어 인징의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정본으로 1912년에 출판된 것이 <만자장경(卍字藏經)>과 <만자속(卍字續)>이다.

이후 불교 서적의 총서로 동경대학(東京大學)의 범문학교실(梵文學敎室)의 다까구수(高楠順次郞) 등이 중심이 되어 1922년∼1934년까지 13년이 걸려 완성한 것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이다.

당시 유통이 되고 있던 축쇄판 대장경이 비싸 학자들이 구입하기 어려웠고 또한 일본 국내에 있는 필사본 대장경을 이본(異本)과 비교 조사하여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하는 요망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동경 증상사(增上寺)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고 남송 사계판(思溪版), 원 대보녕사판(大普寧寺版), 명 만력판(萬曆版), 그리고 궁내청 서릉부(宮內廳書陵部)의 북송 복주동선사판(福州東禪寺版)을 대교하여 지방 사찰이나 대학도서관과 개인 소장을 모두 망라하고 돈황 사본까지 참고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대장경은 학자들이 이용하기 편리하여 현재 세계 각 국에서 불교 연구의 기본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일본에서의 대장경 간행은 거의 고려 대장경을 정본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인쇄 문화를 받아들여 간행하였고, 특히 신활자본 대장경은 일본과 중국을 막론하고 대부분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하였으며, 현재도 간행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