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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5월의 추천도서 (438) 롤랑전(원제: (La) chanson de Roland) - 이형식




 

 

책소개

 

프랑스 최초의 장편 전기문학. 무훈시(武勳詩)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쓰여졌으리라 추정되지만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언어로 썼는지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778년 샤를르마뉴 대제가 이베리아 반도의 사라센 제국을 토벌할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프랑스 영웅 롤랑의 무용담을 그렸다. 『여우 이야기』,『트리스탄과 이즈』등의 중세문학 작품을 감칠맛 나는 우리말로 살려 번역하고 국내에 최초로 소개해 온 이형식 교수가 이번에도 장중한 운율과 내밀한 정서를 살려 우리말로 옮겼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작품소개

 

프랑스에서는 남부의 연애 시인 트루바두르(troubadour)에 대하여 북부의 음유시인을 트루베르(trouvére)라 하며, 그 문학은 샤를마뉴(카를) 대제를 중심적 영웅으로 하는 계열을 비롯해 여러 계열로 분류할 수 있으나 사라센인과의 전투를 주제로 하는 것이 현저하다. 11세기 말 또는 12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는 현존하는 무훈시 중 최고(最古) 최대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봉건 제도의 이상인 기사의 영웅적인 행위를 예찬하기 위해 씌어진 서사시이다.

8세기 말경, 프랑스 왕 샤를마뉴는 스페인에 주둔하고 있는 사라센 사람들과 전쟁을 벌인지 7년째가 되었다. 사라고스의 회회교왕 마르실은 도저히 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여 복종하기를 맹세하며 금은 보석을 보내어 프랑스에 충성을 서약했다. 용사 롤랑은 이 신청을 거절하여 뿌리째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가느롱은 그 말에 반대하여 평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엇갈린 주장을 했다. 그리고 그 평화안이 샤를마뉴 대왕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 평화 조약의 사자로 마땅히 가야 할 사람은 가느롱이라고 롤랑은 지명했다. 그러나 그 사자의 역할이란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가느롱은 화가 났지만, 그 명을 받아들여 롤랑에의 복수를 맹세하면서 사라고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사명을 완수한 가느롱은 마르실 왕과 한 패가 되어 프랑스군이 귀국하는 도중 불의의 습격을 가하기로 약속하고 돌아왔다.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프랑스군은 롤랑에게 1만 명을 주어 후위를 지키게 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산봉우리가 높고 골짜기가 어두컴컴한 외진 곳에 이르게 되자, 회회교의 군사들은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것이었다. 첩첩산중인 피레네 산맥이라 더 도망할 것도 없었다. 롤랑의 친구인 오리비에는 뿔피리를 불어 샤를마뉴 대왕에게 알리라고 했으나 롤랑은 그 말을 거절하고 자기 혼자의 힘으로 적과 싸우리라 결심했다. 전투는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힘껏 잘 싸웠으나 전사자의 숫자는 늘어날 뿐이었다. 남은 병력이란 이제 겨우 60명뿐, 그제서야 롤랑은 뿔피리를 불어 샤를마뉴 대왕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원군이 오는 낌새를 알아챈 사라센군은 도망가지만, 홀로 남은 롤랑도 끝내는 승리자로서 또한 크리스천의 순교자로서 숨지고 만 것이었다.

샤를마뉴 대왕이 롱스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군이 전멸한 후였다. 대왕은 사랑하는 부하들의 죽음을 탄식한 뒤에 이교도들을 추적하여 그들을 죽이기도 하고 또는 에블 강에 빠져 죽게도 했다. 그리고 난 뒤 롱스보로 돌아와 전사들을 정중하게 매장했다. 반역자인 가느롱은 능지처참을 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