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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3월의 추천 도서 (745) 사서집주 - 주희(朱熹)


 

 

1. 책소개

 

중국 송대의 『사서집주 _ 원본』.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희가 유교의 경전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으로 이루어진 <사서>를 주석한 <사서집주>의 영인본이다. 사서에 대한 뜻과 이치를 해설하고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사서집주 (四書集注)

사서(四書)의 주석서. 논어집주(論語集注)》 《맹자집주(孟子集注)》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주자(朱子))가 가장 힘을 쏟은 저술(著述)로 특히 대학은 죽기 직전까지 고쳐쓰기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는 송나라 학자의 주석에 입각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에 근거하여 새로운 해석을 덧붙여 주석학과 철학이 훌륭하게 융합하였다. 주자학의 필수서로서 존중되고 있어 송나라 이후 중국 근세사회에서 가장 널리 읽혀짐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많이 읽혔던 책이다.

 

참고1.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註) 주자(朱子)(1130~1200) .

저자는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儒學者). 사서(四書)의 채용은 북송조(北宋朝)에서 고등문관시험 합격자에게 대학(大學)혹은 중용(中庸)중의 한 편을 (예기(禮記)가운데서 뽑아 준 데서 비롯되는데, 사마광(司馬光)대학광의(大學廣義)》 《중용광의(中庸廣義)를 거쳐, 이정자(二程子: 북송시대의 성약자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말함.)에 이르러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합쳐 사서(四書)가 되었으며, 주자의 이 주()에 의해 그 지위가 확정되었다. 주자는 먼저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1172), 대학혹문(大學或問)》 《중용혹문(中庸或問)(1176)을 저술한 바 있으며, 이것들을 기초로 논맹집주(論孟集註)(1177),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1189)를 완성했던 것이다. 이 주()를 고주(古註)에 대해 신주(新註) 라 부른다.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註)는 이 대학장구(大學章句)1, 논어집주(論語集註)10, 맹자집주(孟子集註)14, 중용장구(中庸章句)1권 등 24권을 집대성한 것이다. 주자는 만년까지 개정(改訂)을 했으며, 특히 대학장구(大學章句)는 죽기 직전까지 가필되었다. 주자 생존 중 일찍이 향인(鄕人)에 의해 출판되었으나 이는 미정본(未定本)이며, 가령 임장(臨漳) ()의 사자(四子)가 이책이었다면 1190년 간()이 되지만, 현존 최고(最古)의 것은 1252년에 나온 순우본(淳祐本)이다. 淸朝에 이르러 오영(吳英)이 간행한 이 송본(宋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인데, 문구당 영인본(1928~29)이 바로 그것이다. ()의 조순손(趙順孫)사서찬소(四書纂疏)(통지당경해(通志堂經解)수록)가 고주(古註)의 각 혹문(或問): 어떤 사람이 묻는다는 뜻으로, 질문자에게 대답하는 체제로 자기의 의견을 기술하는 문체.을 수록하면서 요령을 얻고 있다.

【내용(內容)주자는 먼저 대학(大學)으로 인륜(人倫)에 관한 학()의 대요를 알고, 다음 논어(論語)로 토대를 다지며, 맹자(孟子)에 의해 그것을 확대한 다음, 중용(中庸)으로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으로 사서(四書)를 학(((()의 순으로 배열했다. 그리고 이것들이 공자(孔子)(증자(曾子)(맹자(孟子)(자사(子思)()의 저작이라 주장하며, 불교(佛敎)에 대한 유교(儒敎)의 도통(道統)을 강조하고 있다. 훈힐(訓詰)에 대해서는 광범하게 고주(古註)를 참조하면서 이것을 객관적으로 섭취하고, 이어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입장에서 이것을 철학적으로 기초를 세웠다.

대학(大學)은 경() 1(()10()으로 나누고, 명명덕(明明德신민(新民지지선(止至善)의 세 강령과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등 여덟 조목의 조직을 밝힌 다음,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전()을 보()하고 반성지(反省知)에 의한 궁리(窮理)를 매개로 하여 오입관통(悟入貫通:도를 닦아 실상의 세계에 들어감.)의 절대경에 들어갈 것을 역설했다. 한편 論語의 인()을 마음의 덕(), 사랑의 이()로 하여 인륜(人倫)의 도()에 관한 학습을 해명하고,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발휘하여 인심천리(人心天理)가 본래 청정(淸淨)했다는 것을 나타내면서 존심양기(存心養氣:맹자에 기원을 두는 유가(儒家)의 실천 명제(命題))의 론()을 다룬다. 중용(中庸)의 천(((()에 대해서는 인성도덕(人性道德)의 근원을 하늘에서 구하고, 나아가서는 경(), 신독(愼獨)이 미발(未發)한 중()과 그것이 활용된 화()를 설파, 체용겸비(體用兼備)의 론()을 완성하고 있다.

이와같이 고전의 사서(四書)는 그의 태극론(太極論) 理氣不離不雜의 관법(觀法)으로 조직적으로 처리되며, 서로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게 된다. 국가 사회의 밖에 있으면서 마음의 순수성을 구하는 선()의 방법도 주자(朱子)에 의해 세속적 사회로 흡수되면서 공맹(孔孟)을 전통으로 하는 인륜(人倫)의 학()과 훌륭하게 결합되며 당시의 관료 및 서민으로 하여금 윤리적 자각과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평가(評價)대학 중용의 장을 나누는 방법과 훈힐(訓詰)과 성리학적(性理學的) 색체에 대해서는 양명학(陽明學)과 청조(淸朝) 고증학파(考證學派)로부터 공격 받았으나, 그 언어학적 해석의 타당성과 철학적 기초의 보편성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할 정도로, 전후(前後)에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사서대전(四書大全)(1415)의 출현과 동시에 주자학(朱子學)은 관학(官學)이 되어 그 후 민국혁명(民國革命)까지 그 생명을 유지하였으며 동양에 끼친 영향이 크다.

참고2. 사서율곡언해(四書栗谷諺解)

1576(선조9) 이이(李珥 1536~1584)가 선조의 명을 받아 사서를 언해한 책, 이이는 1584(선조17) 죽을 때까지 사서 언해의 초고만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선조는 교정청을 설치하고 계속 그 일을 진행시켜 90년 무렵 사서의 언해만을 완료·간행하였다. 그 뒤 임진·정유 양란으로 중단되었다가 1601년부터 다시 시작되어 1606~12년에 사서삼경의 관찬본이 나오게 되었고, 영조25 때 가전본(家傳本수필본(手筆本등본(謄本) 등을 수집, 정사(淨寫)하여 1749년 간행되었다. 이 책의 토나 석()은 아주 정확하여 관찬본에 끼친 영향이 크며, 일원성을 주장하는 이이의 철학적 배경이 잘 나타나 있다. 대학율곡언해》 《중용율곡언해는 각각 11, 논어율곡언해44, 맹자율곡언해77. 활자본. 규장각도서.

사서율곡언해가 나오게 된 배경 : 1574(선조7)년에 유희춘(柳希春)이 선조의 명을 받아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의 구결(口訣), 언해(諺解)를 상정(詳定)하려 하다가 1576년에 곧 상소하여 이 일을 율곡(栗谷)에게 맡김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선조가 유희춘의 말에 의하여 율곡에게 사서와 오경의 언해를 상정케 하였는데, 율곡이 명을 받들어 사서언해(四書諺解)만 이루어내고 오경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끝내 임금께 올리지 못하여 인출(印出)함에 이르지는 못하고 겨우 전사로 인하여 후세에 전할 뿐이었는데, 1749(영조25)에 이르러 홍계희(洪啓禧)등이 그 등본(謄本)을 저자의 후손과 문생의 집에서 구득하여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곧 본서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이 영조조판(英祖朝版) 뿐이다.

참고3. 사서질의(四書質疑)

조선 중기 유학자 이덕홍(李德弘)이 사서(四書) 중에서 중요한 구절이나 의심스러운 부분을 주석한 책. 1666(현종7) 외증손 김만휴(金萬烋)가 편집하였다. 내용은 논어세가(世家) 및 학이(學而) 이하 20, 맹자양혜왕(梁惠王) 이하 4, 중용에서 30조목, 대학에서 22조목을 분류하여 실었다. 서술방식은 문제의 구절마다 훈고적인 측면의 주석과 해설을 달았고, 특히 한자의 음을 올바로 읽을 수 있도록 특수한 음에는 직접 한글로 음을 달아놓았다. 차례는 논어질의·맹자질의·중용질의·대학질의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책 끝에는 김만휴의 발()이 있다. 불분권1. 필사본. 규장각도서.

 

참고4. 사서답문(四書答問)

조선 후기 학자 이유태(李惟泰)가 이이(李珥)논어혹문의 변의를 모방하여 사서의 난해한 어구를 간추려 해설한 책. 19669대손 철영(喆榮)이 편집, 간행하였다. 각 권이 문답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대학으로 원전의 구성편차에 따라 357, 2논어로 서설·학이(學而)에서 자로(子路)까지 312, 3논어로 헌문(憲問)에서 요왈(堯曰)까지 96, 4맹자로 서설·양혜왕(梁惠王)에서 진심(盡心)까지 391, 5중용으로 서설, 1~33장까지 345항이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견해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해답에 사서와 관계되는 서적과 선유들의 말을 인용, 내용에 확실함을 더하였다. 54.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참고5. 사서석의(四書釋義)

조선 중기의 거유(巨儒)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등 사서(四書)의 뜻을 한글로 풀이한 책. 1. 목판본(木版本). 31x22cm. 퇴계가 제자를 가르치며 연구한 것을 필사본으로 엮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분실되어, 감사(監司) 최관래(崔瓘來)가 사우(士友)간에 전하여 온 사본(寫本)을 수집, 다시 편집하여 1609(광해군1)에 간행한 것이다. 석의(釋義)의 내용은 퇴계가 제가(諸家)의 훈석(訓釋)을 종합 증정(證訂)한 것으로, 원본의 순서대로 전부 석의한 것이 아니고 난해(難解)한 구절만을 풀이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참고6. 사서강설(四書講說)

조선 영조 때의 학자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가 송학(宋學)의 기본 학문인 사서(四書)에 대하여 강의한 것을 엮은 책. 41. 사본(寫本). 순서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의 순으로 되어 있고, 방법은 문답식으로 어떤 문제점을 하나씩 설정하고 거기에 대한 해석을 서술하고 있다. 이 강설의 특색은 사서(四書) 전체의 내용을 대학의 8조목을 모방하여 격치장(格致章성의장(誠意章정심장(正心章수신장(修身章제가장(齊家章) 등으로 구분한 점이다.

 

출전·참고 - 세계명저대사전/동서세계대백과사전/원색세계대백과사전/국어대사전(이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