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AD 1825 1기(13.3~18.2)

3월의 추천도서 (28) 강산무진 - 김훈



 

◎ 목차

 

배웅
화장火葬
항로표지航路標識

고향의 그림자
언니의 폐경
머나먼 속세俗世
강산무진江山無盡
세속 도시의 네안데르탈인 - 해설 신수정(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 본문 중에서....

 

담뱃갑 안에 일곱 개비가 남아 있었다. 일곱 개비를 다 피우고 나면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은 생애의 시간 속에서 피울 수 있는 담배 일곱 개비가 그다지 적지 않게 느껴졌다. 그것이 적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어쨌든 아직은 일곱 개비가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몸속에 깊이 스몄다가 토해지는 담배연기는 호흡처럼 편안하고 친숙했다. --- 본문 중에서

 

장모는 부드러운 면포를 잘라서 기저귀를 만들어왔다. 아내는 기저귀마다 빨래집게를 물렸다. 빨랬줄에서 기저귀들이 바람에 길게 나부꼈고, 가을빛이 기저귀 위에서 출렁거렸다. 바람은 북동풍이어서 기저귀들은 섬의 남쪽 바다를 향해 펄럭거렸다. 손바닥만한 아기 바지도 한 뻠 가랑이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 본문 중에서

 

당시의 평균 자연수명이 몇살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삼십여 년쯤 살다 죽은 여자의 뼈가 젊은 뼈인지 늙은 뼈인지조차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섭양이 부족한 생애에서 강도 높은 노동에 종사했다'는 설명도 그 뼈 토막을 들여다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뼈는 기원화의 생애에 관하여 아무런 정보도 전하지 못했다. 박물관 유리상자 속에서 깔때기를 활짝 벌린 그 골반뼈는 다만 푸르스름한 석회질의 결일 뿐이었다. 대학신문은 박물관장의 기고문에 깔때기 모양의 골반뼈 사진을 곁들였고 그 위에 '기원화, 본교 박물관에 피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렇게 해서, 골반뼈로 남은 AD6세기 여자의 이름은 기원화가 되었다. 진부한 이름이었다. --- 본문 중에서

 

- 가족들 이외에는 암을 알리지 마십시오. 암환자라는 걸 주변에서 알게 되면 신변을 정리할 때 불이익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제가 워낙 많은 환자들을 봐서 하는 말입니다.
의사가 메모지를 꺼내서 주의사항을 적어주었다. 술 담배 섹스를 끊고 잠을 많이 잘 것, 피로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산책을 할 것, 청국장을 많이 먹을 것, 고등어 꽁치 방어 같은 등 푸른 새애선을 많이 먹을 것... 나는 여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자궁유방검진실 앞 복도를 지나서 병원을 나왔다. --- 본문 중에서

 

남은 담배 몇 개비가 지나간 모든 담배를 환기시키기도 하는 것인지, 간암 판정을 받고 돌아와서 생애의 마지막 담배를 피울 때 어째서 오십 년 전 유년의 길바닥에 나뒹굴던 담뱃갑 색깔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