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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12월의 추천도서(305) 톨스토이 단편 걸작선 - 레프 톨스토이



 

저자소개

 

레오 톨스토이 Lev Tolstoy

 

러시아의 소설가 ·사상가. 

남러시아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 출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임과 동시에 문명비평가 ·사상가로서도 위대한 존재였다. 명문 백작가의 4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1847년 대학교육에 실망을 느껴 카잔대학을 중퇴하고 향리로 돌아가 지주로서 영지 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하였으나, 그의 이상주의는 실패로 끝나고 잠시 방탕생활에 빠졌다. 1851년 형의 권유로 군대에 들어가 캅카스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고, 다음해 처녀작 《유년시대 Detstvo》(1852)를 익명으로 발표하여 네크라소프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소년시대 Otrochestvo》(1854) 《세바스토폴 이야기 Sevastopoliskie Rasskazy》(1854∼1856) 등은 군에 복무하면서 집필한 작품들로서 1855년 군에서 제대하고 수도로 올라갈 무렵에는 이미 청년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857년 서유럽 문명을 시찰하기 위해 국외에 나갔으나 실망하고 귀국하여, 인간생활의 조화를 진보 속에서 추구하던 그는 그 후 내성적인 경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62년 궁정 시의(侍醫)의 딸인 소피아와 결혼하고 문학에 전념하여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사회를 그린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 Voina i mir》(1864∼1869)를 발표, 이어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3∼1876)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無常)에 대해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과학 ·철학 ·예술 등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마침내 종교에 의탁하였다. 이때가 그의 전향기로서 《교의신학비판(敎義神學批判)》(1880) 《요약 복음서》(1881) 《참회록 Ispoved’》(1882) 《교회와 국가》(1882) 《나의 신앙 V chem moya vera?》(1884) 등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체계화되어 갔다. 이 전향 후의 사상을 보통 ‘톨스토이주의’라고 한다.

그의 사상은 현대의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사해동포 관념에 투철한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하여 근로 ·채식 ·금주 ·금연을 표방하는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와 자기 완성을 신조로 하여 사랑의 정신으로 전세계의 복지에 기여하려는 것이었다. 1882년 모스크바 빈민굴을 시찰한 후 사회조직의 결함에 깊이 생각이 미치자, 그의 사상적 번민은 종교적 ·윤리적 문제에서 사회제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또 1885년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하여 이 문제로 부인과 충돌, 그 후 그의 일체의 저작권은 부인이 관리하였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부정파교도(聖靈否定派敎徒)와 친교가 있어 4,000명에 달하는 이 교도들을 미국에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유명한 《부활 Voskresenie》(1899)이다.

그는 수년 전부터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를 집필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문학관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으나, 《부활》의 집필은 앞의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동방정교회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는 이유로 1901년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破門)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부활》 이후의 주요작품으로는 《신부(神父) 세르게이》(1898), 희곡 《산송장》(1900), 단편 《무도회의 뒤》 《병 속의 아료샤》(1905)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종교와 도덕〉(1894) 〈톨스토이즘에 대하여〉(1898) 〈현대의 노예제도〉 〈자기완성의 의의〉(1900) 〈유일한 수단〉(1901) 〈세 가지 의문〉(1903) 〈셰익스피어론(論)〉(1903) 〈유년시대의 추억〉(1904) 〈러시아 혁명의 의의〉(1906) 〈마을의 노래〉(1909), 그리고 최후의 대작 《인생의 길》(1910) 등을 들 수 있다.

전향 후 그의 생활신조는 전술한 대로 재산과 저작권의 포기는 가족에게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반면 세상에서는 그를 위선자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어 그가 성명했던 본래의 뜻대로 실행하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종종 한 집에서 기거를 같이했던 그의 고제(高弟) 첼트코프에 대한 부인의 질투와 증오도 가정생활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다. 1890년에 발표된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는 이러한 내적 고민을 선명하게 그렸다. 그는 자신의 가정생활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몇 차례 가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1910년 10월 29일 이른 아침 장녀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의 여행길에 올랐으나 도중에서 병을 얻어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역)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출처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