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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추천 도서(598) 바람의 넋 - 오정희


 

1.책소개

 

'야희'를 비롯한 9편의 단편과 중편 '바람의 넋'이 실린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두려움 욕망과 죽음의 문제들을 국한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출처 - 예스24 제공

 

2.저자소개

 

오정희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상문학상(1979)을 시작으로 동인문학상(1982), 동서문학상(1996), 오영수문학상(1996) 등을 수상하며 한국의 대표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03년에는 독일에서 번역 출간된 《새》로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했다. 이는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어의 미학적 지평을 넓힌 작가의 문장이 빚어낸 작품들은 존재와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간극을 극복하기 위한 여성적 자아의 내밀한 감정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또한 형체가 없는 내면의 복잡한 사건들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일상의 슬픔과 고통, 허무의 정체를 추적하고 있다.《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돼지꿈》 등의 작품집이 있으며, 장편소설로는 《새》 등이 있다.

 

3.책속으로

 

집을 떠날 때는 매번 그랬다. 꼭 닫힌 분합문의 틈서리로 비비대며 안타깝게 아우성치는 바람 소리를 들을 때, 빨래를 하다가 문득 깨끗이 닦인 유리창에 담긴 시리도록 차갑고 새파란 하늘을 가슴속에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지나가듯 서늘한 느낌으로 오래 바라보다가, 어린 승일이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시장에라도 가는 시늉으로 집을 나설 때 은수 자신 고작 한나절의 외출 이상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세중의 퇴근 시간까지는, 저녁을 지어야 할 시간가지는 돌아오리라. 어느 모진 손길이 아이와 남편, 고양이처럼 길든 집에서 떼어낼 수 있으랴.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무심히 나선 걸음이 집에서 멀어질수록 마치 한없이 풀리는 연줄처럼, 바닥모를 깊이로 소리없이 떨어져내리는 추처럼 점차 무게 없이 가볍게 등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아이와 남편, 자잘한 일상 생활로 이어지는 현실이 뿌리 없이 부랑하는 삶으로 불투명하게 흐려지며, 현재의 삶을 환상으로 밀어낸 자리에 대신 가슴 밑바닥에 단단히 매몰된 기억의 촉수가 살며시 고개를 들곤 했다. 때문에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이 자신이 가고있는 곳도 모르면서 제 걸음에 취해 한 발짝씩 옮겨
... --- p.251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그 여자는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햇빛을 쬐러 가자, 방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맞대고 전자놀이판의 자동차 경주 게임을 하고 있던 두 사내아이는 뜻밖의 제의에 의아한 눈빛으로 그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엄마는, 바람이 분다고 감기를 걱정하며 방금 자신들을 밖으로부터 불러들였던 것을 잊은 것일까, 더우기 지금은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하는, 결코 해바라기에 적당한 시간이 아닌 것이다.

베란다로 나가는 마루의 카다란 창은 광장이라 불리는 그리 널리 않은 공터를 향해 나 있어 일조(日照)의 차단물은 없었지만 동향인탓에, 아침곁에만 잠깐 드는 햇빛이 물러간 지 오래여서 집안은 젖은 듯 고즈넉했다. 겨울이 오기 전 햇빛을 많이 쬐어 두어야만 해, 겨울은 어둡고 길단다. 여느 때처럼 잠깐의 외출일 뿐이라는 것을, 또한 엄마와 함께 가는 길이 결코 대단한 모험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은 순순히 일어나 그녀가 시키는 대로 점퍼 깃을 여미고 양말을 당겨 신었다.
--- p.86

 

출처 - 예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