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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추천도서(22.3~23.2)/2022-10

10월의 추천도서 (3511)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1. 책소개

 

반지성·자본주의 사회에 전하는
두 창조적 소수자의 엄중한 메시지!

 

‘위기’라는 말이 보편화된 세상이다. 지구가 여섯 번째 대멸종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이를 증명하듯 지구는 가뭄·홍수·화재 등 이상 기후에 신음하고 있다. 삶의 터전을 잃은 기후 난민들이 생존의 길을 찾아 국경을 넘고 있다. 나이·성별·국적·계급, 여기에 국민/비국민의 갈등이 사회의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작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인류의 장밋빛 미래를 보장할 것 같았던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인간을 존재의 자리에서 소외시키는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 문제들을 극복하고 미래 세대에게 빌려온 지구와 상호 존중의 사회를 온전한 모습으로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을까.
이 중대한 물음 앞에서 난민·이주노동자 출신 홍세화와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영화감독 이송희일이 만났다. 이들의 만남은 차별과 혐오의 최전선 당사자들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뜻깊고, 이들의 대화는 그동안 공론화되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대담집에서 두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자신이 몸소 겪은 이 세상의 기이한 모습을 증언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공부와 열정적인 창작 활동으로 형성한 인식의 틀 안에서 전 지구적 기후위기와 사회 구성원들의 갈등 원인을 진단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온 두 ‘창조적 소수자’의 대화를 통해 미래 세대를 위한 새로운 세상, 대전환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홍세화

 

언론인·사회운동가. 1979년,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체류 중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망명하였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상의 자유 침해에 따른 난민으로 인정받아, 관광 안내·택시 운전을 하며 이주노동자로 생활하였다. 이때 집필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똘레랑스’라는 용어에 ‘공존’의 메시지를 담아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2년 귀국하여 언론, 출판, 교육, 사회운동,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이며, 시민 모임 ‘마중’을 통해 화성 외국인 보호소에 수용된 외국인들을 지원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미안함에 대하여』, 『결: 거?s에 대하여』, 『공부』,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생각의 좌표』, 『지구를 구하는 정치 책』 등이 있고, 『노루 인간』, 『딸에게 들려주는 인종차별 이야기』, 『왜 똘레랑스인가』 등을 번역했다.

 

저자 : 이송희일

 

영화감독·작가. 1998년 첫 영화 〈언제나 일요일같이〉를 시작으로 20년 이상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다.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성소수자들의 슬픔, 10대들의 외로움과 아픔, 청년들의 분노와 좌절 등을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연출로 그려온 그는, 2006년 〈후회하지 않아〉로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을 이끌어 한국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후회하지 않아〉, 〈백야〉, 〈야간비행〉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최근에는 SNS에서 기후와 생태 이슈,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상상력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미행〉, 〈야간비행〉, 〈지난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 〈백야〉, 〈탈주〉, 〈후회하지 않아〉 등이 있다.

 

출처:교보문고

 

3. 목차

 

저자의 말 / 왜 탈성장이어야 하는가 / 차별과 혐오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 죽음의 행렬, 어떻게 멈출 것인가 / 한국 진보정치, 어디로 가야 하는가 / 교육은 우리를 어떻게 배신해 왔는가 / 언론은 누구를 위해 복무하는가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세화: 저는 그 ‘인류세’라 는 말보다 ‘자본세’라고 해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의 견해에 공감하죠. 인류세라고 하면, 인류가 탄생한 지 수십만 년 지났는데, 기후위기가 그 긴 세월 전체에 걸쳐 축적된 문제가 아니잖아요. 결국 인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가 약 5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주도해 온 성장주의가 야기한 문제잖아요. 자본주의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걸 곧바로 드러나지 않게, 슬쩍 호도하려는 의도가 ‘인류세’라는 말에 담겨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자본세’라는 말이 훨씬 더 온당한 규정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죠. 기후위기라는 것은, 팬데믹도 마찬가지고요, 자연의 역습이랄까,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저는 하죠. ‘지구가 네 개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정도니까. ‘자연의 역습’, 거기에 인간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고요. 그런 얘기 많이 해왔잖아요. “인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다.”_21쪽

희일: 이 위기를 넘어서려면 1920년대, 1930년대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보다 더 강력한 국제 기후운동, 예컨대 ‘기후 인터내셔널’ 형태의 운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엔 당사자 총회처럼 각 정부 수장들이 모여서 하는 형식적인 국제 담화로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개한다는 건 거의 농담에 가깝죠. 계속 자본의 이윤 창출에 목을 매고, 축적 과정을 지연시키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결정하지 않는 무능력한 조직으로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어요. 국제적 차원에서도 강력한 기후운동도 존재하고, 또 일국적 차원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요청하는 기후운동이 있어야 하는데 참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_37~38쪽

세화: 난민이 어떤 존재일까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난민은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을 잃은 존재예요.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이웃도 없는, 대부분이 혈혈단신으로 물설고 낯선 땅에 와서 사회적 입양을 허락해 주세요, 하고 간청하는 사람입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말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직업도 없어요. 빈손으로 아무 일이나 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환대하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혐오와 배척을 부추기나요? 청와대 청원에 7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었는데 대형 교회 중심의 개신교 일파가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고는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참으로 참담한 한국 사회의 몰골이죠._100쪽

희일: 몇 년 전에도 육군은 함정 수사를 했어요. 게이 앱에 게이인 척하고 잠복해서 군인들을 색출한 거예요. 무슨 파시스트 비밀경찰들도 아니고, 가짜 게이 흉내를 내서 색출을 하고 장교들까지 전역시키고 그랬거든요. 한국 육군 수준이라는 게 이렇게 잔혹합니다. 변한 게 없어요. 1997년, 제가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시작했을 때예요. 그때 한 트랜스젠더가 하이힐을 신고 훈련소에 들어갔어요. 자신은 여성인데 왜 군대를 들어가야 되느냐는 항의의 표시였어요.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결국 그 트랜스젠더는 훈련소 화장실에 들어가 병을 깨서 자기 고환을 잘라버렸어요. 정말 고통스러운 시대였죠. 그런데 지금 그때보다 더 나아진 게 있을까요? 동성애를 금지하는 ‘군형법 92조 6항’은 여전히 존재하고, 게이 군인들을 색출하고, 트랜스젠더 혐오에 혈안이 된 것만 봐서는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육군이 성소수자들을 대하는 일련의 태도야말로 성소수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를 가장 하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사실 대통령이 됐든, 민주당이 됐든, 민주주의 세력 어쩌고 입에 발린 헛소리들을 할 시간이 있으면 이런 차별적 문제들 먼저 시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아니, 그 전에 트랜스젠더 두 명이나 연달아 자살을 했으면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유감이라도 표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말 지독한 사람들이에요. 자살을 하는 성소수자에, 비닐 움막에서 자다 얼어 죽는 이주노동자에, 보호소에서 새우꺾기를 당하는 난민까지,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차별 그 자체예요. _113쪽

세화: 20세기 초에 유태인이 아주 막역한 게르만 친구한테 쓴 편지가 있어요, 내용 중에 이런 게 나옵니다. “나는 자고 일어날 때마다 ‘아, 나는 유태인이야.’ 하고 나를 돌아본다.” 하고는 친구에게 물어봐요, “너는 자고 일어나서 ‘아, 나는 게르만이야.’라고 생각해 본 적 있니?”라고요. 유태인이 쓴 편지를 읽으면서 게르만 친구는 잠시 생각해 보니 자고 일어났을 때 단 한 번도 ‘아, 나는 게르만이야.’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저도 아, 나는 서울 사람이야, 한국 남자야,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가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로 살면서 ‘난민이고, 이주노동자’임을 매일 확인하게 된 거죠. 사회적 소수자가 되니까 자기를 돌아보게 됐던 거예요. 그러니까 다수자는 자기를 돌아볼 이유가 없는데, 소수자는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는 거죠. 문화·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는 소수자들에 의해 훌륭한 작품들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역으로 다수자에 속하는 사람들이나 강자들은 그러한 점이 디폴트로 당연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생각 자체가 거의 없어요. 여성의 경우에는 밤길을 걸어갈 때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두려울 수밖에 없는데, 그런 걸 남자들은 느끼지 않는 그런 점들에 대해 학습이 필요한 거죠. 사회적 강자나 다수자는 역지사지와 함께 의지로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볼 때 비로소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와의 관계 설정에 올바른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소수자는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는 점에서 천형天刑을 받은 존재인 동시에 천혜天惠를 받은 존재라는 말을 쓴 적이 있어요. 하늘로부터의 형을 받기도 했지만 혜택을 받기도 했다는… 강자나 다수자도 자기를 돌아보아야 한다,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 성찰적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_121~122쪽

희일: 자신의 존재를 디폴트로 설정하는 이성애자들은 생물학적 이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상성’에 정박된 사회가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잘 하지 않아요. 물론 성소수자들은 어렸을 적부터 성애를 비롯해 자신의 존재와 감각을 다양한 각도에서 성찰할 수밖에 없죠. 동성애 해방운동, 즉 퀴어 운동은 이렇게 당연시되는 정상성을 의문시합니다. 성 정체성과 사회구조를 말이죠. 기준 자체를 재구성하자는 급진적 요청이에요. 나도 나의 존재를 성찰하고, 당신도 당신 존재를 성찰하자, 그런 거죠. 반면에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성소수자로서의 실존적 인권에 방점을 찍어요. 미국식 성소수자 운동이 그렇습니다. 현재는 뭐 다 글로벌화됐지만요. 실존 양태에 기반을 둔 인권을 중요시하다 보니, 정체성 정치에 상당 부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 현재까지도 종종 ‘피해자 정체성’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제일 피해자야.” 저도 가급적이면 이런 우울한 레토릭은 피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사용할 때가 있더라고요. 퀴어 운동, 그러니까 이성애·동성애 같은 성애의 서사도 뒤흔들고 사회구조도 재구성하자는 급진 성정치학의 역사를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게 소수자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디폴트라고 생각하는 다수에게도 더 많은 사유의 기회와 삶의 가치를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피해자 관점이 아니라 해방의 관점으로. _123쪽

세화: 저는 지금으로서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반대하느냐가 진보인지 아닌지를 가름하는 기준이라고 보고 싶은데요. 우리 사회는 수구적 보수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국힘당(국민의힘)과 거기에 맞서 자유주의 보수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오랫동안 대립해 왔죠. 그러나 두 당 모두 보수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데요, 두 당은 한국의 양대 정당으로 앞으로도 권력을 교차로 계속 주고받을 위험이 커요. 겉으로는 서로 싸우지만 실제로는 나눠 먹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진보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고, 지금은 무척 취약하지만 앞으로 형성해 나가야 한다는, 그런 의미로 일단 얘기를 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한국에서는 진보의식을 형성하는 사람이 소수일 수밖에 없는데, 진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 가를 볼 때, 이 점이 이를테면 유럽과 전혀 다른 점인데요. 대부분이 ‘자신의 계급적 처지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어쨌든 계급화, 계층화가 이루어지면서 부모도 그렇고 자식도 그렇고 노동자는 노동자로 살리라는 전망, 이런 계급의식이 일정 정도 형성되어 있어요. 한국의 경우에는 그게 거의 없죠. 분단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진보세력 형성에 무척 어려운 문제를 낳게 됩니다._172~173쪽

희일: ‘세계의 시민’이 된다는 건 멋진 일인 것 같아요. 주체의 재구성이잖아요. 우리가 온갖 사람들과 사물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평등, 연대, 책임의 문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좀 더 확장된 형태로 사유할 수 있어요. 자본주의와 기득권에 편향된 사회에선 각 주체들을 ‘이기적인 존재’와 ‘정치적 소비자’로 끊임없이 호명합니다. 그래야 관리가 편하니까요.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기이한 세상의 풍경

두 사람이 겪고 바라본 세상은 온통 기울어진 운동장의 확장판이다. 식민지 착취의 경로는 그대로 기후위기의 지형도 및 에너지 수탈·노동력 착취의 경로와 일치한다. 다수가 소수를 억압해 온 역사와 기승을 부리는 우익 정치는 난민·이주노동자·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한다. 기술과 자본을 가진 슈퍼 엘리트들은 노동을 파편화하고 자본 친화적 의식을 주입하여 노동자성을 박탈한다. 교육은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을 내세워 불평등의 대물림을 은폐한다. 정치판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존재의 근거로 삼는 수구적 보수세력과 자유주의 보수세력으로 양분되어 있고, 진보정치는 중층적 모순으로 분열되어 앞길을 못 찾고 있다. 언론은 공익과 진실이라는 소명을 망각한 채 사익 추구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여기에 유튜브, SNS를 비롯한 1인 미디어들은 확증편향의 세계를 부추기고 있다.

앓고 있던 마음의 병은 세계에 대한 앎의 의지와 근심으로 전이됐다. 역설적이게도 되레 그게 마음의 근육을 키운 걸까. 나의 가치관은 종전보다 왼쪽으로 더 휘어졌고, 세계가 급진적 기획 속에서 바뀌지 않는 한 인민의 삶과 생태계는 더욱 처참하게 부서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송희일_저자의 말 중에서)

‘대전환’이라는 단어가 스스로 말해주듯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아니, 바꾼다는 말로 부족하다. 뒤엎어야 한다. 뒤엎지 않고서는 대전환을 이룰 수 없다. 후대 몫까지 수탈하는 기후위기, 동시대인들을 착취하고 수탈한 결과물인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 정치는, 그리고 시민은 응답해야 한다. (홍세화_저자의 말 중에서)

탈성장과 시민의식 형성

두 사람은 ‘탈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시민들이 연대하여 체제의 전환을 이루어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기후위기를 극복해 보겠다고 벌어지는 정상들의 회담에 정작 피해 당사자인 제3세계, 농민, 미래 세대의 목소리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기울어진 현실과 여전히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야기하는 가진 자들의 태도를 지적하며, 성장·기술·자본 중심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탈성장으로 가지 않는 한, 강력한 국제 기후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거라고 전망한다.

이 위기를 넘어서려면 1920년대, 1930년대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보다 더 강력한 국제 기후운동, 예컨대 ‘기후 인터내셔널’ 형태의 운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엔 당사자 총회처럼 각 정부 수장들이 모여서 하는 형식적인 국제 담화로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개한다는 건 거의 농담에 가깝죠. 계속 자본의 이윤 창출에 목을 매고, 축적 과정을 지연시키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결정하지 않는 무능력한 조직으로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어요._37쪽 (이송희일)

탈성장이 외적 변화의 큰 그림이라면 이를 추동할 내적 변화의 필수 요소로 시민의식 형성을 꼽는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이 교육의 중요성이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학생들에게 자본주의를 공부시키지 않아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커녕 노동에 대한 반감과 자본 친화적 의식, 즉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게 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객관적 사실 숙지 여부로 학생을 평가하고 등급을 매기는 시스템은 학생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고, 공교육 붕괴를 초래했다.

한국 사회의 노동 문제와 관련해서 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 보는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는데도 사회 교과목에서 자본주의를 공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공교육에서 사회 교과목을 배우는 까닭은 국민이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한 것이잖아요. 그런 사회 교과목이 초등학교 때부터 있어요. 그러면 왜 우리가 사회 교과목을 공부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인식하라고 공부하는 건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자본주의사회라면 제일 중요하게 공부해야 할 게 자본주의거든요. 논리적 귀결인데, 한국의 공교육에 그게 거의 없는 겁니다._129쪽 (홍세화)

이렇게 무너진 교육을 바로 세워 정체성과 계급의식을 가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판할 줄 아는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는 데 두 저자는 동의한다. 그래야 국민을 배반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며 권력을 양분해 온 양당 정치와 이들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언론에 민주적 통제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차별과 혐오를 합리화하는 반지성적 피해자 정체성, 흑/백의 세계로 분리된 확증편향의 세계에서 벗어나,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관점에서 나와 타자, 나와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재생산되는 불평등과 기후위기의 해소에 대해서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시대를 증언하는 당사자들의 체험담

이 대담에 이성적으로 설득되고 감성적으로 공감하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이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담이 무거운 주제를 뒷받침하기 때문일 것이다. 홍세화는 파리에서의 난민 생활, 프랑스의 교육 현장을 목격하고 우리의 교육 현실에 대해 느낀 슬픔, 귀국 후 진보진영의 분열을 겪은 좌절과 분노, 화성 외국인 보호소에서 행해진 외국인 고문의 참상을 들려준다. 이송희일은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의 울분과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 그리고 심형래 감독의 ‘디워’ 사태 때 반지성 영웅주의의 타깃이 되어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씁쓸한 경험, 영화 〈야간비행〉을 찍을 때 접한 교육 현장의 비정함과 학교 폭력의 비극을 들려준다. 이들의 경험은 반지성주의, 차별과 혐오를 낳은 편견, 몰상식이 판치는 경제 동물의 사회, GDP 인종주의가 횡행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외면할 수 없는 시대의 증언이다. 

 

출처: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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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 홍세화와 이송희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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