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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1월의 추천도서(335) 대표자 - 에머슨

 

 


 

 

1월의 추천도서(335) 대표자 - 에머슨[Emerson, Ralph Waldo

 

저자소개

 

미국의 철학자이며 시인. 처음에 성직에 있었지만, 교회와 충돌하고 1835년 이래 뉴햄프셔 주의 콩코드에 거주하였으므로 '콩코드의 철학자'로 불리운다. 플라톤, 칼라일 그리고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의 영향을 받았다.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철학의 영원한 문제라 하고 초월론을 주장하였다. 인식에서는 직관주의의 입장에서 사물의 본질이 파악될 수 있다고 보고, 역사에 관해서는 위인이 사회의 진보를 초래하며, 이 진보라는 것은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회에서의 부자와 빈자의 대립은 영구적이라고 하면서, 그 자신은 빈자의 편에 서서 부자(부르주아)를 비난하였으며 또 미국의 흑인 노예의 존재에 대해 반대하였다.

 

뉴잉글랜드의 초절주의를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다.

에머슨은 유니테리언 교회 목사이자 예술애호가였던 윌리엄 에머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머슨은 청교도시대부터 그의 가문의 모든 직계 선조들이 종사해왔던 성직을 이어받았다. 그의 어머니 루스 해스킨스의 가족은 독실한 영국 성공회파였다. 영국 성공회파 작가나 사상가들 중 에머슨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로는 랠프 커드워스, 로버트 레이턴, 제러미 테일러,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등이었다.
1811년 5월 12일 아버지가 죽자 그의 지적 교육은 고모인 메리 무디 에머슨에게 맡겨졌는데,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진지하게 수행했다. 1812년 보스턴 공립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그가 쓴 시들이 좋은 반응을 얻어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817년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정신의 발전'을 담은 기록일 것이다. 1821년 대학을 졸업한 뒤 하버드 신학교의 시간제 연구과정을 준비하는 동안 교단에 섰다. 1826년 에머슨은 유니테리언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지만 병에 걸려 늦어지게 되었고, 1829년에야 비로소 보스턴 제2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그의 입장은 확고해 보였다. 1829년 엘렌 루이자 터커와 결혼했지만 1831년 그녀가 결핵에 걸려 죽자, 슬픔에 젖어 자신의 신앙과 직업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다. 그러나 사실 그는 이미 그 이전 몇 해 동안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독일에 있던 그의 형 윌리엄은 기적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해 의혹을 던진 새로운 성서비평을 에머슨에게 알려주었다. 에머슨이 했던 설교들은 처음부터 전통적인 교리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대신 영혼의 활용에 대한 개인적인 탐구의 성격을 띠며, 이상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자아신뢰와 자아충족이라는 개인적인 교리를 선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외적·역사적 전거들을 제거했으며, 우주의 도덕법칙에 대한 사적(私的) 직관에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을 두고, 미덕을 갖고 성취하는 삶을 시금석으로 삼았다. 유니테리언파의 교리는 당시 그에게 그다지 매력을 주지 못했으며, 1832년 그는 성직에서 물러났다.

 

에머슨이 교회를 떠났을 때 그는 기적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로 인정된 것보다도 더욱 분명한 신에 대한 확신을 찾고 있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얻는 계시, 즉 신을 직접적·즉각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했다. 목사직을 떠난 뒤 그는 유럽을 여행했다. 파리에서 앙투안 로랑 드 쥐시외가 자연물의 표본을 진화된 순서대로 배열해놓은 수집품을 보았고, 그것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영적 교류가 있다는 그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영국에서 그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윌리엄 워즈워스, 토머스 칼라일 등과 중요한 만남을 가졌다. 1833년 귀국하여 〈자연 Nature〉을 쓰기 시작했으며, 인기있고 영향력있는 강연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34년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 영구적인 거주지를 마련하고, 이듬해 리디아 잭슨과 결혼하여 그의 작품활동에 있어 근본적인 뒷받침이 되어준 평온한 가정생활을 누리기 시작했다.
1830년대에 에머슨은 독자적인 문학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다른 지식인들도 점점 더 에머슨이 가졌던 개인적인 의혹과 문제의식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1830년대가 지나기 전, 그의 개인적인 성명서들인 〈자연〉·〈미국의 학자 The American Scholar〉 및 신학교에서의 〈강연 Address〉을 통해 후에 초절주의자들이라고 지칭되는 일군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에머슨은 초절주의자들의 대표자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에머슨은 1836년 보스턴에서 〈자연〉이라는 표제를 붙인 95쪽의 소책자를 익명으로 출판함으로써 초절주의 창시에 기여했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한 뒤 자신의 핵심적인 철학을 세웠으며, 그후 그가 쓴 내용들은 거의 모두 〈자연〉에서 처음 주장했던 사상을 확대·증보·수정한 것이다. 에머슨이 가졌던 종교적 의혹들은 뿌리 깊은 것이어서 기적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신념을 유지하는 유니테리언 교회에 대한 그의 반대를 훨씬 넘어선다. 또한 그는 뉴턴 물리학의 기계적 우주론이나 그가 하버드대학교에서 배웠던 로크의 감각적 경험에 의거한 심리학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었다. 에머슨은 합리론 철학가들이 우주의 구성법칙으로 생각하고 있던 기계론적 인과관계의 연속성에는 자유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느꼈다. 이러한 세계는 사념과 직관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감각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그것은 인간을 물리적·심리학적으로 결정짓는 것이었다. 또 인간을 환경의 희생물, 즉 불필요한 정신력의 소유자이며 실재를 진실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에머슨은 18세기 합리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이상적인 철학을 개진했다. 그는 감각적 경험과 사실로 이루어진 물질적 세계를 초월하는 능력, 우주에 내재하는 영혼을 깨닫고 인간 자유의 잠재력을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인간이 자신의 자아와 영혼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신을 가장 잘 발견하게 되며, 그러한 계몽된 자기인식으로부터 행동의 자유와 자신의 이상과 양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생기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인간의 정신적 재생은 자신 안에 깃들어 있는 자기 몫의 '대령'(大靈 oversoul)에 대해 개인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대령'은 모든 창조물과 생물 안에 스며 있고, 만일 인간이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접근가능한 것이다." 에머슨은 '오성'(understanding), 즉 감각자료의 일상적인 수집이나 물질세계의 논리적 인식에 의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이성'에 의지할 수 있는지를 해명했다. 그가 말하는 이성이란 영원한 진실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의미한다. 에머슨은 자기충족과 자기신뢰라는 원칙은 이제까지 제도화된 교회들이 담당해왔던 정신적인 인도를 받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는 그의 생각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자기 자신이 되려는 용기를 지녀야 하며, 자신의 직관에서 생긴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면서 내적인 힘을 신뢰해야 한다고 했다. 명백히 말해서 이러한 사상들은 결코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에머슨이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할 때 그가 전에 연구했던 신플라톤 철학, 콜리지와 다른 유럽 낭만주의자들의 작품, 엠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글들, 힌두 철학 및 다른 원전들의 영향을 받았음은 명백하다. 에머슨이 초절주의자들과 비슷한 개념을 표현했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은 그가 자신의 사상을 웅대한 통찰력을 갖고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세련된 문필가로서의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적 설명에는 독특한 힘과 유기적 통일성이 있으며, 축적된 효과가 당시의 독자들의 상상력에 수많은 암시와 자극을 전해준 것이다.
1837년 8월 31일 〈미국의 학자〉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에머슨은 그 자신처럼 새롭게 해방된 지성인들의 의무와 자질에 대해 설명했다. 이 강연은 결국 하버드대학교의 지성인들에게 현학적 태도, 타인에 대한 모방, 전통주의, 실생활과 연관되지 않은 학문 등을 경고한 도전장이었다. 에머슨이 1838년 하버드대학교에서 했던 〈신학대학에서의 연설 Address at Divinity College〉도 생기 없는 그리스도교 전통, 특히 그가 알고 있었던 유니테리언 교파에 대항하는 또다른 도전이었다. 그는 종교제도나 예수의 신성이란 도덕법칙이나 직관화된 도덕정서를 통해 신성과 직접 만나려는 인간의 시도를 좌절시키는 것으로 보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강연으로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했고,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게 되었으며, 수년 동안 하버드대학교로부터 배척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제자들은 1836년 창설된 비공식적인 초절주의 클럽에 가담하여 그를 격려했다. 1840년 〈다이얼 The Dial〉지를 창간하는 데 기여했는데, 처음에는 마거릿 풀러가 편집하다가 후에 그 자신이 잡지의 편집을 맡으면서 초절주의자들이 미국에 제시하려는 새로운 사상들의 출구를 마련해주었다. 이 잡지는 비록 단명했지만 이 학파의 젊은이들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쟁점들을 제공해주었다. 그는 그의 강연들을 추려 〈명상록 Essays〉이라는 2권의 책(1841, 1844)을 출간했는데, 이 책들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명상록〉 제1권에서 에머슨은 도덕적 개인주의에 대한 그의 사상을 확고히 했고 자기 신뢰의 윤리, 자기 수양의 의무와 자기 표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명상록〉 제2권에서 에머슨은 초기의 이상주의를 실생활의 한계에 맞게 조정했다. 그러나 말년의 작품을 보면 그가 사물의 상태를 점점 더 묵인하고, 자신에 대한 신뢰보다 사회에 대한 존경심이 점차 늘어났으며, 천부의 능력이 지닌 모호성과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위인전 Representative Men〉(1849)에는 플라톤·스베덴보리·몽테뉴·나폴레옹·괴테의 전기들이 실려 있다. 〈영국인의 특성 English Traits〉에서는 자신의 조상이라고 한 국민성을 분석했고, 가장 성숙된 작품 〈삶의 행위 The Conduct of Life〉(1860)에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함께 고양된 형태의 인도주의가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에머슨의 〈시집 Poems〉(1846)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증보되어 〈오월제 May-Day〉(1867)로 출간되었고, 이 2권의 시집으로 그는 위대한 미국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60년대에 미국에서 에머슨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세월이 흐르자 그도 서서히 사회에 적응되었고, 그의 반항적인 참신성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강연을 자주 했지만, 1860년 이후의 글들을 보면 그의 필력이 쇠진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세대는 나이든 에머슨만을 알았고, 그의 가르침이 야기했던 신랄함을 되새기지 못한 채 그대로 그의 이론들을 받아들였다. 1882년 에머슨이 죽은 뒤 그는 곧 해방자로서의 힘을 상실한 콩코드의 현인으로 변모되었고, 젊은 시절 그가 부수려고 했던 바로 그 전통에 속하는 명사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1834년과 미국 남북전쟁 동안의 미국 순회 강연을 통해 에머슨의 주장과 웅변은 지속적인 신념을 심어주었다. 그는 유럽의 심미적·철학적 조류를 미국에 전했던 문화의 중개자로서 공헌했으며, 미국의 르네상스(1835~65)로 알려진 찬란한 문예부흥기 동안 자국민을 인도했다. 초절주의의 주된 대변자로서, 또한 유럽 낭만주의의 지류를 미국에 심은 사람으로서 에머슨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 안에 깃들어 있는 정신적인 잠재력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도록 종교적·철학적·윤리적 운동에 있어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출처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