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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추천 도서(19.3~20.2)

7월의 추천도서(2322) 코리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 - 버라토시 벌로그 베네데크

1. 책 소개

 

한말 외국인의 기록을 제공하는 <코리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번역한 책. <코리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1900년대 초 버라토시가 한국을 여행하면서 겪은 일들을 간결한 문체로 담담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여행을 하면서 사물을 관찰하는 민속학자로서의 예리함을 바탕으로 1900년대 초 우리나라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펴본다. 미지의 나라 한국을 자국에 알리려는 열의와 한국에 대한 잘못된 소문들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통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저자의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출처 : 교보문고

 

2. 저자

 

‘한국인은 주변 여러 나라의 다른 어느 민족들보다 신체적으로 뛰어나다. 또 한민족은 중국 고대문화와 문명을 일본에 전수해 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적 능력이 이미 인정되어 온 일본인, 중국인의 그것과 충분히 경쟁할만한 수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월등한 면이 있다.’

1989년 헝가리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물러나면서 제3세계 국가를 다룬 서적들이 헌책방에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초머 모세Csoma M'ozes가 발견한 1929년에 출판된 버라토시 베네데크Bar'athosi Balogh Benedek의 「코리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나오는 대목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바라본 한국은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보다도 더 알려지지 않은 나라,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서 생사를 담보로 일본과 소리 없는 투쟁을 하고 있는 나라였다. 물론 헝가리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유럽의 일부 여행안내서에서는 한국에 대한 간단한 소개 정도만 실렸을 뿐 전문적으로 한국을 연구하거나 한국을 주제로 한 책들을 출판한 학자나 여행가가 전무했다.

그런 가운데 헝가리 인으로는 처음으로 해군 군의관이었던 가슈파르 페렌G'asp'ar Ferenc이 한국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했는데 1890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즈리니Zrinyi호가 한국과의 외교 수립을 위해 동아시아로 출항하여 제물포항에 도착해 한국 정부와 협상했지만 체결되지 않았다. 그때 외교사절단과 동행했던 그는 당시의 체험과 세계일주를 주제로 하는 「4만 마일을 돛과 증기선으로」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600쪽에 걸쳐 자신이 방문한 나라의 사진과과 설명을 곁들였는데 일본은 자세히 묘사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만은 간단히 세계에서 가장 더럽고 추잡스러운 나라라고 기록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한국과의 외교수립이 무산되면서 두 나라 간에 인식은 백지에 가까웠다. 1892년 도쿄에 있는 한국 주일 대사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주일대사와 우호 무역 등의 교류를 비롯해 언어, 문학, 법, 예술, 산업 등을 쉽계 교류할 수 있도록 합의했지만 허울뿐이었다. 서울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대사관이 없었고, 비엔나나 부다페스트에도 한국공사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양국간의 외교채널은 일본에 있는 양국의 대사관이 전담했다.

20세기 초 작가이며 여행가였던 신부 버이 페테르Vay P'eter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시베리아, 몽고, 중국의 베이징, 서울, 도쿄 등을 방문한 뒤 「동양의 황제들과 제국들」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의 중간 부분부터 제물포, 서울, 궁궐과 한국 문화, 생활에 대한 경험 등이 서술되었고 나중에 들른 부산에 대해서도 기술되어 있다. 그 무렵 헝가리의 민속학자인 버라토시 가 한국인들의 생활모습을 자세히 관찰한 뒤 ‘한국,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이야말로 한국에 관한 헝가리 최초의 단행본이었다.

 

투란 사상의 근원을 찾아서

버라토시 벌로그 베네데크는 만주 퉁구스 연구자이자 탐험가로서 20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헝가리의 민속학자였다. 귀족 출신으로 트란실바니아출신이다. 어린 시절부터 헝가리 민족의 근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1899년 민속학과 언어학을 공부하기 위해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에 유학생활을 한 후 초등학교 교사직을 거쳐 노년에는 초등학교 교장직에 있으면서 연구활동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베네데크는 일본에서 동양사를 연구하면서 한국사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접할 수 있었고 두 차례의 한국 여행을 경험했다.

버라토시는 투란사상에 심취했는데, 이 사상에 속하는 아시아 제민족을 연구하면서 많은 책을 썼다. 그는 헝가리인들이 투란으로부터 기원했고 한국인 역시 마찬가지라고 여기고 몹시 중시했다. 투란Turan이란 마자르족인 헝가리 민족과 한국, 일본, 만주족 등 동아시아민족이 오래 전 같은 장소에 거주했던 혈족이라는 사랑이다. 20세기 초 헝가리 내에서 크게 유행했다.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는 천여 개가 넘는 동일한 어원의 투란어를 비교 분석하면서 한국어와 투란어가 매우 가까운 친족관계의 언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언어학자 애스톤William George Aston은 50년 전에 이미 한국어와 일본어가 친족관계임을 증명했다.

기원전 2000년 전에 현재의 만주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훈족이 중국의 침략에 무너지면서 대부분 서북쪽으로 이동했고 나머지는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일부는 일본에 건너갔고, 일부는 지금의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중국의 고대문헌이나 자료는 헝가리인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그는 헝가리 민족과 친족관계라고 속하는 우랄, 알타이에 속하는 민족들과의 심도 깊은 접촉을 위해 1903년부터 동아시아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유럽에 잘 알려진 일본을 첫 여행지로 선택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일본에 도착했지만 갑작스런 러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인도를 거쳐 힘겹게 귀국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의 경험은 「대일본, 아름다운 동양」이란 책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책은 헝가리의 최대 일간지 세계일보의 사주였던 출판사 부장 톨너이 시몬에 의해 출판되었다. 출판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5만부를 찍었다. 그 외에도 「세계로의 산책」과 청소년들을 위한 「세 학생의 세계모험」을 써서 사주에게 12만 5천 펭괴를 벌게 해주었다. 하지만 버라토시가 받은 금액은 겨우 1,850펭괴였다. 그는 급히 두 번째 여행경비를 조달해야 했으므로 이 불공평한 처사를 감내해야 했다.

1907년 봄 버라토시의 두 번째 아시아 여행이 시작되었다. 독일 함부르크 민속박물관은 그에게 동양의 민속품을 구해와 달라고 부탁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아무르강 유역의 퉁구스족에 대해 연구하던 도중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1909년 또 다시 연해주를 여행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는 1914년 또 다시 시베리아를 거쳐 일본으로 가서 사할린에 사는 소수민족을 연구했다. 그런데 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무렵 사라예보 사건이 발발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러자 러시아 경찰은 하바로프스키에서 적국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시민인 버라토시를 체포했다. 9월 말 가까스로 러시아를 탈출한 그는 연구하면서 수집한 많은 자료와 사진, 수집품들을 두고 일본을 거쳐 헝가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조국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면서 전 영토의 70%를 주변국인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에 빼앗겼다. 그 중에는 버라토시의 고향인 트란실바니아도 있었다. 그 지역은 많은 광산과 공장이 있었으므로 헝가리의 국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와 함께 주변국들은 반 헝가리군사협정을 맺고 헝가리를 지속적으로 관리했다. 그로 인해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어버린 헝가리의 지식인들 사이에 투란 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투란사상이란 헝가리의 마자르족, 한국, 일본, 만주 등의 동아시아 민족이 고대에 친족이었다는 사상이다. 헝가리는 지리적으로 게르만족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슬라브족인 체코,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유고,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에 둘러싸여 있다. 멀리는 러시아가 있다. 9세기 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헝가리의 마자르족은 고립된 상태였던 것이다.

20세기 초 범슬라브주의가 유행했다. 러시아 제국의 주도로 모든 유럽의 슬라브족 국가의 통일이 목적이었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의 프라하까지 거대한 슬라브족 대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는 헝가리 인들로서는 두려운 일이었다.

때마침 독일에서는 범 독일주의 사상이 제창되어 독일,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를 망라하는 대제국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렇듯 슬라브족과 게르만족의 틈바구니에서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헝가리 지식인들의 작품에는 민족 멸망사상이 담겨 있었다.

그런 조국의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던 버라토시는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거대한 중국과 일본제국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는 한국인들을 자신과 동질화했다. 때문에 그는 어렵사리 한국의 역사를 구해 연구하며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도 부다페스트에 있는 민속박물관에는 러시아 연해주, 만주, 일본 홋카이도 등지에서 가져온 귀한 수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또 한민족처럼 헝가리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민족들을 소개하는 많은 글들을 남겼다. 소련군이 2개월에 걸쳐 부다페스트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그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45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강조했던 투란사상은 잊혀진 지 오래이다. 학계에서도 투란사상이 검증되지 않고 학문적이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자들은 헝가리 인들의 뿌리를 찾으려 했던 그를 여전히 존경하고 그의 사상을 믿고 있다. 버라토시의 동아시아 샤머니즘 관련 연구는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연해주 근처 무속인들의 노래와 목소리를 녹음한 자료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또 그가 편찬하던 아이누어 사전 자료는 일본인들로서도 희귀한 자료이다. 그 때문에 일본 학자들은 그의 연구 업적을 높이 평하하여 1996년 일본 헝가리 친선협회의 재정지원으로 부다페스트에서 버라토시 기념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물론 버라토시는 자신의 책에서 서구학자들이 태생적으로 품고 있던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으로 한국을 오도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머나먼 동구 헝가리의 민속학자로서 극동의 조선에 대하여 동류의식을 가지고 유럽에 기울어져가는 한국과 한국인을 소개했다는 점만으로도 우리는 버라토시란 인물에게 빚을 지고 있다.

 

출처 : http://blog.daum.net/coar21/32

 

 

3. 목차

 

역저자 머리말 
원저자 머리말 

제1장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까지 

제2장 자연 환경 

제3장 여행중의 어려움 

제4장 사찰의 세계 

제5장 한국사 개요 

제6장 일본에 미친 한국의 문화적 영향 

제7장 유럽, 한국을 알다 

제8장 분수령에서 서울까지 

제9장 수도와 항구 

제10장 일제의 강점 

제11장 한국은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살 것이다 

에필로그 

<부록> 초머 모세 
1. 헝가리 민속학자 버라토시 
2. 버라토시의 업적과 평가 

역저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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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