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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5월의 추천 도서 (1177) 옥중서간 - 디이트리히 본회퍼


 

 

 

1. 책소개

 

잘못된 국가 권력과 신앙인의 양심이 충돌했을 때 목숨을 걸고 저항한 자유의 투사 본회퍼가 옥중에서 쓴 신앙고백서. 세계인이 함께 읽는 명저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이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절박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고 있다.

 

출처 - 인터파크 도서 제공 

 

2. 목차

 

10년 후(1943년의 전환에 대한 해명)
발 아래 디디고 설 땅이 없이
누가 확고하게 설 것인가
서민적 용기란
결과에 관해서
우둔에 관해서
인간 멸시
이 세상에 내재하는 의
역사에서의 하나님의 지배에 관한 몇 개의 신앙조항
신뢰
질()의 감각
함께 괴로워하는 것
고난에 대해서
현재와 미래
낙관주의
위험과 죽음
우리는 아직 쓸모가 있을까
양친께 드리는 편지(1943년 4월-1944년 4월; 테겔에서)
옥중에서의 결혼식을 위한 설교(’1943년 5월)
옥중보고(테겔에서의 1년 후)
대우 일반
식사
작업
조명
공습경보
개별적인 것
어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1943년 11월-1944년 8월)
함께 옥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1943년 성탄절)
수례일의 상념(1944년 5월)
시-행복과 불행
시-나는 어떤 자일까
시-기독교인도 이교도도
시-자유에의 도상의 정류소
제사잡감&
어떤 저서의 초안
시-친구
생명의 증좌(1944년 12월 28일 이후)
프린츠 알브레흐트 가에서
시-선한 힘에 관해서
시-요나
추기(1944년 2월 4일 이후)
시-과거
역자주
해설

 

출처 - 인터파크 도서 제공

 

 

 

3. 책속으로

 

본 회퍼의 기독교관 (옥중서간에서 발췌)


< 요지 >
    
1) 기독교에서 부활, 불안․곤궁․공포로부터의 구제, 내세에서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제를 얘기하는데 그때 중점은 오히려 죽음의 한계를 넘어 지상의 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있지 구제, 영혼의 부활에 있지 않다(부활, 구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님).
2) 예수 그리스도는 생의 중심이지 결코 우리들에게 미해결의 문제를 대답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든 생의 중심에서 생기며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 역시 생의 중심에서 생긴다.
3)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신이 이 세계에 있어서 무력하고 약함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그의 약하심과 고난에 의해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우리는 고난 속에 신과 함께 있고 우리의 곤궁 속에 신은 찾아오신다.
4)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삶”에 동참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발췌내용>

1.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도대체 기독교란 무엇이며 그리스도란 누구인가? 그것이 신학적인 말이건 신앙적인 말이건 간에 말에 의해서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마찬가지로 내면성과 양심의 시대, 즉 일반적인 종교의 시대도 지나갔다. 우리는 완전히 무종교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은 이미 단순히 종교적으로는 될 수 없다. 분명히 종교적이라고 보이는 사람들도 결코 그것을 실제 행위에는 나타내지 않고 종교적이라는 것을 가지고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다.(p.159)

- 종교적 인간은 인간의 의식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칠 때라든가 인간의 모든 능력이 쓸데없게 될 때 신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한 신은 본래 언제나 “기계장치의 신”이며 그것을 종교적 인간들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피상적 해결을 위해서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실패에 부딪혔을 때의 힘으로 불러낸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이미 죽음 자체도 거의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죽음이나 죄가 아직 참된 한계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p.161)

- 우리는 한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중심에 있어서, 약함에 있어서가 아니라 힘에 있어서, 따라서 죽음과 죄책을 계기로 해서가 아니라 생과 인간의 선에 있어서 신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한계에 설 때는 침묵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미해결인 채로 둘 도리밖에 없다. 부활을 믿는 것은 죽음의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신이 피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인식 능력이 피안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인식론적 초월성은 신의 초월성과는 무관하다. 신은 우리들의 생활의 한가운데서 피안적이며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 한계가 아니라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것이 구약성서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신약성서를 구약성서적으로 읽는 일이 너무도 적다.(p.162)


2. 도대체 구약성서에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이 문제된 곳이 있을까. 일체의 중심점이 세상에 있어서의 신의 의와 신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닐까. 로마서 3장24절 이하도 하나님만이 의롭다고 하는 생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개인의 구원의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내세가 아니라 창조되었고 유지되고 율법에 붙잡혀 있고 속죄되고 새롭게 된 그대로의 이 세계가 아닐까.(p.164)

- 신을 우리들의 불완전한 인식의 보충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인식의 한계가 부단히 확대되어 가면 이와 더불어 항상 신이 옆으로 밀려나고 거기에 따라서 후퇴일로를 거듭하게 된다. 우리는 인식하지 않는 것에서가 아니라 인식하는 것에서 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은 미해결의 문제에서가 아니라 해결된 문제에서 우리를 붙잡으시기를 원하신다. 신은 우리의 가능성의 한계가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죽음에서가 아니라 생에서, 고난에서가 아니라 건강과 힘에서, 죄에서가 아니라 행위에서 비로소 인식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의 중심이지 결코 우리들에게 미해결의 문제를 대답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 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든 생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 역시 생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다.(pp.186~187)


3. 구약성서의 신앙은 결코 구제종교가 아니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구약성서로부터 분리하여 구제신화에서 해석한다는 근본적인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닐까. 종래에는 구제신화가 일반적으로 죽음의 한계의 극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구제 다시 말하면 죽음의 한계의 차안(此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되는 것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기 위해서다. 구제신화는 비역사적으로 사후의 영혼을 구한다. 기독교에서 부활의 소망이 선교되고 있고 불안, 곤궁, 공포, 동경으로부터의 구제, 보다 좋은 내세에서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제를 얘기하나 그때 중점은 죽음의 한계의 피안에 있다. 기독교적 부활의 소망은 지상의 생을 인간에게 지시한다는 점에서 신화론적 부활의 희망과는 다른 것이다.(pp.199~200)

- 기독교인은 구제신화를 믿는 자와 같이 이 지상의 과제와 곤란에서부터 마침내 영원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지상의 생을 남김없이 다 맛보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신 분이 그와 함께 하시게 되고 또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신·구약성서는 굳게 결합되어 있다. 구제신화는 인간의 한계 경험에 의해서 성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인간을 생의 한가운데서 붙잡는다.(p.200)


4. 성서에서 인간을 죄인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의 약점내지 속됨을 지적하기보다는 신을 부인하거나 적극적 의미에서의 인간의 오만, 신 앞에 불의를 저지르는 것등을 의미한다. 또한 일부에서는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내밀하고 깊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성서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전체적 인간이다. 인간은 안에서 밖으로와 마찬가지로 밖에서 안으로 향해 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그의 내밀한 혼의 속 깊은 곳에서라야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p.207)


5. 신 앞에 요구되는 성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신 앞에 있는 우리들의 상태를 바로 인식하게 한다. 신약성서의 신은 우리들이 신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자로서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들과 함께 있는 신은 우리들을 버리신 신이다(막15:34).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신은 자기를 이 세상으로부터 십자가로 추방한다. 신은 이 세계에 있어서는 무력하고 약하다. 그리고 신은 바로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들과 함께 있고 우리를 도와준다. 그리스도가 그의 전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약하심과 고난에 의해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마 8:17). 인간의 종교성은 인간이 곤궁에 빠졌을 때 이 세상에서의 신의 능력에 호소하도록 인간을 가르치는데 이는 곧 기계장치의 신이다. 성서는 인간에게 신의 무력과 고난을 가르치고 있다. 고난을 당하는 신만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이 세계에서 그의 무력함에 의해서 능력과 장소를 획득하는 성서의 신을 볼 수 있게 된다.(p.212)

- 기독교인은 그의 고난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이교도인과 구별된다. 인간은 신을 상실한 세계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고 세속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며 바로 거기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적 행위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곤궁이나 문제나 죄나 불안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길에, 메시아적 사건에 자기도 들어가서 그렇게 함으로써 아시아 53장이 성취되는 것이다.(pp.214~215)

- 생의 충분한 현세성에 있어서라야 비로소 믿는 것을 배운다. 성자이건 회개한 죄인이건 혹은 교인이건, 의인이건 불의한 인간이건, 병든 자이건 건강한 자이건, 성공한 자이건 실패한 자이건,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무언가 만들어내는 것을 단념했을 때(이것이 곧 현세성임), 그 때야말로 사람은 자기를 오로지 하나님 손안에 맡기고 그때야말로 이미 자기의 고난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고난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때야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이며 회개가 아닐까.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이 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렘45장)(p.218)


6.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것은 인간의 전 존재 전환이 일어난다는 경험이요.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경험이다. 예수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초월경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다는 것에서 비로소 전능, 전지, 편재(偏在)가 유래한다. 신앙이란 예수의 이러한 존재에 관계하는 일이다(수육, 십자가, 부활). 신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는 “타인을 위한 존재”에 있이서의, 곧 예수의 존재에의 관여에 있어서의 새로운 생이다(pp.228~229).


7. 확실한 것은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 곁에, 하나님의 임재하에 사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는 것, 이러한 생은 우리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생이라는 것,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도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는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지상의 어떠한 힘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 위험도 곤란도 다만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 가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들은 아무것도 요구할 것이 없지만 어떠한 것이라도 간구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고, 우리들의 기쁨은 고난 속에, 우리들의 생은 죽음 속에 숨어 있으며 우리들은 언제나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사귐 속에 처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다”와 “아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굳건한 터전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한 시대에는 우리들은 언제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 가치가 있는 가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우리들은 이 사람 저 사람이 살고 있으니까 자기도 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계가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지탱할 자격이 부여되었을 때, 예수와 같은 인간이 산 일이 있을 때, 그리고 그때에만 우리들 인간에게는 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산 일이 없다면 우리가 알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들의 생은 무의미할 것이다.(pp.234~235)

 

출처 - 생명나무 쉼터(http://blog.daum.net/7gnak/15712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