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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4월의 추천도서(406)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 N.할라즈



 

책소개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라는 한 평범한 유태인 장교에 대한 부당한 박해로써 프랑스인 전체를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분열시킨 후 마침내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실과 양심이 거짓과 음모를 굴복시키는 거대한 드라마로 종결되었던 드레퓌스 사건. 왜 백여 년 전 먼 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단순한 군사 첩보 사건이 다시 읽혀져야 하는가. 이 책은 드레퓌스 사건의 처리 과정을 통해 인권과 정의,그리고 진실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국가 조직이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거나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실을 날조하거나 은폐하는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당한 처사에 맞서서 지식인들과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항거한 유명한 사례가 바로  프랑스에서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입니다.

 

1894년 9월 어느 날, 프랑스의 참모본부 정보국은 평소 간첩행위를 하는 것으로 지목된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를 훔쳤는데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 무관인 슈바르츠코펜이었고 발신인은 익명이었지만,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 관련 자료의 목록, 즉 일종의 '명세서'였습니다. 그런데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지목해버렸고 이런 판단에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는 졸지에 체포되어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당시의 주류 신문들은 온갖 날조된 혐의와 추측 기사로  드레퓌스를 모함했고,  마침내 드레퓌스는 1894년 12월, 군사법정의 비밀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참모 본부의 상관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사태를 빨리 수습하는 데 혈안이 되어 여러 문서를 날조하여 유죄의 증거로 제출한 다음, 그가 그것에 대해 반론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재판을 끝내버렸던 것입니다. 1895년 2월 21일 밤, 드레퓌스는 아무도 모르게 아프리카 기아나의 적도 해안에 있는 '악마도'라는 외딴 섬에 수형되었습니다.

 

재판이 끝난 지 15개월이 흘러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이 드레퓌스라는 이름조차 잊어버린 1896년 3월, 참모본부 정보국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또다른 스파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드레퓌스 사건의 서류철을 보게 되었는데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과 그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보병 대대장인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적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진상을 상부에 보고하면서 에스테라지를 체포하고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상관들은 이미 스스로의 입지와  참모본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두기를 원했고 피카로 중령은 생명의 위험까지 느꼈습니다.  피카르가 해임되자 사람들은 그가 찾아낸 증거들이 상관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드레퓌스 편에 서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언론인 조제프 레나크와, 역시 언론인으로 나중에 제1차 세계대전 때 총리를 지낸 조르주 클레망소, 상원의원 오귀스트 쇠레르 케스트네르도 있었습니다. )

 

그런 와중에 드레퓌스의 친형과 부인 등이 필사적으로 재심을 요구하는 가운데, 프랑스 내부는 군부와 국가권력의 편을 드는 세력과 그 반대의 진보세력으로 양분되었지만  그래도 군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이비 언론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미국, 유럽의 지식인까지 합류하면서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되어 갔습니다.  마침내  정치가 클레망소가 운영하는 중소 신문인 <로로르 (여명)>지에 대문호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나는 고발한다>라는 명문장의 논설을 실으며선 여론은 반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에밀 졸라는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 중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899년에 귀국하는 등의 우여곡절도 있었고, 프랑스 내외의 많은 지식인,  신문사 프 피가로 등이 에스테라지를 범인이라 주장했지만 대부분은 반유대주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898년 8월, 처음부터 드레퓌스 사건을 날조하고 증거서류까지 조작했던  앙리 중령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자살하자 겨우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지만, 군사법원에서는 10년형으로 형량만 감했을 뿐 유죄판결을 뒤집지는 않았고 다만 선고 후 대통령이 사면해서 감옥에서는 풀려나왔지만 복권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지식인들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1904년에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에서야 드레퓌스의 무죄가 선고되어 모든 혐의를 벗고, 복권도 되어 육군에 복직했습니다. 드레퓌스는 후에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전투에 두 번 참가한 뒤 1935년 7월 11일 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출처 :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