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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추천 도서(20.3~21.2)

3월의 추천도서(2560) 윤이후의 지암일기

1. 책소개

 

윤이후, 17세기 조선의 일상을 고스란히 기록하다
조선시대 생활상을 담은 보물창고 『윤이후의 지암일기』

『윤이후의 지암일기』는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공재 윤두서의 생부이며 「일민가逸民歌」라는 가사의 작가로 알려진 윤이후(尹爾厚, 1636∼1699)가 1692년 1월 1일부터 1699년 9월 9일까지 8여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 완역본이다. 함평현감을 마지막으로 해남으로 내려와 죽기 5일 전까지 그의 말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윤이후의 지암일기』의 진정한 가치는 조선후기 일상사의 보물창고라는 점에 있다.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 일기가 적지 않지만 이 정도로 일상을 섬세하고 풍부하게 기술한 자료는 거의 없다. 오랜 기간 병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 서울의 세 아들과 괴산의 딸 소식에 애틋해 하고, 정쟁에 휘말려 의금부에 갇힌 셋째 아들 생각에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마음, 인천 사는 누나와 자형의 죽음 앞에 애통해하는 형제의 심정, 천한 노비였으나 자신을 길러 준 유모의 죽음 앞에 그녀의 삶을 기록하는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집과 사당을 짓는 건축, 섬과 해안에 제언을 쌓아 농지를 넓히는 개간, 연이은 상례와 장지를 찾기 위해 풍수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 땅을 둘러싼 분쟁,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일상과 정감을 담은 많은 운문과 산문, 노래와 악기를 가까이 한 음악적 취미와 꽃과 나무를 구하여 조경을 하는 열정, 병치레와 치료의 기록, 영암과 강진 일대의 단거리 여행과 서울과 거제를 오간 장거리 여행의 상세한 기록, 오랜 기근과 전염병에 따른 참혹한 풍경들, 갑술환국(1694)을 둘러싼 파란의 정국 상황과 대동미 운영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후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활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윤이후의 지암일기』라는 창문을 통하여 17세기 조선이라는 공간을 들여다보자. 그곳엔 거시사와 제도사가 서술하는 화석처럼 경직된 조선후기 유교사회의 모습은 조금도 없다. 일기 속에는 종횡으로 얽힌 무수한 군상들 사이의 생생한 삶이 약동한다. 기근과 환난, 고통과 절망 사이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일기를 펼쳐 한 해 두 해 읽어나가다 보면 마치 내가 조선시대 사람으로 그 시대를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얼핏 각자의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삶이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되고 이렇게 역사로 남는다는 사실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들 각자의 삶이 누군가에겐 공감이 되고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윤이후의 지암일기』는 최초의 완역본이다. 하영휘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외 7인이 2013년 11월 번역에 착수한 이래 6년 만에 빛을 보는 이 책은 마모가 심한 원문에서 한 자라도 더 살리려 노력한 결실이다.

출처: 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윤이후

尹爾厚(1636∼1699)
본관은 해남, 자는 재경載卿, 호는 지암支庵이다.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공재 윤두서의 생부다. 조실부모하고 윤선도 슬하에서 자랐다. 5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함평현감 재직 중 강호에 뜻을 두어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했다. 그 후 강호의 꿈을 이루 기 위하여 죽도에 별서를 경영했다. 『지암일기』는 그가 함평현감 재직 중이던 1692년 1월 1일부터 죽기 5일 전 인 1699년 9월 9일까지 쓴 일기다. 이만큼 내용이 다양하고 재미있는 조선시대의 일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출처: 교보문고

 

3. 목차

 

머리말 강호의 꿈

1692년 벼슬을 던지고 돌아와 解符歸來

1월 그 속마음을 어찌 알랴
2월 돌아가 병든 어머니를 모시려는 마을일지니
3월 죽도 별업으로 나와 제방을 보수하다
4월 기둥을 세우고 방향을 정하다
5월 두 친구의 애쓰는 정성이 진실로 고마워
6월 두통으로 괴로운 나날들
7월 구들을 놓은 뒤 벽을 바르고 콩댐을 하니
8월 아버지 묘에 석물을 세우다
9월 조상 제사의 유사가 되어
10월 소리산에 배를 보낸 이유
11월 낙무당을 보수하다
12월 가야금과 거문고를 만들고

1693년 운명인 듯 받아들여 安之若命

1월 집사람은 글을 모름에도
2월 인천 누님의 별세
3월 어머니 상을 당해
4월 장례를 지내고 사흘 만에 큰비가 오니
5월 아내의 눈병
6월 동네 사람들을 진휼하다
7월 학질의 괴로움
8월 파산 석물에 대한 의논
9월 서울로 나포되다
10월 의금부에 하옥되다
11월 석방되어 돌아오다
12월 송사 청탁을 물리치고

1694년 근본에 충실하여 농사에 힘쓰니 務本力穡

1월 겨울과 봄에 눈도 오지 않으니
2월 서로 목숨 의지하는 사이였건만
3월 속금도에 제언을 쌓다
4월 자던 새가 둥지에서 놀라 깬 것 같아
5월 충헌, 두 글자의 뒷이야기
윤5월 류 대감의 위문편지에 답하다
6월 죽도가 있기에 세상을 잊을 수 있어
7월 외로운 신하의 눈물 황천에 사무치네
8월 유모와 나
9월 죽은 아들의 궤연이 돌아오다
10월 팔마장에 사당을 짓다
11월 묏자리 잡기가 어려워
12월 인천 자형도 세상을 버리시고

1695년 산과 물에도 이치가 있거늘 山水有理

1월 기대하지 않은 일 세 가지
2월 집안에 초상이 줄을 이어
3월 사대부의 수치가 되는 일일지니
4월 은 채굴지를 방문하다
5월 황원을 둘러보다
6월 비 인향과 수춘의 추쇄
7월 지사 서육과 풍수를 논하다
8월 논정 땅을 둘러싼 다툼
9월 진도를 방문하다
10월 죽도에 초당을 짓다
11월 도둑맞고도 다행한 일 세 가지
12월 한 해가 내달리는 수레바퀴 같아

1696년 기댈 구석 없는 고아로 태어나 零丁孤苦

1월 시를 주고받은 날들
2월 죽도의 노래
3월 암행어사가 하는 짓
4월 절도의 유배객을 찾아가다
5월 서울로 가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다
6월 집으로 돌아오는 길
7월 유모의 딸 가지개의 죽음
8월 이 일을 어찌 할까
9월 요사이 괴로움을 이루 말할 수 없어
10월 그래도 친척이 남보다 낫네
1월 밤에 운 수탉
12월 종아의 유배 소식
1697년 나는 떠나고 너는 남아 我去爾留

1월 손자 희원의 탄생
2월 종아를 찾아가다
3월 떠나는 길 눈물로 옷깃을 적시며
윤3월 두모동 제언을 보수하다
4월 아들의 죽음
5월 마음 달랠 길을 찾아
6월 유모의 제사를 지내다
7월 도적을 막는 몽둥이
8월 육촌형 윤이형의 죽음
9월 노 선백의 집을 수리하다
10월 더부살이와 같은 삶
11월 종아의 가솔을 데려오다
12월 고요 속에 흥이 넉넉함을 알겠으니

1698년 마음 가는 대로 한가로이 任意容與

1월 대둔사를 방문하다
2월 천연두로 손자를 잃다
3월 강진 백운동을 구경하다
4월 변례 중의 변례
5월 백치 외숙의 별세
6월 일민가逸民歌
7월 회록이여, 어이해 초당을 태웠는가
8월 고금도와 강진 일대를 여행하다
9월 고창현감의 조사보고서
10월 친족들과 함께한 가을 나들이
11월 전염병을 물리치는 별신굿
12월 지사 손필웅과 풍수를 논하다

1699년 흰머리에 파리하게 여위어 白頭疲?

1월 눈보라 속에서
2월 인심의 타락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3월 널찍한 바위에 올라 화전을 부치다
4월 새 급제자 축하연에 가다
5월 가뭄과 병충해
6월 질화로에 부친 시
7월 쌀 닷 섬의 수모
윤7월 합장암 유람
8월 애도의 글을 지으려니 눈물이 떨어지네
9월 손자들을 위해 서실을 짓다

부록
『지암일기』 인물 소사전
윤이후 가계 및 친족도
『지암일기』의 공간 정보
찾아보기

출처: 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1693년 1월 16일 경신 】오후에 비가 오다가 저녁 무렵에 그침
새집 뜰 앞에 유자, 모과, 괴산대리자槐山大梨子를 심었고 옛집의 남쪽 창밖에는 사철동백, 으름덩굴을 심었다. 또 죽도에는 유자, 괴리자槐梨子 사철동백, 으름덩굴을 심었다. ? 지난겨울 동짓달 20일 전에 진달래를 화분에 심어 방안에 뒀었다. 섣달 20일 후에 꽃을 피웠는데, 지금은 활짝 피어 탐스럽고 고운 모습이 볼만하다. 하루는 아내가 와서 완상하다가 글자를 모아 시구를 지었다.

早發一盆花 꽃 한 화분이 일찍 피자
春色滿房中 봄기운이 방안에 가득하네
老人少如花 노인은 꽃처럼 젊어지고
靑春長不盡 청춘은 길이 끝나지 않기를

아내는 글을 모르며 다만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 곁에서 듣고 기억하여 잊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책을 읽어 배운 사람과 자못 비슷하니 비록 부녀자이지만 물려받은 문장이 있는 것인가. 지금 여기에 지은 마지막 구는 나의 늙음을 가련하게 여겨서 다시 젊어지길 축원한다는 뜻을 말한 것인데, 압운押韻을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된 시구는 못 되었지만 기상이 꽤나 좋고 넉넉한 맛이 있어 볼만하다. 오랫동안 병을 앓아서 점차 위태로운 고질이 되었지만 (…) 이를 통해 볼 때 장수도 기대할 만하다.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것을 기록하는 것이 매우 우습지만, 죽을 뻔했다가 약간 소생한 후에 볼만한 기상이 있어 이렇게 적어 둔다._본문 132쪽

【1694년 6월 27일 계해 】맑음. 소나기가 간간이 내림
내가 함평에서 귀향한 후 세상일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오직 밭 갈고 우물 파는 것만을 일삼아 왔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자못 이를 근심하여 매번 서울로 돌아가기를 곁에서 간절히 권했다. 서울에 있는 동료들도 편지로 시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하기도 하고, 혹 한단학보邯鄲學步라는 말로 나를 조롱한 이도 있었으나, 나는 번번이 웃으며 응하지 않았다. 친상親喪을 당하자, 집안사람들의 뜻은 모두 장례가 끝나면 상경하여 거상居喪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나는 더욱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국이 뒤집어지고 나서야 전에 이러쿵저러쿵했던 자들이 비로소 내 뜻에 감복했다. 하물며 나를 조롱한 자들은 유배형에 처해졌으니, 생각건대 필시 나를 부러워해 마지않을 것이다. 아! 나는 진실로 어리석으므로 오늘날의 일에 대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감개한 바가 있어서 구차하게 용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날 요직에 있던 여러 재신宰臣 중 남쪽 지방으로 귀양 온 이들이 모두 내가 화망禍網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본래 용렬한 제가 어찌 감히 환란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이 말을 전해 듣고 내가 말을 야박하게 한다고 여기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죽도를 점유하려고 계획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종서는 서울에 있었으므로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 비로소 나를 따라왔다. 그러고는 올라가서 한번 둘러보기도 전에 마음으로 기뻐하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좋아하니, 이 아이의 소견이 그리 범상하고 누추하지는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시사時事를 이야기하며, 출사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내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죽도가 있어 더욱 세상을 잊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한다. 아이의 이 말이 참으로 내 마음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 탄복하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_본문 344~345쪽

【1696년 7월 22일 병자 】맑음
성덕항이 왔다. ? 팔마로 돌아왔다. 이대휴를 역방했다. 길에서 양득중梁得中을 만났다. ? 가지개加知介가 13일에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내 유모 소생인데, 작년에 와서 만난 후로 다시 보지 못했다. 굶주린 나머지 사산하고 자신도 역시 일어나지 못했으니, 매우 비참하다. 커서는 용모가 그 어머니와 흡사하여 내가 볼 때마다 눈물을 훔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작년에 와서 만났다가 황원黃原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때 슬퍼해 마지않기에, 나도 눈물을 삼키며 잘 타일러 보냈었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지 어찌 알았겠는가. 너무도 애통하다._본문 693~694쪽 

출처: 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윤이후는 누구인가

윤이후는 자가 재경載卿, 호가 지암支菴이며, 고산 윤선도의 손자이자 공재 윤두서의 생부이다. 윤이후는 지금껏 그 조부와 아들에 비해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윤선도의 실질적인 계승자로서 해남윤씨 집안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윤선도의 여러 손자들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윤이후 혼자였고, 윤이후 항렬의 모든 이들이 후사를 두지 못하여 윤이후의 아들들이 양자로 들어갔다. 정치나 사회적으로 가문의 가장 큰 울타리가 될 수 있었던 이가 윤이후였고 가문의 미래를 짊어질 이들도 모두 윤이후의 혈통이었기에, 윤선도의 빈자리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그는 윤선도의 정치적 유산과 가문의 사업을 이어 받아, 외적으로는 중앙 정계에서 남인南人의 중진으로 역할 하였고, 내적으로는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집안의 장토를 늘리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말년에는 해남 죽도에 정사를 짓고 은거하여 「일민가逸民歌」라는 가사 문학 작품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윤선도가 보길도에 은거하여 「어부사시사」를 지은 것과 닮아 있다. 그의 삶은 마치 윤선도의 거울과 같았다. 할아버지 윤선도의 문명文名과 아들 윤두서의 화명?名에 가려 있던 윤이후는, 어쩌면 할아버지의 글과 아들의 그림보다 더 소중한 선물을 후대의 우리에게 남긴 것인지도 모른다.

『윤이후의 지암일기』최초의 완역본

하영휘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외 7인이 2013년 11월 번역에 착수한 이래 6년 만에 빛을 보는 이 책은 지난한 공동 작업의 결실이다. 역자들은 마멸이 심한 원본에서 행초로 흘려 쓴 원문을 한 자라도 더 살려 읽기 위해, 그리고 개인의 사적 기록이기에 파악하기 힘든 문맥 가운데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번역을 제시하기 위해 오랜 기간 함께 모여 분투했다. 그 가운데 얻은 여러 지식을 토대로 독자가 옛 일기를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읽을 수 있게끔 여러 장치를 마련하여 제공하였다.
하루하루를 순차적으로 기록한 편년체 자료로서 개별 사건을 파악하기 어려운 일기의 단점을 고려해, 일기에 담긴 주요 사건을 추려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각 연도별 일기 앞에 설명하고, 중요한 사건의 경우 그 배경이나 맥락을 해설하는 박스를 일기 중간 중간에 배치하였다. 기록이 자세한 만큼 허다한 인물과 지명이 등장하여 자칫 읽는 이가 길을 잃기 쉽기에, 등장인물 및 지명의 정리에도 따로 공을 들였다.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비중을 따져 고른 180여 명의 인물 소사전을 책 말미에 덧붙이고, 일기에 언급되는 600여 곳의 고지명에 대한 현재 위치(주소)를 책 말미에 제시하였다. 그와 함께 일기의 주요 무대가 되는 해남, 영암, 강진 일대의 자세한 지도도 실었다. 『윤이후의 지암일기』는 최초 완역본이라는 의의도 크지만, 번역 가운데 이루어진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함께 담아냈다는 측면에서, 단순 번역본을 넘어선 해설서로서의 기능 또한 갖추고 있다.

『지암일기』의 시대_ 대기근과 정쟁으로 얼룩진 환난의 시대

윤이후가 『지암일기』를 쓴 17세기 말은 사회적으로는 혹독한 대기근이 닥치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정점으로 치달은 시대였다. “길을 떠난 후 나주 위로는 보이는 참상이 더욱 심하다. 논 값이 1섬(15말) 혹은 2섬에 불과한 경우가 많고, 사람 값은 1섬에도 못 미친다. 죽은 사람도 이루 셀 수가 없다. 광호촌만 해도 죽은 사람이 70여 명에 이를 것이라 한다.”(1696년 4월). “5, 6년의 흉년과 작년, 올해의 독한 전염병으로 사람이 많이 죽었다.”(1699년 5월). 길가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강도가 들끓었던 을병대기근(1695~96) 당시의 참혹한 정경을 일기는 여실이 보여준다. 심지어 큰 부자였던 윤이후도 양식이 떨어져 걱정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딸린 식객이 많은 데다 오랜 흉년에 의탁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윤이후 또한 기근의 혹독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문을 두드려 구걸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도망친 노비들이 굶주림에 지쳐 스스로 돌아오는 풍경들을 보면 당대의 참혹했던 실상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기사년(1689)에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남인이 득세했지만, 갑술년(1694)에는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아 남인들은 모조리 쫓겨났다. 권대운, 권규, 목내선, 민암, 김덕원, 정유악, 류명천, 류명현, 이의징, 이운징, 이현기 등 당시 남인계 유력 정치인들이 대거 파직되어 해남 부근의 강진, 진도, 고금도, 신지도, 우이도 등지에 유배된 정황이 『지암일기』에 자세히 나온다. 윤이후는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물러나 있기는 하였으나,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남인의 선봉에서 서인에 강하게 맞섰던 윤선도의 손자이기도 하고, 한때 그들과 동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방문하거나 자주 편지를 보내 위로하는 한편, 식량과 생필품을 보내며 보살폈다. 일기에는 그들과의 교류 내용이 1694년 5월 10일자에서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꾸준히 기록되어 있다. 갑술환국으로부터 3년 후인 1697년 셋째 아들 종서가 ‘세자 저주 무고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반대당의 끈질긴 공격으로 죽게 되는데, 이 사건도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윤이후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사사로운 기록이지만 『지암일기』는 당대 중앙 조정 정변의 정황을 다른 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는 단서를 무수히 품고 있다.

『지암일기』의 공간_ 간척과 경영 및 풍수와 유람의 공간

조선시대 양반은 유자儒子로서 경세經世의 큰 원칙을 논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실생활에서 토지 경영이나 거래 등 실물 경제를 언급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윤이후는 명문가의 일원으로서 선대로부터 이어진 해남윤씨 가문의 경제력과 그로부터 파생된 독특한 경영 문화를 바탕으로 경영에 대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전원에 묻힌 생활을 추구하는 가운데 ‘간척’과 ‘농업’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고 여러 사업을 벌였던 이유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윤이후는 은퇴 후 해남 일대 해안과 섬에 제언을 쌓고 그 안을 간척하여 농지를 조성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갔다. 언전堰田(제언 내부의 농지)을 조성하는 것은 해남윤씨 집안이 대대로 재산을 증식하는 한 방식이었다. 윤이후는 죽도, 속금도, 두모동의 제언 공사의 전 과정을, 계획 단계에서부터 실행, 사후처리(작인과 마름의 지정)에 이르기까지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다. 제언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은 물막이 작업이었는데, 그 때는 인근 면민과 사찰의 중이 동원되고 관의 허가와 협조 하에서 이루어졌다. 속금도 제언 공사의 경우 동원된 역군만 1,587명, 이들이 평균 2일씩 일해 연인원으로 3,187명이 동원되었다. 적지 않은 지역의 인원이 동원되고 관의 허가가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조선시대 지역 양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간척 공사의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다. 공사가 끝난 다음 개간을 거쳐 수확한 곡식을 간척지 마름에게 나누어준 기록 또한 보인다.

죽도는 은퇴 후 윤이후가 둑을 쌓고 초당을 지어 별업으로 삼았던 공간이다. 종래 죽도의 위치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현지답사를 다녀온 역자들의 노력을 통해 죽도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윤이후는 1692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죽도에 제언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야 완료했다. 죽도는 밀물 때는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이 되고 썰물 때는 흘러가는 강물을 발 아래로 굽어보아, ‘호남에는 상대가 없을’ 정도로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윤이후는 그곳에 아담한 초당을 짓고 제방을 쌓아 경지를 만들어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스스로 꿈꿔 온 ‘강호의 삶’의 중심 공간으로서 죽도에 대한 윤이후의 애정은, 그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수많은 운문과 산문 그리고 그곳을 방문한 친우들의 시문까지 포함해 『지암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덕분에 독자들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죽도의 풍광을 그려볼 수 있다.

윤이후는 해남과 영암 및 강진 일대 명소를 꾸준히 유람하였다. 대흥사, 백련사, 도갑사, 무위사, 미황사 등 큰 절은 물론, 도장사, 합장암, 수도암과 같은 작은 절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사찰뿐만 아니라 강진의 백운동, 영암의 구림 등 지역의 명소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고 시절과 경치를 완상한 기록 또한 많이 보인다. 지역뿐만 아니라 『지암일기』는 서울을 두 차례 오간 기록 그리고 거제를 오간 기록, 총 세 차례에 걸쳐 장거리 여정을 다녀온 기록이 실려 있다. 길을 가는데 만난 사람들과 마주친 풍경, 묵었던 장소, 지역의 특산물, 오가는 데 걸린 시간 등 조선시대 장거리 여행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다채로운 정보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특히 해남에서 거제를 오간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는 호남 양반의 영남 유람기로서 그 가치가 뚜렷하다고 하겠다.

『지암일기』의 사람_ 신분을 초월한 교유와 애정으로 기록된 사람들

『윤이후의 지암일기』는 가족과 친족, 이웃과 노비, 관리와 지역민 등 17세기 해남이란 시공간을 무대로 한 생활 및 친교의 기록이며, 인간관계의 기록이다. 자신의 동정과 부인 및 자식들에 관한 기록은 물론이고, 자기 집에 내왕한 인물과 외출하여 만난 사람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기록했다. 편지의 수발과 그 인편도 기록했는데 특히 세 아들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 서울 소식과 소문도 담았다.
일기에는 총 25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370여명은 지식 엘리트 계층의 인물(문·무과 급제자 240여명, 사마시 합격자 120여명, 음서직 10여명)이고, 이외 승려(60여명), 노비(250여명), 공인工人, 석수石手, 점쟁이, 풍수장이, 의원, 침의, 재인, 악사, 가수, 화가, 기생, 걸인 등 다양한 하층민들의 생활상이 실려 있다. 윤이후는 가풍에서 비롯한 문화적 소양과 오랜 기간 갈고 닦은 학문적 배경을 토대로, 양반ㆍ평민ㆍ천민을 아우르는 인간에 대한 소박한 관심과 시대의 격변과 인생의 희비를 반영한 담담한 통찰을, 자신이 경험한 일상 가운데 고스란히 담아냈다.
윤이후는 간혹 기인을 만나면 자세히 묘사했다. 김경룡이라는 장사를 만나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사람은 장사로 유명하다. 체구는 작지만 용맹이 남다르고 총을 잘 쏘아 지금까지 잡은 호랑이가 20여 마리다. 올해 나이가 여든인데, 근력과 정신이 조금도 쇠하지 않고 눈동자가 빛나고 시력이 좋다. ‘젊었을 때 호랑이 여섯 마리의 눈 12개를 먹었습니다. 지금껏 시력이 쇠하지 않은 것이 혹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그가 말했다.”(1697년 4월 6일자)

노비들의 인간적인 모습 또한 다채롭고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는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반영한다. 자신의 유모인 복생福生의 일대기 및 그와 얽힌 자신의 추억과 감상을 일기에 자세히 기록하며 “유모의 손자 대까지는 신공을 징수하지 말고 또 잡아다 부리지 마라. 그 후소생은 여러 대가 지나도 절대로 외손에게 상속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을 자손들에게 남기기도 했다. 1697년 10월 20일 일기에는 덕립이라는 노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노 덕립이 새벽닭이 울 때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이 노의 나이가 올해 여든인데, 부부가 지금껏 해로하고 자손이 60여 명이나 된다. 실로 세상에 드문 복이다.”라 썼다. 때로는 병문안을 온 비에게 시를 써 주기도 했다.
책의 말미에 실은 인물 소사전의 수록인물 180여 명 가운데 노비가 20여 명에 달한다. 신분이 낮았던 평민과 노비를 대하며 그들의 재주와 매력 그리고 행복을 발견하고 편견 없이 기록한 것을 보면, 윤이후는 신분을 초월해 인간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은 일기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이자 나아가 하층민의 생생한 기록이 드문 한국사에서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지암일기』의 생활_ 취미, 질병, 교류 사이에 생생히 드러나는 일상

윤이후는 음악을 수시로 즐겼다. 약사와 가사를 초빙하여 며칠씩 머물며 재능 있는 비들을 가르치게 했다. 간혹 산사나 명승에 모여 연회를 열 때면, 금비琴婢, 야비倻婢, 가비歌婢 등을 데리고 다녔다. 1692년 9월 29일 일기에 “윤천임이 금아琴兒 한 명을 불렀다. 윤세미 씨가 데려온 이형징은 평소 거문고와 노래로 이름난 사람이다. 나와 함께 간 송창좌와 서로 어울려 연주했다. 밤이 깊어서야 파했다. 오늘 모임은 훌륭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썼다. 거문고 만드는 사람을 부르고 향목香木을 마련해 거문고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음악에 대한 취미뿐만 아니라 각종 나무와 화초 심기 또한 스스로 벽이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다. 감, 배, 사과, 유자, 포도 등 과실수는 물론 대나무, 동백, 진달래, 매화 등 화훼 또한 즐겨 심었다. 진달래와 동백, 매화 등을 화분에 심어 방에 두고 완상한 내용들로도 꽃과 나무에 대한 윤이후의 관심과 취미를 짐작해볼 수 있다.

병치레에 관한 기록도 많다. 조부 윤선도의 제사 참석차 서울을 다녀온 후 1696년 8월부터 약 석달 간 다리에 부스럼이 나고 왼쪽 팔의 혈병이 심해지는 병증을 하소연하고, 팔에 창질이 생기는 등 합병증에 대해서도 토로하였다. 셋째 아들 종서의 옥사로 마음고생이 심한 가운데 병세는 더 깊어가자, 인근 지인들이 위문편지와 함께 식품과 약재를 보냈다. 전복, 햇밤, 배, 담근 감, 말린 새우, 석류, 쌀, 생닭, 생낙지, 말린 민어, 밀가루, 누룩, 깨, 귀상어 등 다양한 계절 음식의 명칭을 살펴볼 수 있으며, 치료를 위해 처방한 다양한 약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환후의 변화도 상세히 썼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선물을 주고받은 기록도 많다. 그 중에 두드러지게 잦은 물품이 바로 부채다. 1693년 8월 9일 일기 내용이 재미있다. “곡성현감 김주익이 부채 여섯 자루를 보냈다. 들으니 그가 부채를 쌀 때 아우를 시켜 문안 편지를 쓰게 했는데, 아우가 편지 봉투에 ‘윤 지평 댁’이라고 쓰자 형이 말하기를 “지평이라고 하면 부채 꾸러미가 적어도 15자루는 되어야 하는데, 지금 부채가 떨어져 많이 보낼 수 없으니 ‘함평’이라고 쓰라.”라고 했다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배를 잡고 웃었다.” 윤이후는 1692년 함평현감 자리에서 물러난 후 사헌부지평 벼슬에 제수된 적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함평현감보다 사헌부지평 벼슬이 더 높으니 ‘지평’이라고 하면 그만큼 부채를 더 많이 보내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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