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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추천 도서(20.3~21.2)

3월의 추천도서(2559) 발해고

1. 책소개

 

발해를 우리 역사로 체계화한 유득공, 그가 최후까지 수정한 《발해고》 4권본의 국내 최초 번역본이다.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규정하고 이를 체계화한 유득공의 《발해고》 4권본을 국내 최초로 번역했다. 《발해고》 4권본은 기존에 알려진 《발해고》 1권본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본래 9개의 목차는 5개의 목차로 개편되었고, 내용은 3분의 1 이상 추가되었으며, 1권본의 오탈자가 바로잡혔다. 유득공의 논평도 대폭 늘어나 그의 발해사 인식도 한층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은 《발해고》 4권본의 본문 구성 방식을 그대로 가져왔다. 또한 550여 개의 번역자 주를 통해 1권본과 4권본의 세세한 차이와 생소한 어휘에 담긴 역사적 의미 등을 설명함으로써 《발해고》 4권본을 좀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밖에 독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발해고》 4권본 원문도 함께 실었다.

출처: 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유득공

저자 유득공은 1748년(영조 24년)에 서얼로 태어났다. 1779년(정조 3년) 박제가ㆍ이덕무ㆍ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1800년 그를 아끼던 정조가 승하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년(순조 7년)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발해고(渤海考)》,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사군지(四郡志)》 등 문학과 역사, 지리, 풍속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출처: 교보문고

 

3. 목차

 

옮긴이의 말: 유득공이 남긴 최후의 《발해고》
1권본과 4권본의 차이
오경도
오경표
《발해고》 목차

제1권
군주고
진국공 | 고왕 | 무왕 | 문왕 | 폐왕 | 성왕 | 강왕 | 정왕 | 희왕 | 간왕 | 선왕 | 이진왕 | 건황왕 | 현석왕 | 인선왕 | 염부왕 | 흥요주

제2권
신하고
대문예, 대일하, 마문궤, 총물아 | 대야발, 대굉림, 대신덕 | 임아상, 장문휴, 대낭아 | 대상청, 대정한, 대청윤 | 대능신, 여부구 | 대예 | 대명준, 고보영, 대선성 | 고원고 | 대원겸 | 위균 | 대소현 | 고모한 | 최오사 | 대난하, 이훈 | 고인의, 덕주, 사나루, 고제덕 | 서요덕, 이진몽, 이알기몽 | 모시몽 | 양승경, 양태사, 풍방례 | 고남신, 고흥복, 이능본, 안귀보 | 양방경 | 왕신복, 양회진, 달능신 | 일만복, 모창배 | 오수불 | 사도몽, 고녹사, 고울림, 고숙원, 사도선, 고규선 | 장선수 | 고반죽, 고열창 | 여정림 | 대창태 | 고남용, 고다불 | 왕효렴, 고경수, 고막선, 왕승기 | 왕문구 | 정태, 장선 | 오효신, 양성구, 배정, 배문, 배구 | 오소탁, 그의 아들 광찬 | 신덕 | 대화균, 대원균, 대복모, 대심리 | 모두간, 박어 | 오흥, 승려 대대 | 김신 | 대유범 | 은계종 | 홍견 | 정근 | 대광현 | 진림 | 박승 | 고길덕 | 대연정 | 유충정, 대경한 | 이광록 | 대도행랑, 고진상, 왕광록 | 사지명동, 사통, 살오덕, 우음약기, 소을사, 고성, 이남송, 수을분, 가수, 정기질화, 선송, 기질화 | 개호

제3권
지리고
경과 부의 설치 | 주와 현의 연혁 | 산천의 역대 명칭 | 15부에 관한 고증 | 발해와 신라의 경계

제4권
직관고
문관직 | 무관직 | 관복
예문고
당나라 현종이 무왕에게 보낸 네 건의 서한 | 무왕이 일본국 성무천황에게 보낸 서한 | 문왕이 일본국 성무천황에게 보낸 서한 | 강왕이 일본국 환무천황에게 보낸 네 건의 서한
부록 정안국고

출처: 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조영은 곧바로 걸사비우의 무리와 함께 읍루의 동모산(東牟山)에 거점을 만들었다. 그러자 말갈 및 고구려 유민들이 다들 그에게 모였다. 뒤이어 사신을 파견하여 돌궐과 수교하는 한편, 부여ㆍ옥저ㆍ조선ㆍ변한에 있는 바다 북쪽 10여 나라를 점령했다. 이로써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거란과 닿으며 남쪽으로는 니하(泥河)를 경계로 신라와 접하게 되었다. 영토는 사방 5,000리가 되고 가구는 10만여호가 되었으며 정예병은 수만 명이었다. _ 37ㆍ38쪽, 〈제1권 고왕〉 중에서

보내준 글을 지금 살펴보니, 갑자기 문서 형식이 바뀌었습니다. 날짜 밑에 관품과 성명을 적지 않았으며, 문서 말미에다가 천손(天孫)이란 거짓 칭호까지 허위로 표기해놓았습니다. 고씨의 시대에는 병란이 쉴 틈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 조정의 위세를 빌리고자 형제를 칭했던 것입니다. 지금 왕이 아무 이유도 없이 조카라고 칭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것입니다. 이후의 사신들은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_ 98ㆍ99쪽, 〈제2권 일만복, 모창배〉 중에서

오소탁은 대인선 때의 재상이다. 신라인 최언위崔彦?가 당나라에 가서 예부시랑禮部侍郞 설정규薛庭珪 밑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했다. 소탁의 아들 광찬의 이름은 최언위 아래에 있었다. (중략) 그는 그것을 보고 표문을 올려 “신이 옛날 조정에 와서 급제했을 때는 제 이름이 이동(李同)의 위에 있었습니다. 지금 신의 아들 광찬도 언위보다 위에 있어야 합니다”라고 요구했다. 당나라 조정은 언위의 실력이 우수하다면서 불허했다. _ 110쪽, 〈제2권 오소탁, 그의 아들 광찬〉 중에서

서쪽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동쪽으로 사신이 일본에 가고 남쪽으로 고려로 도주했던 일들이 여러 역사서에 여기저기 매우 많이 나타난다. 300년 역사를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니, 그래서 해동성국이라 부르는 것이다. _ 123쪽, 〈제2권 개호〉 중에서

생각해보면, 《요사》 <지리지>에서 개주가 실제로 지금의 봉황성에 있었고 발해의 용원부로 불렸다고 말한 것은 잘못된 이야기다. 《대청일통지》에서는 《요사》 <지리지>의 오류를 바로잡지 못한 채 이를 함흥부라고도 하고 봉황성이라고도 했으니, 이는 여기저기서 갖다 붙인 결과다. 또 조공길을 개설한 사실을 끌어다가 봉황성이 조선 동쪽에 있었다고 말하고 예맥 고토를 운운한 것은 더욱더 잘못된 일이다. _ 157쪽, 〈제3권 15부에 관한 고증〉 중에서

출처: 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한민족 최후의 제국, 발해
규장각 검서관 유득공에 의해 깨어나다

1784년, 조선의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검서관(檢書官)으로 일하던 37살 청년 유득공은 《발해고》를 세상에 내놓는다. 《발해고》는 청나라가 중화질서의 중심으로 등장한 뒤 소중화주의와 북벌론에 안주하고 있던 조선을 뒤흔들었다. 당시까지 조선 사회는 반도 바깥의 발해를 자국의 역사라 여기지 않았다. 기자 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반도의 마한이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로 통일되었다는 성리학적 역사관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득공은 이 같은 역사관에 반발했다. 《발해고》에서 유득공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이자, 삼국시대 이후에도 신라와 발해가 병립했다는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했다. 이는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규정하는 것이자, 한민족의 강역을 대륙까지 확장시킨 혁명적인 역사관이었다. 이후 《발해고》는 한치윤ㆍ홍석주ㆍ정약용ㆍ김정호 등 당대 조선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이들이 발해에 관심을 갖게 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근대 이후에는 신채호ㆍ박은식ㆍ장도빈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일제 식민사학의 역사 왜곡에 맞서는 데 필수적인 저서로 자리매김한다.

잊혀진 제국을 향한 끝없는 탐구
유득공이 최후까지 수정을 거듭한 《발해고》 4권본

유득공이 《발해고》를 출간한 후에도 발해에 관한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출간 이후 당대 최고의 학술기관인 규장각에서 국내의 여러 역사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입수한 각종 문헌들을 검토하고 발해 관련 사료들을 발굴했다. 또한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중국 연행길에 참가해 발해의 강역이었던 만주 지역을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발해에 관한 연구가 축적될수록 유득공은 《발해고》 개정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발해고》를 작성하고 이를 자신의 문집인 《영재서종》에 포함시켰다. 이것이 《발해고》 4권본이다.
이 새로운 수정본은 기존에 출간된 《발해고》 1권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구성이 완전히 달라졌다. 9고(考)로 구성된 《발해고》 1권본과 달리, 《발해고》 4권본은 5고(考)로 재구성되었다. 새로운 내용도 대폭 추가되었다. 발해의 역대 신하들을 다루는 〈신하고〉에는 《발해고》 1권본에는 없었던 32인이 등장했다. 발해의 지리를 설명하는 〈지리고〉의 경우, 완전히 새로 썼다고 여길 만큼 고금의 지리지와 역사서들을 비교 분석해 발해의 지방행정구역을 치밀하게 규명하고 있다. 발해의 외교문서를 다루는 〈예문고〉에서는 당나라 현종이 발해 무왕에게 보내는 네 개의 서한을 추가해 당나라와 발해의 관계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또한 4권본은 1권본에 비해 유득공의 논평이 크게 늘어났다. 이를 통해 발해사에 관한 그의 인식을 깊이 파악할 수 있다.

제국의 역사는 온전히 기록되지 않았다
우리가 완성시켜야 할 발해사

유득공의 《발해고》 4권본은 발해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한층 심화시킬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그럼에도 《발해고》 4권본은 미완의 원고라는 뜻의 ‘고(考)’가 붙어 있다. 《발해고》를 처음 세상에 내놓을 때, “감히 정식 역사서로 자처할 수” 없다고 밝힌 유득공의 고뇌가 4권본에도 이어졌던 것이다.
《발해고》 4권본이 작성된 지 2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발해는 다시 한 번 우리 앞에 부활하고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대항해 우리 민족의 주요한 역사적 전거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발해는 온전하게 우리 역사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다. 발해 역사의 객관적ㆍ실증적 연구가 아직도 많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잊혀진 제국 발해를 향한 치열한 탐구정신의 결과물이자,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발해사를 인식하는 주춧돌이 될 것이다. 

출처: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