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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2월의 추천도서(1802) 한국통사 - 박은식


1. 책 소개


근대적 방식으로 서술된 최초의 우리 역사서, <한국통사>를 다시 읽다!

우리 고전을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춰 새롭게 번역하고 해설한「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제2권『한국통사』.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새롭게 번역하여 일반 독자들이 알기 쉽게 해설한 책이다. 역사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국내 정치적 주요 사건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번역한 원문을 각 장의 뒤에 실어 대조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특히 박은식이 살았던 당대의 시점에 맞추어 해설하였으며, 당대의 정황을 풍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대표적인 야사인 정교의 <대한계년사>, 황현의 <매천야록> 등과 대조하여 소개하였다.

*

한국통사는 한 나라의 국교(國敎)와 국사(國史)가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결코 망한 것이 아니라는 신념 아래,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서술된 것이다.
체재는 범례·목록·서·서언·삽화·제1편 2장·제2편 51장·제3편 61장·결론·후서·발 등으로 되어 있다. 삽화는 모두 12항목으로 되어 있다.
제1항은 광개토왕비문에서 집자한 제사(題辭), 제2항은 백두산 천지, 제3항은 고적으로 신라태종묘비 등 12점, 제4항은 이순신(李舜臣)의 철갑구선(鐵甲龜船), 제5항은 금강산, 제6항은 궁전의 명소, 제7항은 서울의 명소, 제8항은 한국황실, 제9항은 순종, 제10항은 황실의장과 경내명소, 제11항은 을사조약·한일신협약 때의 한국대신 및 일본대표, 제12장은 을사조약 이후 순국한 인물 등의 사진을 수록하였다.
본문은 3편 114장으로 1864년 고종 즉위로부터 1911년 이른바 105인사건 발생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서술하고, 중요 부분은 각 장 뒷부분에 저자의 의견을 첨가하였다.
제1편은 서설편으로 지리와 역사의 대강을 적었다. 제1장은 한반도의 위치와 산천, 각 지방의 중요도시와 명승지 및 특산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2장은 단군신화에서 시작해 고종 즉위 전까지의 역사를 긍정적인 사실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제2편은 모두 51장으로 대원군의 섭정에서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 성립 직전까지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제1∼10장에서는 대원군이 집정해 하야하기까지의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서술하였다.
즉, 대원군이 집정하게 된 경위와 경복궁 중건―서원 철폐―세제 개혁―국방대책과 풍속 교정―천주교 탄압―병인양요―신미양요―일본과의 통상교섭 거부―대원군의 하야 경위 등이 그 내용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대원군의 세도정치 척결과 왕권강화를 위한 내정개혁은 높이 평가했지만, 서세동점의 국제정세에 어두워 쇄국정책으로 한국이 중흥할 기회를 잃었다고 하면서 통사(痛史)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제11∼13장에서는 민씨정권에 의한 문호개방과 그에 따르는 사실들을 서술하고, 문호개방은 우리나라가 스스로 부강해질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뒤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14∼17장에서는 임오군란과 그 결과로 일어난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 및 일본측과의 제물포조약 체결, 청일 양국의 군대주둔 문제에 관해, 제18장에서는 구미열강과의 통상조약 체결에 관해 서술하였다.
제19∼25장에서는 갑신정변에서부터 동학혁명이 일어난 때까지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갑신정변에서 일본이 소극적이었던 것은, 개화당이 성공해 계속 집권하면 한국이 지나치게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고 하였다.
제26∼44장은 동학혁명에서부터 청일전쟁·갑오개혁을 거쳐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사실을 서술하였다. 저자는 동학혁명의 책임은 정부에 있고, 갑오개혁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제45∼47장은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의병운동을, 제48∼51장은 아관파천과 그 뒤에 일어난 열강의 이권쟁탈에 관한 내용이다.
제3편은 모두 61장으로 1898년 대한제국이 성립한 때부터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제1장은 대한제국 성립 때의 국내사정과 독립협회 활동상을, 제2∼13장은 열강의 이권쟁탈, 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을 서술하였다.
제14∼32장에서는 일제의 통신기관 강점, 일본선박의 내해항해의 자유권, 황무지개간 요구와 이의 반대운동, 압록강변의 삼림채벌권, 각 지방 광산채굴권 등의 장악 및 정치적으로 경찰권을 빼앗고 고문정치를 실시하는 과정과 러일전쟁과 강화조약 내용 등을 서술하였다.
제33∼44장은 일제의 침략 앞에 매국과 애국에 관계된 인물들을 서술하였으며, 을사조약 강제체결의 경위와 일본의 이권침탈 및 문화재 약탈상 등을 중점적으로 논하고 있다.
이기(李沂)·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김인식(金寅植) 등의 일본천황에게 보낸 항의문, 『황성신문』의 폐간과 장지연(張志淵)의 언론활동, 이상설(李相卨)·이유승(李裕承)·안병찬(安秉瓚)·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 등의 을사조약 반대운동과 민영환·조병세·홍만식(洪萬植)·송병선(宋秉璿)·이상철(李相哲)·김봉학(金奉學) 등의 순국, 최익현(崔益鉉)의 격문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할 목적으로 이용한 한국인은 의친왕(義親王)이강(李堈), 영선군(永宣君)이준용(李埈鎔) 등 황족, 박영효(朴泳孝) 등 당시의 국사범, 송병준(宋秉濬)·이용구(李容九) 등 일진회(一進會) 간부들이라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제45∼61장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10년 국권상실,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내용을, 제45장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한국의 농토를 약탈한 사실을, 제46장에서는 헤이그밀사파견 사실을, 제47장은 고종의 퇴위사실을, 제48장에서는 정미7조약의 진상을, 제49장에서는 군대해산과 박승환(朴勝煥)의 순국 사실, 제50장에서는 군대해산 후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을, 제51∼58장에서는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탄압상,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의 의거, 이재명(李在明)의 의거, 안중근(安重根)의 의거 등을, 제59∼61장에서는 국권상실 이후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출처 : 교보문고


2. 저자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성칠(聖七), 호 겸곡(謙谷)·백암(白巖)·태백광노(太白狂奴)이다. 10세 이후 부친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주자학 연마에 심혈을 기울여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날렸다. 학문적 계보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찍부터 신기영(申耆永)·정관섭(丁觀燮) 같은 정약용(丁若鏞)의 문인들과도 접촉하면서 그의 실학사상을 체득하였다. 26세를 전후하여서는 박문일(朴文一)·박문오(朴文五) 형제에게서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사사하였다.


1885년 향시에 합격, 1888∼1894년까지 숭인전참봉·동명왕릉참봉의 벼슬을 지냈다. 1890년대 서울에 거주하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사상도 종래의 정주학(程朱學) 중심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바탕으로 교육·언론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여, 1904년 《학규신론(學規新論)》을 간행하는 한편, 서우학회(西友學會)를 발기하고 1908년 그 후신인 서북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기관지 《서우》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교육·학회 활동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1909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하였는데 유교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유교의 정신이 제왕에 맞추어져 있고 일반 인민사회에 보급하는 정신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교화에 소극적이어서 대중화에 노력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주자학으로는 지금의 현실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양명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장지연 등과 양명학을 기초로하는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여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의 공작에 대항하였다. 그는 민족의 대동 단합과 단결을 강조하며 민족적 통일을 가장 중요한 이념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민중계몽 ·교육 ·언론 활동도 1910년 국권피탈과 더불어 일단 막을 내리고, 1911년 가을 만주 위안런현[桓仁縣]으로 망명하면서 나라 밖에서 구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나라 잃은 슬픔을 국사연구를 통하여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등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博達)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 1914년 잠시 홍콩에 머물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는데, 이때 《안중근전》과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지었다.


19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또한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918년에는 러시아에서 한인교포 잡지 《한족공보(韓族公報)》 발행에 관여하던 중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하였다. 이에 그는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기 시작, 이듬해 이를 간행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임정은 독립운동의 이념·방법·지연·인맥 등의 파벌 암투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임정의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그 해 8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해 11월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당부하는 유촉(遺囑)을 남기고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정의 국장으로 상하이 정안길로(靜安吉路)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정부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는 그의 독립활동과 많은 저술들을 통해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정신주의적·관념적 역사관에 머물긴 했지만 역사 연구와 서술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교보문고



3. 목차


서언 

제1부 
1. 지리의 큰 줄기 2. 대원군의 섭정 3. 경복궁의 중건 4. 서원 철폐 
5. 조세제도 개혁 6. 프랑스군을 크게 이김 7. 미국 함대를 물리침 

제2부 
1. 임오군란 2. 갑신정변 3. 갑오동학란 4. 갑오개혁 5. 일본인이 국모를 시해함 

제3부 
1. 국호를 대한으로 고치고 제국이 됨 2. 이토가 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함 
3. 줄 잇는 애국 선열들의 순국 4. 중국지사 반종례가 바다에 투신자살함 
5.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 6. 군대해산과 참령 박승환의 순국 
7.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 살해함 8.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함 

결론 / 『韓國痛史』 原文 차례 / 참고문헌

출처 : 본문 중에서


4. 책 속으로


한국‘통사(通史)’는 ‘통사(痛史)’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가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한국통사』 서언 

지난 1910년 국망을 맞이하면서 좌절했던 우리 선조들은 자신들의 동시대와 세계를 어떻게 보았을까? 오늘날의 시점에서 국망(國亡)의 시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아카넷출판사)의 두 번째 책 『한국통사』 역해서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 초점을 맞춰 원저자 박은식의 원문을 새롭게 번역하고 일반 독자들이 알기 쉽게 해설한 책이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개인과 개인이 상호 동등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지난 역사에서 찾으려는 지금 『한국통사』는 이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만하다. 

태백광노 박은식이 한국통사를 쓴 까닭은? 

『한국통사』는 고종 즉위년(1863)부터 1911년 105인 사건까지 서술한 역사책으로 구성은 1책 3편 114장이고 한문으로 쓰였다. 이 책은 박은식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책으로 1914년에 완성되었으며 이듬해인 1915년에 상해 대동편역국에서 출간되었다. 『한국통사』에서 보이는 역사 서술 체제는 전통적인 역사서술체제인 기전체나 편년체를 따르지 않고 각 사건·사실들의 내용을 설명할뿐더러 그 원인과 결과를 서술함으로써 인과 관계에 입각한 근대적 역사서술 방법론을 적용한 것이 눈길을 끈다. 
박은식은 국혼(國魂)을 잃지 않는다면 나라를 유지할 수 있으며 또 설령 나라를 잃을지라도 언젠가 국혼에 기대어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가로서 국혼이라 할 국사를 남겨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면 궁극적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이 책에서 한국 국망(國亡)의 시기, 근대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결국 박은식이 아픈 역사, 쓰라린 역사란 뜻의 통사(痛史)를 기록한 뜻은 자신이 목격한 원통하고 분함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 언제나 당대를 비추어 ‘오래된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거울’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 ‘통(痛)’은 곧 분노이다!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정경을 보니 더욱 서글퍼져 어찌 견딜 수가 있겠는가. 고국을 바라보니 구름과 연기가 서린 듯 아득하기만 하구나.” “무릇 우리 형제는 서로 생각하고 늘 잊지 말며 형체와 정신을 전멸시키지 말 것을 구구히 바란다.” “무릇 세상의 강하고 사나운 자는 날로 약한 나라를 침략하여 삼키고 나약한 종족을 도태시키는 것을 능사로 삼으니……”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백두산이 있는 나라의 사람으로 망국을 슬퍼하여 미쳐서 돌아다니는 노예’란 뜻의 ‘태백광노(太白狂奴)’라는 필명으로 출간했다. ‘한국 근대사를 근대 역사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민족주체적 입장으로 정리한 근대 민족사학의 이정표적 저작이라고 평가받는 『한국통사』는 현실을 단 한 치도 외면하지 않은 나머지 미쳐버린 ‘광노’의 처지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박은식이 기록한 국망 이후의 역사, 작금의 우리 현실도 통사(痛史)로 기록되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는 나라 잃은 부끄러움과 원통함으로 광노가 되어버린 역사가에게서 정당한 분노를 배운다. 
이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동기는 바로 ‘분노’라며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타인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고 발 딛고 있는 현실에 분노하라며 설파하는 93세의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의 메시지와도 맥이 통한다. 

백년 후에 되돌아보는 최초의 한국 근대사 
일반 근대사, 일제침략사, 독립운동사로서의 기록
 

『한국통사』는 왕과 신하 위주로 서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한국 근대사를 민인 대중에 중심을 두고 사건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채택한 데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민족사학의 초석을 닦은 셈이다. 
우리 국망의 시기 일제의 침략과 한국인의 근대국가 건설 운동을 인과관계에 입각하여 정면으로 서술했다는 점은 이후 한국인들이 일제의 폭압과 교묘한 동화정책에 굴하지 않고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박은식의 실천적 역사인식과 근대적 역사서술이 지니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주체의 형성과 발전은 자기 문화의 자주적 건설 경험과 외부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준다. 

책의 구성 및 특징 

-. 이 역해서는 『한국통사』의 주요 내용을 해설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본문 자체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며 해설은 되도록이면 박은식이 살았던 당대의 시점(時點)에 맞추었다. 그리고 당대의 정황을 풍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대표적인 야사라 할 수 있는 정교의 『대한계년사』, 황현의 『매천야록』 등과 대조하기도 하였다. 다만 저자가 사실을 잘못 알고 있거나 해석이 전혀 다른 경우에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참조하여 해설하였다. 
-. 『한국통사』의 전문을 번역하지 않고 역사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국내 정치적 주요 사건을 위주로 번역하였다. 이는 역해서의 분량을 고려한 가운데 해설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조약이라든가 경제 침탈 등을 보여주는 내용은 생략되었다. 번역한 원문은 각 장의 뒤에 실어 대조하게 하였고 아울러 전체 원문의 차례를 부록에 실어 번역에서 생략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원문의 편제를 따르지 않고 발췌 내용을 중심으로 3부로 갈랐다. 
-. 이전 번역본의 충실한 번역을 바탕으로 하되 드러나는 오류나 오역은 바로잡았다. 
-. 내용의 분량은 적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 부 처음에 해당 소시기의 역사를 개관하는 글을 붙였다. 이는 일부 원문 내용의 생략에 따른 공백을 메워주리라 본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 서울대규장각학국한연구원·대우재단 공동기획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는 우리의 고전을 학계의 분야별 전문가가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새롭게 번역하고 해설한 결과물이다. 고전에 대한 개설적인 해설서나 흥미 위주의 문화·생활사에 치우치지 않고 한국학 등 전문 연구자들이 고전 텍스트를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풀이하되 최대한 대중의 언어로 담아내어 학계와 일반 독자들의 지식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시리즈는 고전 텍스트에 전문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집적하고 지식 교양의 대중적 확산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한국학 연구의 중심기관인 규장각과 기초학문 분야의 연구 진작을 위하여 각종 학술연구 활동을 지원해 온 대우재단의 공동 기획이다. 

출처 :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