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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추천도서(22.3~23.2)/2023-02

2월의 추천도서 (3635) 나의 공부는 여기서 멈추지만

1. 책소개

 

치열하고 엄정했던 역사가가
전쟁과 근대 그리고 동서양 문명을 성찰하다

치열하고 성실했던 노학자의 유저遺著


이 책은 지난 2월 세상을 떠난 이영석 전 광주대학교 명예교수의 마지막 저술이다. “일류대학 출신도 아닌 국내파 학자로 지방대학에서만 30년간 강의한”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성실했던 역사가였다. 1994년 《산업혁명과 노동정책》을 시작으로 28년간 25권(단독ㆍ공동 저서와 역서 포함)의 책을 출간한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국내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는 척박한 환경에서 거의 매년 한 권의 책을 냈으니 이는 여느 사학자가 쉬 따르지 못할 성취라 할 수 있다.
책은 그가 말년에 쓴 12편의 글을 묶은 것이다. 여기에는 연구의 지평을 넓히려 한 지은이의 노력과 고심이 오롯이 담겨 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대한 애정
1부 ‘전쟁과 수난’에서는 전쟁과 국가폭력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의해 망각된 민초의 삶을 살피는 지은이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강제동원된 라인연방 출신 야코브 발터의 연대기를 분석한 글이 그런 예다. 이 진귀한 기록에서 지은이는 혁명의 열광, 해방, 자유 같은 추상적 슬로건이 아니라 신앙에 의지한 채 생존을 위해 전력을 다한 ‘개인’을 보여준다. 1819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던 군중을 향해 기병대들이 칼을 휘둘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피털루 학살 사건’, 영국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인도인 수백 명이 살해된 1919년 인도 암리자르시 ‘잘리안왈라 공원 학살 사건’은 영국 민주주의 흑역사를 보여주는 대목. 지은이는 이를 5ㆍ18광주민중항쟁과 더불어 민중의 저항으로 읽는다.

국가사를 넘어 … 지적 탐구의 확장
지은이는 오랫동안 영국사를 천착해왔다. 영국의 특정 시대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분야로 시야를 넓히겠느냐는 일종의 ‘지적 결벽증’ 탓이 컸다. 한데 이 유저의 2부 ‘근대의 성취, 근대의 한계’에서는 국가사를 넘어 지역사 또는 문명사로까지 눈길을 돌린다. 산업혁명이 곧 화석 문명의 문을 열어젖혔음을 지적하면서 “이는 자연의 수탈 필요성을 증대시켰고 …… 생존선 이상의 물질적 번영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인간은 생존만이 아니라 욕구 충족과 즐거움과 소비 자체를 위한 소비”, 곧 무한한 낭비의 시대가 열린 것이라 갈파한 글이 그렇다. 그런가 하면 콜레라와 황열병의 만연으로 전염병 예방을 위한 국제공조가 이뤄지는 과정을 살핀 ‘전염병과 국제공조의 탄생’, 리처드 에번스의 역저 《힘의 추구》를 분석적으로 읽어낸 ‘19세기 유럽사를 보는 시각’에서도 저자의 이 같은 학문적 분투가 느껴진다.

서로의 눈에 비친 동서양의 근대
3부 ‘동양과 서양’은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역사가 아놀드 토인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이순탁 연희전문 교수의 여행기를 축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서양이 상대를 보는 시선을 비교, 분석한다. 여기서 일본의 봉건 지배층이 근대화를 위해 2,000년 이상 지켜온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은 데 대해 감탄하는 영국 지식인들을 만날 수 있다. 1933년 당시로선 드문 세계 일주 여행에 나선 이순탁 교수가 거리 곳곳에 마르크스나 엥겔스 초상이 걸려 있고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파시즘에서 공산주의까지 극단적 정치 이데올로기를 설파해도 정치인은 물론 평범한 시민 모두 개의치 않는 풍경에 대한 감탄도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 “영국인들이 이렇게 사상에 관대한 것은 자신의 것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때문이라는 그의 지적에 공감하게 된다. 황화론黃禍論의 뿌리를 캔 ‘다시 돌아보는 황화론’ 역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백조의 노래’라는 표현이 있다. 백조는 죽기 직전에 노래한다는 북유럽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작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은 시가나 가곡 등을 가리킨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지은이의 ‘백조의 노래’다. 뜻하지 않게 일찍 세상을 떠난, 우직할 정도로 견실하고도 엄정했던 역사학자의 마지막 글들이어서다. 그러기에 사학도들에겐 학문적 등대가 될 만하고, 역사 덕후들에겐 문명사의 숨은 결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출처: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이영석 (1953~2022)

서양사학자(영국사).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역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대학교 클레어홀과 울프슨 칼리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한국서양사학회와 도시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평생 영국 사회사, 노동사, 생활사, 사학사 분야의 많은 논문과 저서를 쓰고, 옮긴 그는 2022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구 논문 앤솔로지를 엮은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저술이다. 평소 “일류대학 출신도 아니고 국내파 학자로 지방 중소대학의 교양과목 선생으로 30년을 지내다 퇴직했다”고 겸양을 보였지만 누구보다 성실한 학문적 자세로 젊은 서양사학자들의 롤 모델로 꼽히곤 했다.

단독 저서
1994, 《산업혁명과 노동정책》(한울)
1999, 《다시 돌아본 자본의 시대》(소나무)
2003,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푸른역사)
2006, 《사회사의 유혹》(전2권, 푸른역사)
2009, 《영국 제국의 초상》(푸른역사)
2012, 《공장의 역사》(푸른역사)
2014, 《지식인과 사회》(아카넷)
2015,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가들》(푸른역사)
2016, 《영국사 깊이 읽기》(푸른역사)
2017, 《삶으로서의 역사》(아카넷)
2019, 《제국의 기억, 제국의 초상》(아카넷)
2020, 《잠시 멈춘 세계 앞에서》(푸른역사)

역서
1999, 《역사학을 위한 변론》(소나무)
2003, 《옥스퍼드 유럽 현대사》(공역, 한울)
2004, 《자연과학을 모르는 역사가는 왜 근대를 말할 수 없는가》(문화디자인)
2007,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한길사)
2020, 《잉글랜드의 확장》(나남)
2020,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푸른역사)

공저
2000,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푸른역사)
2003, 《서양의 가족과 성》(당대)
2011, 《도시는 역사다》(서해문집)
2016, 《서양사 속 빈곤과 빈민》(책과함께)
2021, 《신데카메론》(복있는 사람들)
2021, 《역사상의 제국들》(네오)

 

출처:본문중에서

 

3. 목차

 

추도사 1
책머리에

제1부 전쟁과 수난
1장 한 평범한 인물의 기록에 나타난 나폴레옹 전쟁
2장 전쟁과 동원, 그리고 제국
3장 공습과 피난의 사회사-제2차 세계대전기 영국인의 경험
4장 국가폭력과 저항-피털루, 잘리안왈라 공원, 그리고 광주

제2부 근대의 성취, 근대의 한계
5장 인간과 자연, 그리고 역사
6장 19세기 유럽사를 보는 시각
7장 전염병과 국제공조의 탄생
8장 노년과 노령연금-담론, 의회 조사, 입법

제3부 동양과 서양
9장 여행기를 통해 본 일본과 일본인
10장 다시 돌아보는 황화론
11장 아놀드 토인비가 바라본 동아시아의 근대도시
12장 영국과 미국-한 식민지 조선 지식인의 인상

책을 마치며
참고문헌

찾아보기
추도사 2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야코브 발터는 나폴레옹 군대에 세 차례 징집당했다. 당시 뷔르템베르크는 프랑스의 라인연방Rheinbund에 속해 있어 사실상 프랑스의 위성국가였다. …… 발터의 회고록을 보면, 1806년, 1809년 그리고 러시아 원정기인 1812년에 프랑스 군대에 소집되어 참전했다(16쪽).
아침이 되자 병사들 각자 모스크바 ‘시민권Bürgerrecht’의 상징[약탈물]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거나, 두꺼운 모직물로 된 코트로 감았다. 병사들은 빵을 가득 담은 붉은 색 모로코 가죽 주머니를 옆구리에 매달았다. …… 곧 닥쳐올 불행을 견뎌내기 위해 설탕이며 이른바 모스크바 차까지 가져갔다(32쪽).

발터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나폴레옹의 독일 지배에 대한 분노나 민족적 자긍심을 전혀 기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정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는 것에 열광하지도 않는다. 그의 회고 전체를 흐르는 분위기는 전쟁의 승패에 무관심하고 러시아 군대와 전투할 때도 적개심을 표명하기보다는 어떻게 살아남아 귀환할 것인가의 문제가 유일한 관심사일 뿐이다(35쪽).

나폴레옹은 오만하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가 동원한 수십만 명의 병사들은 유럽 지배라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 그에게 병사 개개인은 무지하고 하찮은 존재였겠지만, 발터와 같은 독일인 젊은 병사 또한 나폴레옹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전력을 다한 개인이었다(38쪽).

그 기록은 국가, 조국, 헌신, 위인 숭배, 타자에 대한 적대감 등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독일적 정체성도, 나폴레옹에 대한 열광도 보이지 않는다. 발터가 아래로부터 바라보는 시선은 나폴레옹과 그의 지휘관들이 일반 사병에 대해 갖고 있을 냉랭함 비슷한 감정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퇴각할 때 언뜻 보았던 나폴레옹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경외감이나 숭배가 아니라 오히려 연민의 감정을 드러낼 정도다. …… 그가 의지했던 것은 혁명의 열광, 해방, 자유 같은 추상적 슬로건이 아니라 유년시절부터 익숙했던 신앙이었다(39쪽).

1897년 식민지회의는 당시 식민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의 제안으로 열렸다. 체임벌린은 실리, 찰스 딜크, 제임스 프로드 등 일단의 지식인들이 주장한 ‘대영국론’의 옹호자였다. 대영국론은 브리튼과 해외 백인정착지 모두를 포괄하는 연방제 체제를 수립해, 미국, 독일, 러시아 등 새롭게 발전하는 다른 경쟁국들의 위협에 대처할 것을 촉구하는 보수적 정치담론이었다. 체임벌린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거의 모든 백인자치령과 정착지 대표들이 참석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1897년 회의는 비록 원칙론 수준이기는 하지만, 대영국론의 이상을 결의안에 표명하기도 했다(44쪽).

캐나다 총리 윌프리드 로리에는 …… “나는 캐나다가 영국의 모든 전쟁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반면, 또 영국의 어떤 전쟁에도 동참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펴지도 않습니다.” 로리에가 ‘도미니언’을 선호한 까닭은 무엇인가. 회의에서는 ‘도미니언’의 의미에 관해 몇몇 참석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대체로 그 말은 제국 내의 자치국가self-governing community를 의미한다거나, 또는 ‘책임 정부를 갖춘possessing responsible government’ 국가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자치령 국가를 이전의 식민지적 시각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의도를 반영한다(47쪽).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에 새롭게 등장한 자치령 정부와 이를 주도한 정치가들은 대체로 영국에 관해 이중적 태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영국적 전통, 영국과 협조 및 의존관계를 존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치령 국가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1907년 식민지회의와 1911년 제국회의에서 논의된 중요한 의제였던 외교를 둘러싼 논의 또한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49쪽).

시민적 자유와 대의제 헌정, 이 두 키워드야말로 실제로 자치령 주민과 영국을 이어주는 정신적 유대감의 원천이었다. 친영국 감정은 그들이 인종적·문화적 전통을 공유한다는 인식뿐 아니라, 선진적이고 자랑스러운 정치제도를 공유한다는 자긍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자긍심이 영국을 향하는 구심력보다는 영국과 좀 더 대등하고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원심력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59쪽).

자치령 정부들의 견해를 주도한 인물은 캐나다 총리 로버트 보든과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윌리엄 휴즈였다. 그들은 ‘대영국론’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전쟁에 기여한 만큼 외교정책 문제에서 식민지적 지위라고 하는 불평등한 상태를 벗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1911년 이후 총리 직을 맡아온 보든은 이미 전쟁 초기부터 자치령 군대의 도움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영국 정부의 태도에 분통을 터뜨렸다(63쪽).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자치령 국가들은 이전 제국 질서의 변화를 요구했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자치령은 전후에 파리강화회의나 국제연맹에도 독자적인 주권국가로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당시 영국 정부로서는 국제기구나 회의에 자치령 국가들의 참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자치령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특정한 ‘제국의 원리’를 고안했다. 영국 왕이 “영연방 개별국가들을 결속하는 초석”이라는 원리였다(64쪽).

1940년 ‘대공습’ 이후 몇 개월간 런던 시민들의 삶에 관한 증거는 부유층의 호화생활, 노동자들의 나태, 범죄 증가 현상을 보여준다. 뒹케르크 철수 이후 정부는 계급 갈등, 범죄, 사기 저하, 국민건강 악화 등의 난제에 시달렸다. …… 국민적 단합과 평등주의라는 허상 아래 실제로는 동료애도 계급 내에 국한되었고 계급을 넘어선 연대는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계급 간의 적대감은 오히려 증폭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어린이 지방 소개 조치에서도 사회적 연대보다는 노동계급 출신 도시 어린이와 농촌 중간계급 가정 간의 갈등과 충돌이 만연했으며 시골 중간계급 가정 상당수는 소개 조치에 관련된 의무를 회피하려고 했다(72쪽).

피털루 학살은 1819년 8월 16일 맨체스터 시내 성 베드로 광장에 정치개혁을 요구하기 위해 운집한 수만 명의 군중을 향해 기마병 부대가 난입, 이들을 해산하면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차티스트 운동기까지 영국 사회는 급진 정치개혁운동과 노동운동으로 진통을 겪었다. ‘피털루 학살’은 당시 지배세력의 폭압과 압제의 유력한 상징으로 운동의 동력을 제공했다(100쪽).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던 귀환병사 존 리스는 그 무렵 올덤에서 직조공으로 일했는데 이 집회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당했다. 그 후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기에 이른다. 죽기 직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워털루에서는 치고 박고 서로 싸웠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살인이었다.”(106쪽)

다이어 대령은 13일 바이사키 축제에 대비해 인근 용병부대 병력을 동원, 경계를 강화했다. 그는 1857년 용병 반란을 머리에 떠올리기도 했다. 3월부터 시행하게 된 롤라트법(집회시위금지법)에 의거, 집회 금지를 공포했다. …… 참가자 다수는 영국인들이 경계하고 두려워할 만한 강력한 비폭력 독립운동 시위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일부 참가자들이 체포된 두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했을 뿐이다(112쪽).

그는 네 출입구를 포위하고 있던 인도 병사들에게 10분간 일제 사격 명령을 내린다. …… 공식적인 통계로도 그 순간에 379명이 사살되었고, 1,100명이 부상했다. 그마저도 이 수치는 다이어 자신이 영국 의회에 보고한 내용일 뿐이다. 그 당시 인도 국민회의 추계로는 사망 1,000명, 부상 1,500명에 이른다(112쪽).

영국에서도 물론 ‘근면혁명’의 물결이 일었다. 그러나 영국이 이러한 길로 나가기에는 인구가 풍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석탄에서 얻은 증기력으로 기계를 돌리는 새로운 방식을 개척했다. 그 후 화석연료에서 동력을 얻는 이 방식이 근대 산업문명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135쪽).

18세기에 런던을 비롯해 주요 도시의 인구가 급증한다. 원래 도심에도 전통적인 ‘파크(울타리 친 수렵지)’가 있었을 것이다. 런던 도심의 하이드파크는 왕실 수렵지였다. 왕실뿐만 아니라 대도시 안에도 이전부터 내려온 귀족들의 울타리 친 수렵지들이 있었다. 이들 일부가 시민에게 개방된 ‘공원’으로 변모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141쪽).

기계와 공장으로 상징되는 산업문명은 자연의 수탈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수많은 자원과 공업원료의 개발로 자연이 훼손되었고, 생존선 이상의 물질적 번영의 길로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이제 인간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소비가 아니라, 욕구 충족과 즐거움과 소비 그 자체를 위한 ‘소비’에 길들여졌다. 무한한 낭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147쪽).

19세기 후반 유럽과 아메리카 각국은 전염병의 확산에 대처하기 위해 국제적인 공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국제위생회의International Sanitary Conference’가 거의 정기적으로 개최되었고, 전염병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이 같은 일련의 국제공조에 힘입어 1907년 ‘국제공중위생국Office International d’Hygiène Publique’이 창설되었다(180쪽).

19세기 말 파나마 지협 운하 공사가 재개되면서 미국은 파나마운하를 통한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1902년 최초로 열린 범미위생회의Pan American Sanitary Conference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이 또한 당시의 범미운동Pan Americanism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국가를 포괄해 수송, 상업, 금융, 공중보건 등의 분야에서 광범위한 표준화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다(188쪽).

영국에서 노령연금을 처음 언급한 이는 블랙클리William L. Blackley(1830~1902)다. 그는 더블린의 트리니티칼리지에서 수학한 후 오랫동안 영국국교회 목사로 일했다. 1878년 그는 노령연금에 관한 글을 《19세기》지에 기고했는데, …… 후일 급진파와 사회주의자들의 화두가 된 연금 문제가 실제로 보수적인 국교회 성직자의 기고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영국 사회정책사의 아이러니다(208쪽).

만일 보편적인 노령연금을 국가가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그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가 야만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노령자와 약한 사람을 죽일 것이 아니라면, 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그들을 대해야 한다(219쪽).

당시 일본의 변화를 주시하던 영국 지식인들은 특히 봉건 지배층이 자기 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1872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이끄는 외교사절단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더 타임스》지 사설 또한 이 점을 강조했다. 이 사설은 일본의 변화를 한마디로 ‘서구화 실험’으로 규정한다. 그 실험은 “유럽의 교육과 법률, 그리고 관습을 모든 국민에게 도입하는 과정”이다. 이전에 그들이 2,000년 이상 지켜온 사회원리를 버리고 지배계급이 그들의 지위를 스스로 양도하는 중대한 ‘사회혁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238쪽).

영국에서 중국인의 해외 이주에 대한 경계론을 처음 설파한 저술은 피어슨의 《국민생활과 특질: 한 예견》(1893)이다. ……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체류 경험을 토대로 피어슨은 백인이 출산율 저하와 국가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점차 정체 국면에 접어드는 반면, 유색인종은 높은 출산율과 활발한 해외 이민, 그리고 적극적인 생산활동에 힘입어 미래에 더욱더 강력해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260쪽).

19세기 중국인 해외 이주자는 대부분 계약노동자 신분이었다. 계약노동자를 뜻하는 쿨리는 힌디어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19세기 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카리브해 연안국, 북미와 중남미로 이주한 아시아계 일용노동자를 가리켰다. 이들의 송출은 주로 영제국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졌다. 최초의 중국인 대상의 쿨리무역은 1807년에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난징조약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276쪽).

1933년 4월 연희전문학교 경제학 교수 이순탁은 안식년을 맞아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났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의 인상과 여정을 글로 써서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귀국 후에 그는 이 여행기를 모아 《최근 세계 일주기》(1934)를 펴냈는데, 이 책이야말로 그 제목에 걸맞게 한국인 최초의 세계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309쪽).

이순탁은 런던 하이드파크에 들러 각종 사상을 전파하는 강연자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공산주의와 반공주의, 파시즘과 반파시즘, 기독교 복음주의와 반기독교주의가 공원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 영국인들이 이렇게 사상에 관대한 것은 자신의 것이 가장 좋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순탁은 영국인들의 자유가 바로 자신감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부러워한다.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초상화가 거리 이곳저곳에 걸려 있고 사람들이 파시즘에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를 설파해도 정치인이나 평범한 시민이나 모두가 이에 개의치 않는다(326쪽).

 

출처:본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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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는 여기서 멈추지만:역사가 이영석이 남긴 서양사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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