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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추천도서(22.3~23.2)/2022-12

12월의 추천도서 (3567)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1. 책소개

 

 

고립감과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위해
재난 시대의 고전을 읽다

요양원에 고립된 이들을 돌보던 고전학자가 길어낸
사회적 재난을 넘어설 용기와 희망의 이야기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는 전염병을 다룬 문학 장르에 대한 헌사이자,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전하는 슬픔의 노래면서 질병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기쁨의 노래다.”
- 《랜싯Lancet》(의학전문저널)

코로나19가 퍼져나간 지 어느새 수년이 지났다. 조금씩 일상이 회복되고 있다지만 여전히 확진자는 발생하고, 코로나로 숨진 수많은 목숨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바이러스가 누그러졌다고 생각할 때 연이어 발생한 참사는 지금이 바로 ‘사회적 재난의 시대’임을 실감케 한다. 팬데믹, 전쟁, 홍수, 다중인파 안전사고 등 끊임없이 발생하는 재난에 ‘사회적’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이유는, 이와 같은 재난의 예방과 대응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몫이고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사회적 재난 시대의 고전 읽기》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2020년 초, 요양원에 고립된 이들을 위해 봉사에 나선 한 고전학자의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 로버트 자레츠키는 거대한 규모의 재난 때문에 감금되다시피 한 사람들의 고립감과 두려움을 실감했고, 사람들이 계속 목숨을 잃는 상황에 무력감을 느꼈다. 정부 당국이 부주의할 때마다 희생되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저자는 《페스트》의 한 구절을 빌어 이렇게 이야기한다.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건강, 진실성, 순수 같은 것은 인간이 의지를 갖고 잠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16쪽)라고.

저자는 팬데믹이 안긴 불안과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재난의 시대에 쓰인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미셸 드 몽테뉴의 《수상록》, 대니얼 디포의 《전염병 연대기》,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전염병과 전쟁이 온 세상을 휩쓸던 시대에 태어났다. 재난 시대의 고전이 들려준 이야기는 한결같다. 재난은 인간에게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알려주며, 부조리 앞에서 우리가 갖춰야 할 것은 바로 ‘주의력’이라고. 우리는 고전을 읽음으로써 타인의 삶이 품은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재난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을 보다 섬세하게 헤아릴 수 있다고. 우리가 나와 타인의 삶에 어떻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는 재난이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뒤흔드는 지금 꼭 필요한 책이다.

 

출처: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로버츠 자레츠키

 

로버트 자레츠키 Robert Zaretsky | 휴스턴대학교 근대고전언어학과 교수. 주로 유럽의 문화사와 지성사를 연구하며, 실존주의와 테러리즘, 계몽주의의 역사, 파리와 베를린의 근현대사 등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님의 전쟁》(1994), 《황소와 수탉: 폴코 드 바롱셀리와 카마르그의 발명》(2004), 《알베르 카뮈: 인생의 원리》(2010), 《보스웰의 계몽주의》(2015), 《예카테리나와 디드로: 여제, 철학자, 계몽주의의 운명》(2019), 《전복적 시몬 베유: 다섯 가지 주제로 보는 삶》(2021) 등이 있으며, 국내에 소개된 저서로 《카뮈, 침묵하지 않는 삶》(필로소픽, 2015)이 있다. 현재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의 전기를 쓰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도서 리뷰》 역사 부문 편집자를 역임했으며,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보스턴글로브》, 《휴스턴크로니클》, 《포린어페어스》, 《슬레이트》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작가의 말

나는 앞선 시대를 살아간 작가들의 이야기가 팬데믹이라는 현상의 밀도와 그것이 세계와 우리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헤아리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같은 이유로 나는 이들의 글을 길잡이 삼아 나와 타인의 삶이 품은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요양원에서 경험한 일을 글로 남기고자 했다. 몽테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책의 재료”는 내가 읽고 일한 경험이다. 지금부터 다룰 작가들은 세상을, 나아가 나 자신을 더 잘 알도록 도와주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마찬가지로 세상과 자신을 더 잘 이해하려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란다.

출처:본문중에서

 

3. 목차

 

들어가며

1장. 투키디데스와 아테네 대역병
-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질병 앞에 두려움 없이 서는 용기

2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안토니누스 역병
- 오염에 맞서 내면의 왕국을 다스리는 지혜

3장. 미셸 드 몽테뉴와 가래톳 페스트
- 죽음이 도사리는 세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글쓰기

4장. 대니얼 디포와 런던 대역병
- 통계의 빈틈에 놓인 인간을 세심하게 포착하는 이야기

5장. 알베르 카뮈와 갈색 페스트
- 때가 되었을 때 바르게 행동할 줄 아는 윤리

후기 《최후의 인간》부터 《최초의 인간》까지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대다수 아테네인이 침묵하는 신들을 보며 절망에 빠졌을 테지만, 투키디데스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이 투키디데스를 객관적·과학적 역사서술의 아버지로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투키디데스를 존경했던 니체는 한 발 더 나아가 엄격하고 냉철한 투키디데스가 초월적인 존재에게 조금도 의지하지 않았다며 찬사를 보낸다. 그는 《우상의 황혼》에서 투키디데스가 자신에게 “즐거움이자 애호의 대상, 플라톤주의로부터의 치유책”이며, 어떤 고대 작가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니체가 보는 투키디데스의 위대함은 명료함과 용기로 요약할 수 있다. “현실 앞에서의 용기가 결국 투키디데스와 플라톤 같은 유형을 구별한다. 플라톤은 현실 앞에서 비겁했기에 이상으로 도망친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을 통제했기에 사물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는다.”
- 〈1장. 투키디데스와 아테네 대역병〉, 43~44쪽

 

폴란드 시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는 이 일화를 소재로 〈왜 고전인가〉라는 시를 썼다. 헤르베르트는 이 일화가 “지도자들의 일장 연설과 / 전투와 포위 작전과 역병과 / 은밀한 외교적 노력으로 이뤄진 빽빽한 그물” 한가운데 “숲속의 핀 하나처럼”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어 시인은 자신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투키디데스의 태도가 현대의 지도자들과 극명하게 대조된다고 지적한다. “가장 최근 전쟁의 장군들은 /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 후대 앞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 자신의 영웅적 행위와 결백을 치켜세운다” 비관적 어조로 가득한 이 시는 처음 영어로 출간된 1968년만큼이나 오늘날의 세계와도 잘 어울린다.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희망과 거리를 둘지언정 절망에 빠질 여지는 더더욱 남기지 않는다. 아테네는 무너졌어도 지성과 진실성, 시민의식, 열린 사고 같은 미덕은 살아남았다. 이런 미덕은 앞으로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빛을 잃곤 하겠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1장. 투키디데스와 아테네 대역병〉, 63쪽

마르쿠스는 스토아 철학이 제시하는 세계를 불안하게 보기보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정신이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이라면, 우리를 이성적 존재로 만드는 이성도 모두에게 보편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려주는 이성도 보편적이다. 그렇다면 법도 모두에게 보편적이다.”(4권 4장) 스토아 철학자는 내면의 이성을 활용해 자신의 행동을 신적 이성의 의지에 맞게 조정하기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토아 철학자가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한다는 점이다. 에픽테토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택의 의미를 강조했다. “네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 너는 무엇보다도 인간이다. 그 말인즉슨,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지배적인 행위는 선택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 선택에 종속되지만, 선택 자체는 노예가 되거나 복종하는 일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스토아 철학자는 마르쿠스가 말한 ‘지배적 이성’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가장 온전히 실현한다.
- 〈2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안토니누스 역병〉, 93~94쪽

요컨대 마르쿠스는 죽음을 “위에서 내려다보는”(9권 30장) 경지에 이르려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눈부시게 빛나는 우주에서 가장 희미하게 깜박이는 별 같은 일로 치부하며 멀찌감치 거리를 둠으로써 죽음을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런 만큼 《명상록》에는 죽음을 다룬 구절이 많다. 마르쿠스는 에픽테토스의 말을 인용해 자신을 “시신을 짊어진 영혼”(4권 41장)에 빗대며, 죽음을 “감각적 반응, 충동의 횡포, 두서없는 생각, 육신에 대한 봉사에서 벗어나는 일”(6권 28장)로 묘사한다. 또, 그는 과거로 눈을 돌려 황제나 현자 들처럼 생전에 경외와 칭송을 받던 이들도 이제는 모두 죽고 없으며, 자신도 머지않아 그들의 뒤를 따르리라는 점을 언급한다.
- 〈2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안토니누스 역병〉, 103쪽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몽테뉴에게 답은 에세이를 쓰는 것이다. 그는 정신이 발을 디딜 “굳건한 발판”을 찾을 수 있다면 에세이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이라면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세상도, 몽테뉴 자신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만큼 같은 상태를 길게 유지할 수 없다. (…) 그러므로 에세이를 쓰는 행위는 닻을 내리고 배를 묶을 곳을 찾는 시도라기보다는, 현재가 과거로 바뀌는 순간을 (그리고 그 순간의 자신을) 포착하려는 끝없는 시도다. 흔히 작가들이 의식의 흐름을 담아내려 시도한 것은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그 용어를 처음 제안한 이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몽테뉴는 그보다 500여 년 앞서 대담하게 선언했다. “나는 다른 어떤 주제보다 나 자신을 탐구한다. 이것이 나의 형이상학이며, 이것이 나의 물리학이다.” 몽테뉴는 그가 창안하다시피 한 문학적 뗏목, 즉 에세이 형식에 올라타고 내면의 감각이라는 급류로 뛰어든 최초의 인물이었다.
- 〈3장. 미셸 드 몽테뉴와 가래톳 페스트〉, 131~132쪽

에세이의 마지막 장에는 몽테뉴가 남긴 가장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자기 존재를 충실히 누릴 줄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완벽하며 신성하기까지 한 일이다. 우리는 자신을 쓰는 법을 모르기에 다른 조건을 찾아 헤매며, 내면이 어떤지를 모르기에 자기 밖으로 나선다. 그러나 죽마를 타고 높이 올라선다 한들 제 발로 걸어야 하는 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왕좌에 오르더라도 엉덩이를 깔고 앉아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이 에세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몽테뉴는 “노년이 좀 더 부드럽게 대접받기를” 바란다고 말한 다음,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아폴론에게 바치는 송시의 한 구절로 글을 마친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아폴론 신에게 건강과 더불어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고 / 리라를 벗 삼아 살게 해주소서”라고 간청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늘 이 대목을 사족이라 생각했다. 호라티우스가 그리스 신에게 바치는 송시보다 왕좌에서도 엉덩이를 깔고 앉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글을 마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 와 나이를 먹고 보니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겠다. 온전한 정신과 음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 〈3장. 미셸 드 몽테뉴와 가래톳 페스트〉, 152~153쪽

디포는 특히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뒷받침하는 데 통계를 활용하는 경향을 경계했다. 《몸과 마음을 위한 적절한 페스트 대비》에 나오는 여러 대화 중 하나에서 한 남자는 동생에게 대역병 당시 집에 격리당하는 일을 어떻게든 피하려던 사람들이 조사원에게 유족의 사망 원인을 거짓 보고하도록 뇌물을 줬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생은 형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숫자가 뻔히 다 나오는데 속일 틈이 어디 있겠어요.” 동생은 여기에 한술 더 떠 이렇게 말한다. “나는 권위 있는 곳에서 공표한 내용은 항상 진짜라고 믿어요.” 비국교도 디포처럼 기존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이라야만 이런 상투적인 말에 거북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디포는 바로 이 같은 사고방식에 반대하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 숫자와 더불어 이야기라는 형식을 활용한다.
- 〈4장. 대니얼 디포와 런던 대역병〉, 176쪽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페스트를 겪고 난 이후에도 이러한 ‘용액’ 같은 본성을 런던 시민의 피에서 몰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1665년 봄, 페스트가 도시를 덮칠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충격으로 종교적·정치적 차이 따위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겨울이 오고 역병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H. F.는 “모든 것이 과거의 길을 따라 제자리로 돌아갔다”며 탄식한다. 도시를 떠난 사람들이 앞다투어 돌아와 가게를 열고 사회 활동을 재개한 것은 물론(사망통계표에서 알 수 있듯, 이런 활동이 너무 일찍 재개되는 바람에 사망자 수가 다시 급증하기도 했다), “그전까지 나라의 평화를 가로막던 갈등과 논쟁, 중상과 비난의 정신”도 함께 되살아났다. H. F.가 말한 “그 당시의 공포”에 대한 기억은 구덩이에 묻힌 수많은 시신보다 더 빨리 썩어 없어지는 듯했다. H. F.는 찰스 2세를 비롯한 왕실과 그의 신하들이 페스트에 대비하는 데 실패했으며 페스트가 퍼진 이후에도 백성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단언했는데, 그들 역시 피난을 떠났던 옥스퍼드에서 런던으로 돌아와 다시 요란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졌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권모술수를 쓰는 정당들과 서로에 대한 혐오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종파들의 모습도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런던 시민들은 “금세 모든 걱정을 훌훌 털어버렸고”, 자신들이 극복한 페스트를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 〈4장. 대니얼 디포와 런던 대역병〉, 199~200쪽

《페스트》의 모든 등장인물은 머독이 말한 과업과 씨름한다. 랑베르는 처음에 자기연민과 원망의 유혹에 눈이 멀어 오랑을 벗어나려 했고, 오랑의 관료들은 헛된 희망에 젖어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리외조차도 동료 의사가 재촉할 때까지 잠시나마 페스트라는 진단을 내리기를 망설인다. 반면 그랑에게서는 이 같은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으며, 리외는 그런 그랑의 태도에 나름의 평가를 내리려 한다. 리외는 그랑을 비롯한 자원보건대의 행동을 “용기”나 “영웅적 행위”라는 말로 과장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기에 “2+2=4라고 가르치는 교사”에게 보내는 칭찬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2+2=4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조차도)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할 때가 있다. 그러나 리외는 그런 상황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2+2가 정말로 4가 맞는지 아닌지 아는 것”이라 말한다. 객관적 진실을 인정하는(눈으로 보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이 뒤따라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이 그와 동시에 펼쳐진다. ‘보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라는 케케묵은 격언은 이렇게 일순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 〈5장. 알베르 카뮈와 갈색 페스트〉, 229쪽

청진기를 두른 시시포스 리외는 오랑이 잊으려는 것을 기억한다. 도시는 언제 돌발할지 모르는 병원체와 이데올로기의 위협에서 영원토록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처럼 엄중한 스토아적 교훈에 감명받은 비평가들은 리외가 타루의 죽음 직후에 떠올린 생각을 간과하곤 한다. 리외는 이제 끝나버린 우정과 페스트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문한다. 그는 “페스트와 삶의 대결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앎과 기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말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아마 타루는 그것이 대결에서 이기는 일이라 말했을 것이다.”
- 〈5장. 알베르 카뮈와 갈색 페스트〉, 247쪽

카뮈는 짧은 생애 동안 그 사랑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했으며, 더 오래 살았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 일은 누구도 해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뮈는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 사랑은 멀리 있는 듯 보여도 늘 곁에 있음을 알았다. 사고로 죽기 얼마 전, 카뮈는 어머니의 사랑이 침묵 속에서도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고 썼다. 이렇듯 사랑이 침묵 속에서도 늘 그의 곁을 지키지 않았다면, 이 특별한 최초의 인간은 최후의 인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언젠가 카뮈는 부조리는 왕이지만 “사랑이 우리를 부조리에서 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항상 사실이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는 결코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 〈후기. 《최후의 인간》부터 《최초의 인간》까지〉, 265쪽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1. 재난 앞에서 왜 고전을 읽는가
- 요양원 자원봉사를 하며 깨달은 고전의 힘

저자는 코로나19가 미국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 2020년 초 텍사스주의 한 요양원에서 자원봉사에 나섰다. 식당이 폐쇄되면서 치매나 각종 질환으로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 요양원에 격리된 채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단호한 대처 덕분에 입소자들은 무사히 지낼 수 있었지만, 그해 10월 주지사가 가족의 요양원 방문을 허용하면서 각지의 요양원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자신이 직접 밥을 먹여주던 사람들까지 목숨을 잃자, 저자는 큰 충격과 자괴감에 빠졌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정부 당국의 부주의 속에서 목숨을 잃었던 상황을 지켜본 저자는 주의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했다. 어떻게 우리는 고립 속에서 자신과 타인을 보다 잘 살피고 돌볼 수 있을까.

며칠에서 몇 주로, 몇 주에서 몇 달로 늘어난 자원봉사 기간 동안 저자는 재난 시대의 고전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상황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려 애썼다. 그는 요양원에 고립된 이들을 움츠러들게 하는 사망자 통계와 TV 속에서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늘어놓는 정치인들을 지켜보며, 거짓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투키디데스의 용기를 떠올렸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죽음만을 갈망하는 입소자를 마주하면서는 죽는 날까지 이성에 따랐을 때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자각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혜를 생각했다. 평범한 치매 환자라고 생각했던 한 노인이 부르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에서는 “노년이 좀 더 부드럽게 대접받기를 바라며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고 리라를 벗 삼아 살게 해달라”(152~153쪽)는 몽테뉴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처럼 고전은 단순히 옛날에 쓰인 책이 아니라 저자 자신을 비롯해 고립된 이들 모두를 세심하게 살피는 길잡이가 되었다. 저자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부터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까지 다양한 시대의 고전 읽기를 통해, 거듭되는 사회적 재난에서 다시금 우리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길어낸다.

2.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재난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 투키디데스의 용기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혜

이 책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로 시작한다. 저자는 수많은 고전 중에서 왜 이 책을 먼저 이야기했을까.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운명을 바꾼 아테네 대역병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해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 전역에 퍼진 역병은 기원전 430년 아테네를 말 그대로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기원전 426년까지 아테네는 수차례에 걸친 역병으로 전체 인구의 1/3인 약 10만 명이 죽었고, 그때까지 국가를 이끌었던 걸출한 지도자는 물론 중무장 보병과 같은 핵심 전력까지 잃었다. 아이러니는 전쟁을 대비해 주민을 도시에 모아놓은 바람에 전염병이 창궐하기 아주 좋은 조건이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재난의 대비가 또 다른 재난의 조건이 된 현실 앞에서 아테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저항력을 떨어뜨려 질병의 손쉬운 먹잇감으로”(34쪽) 만드는 절망은 공동체 전체에 전염되면서 “신들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이 만든 법”(36쪽)을 무너뜨렸다.

저자는 이토록 가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했다는 점에서 투키디데스의 탁월함을 발견한다. 투키디데스는 철학자 니체에게서 “자신을 통제했기에 사물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는다”(44쪽)는 상찬을 받을 만큼 재난 앞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재난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예언을 편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가차 없이 비판한 그의 용기는, 가짜 뉴스를 퍼트리며 뻔뻔하게 말을 바꾸는 지금의 정치인들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사회 전체를 오염시키는 재난은 시대를 넘어 반복된다. 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위에 오른 지 몇 년 되지 않아 안토니누스 역병이라는 대재난을 마주해야 했다. 전염병으로 인해 로마는 공동묘지에서 “다른 사람의 묫자리를 빼앗거나 가족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형편이 못 되는 빈민이 구걸하는 등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83쪽). 역병 때문에 산업이 붕괴되면서 세수가 부족해지자 황제는 황실의 물건을 경매로 팔 정도로 내몰렸다. 적게는 150만 명부터 많게는 2,500만 명까지 죽었을 것으로 추산되는 대역병 앞에서 황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을 위해 쓴 일기, 《명상록》을 통해 그의 생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재위 초에는 제국 한가운데를 휩쓴 역병 속에서, 말년에는 변경을 위협하는 이민족과의 전쟁 속에서 쓰인 《명상록》에는 오염으로부터 내면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 황제의 지혜가 담겨 있다. 《명상록》에서 역병과 전쟁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마음의 타락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오염으로 변질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역병”(101쪽)이라는 구절에서, 진짜 재난은 질병 자체가 아니라 질병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거짓된 인식에서 벗어나 충분히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재난에 대처하기는커녕 더 큰 재난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3. 죽음이 도사리는 세계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 미셸 드 몽테뉴의 자기 탐구와 대니얼 디포의 현실 비판

비극의 무대는 16세기 프랑스와 17세기 영국으로 옮겨간다. 1585년 6월 프랑스의 보르도에 가래톳 페스트가 퍼졌다. 그해 말 도시의 절반에 해당하는 14,000~1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에게 《수상록(에세)》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미셸 드 몽테뉴는 당시 보르도 시장이었지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다음 시장에게 업무를 막 넘긴 참이었다. 역병이 도시를 휩쓸어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 몽테뉴는 자신의 성과 재산을 버린 채 가족을 데리고 멀리 달아났다. 그렇지만 몽테뉴와 그의 가족은 가는 곳마다 잠재적 보균자 취급을 받았고 혹시나 자신들이 정말로 감염된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떨었다. 힘겹게 도피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6개월 후에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의 그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고 역병에서 도피한 이야기를 자신에 대한 탐구인 《수상록》에 남겼다.

몽테뉴가 자신을 탐구하기로 결심한 것은 불확실한 현실 때문이다. 정신이 발을 굳건하게 디딜 발판이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현상학적 혼란에 삼켜지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다 위에서 섬처럼 가만히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코르크처럼 휩쓸리는 처지에 놓인다”(132쪽).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몽테뉴가 의지한 것은 글쓰기였다. 가래톳 페스트가 보르도를 휩쓸 때도 가혹한 종교 전쟁이 프랑스 전역을 광기로 물들일 때도 몽테뉴는 글을 쓰며 죽음을 숙고하고 삶을 존중하고자 했다. 그는 “오늘날의 병폐 중에서도 가장 야만스러운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경멸하는 일”(151쪽)이라고 선언하면서 “이 생애를 자연스럽게 잘 사는 법”(152쪽)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 존재에 충실한 것이 고통에 함몰된 것보다 언제나 더 낫기 때문이다.

한편 1665년 런던 대역병과 1722년 마르세유 페스트는 파국을 반복하는 인간의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페스트가 잠잠해진 연말까지 도시 인구 45만 명 중 10만 명 이상이 사망한 런던 대역병은 영국 국민 모두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런데 1722년 마르세유에서 페스트가 퍼지고 영국에서 가혹한 새 방역법이 선포되는 와중에, 방역을 명분으로 무자비한 정책을 집행한 프랑스 정부의 행태는 많은 이를 충격에 빠뜨렸다. 마르세유 인근의 툴롱에도 페스트가 퍼지자, 프랑스 정부는 군대로 도시를 포위했고 그곳에서 빠져나가려는 주민을 학살했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인 대니얼 디포는 인명을 구하겠다는 정부가 정작 인명을 살상하는 부조리를 접하며 《전염병 연대기》를 썼다. 사망자 통계라는 숫자에 가려진, 죽음의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다.

디포는 H. F.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 삼아 페스트가 퍼진 런던 한복판을 배회한다. “평소 같으면 인산인해였을 거리에는 이제 적막이 가득했고, 눈에 보이는 사람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179쪽)로 런던은 죽음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가산을 챙겨 간신히 전염병에서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 빈민은 도시에 남아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디포를 분노케 한 것은 격리자들에 대한 정부의 가혹하고 무감한 통제였다. 시 당국이 ‘이상이 없는 자’와 ‘병자’를 구별하지 않았기에, 아직 확진되지 않은 사람까지 확진자와 같이 산다는 이유로 전염병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디포는 죽음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가족의 시신이 다른 이들의 시신에 섞여 구덩이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통곡하는 남자, 페스트에 걸린 가족을 있는 힘껏 부양하는 가장,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도 가짜 약을 파는 사기꾼들에, 역병이 물러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사치를 누리는 위정자들까지, 역병은 인간의 따뜻함과 냉담함을 모두 드러냈다. 디포의 글은 타인의 삶에 무감한 방역 정책은 항상 참혹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4. 우리는 때가 되었을 때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가
- 세계의 부조리와 알베르 카뮈의 사랑

우리는 의학이 전염병을 다루기에는 힘에 부쳤던 고대나 중세와 달리,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생물학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무감하게 만드는 사상 또한 전염병이라고 진단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파시즘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전염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군대가 적군을 잘 막아낼 것이라는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는 산산조각났다. 순식간에 독일군에 점령당한 프랑스는 우울과 절망이 가득했다. 세계 전체가 죽음의 도시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카뮈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투키디데스나 디포가 묘사했던 시대와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세상은 이전의 재난 시대와 마찬가지로 부조리로 가득했던 것이다.

카뮈의 대표작인 《페스트》는 그가 살았던 알제리의 도시 오랑을 무대로 전염병이 창궐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소설은 어느 날 수천 마리의 쥐가 이곳저곳에서 기어 나와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곧 시민들은 그들보다 먼저 죽어간 쥐들처럼 목숨을 잃는다. 이에 의사 베르나르 리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자원보건대를 조직해 방역에 나선다. 이처럼 병에 맞서 최선을 다해 싸우는 사람도 있지만, 전염병의 창궐을 내심 기뻐하며 죽어가는 이들을 조소하는 사람도 있다. 이때 저항자와 부역자는 무엇이 올바른지를 아는가 모르는가로 나뉜다. 소설의 주인공 리외는 “2+2가 정말로 4가 맞는지 아닌지 아는 것”(229쪽)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객관적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이 뒤따라오기”(229쪽) 때문이다. 페스트는 결국 물러가지만, 주인공은 전염병이 언젠가 돌아올 것이고 비극도 반복될 것임을 예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페스트와 삶의 대결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앎과 기억”(247쪽)뿐이지만, 때가 되었을 때 바르게 행동할 줄 아는 윤리를 되새기는 한 우리는 다시금 재난에서 일어설 것임을 배울 수 있다.

저자는 책을 마치기에 앞서 인간을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재난으로 밀어넣는 소설 한 편을 더 소개한다. 바로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가 1826년에 쓴 《최후의 인간》이다. 셸리는 가족과 친구 들을 모두 잃고 우울감과 절망감 속에서 쓴 이 책을 통해 전염병으로 인류가 소멸한 2092년의 미래를 묘사했다. 재난 앞에서 이성은 정념의 노예가 되고,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정치인들은 제 한 몸 살겠다고 도망치다 결국 목숨을 잃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잃은 주인공이 폐허를 방황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소설의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은 재난 앞에 선 사람들의 일반적인 감정을 반영한다.

그러나 저자는 카뮈의 미완성 유고인 《최초의 인간》에서 카뮈를 침묵 속에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사랑을 읽어낸다. 우리는 이토록 황폐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가지만 사랑이 있다면 견딜 수 있다. 카뮈는 말한다. “부조리는 왕이지만 사랑이 우리를 부조리에서 구한다”고(265쪽). 사랑은 타인에 대한 깊은 주의력의 다른 이름이며, 사랑을 할 수 있는 한 ‘최후의 인간’인 우리는 ‘최초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저자의 메시지는 재난이 반복되는 지금 이 순간 더없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출처: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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