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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추천 도서 (1677) 파한집 - 이인로



1. 책 소개


3권 1책. 목판본. 이 책은 저자가 69세로 사망하기 직전에 지은 것이다.


이인로의 사후 40년 뒤인 1260년(원종 1) 3월에 아들 세황(世黃)이 수집하고 안렴사(按廉使) 대원왕공(大原王公)의 후원으로 초간되었다. 현재 당시의 초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1659년(효종 10)에 엄정구(嚴鼎耉)가 경주부윤 재임 중에 조속(趙涑)의 가장비본(家藏秘本)을 가지고 각판(刻板)한 중간본이 남아 있다.


≪파한집≫의 권 상은 시평(詩評) 12조(條), 서필담(書筆談) 1조, 수필 7조, 시화(詩話) 1조, 문담(文談) 2조, 기행문 1조, 권 중은 시평 13조, 수필 13조, 권하는 시평 15조, 수필 18조 등의 도합 83조가 수록되어 있다.


≪파한집≫의 ‘파한(破閑)’이란 글자 그대로 한가함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그는 세상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산림에 은둔하며 온전한 한가로움을 얻음은 장기·바둑 두는 일보다 낫기에 ‘파한’이라고 이름 붙인다고 하였다. 그러나 ≪파한집≫은 단순한 심심 파적을 위한 저술이 아니다.


≪파한집≫의 내용은 시화·일화·기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파한집≫의 태반은 시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파한집≫은 우리 나라 시화집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우리 고전시학(古典詩學)의 귀중한 연구자료이다.


이인로는 우리 나라 명유(名儒)들의 시작품들이 기록으로 남겨지지 못한 채로 인멸되어 가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시를 삶의 정수로서 사랑하고 음미하면서 많은 시화를 ≪파한집≫에 수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다른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시편들이 상당수 실려 있다.


그리고 시학의 근본 문제에서 작시법(作詩法) 혹은 구체적인 작품평에 이르기까지 두루 제시되어 있다. 동시에 수필적인 잡록도 여러 항목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파한집≫은 역사자료로써 이용가치가 있다.


이인로가 ≪파한집≫에서 피력한 그의 문학사상은 다음과 같다. ① 시란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어떤 상황에서 창작되며, 또 어떠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그는 빈부와 귀천으로 높낮이를 정할 수 없는 것은 문장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문학 행위의 주체에 대하여 신분적 차등과 구속을 배제한다. 그는 더 나아가서 문장의 가치를 부귀의 그 것보다 더 높이 두었다. 이인로는 문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이 생산해 낸 문학의 내용과 풍격(고상하고 아름다운 면모나 모습)은 자체적인 구속성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는 마음에서 근원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인로는 신준(神駿)과 임춘(林椿)의 작품 성격이 그 표현상에 한스러움과 구슬픔이 깔려 있음은 그들의 현실상황(신분)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 것이다.


② 이인로는 시에 담겨야 할 내용은 충의지절(忠義之節)에 근거하여 형상화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두보(杜甫)의 옥질(玉質 : 미적인 요소와 忠諫의 요소)이 잘 혼합된 경지를 예로 들고 있다.


③ 이인로는 작시론(作詩論)에서는 어의(語義)가 제대로 갖추어진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것은 문학(시)이 언어의 구조물 내지는 예술이라는 투철한 인식을 한 것이다.


따라서 어묘(語妙 ; 말을 솜씨 있게 다루는 것)를 우선적으로 중시하여 다듬은 흔적이 없는 상태인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경지를 권장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의경(意境 ; 뜻의 경계)에서 의묘(意妙 ; 뜻의 묘미)를 추구하였다.


이인로를 이러한 면에서 보면 종래의 단순한 용사론자(用事論者 ; 한시를 지을 때에 옛날의 뛰어난 글들에서 표현을 이끌어 쓰는 일을 주장하는 사람)로만 파악하여온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 밖에 특기할 만한 사항은 왕명과 기년문자(紀年文字 ; 일정한 기원으로부터 계산한 햇수를 표시한 문자)가 27조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것은 그의 사학에 대한 안목을 알아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파한집≫은 1911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활자본으로 출판을 하였다. 1964년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용재총화 慵齋叢話≫와 합본하고 역주하여 간행하였다. 1973년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는 다른 몇 가지 문집과 함께 ≪고려명현집 高麗名賢集≫ 2권으로 영인하고 간행하였다.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도서에 있다.



2. 저자


이인로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화엄승통(華嚴僧統 ; 화엄종의 우두머리)인 요일(寥一)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그 뒤에 환속하였다.


이인로는 25세 때에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하였다.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이인로는 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 : 과거의 시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열전(列傳)에서 이인로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하였다.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인로의 문학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의구묘(語意俱妙 ; 말과 뜻이 함께 묘함을 갖추어야 한다)’를 강조한 작시론(作詩論)이라 하겠다. 또한 어묘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 ;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움)의 자연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 ; 뜻의 묘함)를 위해서는 신의(新意 ; 새로운 뜻)를 중시하였다.


이인로의 저술로는 『은대집(銀臺集)』·『쌍명재집』·『파한집』 등이 있다고 하나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