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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1월의 추천 도서 (1415) 브란덴부르크 비망록 - 양창석


 

 

 


 

 

 

1. 책소개

 

이 책에는 동독 주민들의 탈출과 시민 혁명을 시작으로 화폐 통합, 정치적 통합, 국제 사회의 합의를 거쳐 마침내 분단 45년 만에 극적인 통일을 이루어내는 숨 가쁜 과정이 현장 사진 자료와 함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과정에 소금처럼 녹아 있는 독일 정치 지도자들의 눈부신 활약과 외교적 수완을 저자가 전하는 그들의 육성 증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특히 콜 수상을 비롯한 서독 정치 엘리트들이 어떻게 동독의 급박한 상황에 대처했으며,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전승국들을 설득하여 1년여 만에 통일 대업을 달성하게 되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2. 저자소개

 

양창석

저자 : 양창석
저자 양창석 은 경북대 경영학과 졸업, 런던정경대(LSE) 석사, 단국대 정치학 박사.

1982년 통일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후 주독일 대사관, 주미국 대사관 통일관으로 근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뉴욕) 북한정책 과장, 통일부 대변인, 사회문화교류 본부장, 남북출입국사무소장, 정세분석 국장을 거쳐 현재 남북회담본부 상근회담대표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동·서독 화폐통합』(주독일 대사관)이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3. 목차

 

프롤로그
1장 시민 혁명으로 동독이 무너지다
2장 서독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나?
3장 화폐통합으로 사실상 통일이 되다
4장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지다
5장 대외적 걸림돌을 제거하다
6장 독일 통일의 교훈: 우리는 어떻게 통일을 해야 하나?
에필로그: 동.서독 관계의 발전
부록: 독일 통일 과정 연표
참고 문헌

 

출처 - 알라딘 제공

 

 

 

4.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저자가 독일 통일 직후인 1992년 4월에서 1994년 12월까지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통일연구관으로 근무하면서, 그리고 1995년 3월부터 6개월 동안 독일통일연구단 단장으로 파견되어 있는 동안 만나게 된 독일 통일 주역들과의 면담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중심 자료로 하고 있다. 저자가 만난 독일 고위 관료들은 동방정책의 설계자인 에곤 바 수상실 장관, 프리스니츠 내독관계성 차관, 도비예 내독관계성 차관보, 슈테른 수상실 국장 등으로서, 모두 독일 통일 과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다. 이외에도 저자는 월요 데모를 통해 시민 혁명을 촉발한 라이프치히 시의 부시장을 비롯해 전 연방하원 의장, 사민당 사무국장, 외무성 과장, 전 베를린 시장, 연방은행 국장, 대학 교수 등 정치?경제?학계를 망라한 다방면의 독일인들을 만났다.
이 책에는 동독 주민들의 탈출과 시민 혁명을 시작으로 화폐 통합, 정치적 통합, 국제 사회의 합의를 거쳐 마침내 분단 45년 만에 극적인 통일을 이루어내는 숨 가쁜 과정이 현장 사진 자료와 함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과정에 소금처럼 녹아 있는 독일 정치 지도자들의 눈부신 활약과 외교적 수완을 저자가 전하는 그들의 육성 증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특히 콜 수상을 비롯한 서독 정치 엘리트들이 어떻게 동독의 급박한 상황에 대처했으며,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전승국들을 설득하여 1년여 만에 통일 대업을 달성하게 되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책은 독일 통일 과정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 자신의 통일 과업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한 저자의 충언이 담겨 있다. 저자는 독일 통일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의 통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7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민족 자결권을 명문화하자, 둘째, 우리의 경제력을 키우자, 셋째, 국제적으로 친분과 신뢰를 쌓아 나가자, 넷째,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다섯째,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여섯째, 북한을 더 깊이 알자, 일곱째, 각 분야별 통일 준비를 서두르자 등이 그것이다. 이 교훈들이 값진 이유는 28년 동안 통일부에서 근무한 저자의 북한 및 통일 문제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지혜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기회의 창이 열릴 때 이 책이 통일의 종착지로 안내하는 멋진 네비게이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는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정계, 재계, 학계 여러 분야의 통일 및 대북 관계 종사자들을 비롯해 통일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이 필독해야 할 훌륭한 지침서이자 안내서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5. 책속으로

 

“통일 후 20년 동안을 돌이켜 볼 때 많은 비판과 회의가 있을 수 있으나 통일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긍정적 측면이 극명하게 돋보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독일 연방정부가 2010년 9월말 통일 20년을 결산한 『독일통일백서 2010』에서 내린 결론이다. 동독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자유’를 안겨준 역사는 그 어떤 실수나 비난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최고의 절대적 가치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동독 주민들이 시민 혁명과 민주적 절차를 통해 얻어 낸 것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다.
--- p.6

나는 독일 통일 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통일의 주역들을 많이 만났다. 동방정책의 설계자인 에곤 바 수상실 장관, 프리스니츠 내독관계성 차관, 도비예 내독관계성 차관보, 슈테른 수상실 국장 등 고위 관료들은 독일 통일의 값진 경험을 소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통일에 대한 통찰력도 제공해 주었다. 월요 데모의 진원지인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동독 주민들이 콜 수상에게 통일을 요구했던 드레스덴 성모교회 등 통일의 현장을 찾아가 ‘시민 혁명’의 열기를 느껴보기도 했다.
--- p.7

1989년 5월 2일은 독일 통일로 가는 첫 관문이 열린 날이다. 동독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역에 설치된 철조망을 철거한 것이다. 이날 철조망 제거 행사에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이 직접 참석했다. 비록 극히 제한된 지역의 철조망을 제거했고 여전히 국경수비대가 감시를 하고 있었지만 그 반향은 너무나 컸다. 국경선의 철조망을 제거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본 동독 주민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바늘구멍 같은 기회가 왔다. 우리도 가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비록 국경을 완전히 개방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국경이 무장해제될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하기에 충분했다.
--- p.14

동독 주민들이 대거 탈출한 그 순간까지도 호네커를 비롯한 동독 공산당 지도부는 동독의 안정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폴란드를 비롯한 이웃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을 거부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1989년 6월 동독 정부는 천안문 광장 시위에 대한 중국의 무력 진압을 “질서와 안전의 회복”이라고 공식 옹호했다. 이와는 달리 동독 주민들 사이에는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추진되고 있던 개혁에 대한 갈망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동독 주민 탈출 사태에 대한 동독 지도부의 반응은 이러한 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 결국 호네커 정권은 동독이 직면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필요한 개혁을 거부함으로써 동독의 붕괴를 가속화했다고 볼 수 있다.
--- p.18-20

서독 정부는 동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주민에 대한 유일대표권을 견지해 왔기 때문에 동독 탈출민들을 서독시민으로 빨리 정착시키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서독 정부와 여당은 “동독의 고유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던 정책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라고 평가하고, 만약 사민당의 주장대로 동독 국적을 인정했더라면 1989년 탈출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동베를린 등을 떠나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 주민 수가 급증함에 따라 서독 연방정부는 이들을 위한 긴급 수용 및 정착 대책을 수립했다.
--- p.29

라이프치히 시 슈나이더 데터스 국장은 필자와 한 인터뷰에서 “동독 주민들은 1985년 소련의 개혁 과정을 보고 공산주의가 변혁을 이뤄 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정치적 변혁을 거부한 동독 지도부의 정치적 무능이 동독 주민들을 실망시켰다. 호네커를 크렌츠로 교체한 것은 동독 주민들의 희망을 꺾어 버렸다”라고 말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여행의 자유에 대해서 크렌츠 정권이 우유부단했던 것이 정권의 붕괴를 가속화했다고 볼 수 있다.
--- p.48-49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만 해도 콜 수상을 비롯한 서독 정치 지도자들은 독일 통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장벽 개방 환영대회 연설에서 콜 수상은 “급진적인 구호나 주장을 따르지 말고 국제정치와 유럽, 독일의 상황 등을 전체적으로 고려하여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11월 20일 라이프치히, 동베를린, 드레스덴, 할레 등에서 벌인 시위에서 동독 주민들은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통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즈음에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그의 보좌관들이 독일 통일의 가능성과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텔칙 수상 보좌관은 콜 수상에게 독일 통일 문제에 대해 이제는 밀실에서 논의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보고했다. 티어제 전 하원의장은 라이프치히 시위대의 구호로 인해 서독 정부의 정책 목표가 동독의 민주화와 개혁에서 통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 p.67-68

프리스니츠 전 내독성 차관은, 드레스덴 주민들이 콜 수상에게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고 외친 것이 화폐통합을 서둘러 추진하게 된 기폭제였다고 말했다. 11월 20일 라이프치히 월요 데모에서 통일을 요구하기 시작함으로써, 그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던 동독 혁명이 통일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던 것이다. 통일이야말로 서독인이 누리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특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인식이 동독 주민들에게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1989년 12월 19일 모드로 동독 수상과 정상회담을 위해 콜 수상이 드레스덴 벨레뷔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역사적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 만여 명의 드레스덴 시민들이 콜 수상에게 ‘독일, 독일’, ‘헬무트, 헬무트’, ‘우리는 한 민족이다’ 등의 구호를 열창하면서 신속한 통일을 요구하였다. 1990년 2월 12일 월요 데모에서는 “(서독)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거기로(마르크에게로) 간다”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따라서 서독 정부로서는 ‘동독 주민이 마르크를 찾아 서독으로 오거나 아니면 마르크가 동독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2월 3일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모드로 수상은 콜 수상에게 서독마르크를 유일한 지불 수단으로 동독에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 p.76-77

1988년 3.8%, 1989년 4.5% GNP 성장, 1988년 재정 적자는 GNP 대비 0%, 자본수지는 1988년 1,275억 마르크, 1989년 1,356억 마르크 흑자, 1988년 추가 일자리 창출 120만 명, 이것이 통일을 앞둔 서독의 경제 성적표였다. 서독 경제는 통일을 위해 유리한 재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내독성 차관이었던 프리스니츠는 “서독의 경제력과 재정 상태가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통일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이러한 A+ 성적표를 가진 서독 정부는 1990년 2월초 동독과의 화폐·경제 통합조약을 통해 조기 통일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앞서 재무성과 연립 정당, 각료회의 등에서 통일 추진 방안에 대한 논의를 가졌다.
--- p.83

서독의 정책결정자들은 베를린 장벽 개방과 동독 경제의 붕괴를 초래한 핵심 원인을 동독 이주민의 증가로 보았기 때문에 동독 주민들에게 동독에 머물러 있도록 유인책을 제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콜 수상은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주를 억제하는 데 정책의 우선권을 두었기 때문에 임금과 예금에 대해 기본적으로 l:1 비율로 교환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 서독 정부가 어떤 교환비율을 선택했더라도 두 가지 대안 모두 심각한 정책적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어서, 경제 논리에 입각한 낮은 교환율과, 소득균형화와 이주 억제 등을 위한 높은 교환율 간의 선택이 정치적 결정사항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 p.110, 111

콜 수상과 부시 대통령은 좋은 인간적 관계와 신뢰를 바탕으로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수시로 전화나 서신을 통해 의견을 교환했다. 또한 중요한 회담을 전후하여 외상 등 고위 관리들을 파견하여 사전에 의견을 조율하거나 사후에 회담 결과를 공유했다. 이러한 협조 관계는 상호 간에 인간적 친근감과 신뢰를 제고해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관련국 엘리트들 간에 협조가 아주 잘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특히 미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부시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스코우크로프트는 “그(부시)의 리더십과 개인적 외교가 독일 통일의 핵심요소였다”라고 강조했다. 도비예 전내독성 차관보는“통일로 향하는 과정에 있어서 우방에 대해 솔직해야 하며 감추는 것이 없어야 한다. 서독은 우리의 우방들이 독일의 통일에 대해 우려하지 않도록 꾸준히 노력하고 신뢰를 쌓아 왔다”라고 강조했다.
--- p.238-239

 

출처 - YES 2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