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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추천도서(1794)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 정창권


1. 책 소개


16세기의 조선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시기 사람들은 가족관계에서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았고 친족관계에서 본손과 외손을 구별하지 않았다. 혼속과 결혼생활도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고 그대로 눌러사는 장가와 처가살이 혹은 남귀여가와 친정생활이 널리 유행하였다. 그에 따라 아들과 딸의 차별없이 균분상속이 이루어졌고 제사도 자녀들이 서로 돌려가며 지내는 윤회봉사가 관행이었다. 이처럼 16세기는 여성사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시대임이 분명한데 이 시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의식을 지니고 있었을까?

출처 : 교보문고



2. 저자



지은이 정창권 
고려대학교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현 고려대학교 강사 및 한국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 고전문학 전공자로서 여성을 비롯한 주변부 인물들의 문학과 생활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한국여성문학회 연구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국문 장편소설과 여성」, 「완월회맹연의 여성주의적 상상력」, 「장편 여성소설의 글쓰기 방식」 등이 있고, 저서로는 『한국 고전 여성소설의 재발견』(2002)이 있다.

출처 : 교보문고


3. 목차



이른 새벽에 출근하여 임금께 학문을 가르치다/17 
봄철 녹봉을 받던 날에/29 
마의를 불러 말을 치료하다/39 
노비는 양반의 수족이라/45 
중부 장통방으로 이사하다/55 
부인이 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다/65 
비로소 서울 살림을 주관하다/73 
자기 조상의 제사는 자기가 지내야/81 
. 
. 
초야로 무러나 한가롭게 지내다/229 
며느리 김씨가 본가로 돌아가다/237 
큰손자 장가가는 날/247 
생일을 맞아 집안잔치를 열다/257 
후일담/265

출처 : 본문 중에서


4. 출판사 서평


1. 기획의도 
16세기 양반 가정의 일상생활사!!!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또 하나의 조선이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 이전 16세기까지의 조선이다. 16세기 이전의 조선은 성리학적 체계가 사회 전체적으로 완벽하지 않았고, 특히 남존여비 사상이 확정되지 않아서 고려시대의 생활문화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관련 자료의 대부분은 17세기 이후의 자료들이고, 그 이전의 자료는 정치적 자료인 왕조실록에 주로 의존하는 바라서, 일반적으로 남존여비가 우리 고유의 전통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최근 생활사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16세기의 조선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조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는 사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이 책은 당시의 생활문화를 알 수 있는 핵심 자료로 언급되는 <미암일기>를 연구한 저작이다. 미암 유희춘이 십여 년에 걸쳐 거의 매일 작성한 한문일기인 <미암일기>에 나타난 일상생활의 편린들을 방대한 문헌 연구에 의존하여 추적한 결과 우리는 당시의 생활상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되살려낸 소중한 저작을 갖게 되었다. 

2. 생활사의 중요성 
한국사 연구가 정치사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는 비판은 이미 새롭지 않고, 생활사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막상 생활사 연구 성과는 그리 흔하지 않은데, 학자들은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 구체적인 일상 생활에 대한 기초자료 연구 부족을 지적한다. 개인일기나 시문 등 이른바 일차적인 사료로 취급되지 못하던 문헌들에 대한 세밀한 연구는 정치사의 틀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역사적 풍경을 밝혀내고 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성리학에 기초한 정부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그 정치 이념이 언제 어떻게 각 지방의 생활문화로 정착되었는지는 다만 왕조사를 통해서는 도저히 포착되지 않는 지점들이다.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는 정치사를 넘어서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을 표방하는 생활사 연구의 중요한 시도로 평가할 만 하다. 몇 시에 출근을 했는지, 용변을 본 후에는 어떻게 처리를 하였는지 등 시시콜콜한 생활 이야기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주고 받는 대화와 그들이 맺는 사회관계 등 문화적 함의가 깊은 내용까지 당시의 생활상이 세밀하게 펼쳐진다. 

3. [미암일기]란 
미암 유희춘이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 여에 걸쳐 한문으로 작성한 개인 일기. 유희춘은 1513년 전라도 해남에서 태어나 홍문관 수찬, 무장 현감,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선조 임금이 즉위한 뒤 학문이 해박하다는 이유로 귀양이 풀려 홍문관에 복직하였다. 저서로는 <속몽구>, <육서부록> 등이 있으며, 기대승, 송손, 이황, 이이, 허준, 정철 등과 교유하였다. 자호 미암은 고향 해남의 진산 금강산에 있는 미암바위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의 일기는 조선시대 개인 일기 중 가장 방대하며, 일찍부터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선조실록 편찬에도 중요한 사료로 채택되었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조선총독부에서 활자로 인간한 바 있으며, 담양향토문화연구회에서 한글로 번역한 바 있다. 현재 보물 260호로 지정되어 종가인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에 소장되어 있고, 모현관 뒷편에는 미암의 사당이 있다. 

4. 픽션과 논픽션의 상생(相生)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는 <미암일기>의 번역에 그친 작품이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미암일기를 토대로 당시의 생활사를 복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암일기> 중에서 크게 여섯 가지 테마를 뽑아내었다. 관직생활, 살림살이, 나들이, 재산증식, 부부갈등, 노후생활이 그것인데, 일기 중에서 각 테마를 가장 잘 드러내 줄 수 있는 장면을 추출하고, 기존의 방대한 연구를 종합하여 해당 장면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전제한 후, 마치 소설처럼 해당 장면을 복원하였다. 예를 들어서 말이 병이 나서 마의(馬醫)를 불러 침을 놓는 장면이 있는데, 먼저 말이 당시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그 쓰임새와, 말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서 설명을 한 후, 마의가 등장하는 장면을 서술하였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 생생함에 있어서 소설의 문법을 부분적으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픽션과 논픽션의 장점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생활사라는 새로운 방향의 역사 연구를 위한 새로운 서술방식인 것이다. 

5. 내용 구성 
- 관직생활 
미암이 함경도 종성에서 충청도 은진으로 유배지를 옮겨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새 임금이 즉위함에 따라 그가 경연관으로 차출되었다는 조서(詔書)가 내려오는데, 이에 따라 미암은 급히 서울 소건청동에 살 집을 마련하여 혼자서 서울로 올라온다. 임금은 그를 정5품 홍문관 교리에 제수하여 경연에서 학문을 강론하도록 하는데, 이로써 그는 20여 년 간의 기나긴 귀양살이를 마치고 1567년 11월 55세의 나이로 다시 홍문관으로 출근하기 시작한다. 1장에서 5장까지는 미암이 다시 홍문관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1567년 11월부터 부인이 딸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1568년 9월까지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된 주변 일상을 재현한 것이다. 예컨대 미암의 출퇴근 모습과 경연 모습, 가계의 수입·지출과 경제활동, 관직생활의 필수적인 수단인 노비와 말, 기타 가족을 맞기 위한 새집 마련 등등을 설명과 이야기로 재현하였다. 

- 살림살이 
1568년 9월 덕봉은 딸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담양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창평 수국리에 새집을 짓고 있었다. 말년에 손자들을 데리고 한가롭게 노후생활을 보낼 집이었다. 하지만 미암이 혼자 사는 것을 못내 걱정하던 그녀는 '부인이 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갈 뜻이 있다'라는 일기의 내용처럼 벌써부터 서울로 올라오고자 하였다. 6장에서 11장까지는 이처럼 덕봉이 서울로 올라와 각종 살림을 주관하는 모습을 차례대로 재현한 것이다. 예컨대 집안의 살림 점검과 제사를 지내는 모습, 미암의 의복수발과 서책 정리,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앓게 되는 질병까지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 나들이 
덕봉은 살림을 주관하면서 틈나는 대로 여가생활을 즐겼다. 매달 한두 번씩은 부녀모임을 가졌고, 나라에 특별한 구경거리가 있으면 매번 나가서 구경하였다. 또 평생 시와 문, 편지 등을 써서 『덕봉집』이란 문집을 남기기도 하였다. 12장에서 15장까지는 1569년 여름부터 미암이 휴가를 얻어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는 동년 9월까지의 일기를 토대로 덕봉의 여가 생활을 보여주고자 한다. 아울러 당시 사람들의 꿈에 대한 관심, 여성들의 화장법과 옷차림, 관리들의 전별풍습 등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 재산증식 
마침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온 미암은 본격적으로 재산 증식을 도모한다. 먼저 처가인 담양으로 내려가 인근 지방관에게 식물을 부탁하거나 군사를 요청하고, 본가인 해남으로 내려가 첩과 함께 생활하며 47칸짜리 새집을 건축한다. 16장에서 20장까지는 이처럼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오는 1569년 9월부터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1569년 12월까지의 일기를 토대로 미암의 재산증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부부갈등 
1569년 12월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어 서울로 올라간 미암은 1570년 내내 혼자서 지루한 관직생활을 계속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덕봉이 보고 싶고, 또 해남의 건축일도 마저 끝내고 싶어서 이 해 11월 또다시 휴가를 요청하여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번에도 그는 담양에 들렀다가 곧 해남으로 내려가 첩과 함께 생활하며 새집을 짓는다. 덕봉은 이등해인 1571년 2월 딸을 데리고 해남을 방문하는데, 미암이 지나치게 여색을 밝히고 윤관중이 애첩과 사랑에 빠진 문제로 두 내외는 한바탕 입씨름을 벌이고 만다. 21장에서 24장까지는 이처럼 부부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미암 일가의 생활상을 재현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 사람들의 부부애를 비롯해서 남성들의 득첩풍속과 그로 인한 부부싸움, 기타 첩과 서녀 및 기녀 등의 생활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었다. 

- 노후생활 
1571년 2월 전라감사로 부임한 미암은 그 해 10월 다시 사헌부의 으뜸 벼슬인 대사헌에 제수된다. 이후 그는 4년 여 동안 덕봉과 함께 서울에서 내직생활을 하다가 선조 8년인 1575년 10월 다시금 벼슬을 그만두고 담양 인근의 창평 수국리로 내려온다. 비록 중간에 임금의 명령으로 잠깐씩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했지만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 곳에서 덕봉과 더불어 한가한 노후생활을 보낸다. 손자들을 가르치고 장가를 보내며, 또 생일을 맞아 성대한 집안잔치를 베풀면서 노후를 보낸다. 25장에서 29장까지는 이처럼 창평으로 내려온 뒤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의 일기를 토대로 미암과 덕봉의 노후생활을 재현해 보았다. 특히 이 시기에 며느리 김씨가 본격적인 시집살이를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한다. 


본문 소개 

출근길(19-27쪽) 
당시의 관리들은 날이 밝기도 전에 광화문 앞에 모여 대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침 식사는 대궐 안에서 먹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는 임금이 술을 내리는데, 내시가 술을 따르기 전에 엎드려 절을 하고 받아 마셔야 했다. 하사받은 술은 영광이요 은총이기에 토하지도 못하고 끝까지 참았다. 

경연(22쪽) 
임금은 하루 세 번 경연에 참가했다(너무 춥거나 더울 때는 두 번). 경연은 학술 세미나를 말하는데, 1차 세미나는 새벽 5시에서 7시까지였다. 

급여 및 수입·지출(29-37쪽) 
급여는 1, 4, 7, 10월에 받았다. 미암은 쌀 13섬, 보리 1섬, 명주베 1필, 삼베 3필을 받았다. 그외에도 임금은 노루 한 마리, 말린 꿩 네 마리, 말린 대구 네 마리, 말린 큰 새우 네 두름, 젓 한 항아리 등을 하사하였다. 이외에도 이러한 급여를 어떻게 나누어 가계를 꾸렸는지 수입·지출 내역이 흥미롭다. 

목욕(52쪽) 
당시 양반들은 목욕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겨울에는 아예 목욕을 하지 않았고, 여름 6월에 제사를 지내거나 더위를 먹을 때만 온몸을 씻었고, 자식들에게는 목욕을 자주 하지 말라는 훈계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집세(61쪽) 
지방에서 올라온 양반들은 서울에서 집을 빌려 살아야 했는데, 집세는 포육 한 묶음과 꿩과 반찬거리였다. 

제사(82쪽) 
16세기까지 제사는 시댁의 제사뿐 아니라 친정의 제사도 함께 지냈다. 즉 아들딸을 불문하고 자녀들이 돌려가며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가 일반적이었다. 미암 일가의 제사 일람표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미암의 부인 송덕봉의 시(140쪽) 
여자들의 학문 활동이 금기시된 것은 조선후기의 일이다. 『미암일기』에 나타난 미암의 부인 송덕봉은 학문적으로 미암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서로의 감회를 시를 써서 주고 받았다. 예를 들면 미암이 승문원에서 숙직을 할 때 아내에게 술을 보내며 다음과 같이 시를 한 수 보냈다. 

눈이 내리니 바람이 더욱 차가워 
그대가 추운 방에 앉았을 것을 생각하노라. 
이 술이 비록 하품이지만 
차가운 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으리. 

이에 아내 송덕봉은 화답하는 시를 써서 보낸다. 

국화 잎에 비록 눈발이 날리지만 
은대(승문원)에는 따뜻한 방이 있으리. 
차가운 방에서 따뜻한 술을 받으니 
속을 채울 수 있어 매우 고맙소. 

한문으로 보면 화답시가 운자를 그대로 맞추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본문 중에는 송덕봉의 시가 여러 편 번역되어 있다. 

미암을 야단치는 편지(184쪽) 
홀로 서울에 온 뒤 3-4개월 동안 일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미암 유희춘은 아내 송덕봉에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알라'고 자랑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이에 아내 송덕봉은 1570년 6월 12일에 '그게 무슨 자랑이냐'며 힐난하는 장문의 편지를 쓴다. 둘 사이의 깊은 애정과 존경이 느껴지는 편지이다. 

치열한 부부 싸움(211쪽) 
16세기의 여성들은 부부싸움에서 절대 밀리지 않아서 마치 현대의 부부싸움을 보는 듯하다. 심지어 남편을 내쫓고 공공연히 이혼을 선언하거나 아예 쫓아내어 병으로 죽게 만들기도 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보고되고 있다. 

친정살이(237쪽) 
아들과 며느리가 시부모를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라고 생각하지만, 16세기까지는 사위와 딸이 친정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래서 며느리는 시부모를 대면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미암의 며느리도 친정에서 살다가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야 미암의 집으로 들어와서 살았다. 그러고도 자주 친정에 나들이를 갔는데, 당시에는 매우 자연스러운 풍습이었다. 

출처 : 사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