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소개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 이 일기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다. 이희호 여사 서거 후, 3남 김홍걸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동교동 사저에서 여섯 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이 수첩에는 1972년 8월 3일부터 1973년 5월 11일까지 김대중이 자필로 쓴 일기 223편이 기록되어 있었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이 도쿄에서 납치되기 전까지 일기를 계속 썼다면 두 권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그 행방은 알 수 없다. 『김대중 망명일기』는 한문과 영문을 섞어 필기체로 빼곡하게 쓴 일기를 판독하고 정리한 후 발간사와 해제를 덧붙여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죽음을 각오한 결기로 자신의 운명과 삶에 맞섰던 한 인간의 진솔한 모습이 펼쳐진다.
출처:본문중에서
2. 저자
저자: 김대중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의 섬 하의도에서 태어나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으나 5·16 쿠데타로 인해 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1963년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7·8·13·14대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3단계 통일론과 4대국(미·일·중·소) 안전보장론, 대중경제론,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각종 사회정책 등 획기적인 공약을 제시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관권 부정선거로 패배했다. 1972년 10월유신 선포 이후 해외에 망명하여 일본과 미국에서 반유신 민주화 투쟁을 전개했다. 1973년 8월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납치당해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1978년까지 투옥되었다. 1980년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국제적인 구명운동으로 감형되어 수감생활을 하다 1982년 12월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1985년 2월 목숨을 건 귀국을 단행하여 2·12 총선에서 민주세력이 승리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김대중은 5번의 죽을 고비, 6년여의 감옥생활, 3년여의 망명생활, 지속적인 감시 및 연금 등의 고난을 겪었다.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연이어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한 이후 1993년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했고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 전쟁위기 해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5년에 정계 복귀를 선언했고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헌정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여야 정권교체였다.
대통령 김대중은 IMF 경제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2000년 6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제주 4·3특별법 제정 등 각종 개혁조치로 민주인권 신장에 큰 역할을 했다. 지식정보화 및 문화 강국이 되도록 했으며 생산적 복지정책으로 한국이 복지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한국 외교의 전성기를 이뤄냈다. 김대중은 한국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민주인권 지도자로서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3년 2월 대통령 임기를 마쳤고,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로 서거했다.
출처:본문중에서
3. 목차
고난에서 영광으로, 한국에서 세계로 | 박명림
1972년 08월
1972년 09월
1972년 10월
1972년 11월
1972년 12월
1973년 1월
1973년 2월
1973년 3월
1973년 4월
1973년 5월
『김대중 망명일기』의 역사적 가치와 그 의미 | 장신기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55쪽
(1972년 8월 14일) 인생의 가치는 얼마만큼 높은 자리에 있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바르게 최선을 다해서 살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만고불변의 이치를 잊어버리고 수단 방법을 다해서 돈과 높은 지위만을 위해서 자신조차 잊어버리고 날뛰다 쓰러진다. 하느님과 자기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그리고 국민과 세계 인류를 위해 헌신한 일생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길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생을 관철하고야 말 것이다.
61쪽
(1972년 10월 17일) 나는 이 일기를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쓴다. 그것은 오늘로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가 형해(形骸)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기능의 일부를 정지시켰다. 금년 내에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서 새로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한다는 것이다.
137쪽
(1972년 11월 23일) 오늘은 추수감사절로서 미국 사람들은 칠면조를 먹으면서 가족끼리 즐기는 날이다. 나는 점심을 성호 군과 하고는 온종일 호텔에서 잤다. 어쩐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197쪽
(1972년 12월 26일) 나의 이미지는 1) 신념에 차고 2) 관대하고 3) 멋이 있게.
210쪽
(1973년 1월 1일) 이해의 나의 책임은 더욱 중차대해질 것이며 대한민국의 전 국민은 나에게 그들의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나의 앞으로의 구체적인 처신은 일본에 가서 정할 것이나 원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미증유의 고통과 사경에 신음하는 민주주의를 다시 회생시키는 길이 무엇이냐는 데 판단점을 두고 결코 사적 편의나 공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215쪽
(1973년 1월 4일) 워싱턴 D.C.에서 일본대사관까지 가서 확인한 비자가 이미 사용된 것으로 판명되어 나는 무비자 입국자가 되고 말았다. 길은 7시간 체류하고 서울로 가느냐? 아니면 법무대신의 심사를 받아서 단기 체류를 허가받느냐? 두 가지인데 후자는 희망이 적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여권 기간도 2월 17일로 가까이 다가오고 박정희 정권이 언제 취소할지 모르는 판에 큰 걱정이다.
250쪽
(1973년 1월 27일) 윤재수 씨가 한국에서 왔다. 그는 한국에서 내 아내를 만났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나와 아내 사이에 무슨 연락을 취했는지 추궁을 받았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358쪽
(1973년 4월 4일)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이데올로기 또는 대의명분을 높이 걸고 이를 대중적으로 설득하고 선동하기 위한 웅변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단 집권하면 이러한 대의명분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대중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국가의 발전을 성취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박정희의 비상계엄에 맞서 홀로 투쟁한 김대중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무력화시킨 후 자신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을 했다. 집권자가 무력을 동원하여 민주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장기집권을 도모하는 것을 친위 쿠데타라고 하는데,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은 이에 정확히 부합한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에 맞서 반대 투쟁을 전개한 유일한 인물이 김대중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비상계엄에 의해 철저하게 억눌려서 제대로 된 저항이 나타나지 않았고 해외에서는 박정희 정권과 국내 현실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유의미한 반대 목소리와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다. 김대중은 10·17 비상계엄 선포 당시 일본에 있었고 그 직후 망명을 선택하여 반유신 운동에 나섰다. 고독한 투쟁이었다.
2024년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과 친위 쿠데타, 이를 극복하는 과정과 비교해보면 김대중 망명 투쟁의 의미와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내란은 국회와 국민에 의해서 빠른 시간 안에 평화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1972년 10·17 비상계엄과 친위 쿠데타 직후에는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이 김대중 단 한 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망명 투쟁을 선택한 김대중, 이 일기에는 당시 김대중의 처절하면서도 비장한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여섯 권의 수첩, 말없이 남겨진 기록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 이 일기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다. 이희호 여사 서거 후, 3남 김홍걸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동교동 자택에서 여섯 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이 수첩에는 1972년 8월 3일부터 1973년 5월 11일까지 김대중이 자필로 쓴 일기 223편이 기록되어 있었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이 도쿄에서 납치되기 전까지 일기를 계속 썼다면 두 권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그 행방은 알 수 없다. 김대중은 대부분 한자를 썼으며 중간에 일본어와 영어 등을 사용한 수기(手記)로 일기를 작성했다. 일기에는 고어(古語)가 많고 일본식 한자 표현도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판독하기 위하여 여러 전문가들이 힘을 모았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본문 판독을 완성하고 정리한 후 발간사와 해제를 덧붙여 『김대중 망명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에는 죽음을 각오한 결기로 자신의 운명과 삶에 맞섰던 한 인간의 치열한 모습이 펼쳐져 있다. 김대중이 겪고 생각한 당시의 국내외 정세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김대중은 일본, 미국, 다시 일본에 체류하면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는 물론 날씨까지 상세하게 썼다. 유신 이후 국내외 동향에 대한 여러 중요한 사실들과 10월 유신 이후 국내외에서의 비판적인 외국인들과 해외 한인들의 인식과 행동을 알 수 있는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김대중은 이상적인 지도자의 기준과 정권교체 이후 국가 운영에 대한 구상을 일기에 담았다. 김대중에게 망명시기는 저항과 투쟁의 시간일 뿐 아니라 민주화 이후의 정책과 스스로의 리더십을 연마하는 시간이었다. 준비된 대통령이자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는 내용이다.
망명 투쟁을 결심하기까지
『김대중 망명일기』는 1972년 8월 3일 도쿄에서 처음 시작된다. 1년여 전인 1971년 4월, 김대중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제7대 대선에 출마했지만 박정희에게 아깝게 패하고 만다. 이후 제8대 총선을 앞두고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김대중은 국내 병원에서 치료받을 경우 테러를 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다리 부상을 치료받게 된다. 이 일기는 바로 그 치료 기간 중에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1972년 8월 26일, 김대중은 일기에 ‘1975년에는 선거가 없을 것’이라고 적는다. 박정희는 제7대 대선을 앞둔 1969년에 3선 개헌을 강행했지만, 김대중의 선전으로 치러진 제8대 총선에서 제1야당인 신민당이 개헌저지선을 확보한다. 더 이상 합법적 개헌이 불가능해진 박정희 정권은 결국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10월 유신, 친위 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 일기를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쓴다.
그것은 오늘로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가 형해(形骸)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그날, 김대중은 깊은 절망과 분노 속에서 이 문장으로 일기를 시작한다. 국회는 해산되었고, 헌법 기능은 정지되었으며, 새로운 개헌안은 국민투표에 부쳐진다는 발표가 뒤따랐다. 김대중은 이를 “청천벽력의 폭거요, 용서할 수 없는 반민주적 처사”라고 말한다.
유신 쿠데타의 그날 오후, 김대중은 일본 국회의원들과 면담을 마친 참이었다. 그는 기약할 수 없는 망명 생활을 준비한다.
망명 정치가 김대중의 심정과 고뇌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신변안전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으나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죽고 사는 것을 천주님께 맡기고 나의 신념대로 나갈 뿐이다.” (1972년 10월 27일)
김대중은 일기 속에 짧은 기도문처럼 이 문장을 남긴다. 비상계엄 직후의 일기는 충격과 절망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념과 각오를 다지는 김대중의 내면이 드러난다.
“오늘은 추수감사절로서 미국 사람들은 칠면조를 먹으면서 가족끼리 즐기는 날이다.
나는 점심을 성호 군과 하고는 온종일 호텔에서 잤다.
어쩐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1972년 11월 23일)
일기는 사적이고 내밀한 심경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장이다. 그래서 이 일기 곳곳에는 김대중의 여러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빚더미 속에 아내와 세 아들을 남겨두고 홀로 망명한 가장의 불안과 고통,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기약 없는 망명 투쟁을 이어가는 정치가의 고뇌, 유신 독재의 압력과 회유에 흔들리는 옛 동지들의 소식에 허탈해하는 심정, 개인적인 안위만을 생각하면서 독재에 신음하는 국내 현실을 외면하는 인사들에 대한 분노 등, 망명시기 정치인 김대중의 여러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하루를 마감하는 일기 마지막 부분에는 갑작스러운 망명 생활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김대중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활동이 부족하다고 자책하면서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한다는 심정을 기록한다.
“국내에서 지금 박해와 싸우고 또 견디어 지조를 지키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가슴이 아플 뿐이다.” (1973년 1월 17일)
“본국에서 고생하는 가족과 옥중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괴롭다.” (1973년 1월 19일)
김대중은 단 한 순간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오직 조국의 민주회복과 평화통일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굳은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외로움과 죄책감, 조국을 향한 분노와 그리움 사이에서 그는 다시 일어선다. 일기의 말미에는 ‘희망’ ‘성공’ ‘승리’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흔들리던 마음이 자리를 잡고, 독재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며 국가의 미래를 그리는 지도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독재에 맞서다
“케네디 의원은 나에게 『뉴요커』지의 한국 관계 기사를 읽었다며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부탁하라, 한국보다 당신 개인에게 더욱 관심이 크다, 한국에 가더라도 연락을 끊지 말고 계속 연락하라고 하는 등 극진한 호의를 보여주었다.” (1972년 12월 1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김대중은 돈도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전(前) 대선 후보’라는 타이틀 하나만 가지고 일본에서 망명 활동을 시작한다. 일본 정계와 언론계는 김대중을 환대했고, 여러 후원자의 도움으로 정치적 거점과 인적 네트워크를 마련한다. 그런데 일본보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더 크게 갖고 있기 때문에 김대중은 미국에서의 활동을 병행하기로 한다.
김대중은 『워싱턴포스트』 와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에 자신의 입장을 알렸으며 에드윈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 등 여러 지식인과 접촉하면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외연 확장에 나선다. 미국의 각 대학을 순회하며 강연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 정치인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국제적인 반대 여론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성공적인 망명 투쟁과 김대중 납치사건
김대중의 망명 투쟁이 성공을 거두자 박정희 정권은 긴장했고 중앙정보부(약칭 중정)를 통해 노골적인 방해공작을 펼치기 시작한다. 국내에 있던 김대중의 측근 인사들은 탄압을 받는다. 해외에서 김대중을 만난 인사가 귀국하면 조사를 받았다. 또한 중정은 김대중의 강연과 호텔 투숙 등을 방해했고 김대중의 활동을 감시했다. 김대중의 망명 투쟁이 성공하면 할수록 유신 정권은 더욱더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고 급기야 김대중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내부고발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유신 정권은 1973년 8월 8일 도쿄 그랜드팰리스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한다. 그러나 김대중은 미국의 개입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와 5일 만인 8월 13일 동교동 자택 앞에 던져진다.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 정권의 반민주성과 폭력성을 국내외에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 결과 한국 민주화를 위한 국제연대가 본격화되었고 국내에서도 여러 저항이 나타났다. 그러나 유신 정권은 경직된 대응으로 일관했고 그 정도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서 결국 체제 내부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멸하게 된다. 결국 김대중의 성공적인 망명 투쟁은 유신체제의 붕괴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된 일기
『김대중 망명일기』는 1973년 5월 11일에 멈췄지만, 그날까지 기록된 일과 사건들의 파장은 계속되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기는 멈췄지만, 일기를 통해 정제된 말과 생각은 이후 정치적 행보로 이어져 깊은 영향을 남겼다. 이후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가 제 길을 되찾는 데 있어서 중심축으로 거듭난다.
반세기도 더 지난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비상계엄’ 앞에 섰다. 1972년 10월 17일에 이은 헌정사상 두 번째 친위 쿠데타였다.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총칼로 억누르려 한 그날 한국 국민은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경이롭게 증명해냈다.
역사는 반복하지 않아야 할 것을 반복하려 하고, 정치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다. 『김대중 망명일기』는 그 망각을 붙들어 세우는 기록이다. 이순신에게는 『난중일기』가, 독립운동 시기에는 김구의 『백범일지』와 이승만의 『이승만일기』가 있었다면,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통과한 김대중에게는 『김대중 망명일기』가 있다. 오늘 민주주의의 씨앗이 된 한 사람의 고통과 신념을 보여주는 이 일기는, 어둠이 밀려올 때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무얼 지켜야 하는지 되새기게 하는 정신적 나침반이다.
출처: 「 김대중 망명일기 」 출판사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