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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825 1기(13.3~18.2)

6월의 추천 도서 (824) 삶의 길, 흰구름의 길 - 오쇼 라즈니쉬


 


 

 

 

 

1. 책소개

 

인도의 영적 스승 오쇼 라즈니쉬가 중국 도가 사상가 장자의 강의를 해석한 책. 치유와 깨달음의 시인이자, 젊은 시절 오쇼 라즈니쉬에게 사사하기도 한 류시화가 옮겨 내용의 정확성과 읽는 맛을 더했다. 장자의 가르침을 인용하고 오쇼의 설명이 덧붙여진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많이 활용하여 깊이 있는 주제를 무겁지 않게 전달한다.

'자기 자신조차 버릴 때' 마음의 평화와 자유, 공존과 상생이 가능함을 역설하는 오쇼와 장자의 목소리는 소유와 개성, 자기 주장이 미덕인 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2. 저자소개

 

지은이 - 오쇼 라즈니쉬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쿠츠와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의 소유자 였으며, 남들로 부터 주어지는 지식이나 신념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진리를 체험하고자 했다. 21세에 깨달음을 얻은 오쇼는 사가르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자발푸르 대학에서 9년간 철학교수로 지냈으며 그 사이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기성 종교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전통적인 신념에 의문을 던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또한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현대인의 신념 체계와 철학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오쇼는 특유의 '다이내믹 명상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현대인들은 과거의 낡은 전통과 현대생활의 온갖 욕망에 짓눌려 있기 때문에 깊은 정화과정을 통해 무념의 이완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전세계에서 온 제자들과 구도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은 30개가 넘는 언어를 통해 600권이 넘는 책으로 발간 되었다.

오쇼는 1990년 1월 19일에 자신의 몸을 떠났다. 푸나에 있는 그의 대규모 공동체는 영적 성장을 위한 메카가 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명상, 치료, 창조적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기 위해 전세계로부터 해마다 수천 명이 방문하고 있다.

 

출처 - 예스24

 

3. 역자소개

 

류시화
시인. 대학 재학 시절 오쇼 라즈니쉬의 사상을 접하고 인도로 가서 그의 제자로 입문했다. 이후 수년에 걸쳐 인도, 네팔, 티베트 등지를 여행하는 한편 주요 명상 서적들을 번역 소개했다.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과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치유와 깨달음의 시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인도 여행기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를 펴냈다. www.shivaryu.co.kr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4. 목차

 

옮긴이의 글
첫째날 아침
빈 배
둘째날 아침
도의 사람
셋째날 아침
장자, 불사조를 말하다
넷째날 아침
관계로부터의 자유
다섯째날 아침
아침에 세 개
여섯째날 아침
대자유의 길
일곱째날 아침
세 명의 벗
여덟째날 아침
쓸모없음과 쓸모있음
아홉째날 아침
그물과 물고기
열째날 아침
현자는 도 속에 숨는다

 

출처 - 알라딘

 

5. 책 속으로

 

장자의 이 '빈 배'의 비유는 진실로 아름답다. 그대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대가 너무 완강하게 그곳에 있기 때문에, 너무 단단해서 뚫고 지나갈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를 낸다. 그대가 너무 많이 있다면 어느 곳에서나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싸움과 다툼, 논쟁과 폭력이 일어난다. 갈등은 계속된다.

문제는 그대가 자신으로 너무 많이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도의 세계와 다른 종교들의 차이점이다. 다른 종교들은 말한다.

"선하라. 선하게 행동하면 아무도 그대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도는 말한다.

"존재하지 말라. 사라져라. 자기를 비우라." - 본문 중에서

누군가 죽을 때마다 이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대는 죽은 사람에 대해 슬퍼하는가, 아니면 그대 자신에 대해 슬퍼하는가? 296

그대가 약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도 많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약한 것이다. 389

그리고 기억하라. 근원은 하나다. 파도는 많을지도 모른다. 수백만 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다는 하나다. 그대는 그것에 떨어져 있고 나는 이곳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뿌리를 조금 더 깊이 바라보라.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같은 나무의 가지들과 같다. 가지들을 보라. 그것들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그것들은 하나다. 더 깊이 내려갈수록 그대는 점점 더 적은 차이와 더 많은 조화를 발견할 것이다. 407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열정적으로 죽는다. 죽음이 열정적일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전체적으로 죽는다. 전체성이 있을 때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다. 죽음이 추한 것은 죽음 때문이 아니라 한 번도 제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

 

출처 - 알라딘

 

 

6. 삶의 길 흰구름의 길 

 

오늘 소개할 책은 인도의 성자인 오쇼라즈니쉬가 해석한 장자이야기 이다. 오쇼는 크리슈나무르티’, ‘마하리쉬등과 함께 서구사회에 비교적 잘 알려진 인도의 성인이다. 미국의 작가 톰로빈슨은 그를 예수 이후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목하였다.

 

이 책은 오쇼가 강의한 장자 이야기이다. 장자의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가 나름 생각하는 열 가지를 추려서, 그의 해석으로 새롭게 기술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장자의 원전 보다는 오히려 오쇼의 호흡이 더 많이 들어간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아주 재미있게 집필되어 있다. 이 책을 보면 오쇼는 확실히 스토리텔러로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장자의 문구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예시들을 가져오기 때문에 비록 4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아주 재미있게 음미해 볼 수 있다. 아마도 장자를 해석한 책 중에서 가장 이해도가 쉽게 기술 되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첫번째는 빈배에 관한 이야기 이다. 장자의 원문에서 잠깐 인용해 본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그대가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한때, 킹메이커로 이름을 알렸던 고인이 된 정치인인, 김윤환씨가 사용하던 호가, ‘빈배 (虛舟)’ 였는데, 그도 장자의 이 구절이 특히나 마음에 와 닿았나 보다. 여러분들은 이 글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 한구절에 도와 영성에서 말하는 비움의 의미가 완벽하게 녹아 들어 있는 느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또한 이와 같은 인물일 것이다. 정말로 이런 비움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일을 행하더라도, 단지 그 일이 자기를 통해서 저절로 일어나게 할 뿐일 것이다. 신의 입김이 자기를 통해서 소리가 날 수 있게, 완전히 비워버린 피리와 같다고나 할까?

 

이 글을 보면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낀다. 인간관계를 하다 보면, 내가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도, 오해하고, 시비를 걸고, 갈등을 유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장자는 이야기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시비와 갈등을 유발한다는 것 또한 우리의 에고가 아직 완전히 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사건을 갈등, 시비로 인식한다는 것은, 내 마음 안에 아직도 갈등이나 시비와 같은 씨앗이 남아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그러한 인지가 전혀 없다면, 무엇이 갈등인지, 무엇이 시비인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에고의 존재가 내 마음 속에 남아 있기에 그들은 화를 내고, 시기를 하는 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가르침의 핵심 원문을 잠깐 인용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남을 상처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알지 못한다.’

이 번 장은 중용과 분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금욕주의자가 가장 빨리 타락할 수 있고, 금식하는 사람이 과식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는 마치 시계의 추와 같다.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람은 언제든지 그 반동으로 인하여 다른 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명상도 마찬가지다. 긴장이 많을 때 우리는 항상 명상에 마음이 끌린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명상이 아니다. 그것도 또 다른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중용이다. 정말로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란다면, 화를 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 보다는, 화를 내는 자신과 그 화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다음은 분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진정한 존재감은 분리가 일어 나지 않을 때 찾아온다. 우리의 대부분은 객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 객체 의식이란 바로 분리된 마음이다. 관찰하는 사람과 관찰되는 대상은 둘이 아닌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와 하나의 합은 또 하나일 뿐이다. 분리된 마음에 관해서 오쇼는 재미있는 우화를 들려주고 있다. 여우가 어느 날 호기심 때문에 지네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너는 그 많은 발들을 어떻게 다루니? 한 발 다음에 어느 발이 뒤따라야 하는지를 어떻게 아니? 백 개의 다리를 어떻게 그렇게 잘 조화시키며 걸을 수 있니?’

 

지네로서는 한 번도 품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지네는 걸을 수가 없었다. 관찰자로서의 마음과 관찰되는 자로서의 그 자신으로 지네는 처음으로 둘이 되었다. 마음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분리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존재의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을 행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의 부드러움이나 따뜻함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완전한 도의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는 이미 종교적이지 않다.

 

세번째 이야기는 양나라 제상인 혜자의 이야기다. 혜자는 장자가 양나라를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자리가 박탈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여, 미리 군사들을 풀어 장자를 잡게 했다. 하지만 장자를 찾을 수 없었다. 장자는 직접 혜자를 찾아가서 불사조와 부엉이의 우화를 들어서, 혜자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재상이여, 그대는 왜 그토록 광적으로 그대의 재상직에 매달리며 나를 보고는 놀라 비명을 지르는가?’

 

욕망은 그 안에 열등감을 담고 있다. 진정한 우월감은 열등감에 반대되는 개념의 우월감이 아니라, 열등감이 부재하는 감정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자기 동일시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위, 나이, 명예, 부를 자기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동일시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결코 무한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위나 명예, 부와 같은 것들은 유한함을 내포하고 있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렸을 때, 하루 아침에 지위나 명예나 부가 없어져 버렸을 때, 그들은 결코 삶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 수치심과 모멸감과 불행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둘째는 이러한 것들이 늘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들은 상대적인 우월감과 열등감의 곡예를 탄다. 늘 이러한 감정의 지나친 기복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니 얼마나 불쌍한 삶이던가?

 

네번째 구절은 형식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문을 살펴보자.

 

가장 훌륭한 예의는 모든 형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완전한 행위는 관계로부터 자유롭다. 완전한 지혜는 계획함이 없다. 완전한 사랑은 증명함이 없다. 완전한 진실성은 보증함이 없다

 

사랑보다 더 높은 도덕률이 있을까? 만일 어떤 이가 시장에서 낯선 사람의 발을 밟으면 공손하게 사과를 하고 설명을 덧붙인다. 뭔가에 대해서 설명을 덧붙인다는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온전히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굳이 설명하려 하고,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가 자기의 발을 밟고 스스로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책임진다는 말과 같다. 사과와 해명은 마치 윤활유 처럼 싸움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임질줄 아는 사람이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진정 종교적인 사람은 그래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다. 심지어 자기와 전혀 관계 없는 다른 세상의 사건들까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책임지고, 사랑한다는 것은 너와 내가 결코 둘이 아닌, 하나라는 알아차림을 적극적으로 삶에 실천하는 것이다. 증명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필요하다. 사랑이 적을수록 우리는 더 많이 증명한다.

 

다섯번째 이야기는 우리도 익히 잘 아는 조삼모사이야기이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는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영성에 빗대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 보다 본인의 마음을 끄는 구절이 있다.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열정적으로 죽는다. 죽음이 열정적일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죽음이 추한 것은 죽음 때문이 아니라, 한 번도 제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음이 우리를 데려갈지 전혀 알지 못한다. 정말로 잘 죽는다는 말은, 언제고 죽을 때, 한 점 후회가 없어야 된다는 이야기다. 그 말은 다름 아니라 언제고 죽을 수 있게 정말로 제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본인이 아는 잘 산다는 것은, 에고가 없어진 자리에서 하늘의 이끌림 대로 설레이고 가슴뛰는 상태로 온전히 그것과 몰입되어 사는 삶, 그리고 그 결과는 무조건 받아들이며, 다시금 알아차리고, 순간과 현재에서 최선과 최대로 사는 삶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가장 자기다운 삶을 저절로 살게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 몸으로 배운 삶의 지혜다.

 

여섯째 장, 또한 일면 에고의 비움과 관련한 내용이다. 궁수의 활쏘기가 그 원문이다. 함께 살펴보자.

 

궁수의 기술은 변함이 없으나, 상이 그를 분열시킨다. 그는 근심한다. 그는 활 쏘는 일보다 이기는 일을 더 많이 생각한다.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그의 힘을 다 고갈시켜 버린다

 

무엇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것은 강한 에고의 작용이다. 이럴 때 우리는 순수한 몰입과 재미를 잊어 버린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대표 감독들이 올림픽 결선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긴장 풀고, 늘 하던 대로 편하게 하자라는 말이다. 잘 하려고 욕심을 내다보면, 긴장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의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재미 자체가 목적이며, 고유한 가치다.

 

일곱번째 이야기는 세명의 벗 이야기이다. 이 부분에서는 동시대에 살았던 노자와 공자를 비교하는 대목도 있다. 특히 오쇼가 그러한 비교를 즐겨하는 것 같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도의 세계에서 노닐던 3명의 벗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그 장례 치르는 것을 돕기 위해, 제자 한 명을 보냈다. 제자가 가서 보니, 그들은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때 공자의 제자가 기겁을 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장례의 예법 어느 곳에 이런 것이 적혀 있는가? 고인이 있는 자리에서 어찌 이런 불경스런 노래를 부르는가?’

 

그때 두 벗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리고 이렇게 화답을 한다.

가엾은 친구, 이 자는 새로운 예법을 모르는군

공자는 체계와 형식에 따라 살았다. 그는 완전히 문명화된 사람, 세상에 알려진 가장 완벽한 신사다. 그는 행동하되, 예절에 따라 행동한다. 그는 그 경계를 넘은 적이 없다. 언제나 그는 그 자신이 만든 끊임없는 굴레 속에서 살았다. 오쇼는 이 부분을 꼬집는다.

 

여덟째 장은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장자는 말한다. 쓸모없는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쓸모있는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고 말이다. 건물은 벽과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건물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 같은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우리가 아는 쓸모없는 것들은, 단지 즐기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 정원을 손질하는 것, 순수한 기쁨을 위해 해변에 누워있는 것 등이다. 하지만 쓸모없음이 있기 때문에 쓸모있음이 진정으로 가치를 발휘한다. 장자는 쓸모없음을 순수하게 즐기는 것으로 정의를 내렸다. 단 한 사람도 방랑자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가게와 사무실에 있는 세상은 어찌보면 추한 세상이 아닐까? 밤낮없이, 휴식도 놀이도 없이 끊임없이 일하고, 또 일하는 기계장치로 사람들이 전락할 수도 있겠다. 재미와 놀이가 일의 근본이다. 재미와 놀이를 부정하면 일은 부담이 되고, 무거운 짐이 된다. 하지만 오쇼는 장자식의 쓸모없음에 대한 몰입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경계한다. 진정한 도는 둘 다를 초월하는 것이다. 오쇼에게 있어서 구도자는 하나의 균형, 중도를 걷고 모든 대립하는 것들로 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는 쓸모있음을 이용할 수 있고, 쓸모없음도 이용할 수 있다.

 

아홉번째 장은 그물과 물고기에 관한 내용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물의 목적은 물고기를 잡기 위함이다. 물고기가 잡히면 그물은 잊혀진다. 어디서 나는 말을 잊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가 바로 내가 더불어 말하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다.’

이 구절은 말에 의한 관념화, 그로 인한 에고의 강화를 경계한 문구다. 우리들의 삶을 보면, 어느 순간 도구였던 그물과 말이 우리를 옭아매고, 우리를 눈뜬 장님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진실의 세계는 말과 글을 초월한 곳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말과 그것이 만든 관념화에 집착한다. 대화를 해 보면 안다. 진정한 경청이 참으로 어렵다. 듣는 척 하지만 끊임없이 머리로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오쇼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말을 할 뿐, 들을 수가 없다면 우리가 내뱉는 말은 미친사람의 말이라고... 그건 단지 해방감을 위한 단어의 배설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마지막 장은 전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체가 우리를 만들어 냈고, 그 전체가 우리를 돌볼 것이다. 우리는 전체로부터 나왔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믿고 맡기면 처음으로 삶이 저절로 시작된다. 우리는 바다라는 전체의 파도이다. 우리가 바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 걸림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진정으로 자아가 사라진 사람, 그리고 하나의 없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전체이므로 우주 전체를 소유한다. 이 책의 말미에 오쇼는 감사와 긍정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반동하거나 밀어내지 말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의 굽이침을 알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장자의 이야기를 오쇼의 관점에서 재해석 했다고 하는 것이 이 책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영성에 관한 어려운 내용일 수 있으나, 짧은 우화들을 적절하게 삽입한 오쇼의 강의 덕분에 아주 편하고 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평소에 장자의 내용을 어렵다고만 생각한 사람들은 오쇼의 관점에서 바라본 장자를 만나보기 바란다.

 

출처 - 안광호 (khajo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