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
저자 : 마거리트 히긴스
미국 버클리대학교, 컬럼비아 대학원 졸업 후 1942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 신문에 입사하여 런던·베를린·도쿄·모스크바에서 특파원으로 1963년까지 활동하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던 전설적인 여류언론인이다.
특히 한국전쟁 초기 6개월 동안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여러 특종을 보도하고, 한국전쟁에 관한 단행본인 『War in Korea』를 발간하여 195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 수상자가 되었다.
종군기자로 활동 후에도 1951년∼1954년까지 한국을 7차례 방문해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 휴전에 관한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출처:본문중에서
2. 목차
추천사: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 ------------------------- -------=2
축사: 마거리트 히긴스 자녀 --------------------------------------8
제1부 ㆍ 자유를 위한 희생 (한국전쟁 르포)--------------------------14
제1장 전쟁터로의 여행 -------------------------------------------19
제2장 첫 후퇴 --------------------------------------------------33
제3장 공황-----------------------------------------------------47
제4장 최초의 교전 -----------------------------------------------71
제5장 “어떻게 우리 군이 이렇게 빨리 후퇴할 수가 있어?” ----------------87
제6장 전쟁 초기의 나날들 -----------------------------------------97
제7장 기자 히긴스 ----------------------------------------------121
제8장 “죽음을 각오하고 지켜라.”-----------------------------------143
제9장 인천에서의 대담한 도박 -------------------------------------171
제10장 우리의 동맹 한국인들 --------------------------------------197
제11장 중공군의 개입 --------------------------------------------211
제12장 영웅적인 해병 이야기 “뒤로 전진하다”-------------------------223
제13장 적 -----------------------------------------------------249
제15장 한국전쟁의 교훈과 전망 ------------------------------------263
제2부 ㆍ 한국에 가혹했던 휴전------------------------------------276
제1장 서울수복 기념식장에서 만난 맥아더 장군------------------------283
제2장 맥아더를 젠체한다고 해임한 트루먼 대통령 ----------------------299
제3장 중공군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싸운 밴 플리트 대장 -----------------319
제4장 휴전을 선택한 군 출신 대통령 아이젠하워 -----------------------337
제5장 침통한 심정으로 휴전에 서명한 클라크 대장 ---------------------355
제6장 워싱턴의 정책에 불만을 토로한 유엔군 지휘관들 ------------------367
제7장 미국을 ‘종이호랑이’라고 놀린 중공군 장교 ----------------------375
역자 후기: 마거리트 히긴스의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 ------------381
출처:본문중에서
3. 책속으로
“우리는 미국이 한국을 위한 전투에 개입하는 것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들이 되었다. 미국은 이 전투를 준비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끔찍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 그러나 전쟁 중 한반도에서 많은 비극이 발생했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것이 자유세계를 위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지금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종의 국제적 자명종 시계의 역할을 한 것이다.” (20쪽)
“서울에 이르는 길은 피란민들로 붐볐다. 수백 명의 한국 여인은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커다란 짐보따리를 이고 있었다. 비에 젖은 거리 위에서 피란민들이 우리 미국인의 작은 차량 행렬을 향해 환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은 가슴 뭉클하면서도 어딘지 겁나는 경험이었다. 그들은 미국이 무언가를 해줄 것이라는 애처로울 정도로 뚜렷한 확신을 가진 듯했다.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간절한 소망이 자리 잡았다. ‘제발, 우리가 저 사람들을 낙담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후에도 나는 종종 같은 생각을 했다.” (25쪽)
“맥아더 장군이 비행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바람이 세찬 활주로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그의 방문에 긴급기사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그는 활주로에서 나를 보자,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는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같이 탑승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41쪽) “맥아더는 비행기에서 내게 말했다. ‘도쿄에 도착하는 순간,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에 2개 사단을 파병해주도록 건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나의 건의를 수용할지는 알 수 없군요.’” (45쪽)
“성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십자가는 제단에서 떼어졌으며, 모든 종교적인 상징들은 건물에서 제거되어 있었다. 그 대신 사방의 벽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을 그린 대형 포스터들이 우리를 비웃듯이 내려보았고, 미군을 죄 없는 한국 부녀자와 어린이를 살해하는 인면수심의 괴물로 풍자한 포스터들도 벽에 붙어있었다. 성당은 공산당 본부로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194쪽)
“전쟁의 승리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던 1950년 9월 화창한 가을날, 이승만 대통령이 들려준 마지막 말들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 우리가 학습했듯이 미국 정부도 공산주의자들과의 타협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언제나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상대가 의심하지 않도록 달래는 속임수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당신네는 준비가 너무 늦어져서 그들의 다음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209쪽)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비공산세계에 손쉬운 표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 어디라도 군사력에 호소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침략을 막을 수 있도록 압도적인 힘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한반도에서 우리는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치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또한 승리는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할 때 치러야 할 비용보다는 훨씬 저렴할 것이다.” (274쪽)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1950년 9월 29일 서울수복 기념행사가 개최된 후, 미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하고 있었으며, 맥아더 장군도 미 합참도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우리는 공군력을 이용하여 만주에 대한 전면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적의 전투력을 잃게 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계획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1951년 4월 11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는 정치적인 결정을 함으로써 최후의 순간에 무산되었다.” (290쪽)
“나는 기자로서 수많은 정치인과 관료를 접촉해봤지만, 언론과의 관계에서 트루먼 대통령처럼 둔감한 인물을 만나본 적이 없다. 1951년 7월, 나는 백악관에서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내가 트루먼과 인터뷰를 갖기 3개월 전인 1951년 4월 11일 이미 해고됐다. 내가 맥아더의 군사전략이 옳았고 하자, 트루먼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 보세요. 내가 맥아더, 그 사람에 대해서 얘기 좀 해야겠어요. 그는 그저 허영심으로 가득 찬 인간이에요. 그게 전부입니다. 항상 거들먹거려요. 늘 폼만 잡는 인간이라고요! 맥아더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거들먹거리지 않고, 본업에만 조금 더 충실했어도 그를 해고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에 병력증원이 예정되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에 대응해서 우리가 새로운 공세에 나서는 것은 미국 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299-300쪽)
“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야전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며, 인간미 넘치고 정력적인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장군과의 대화를 잊을 수 없다.
인터뷰는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에서 미 제8군 사령관으로 근무 중일 때 이뤄졌다.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밴 플리트는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발언을 거론했다. 즉, 브래들리가 한국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벌어진, 잘못된 전쟁’으로 규정했는데, 자기는 그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브래들리의 발언에 대해서 극동군사령부의 여러 고위 장교와 대화를 나눴으나, 그 누구도 밴 플리트 장군처럼 강한 반론을 펴지 않았다. 이 인터뷰에서 밴 플리트 사령관은 한국전쟁을 결정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319쪽)
“벤 플리트 장군은 비장하게 말했다. ’만일 이제 중국인들이 한반도 침공에 대한 벌을 받지 않고 교묘히 빠져나가고, 공업증진과 군사적 팽창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을 번다고 생각해보세요. 공산 제국은 엄청나게 강화될 것이며, 아시아 전선이 공고해짐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은 갑절의 힘으로 유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한반도에서 유리한 군사적 결정을 밀고 나가지 않으면, 민주국가들, 특히 미국은 수 세기 동안 악몽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이번에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전투가 교착상태로 되면,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대만, 태국, 미얀마 등 인도차이나로 향할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남아 지역이 공산화되면, 일본은 공산주의자들과의 밀월관계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일본은 자국의 최대 고객이자, 원료 공급국들이 공산주의의 통제하에 빠지게 되면 자포자기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나는 언젠가 우리가 한국전쟁을 회고하면서 ‘그때 공산주의를 저지했어야만 했는데’라고 때늦은 후회를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323쪽)
“사람들은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일 때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지를 잊고 있다. 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유는 중공군이 아주 잘 준비된 진지들에서 공격을 시작하는 이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전이 서명되기 바로 1개월 전인 1953년 6월에만 유엔군측 사상자가 18,000명 이상이나 되었다. 이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최초로 개입해서 우리가 북한지역으로부터 철수했을 때의 사상자 수보다 많은 수치다.
1952년 8월 미 해병대가 중공군과 벙커힐 전투(Korea’s Battle of Bunker Hill)를 치르는 과정에서 사상자들이 너무 많아서 해병 증원 병력을 항공기로 투입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를 태운 지프차가 벙커힐 고지의 관측소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 커브를 도는데, 미 해병 대령이 포탄으로 파괴된 길가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극악무도한 공산군의 지뢰를 밟은 병사를 양팔로 껴안고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은 차마 눈뜨고는 못볼 지경이었다. 부상병의 두 다리는 무릎 아래가 날아갔다. 뾰쪽뾰쪽한 금속들이 그의 얼굴, 머리, 팔, 몸통을 뚫고 들어갔다. 그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그의 몸에서 성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도무지 찾기 힘들었다. 부상병이 죽고 그의 몸에 판초가 씌워지자, 대령은 나를 보고 울부짖으며 쓴소리를 쏟아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절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마침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셨다니 묻고 싶습니다. 제발 제게 말씀 좀 해주세요. 미국인들은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싸우기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저기 산등성이가 보이지요! 그 뒤에 중공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포상(砲床: 적의 사격이나 폭격으로부터 화기·장비·인명을 방호하고, 포 사격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시설)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적의 포탄들 때문에 우리는 지옥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을 몇 개의 전술핵무기로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압니다. 전술핵무기 사용에 관한 교육을 받기 위해 특수학교에 다녔거든요. 사용하지도 않을 무기를 만들기 위해 도대체 왜 돈을 낭비합니까? 흔히 우리는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또 듣습니다. 그런데 대체 누구에게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지난밤에 벙커힐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서 우리 해병대 제1사단에서는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물론 오늘 밤에도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또 나올 겁니다.
만일 전쟁이 인간에게 죽음을 요구할 정도로 중요하다면, 마땅히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싸울 기회를 충분히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싸운다는 것은 최선 무기들을 가지고 무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3자로부터 압력을 받은 일부 정치인들이 장병들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는 무기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함으로써, 수많은 장병에게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지를 점령하라고 불필요한 명령을 내리는 우리 지휘관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이곳에서 빌(Bill, 지뢰를 밟아 사망한 해병의 이름)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본 당신은 내게 어떤 무기가 다른 무기보다 더 끔찍하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빌어먹을 놈의 지뢰는 핵폭탄만큼이나 치명적으로 당신을 살해합니다. 단지 죽는 데 걸리는 시간이 일반적으로 오래 지속될 뿐입니다.’
이 말을 하는 동안 해병 대령의 뺨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337-339쪽)
“나는 밴 플리트 장군의 말처럼 아이젠하워가 중공군에 대해서 필요한 조치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이젠하워가 중공군을 반격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고들 얘기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 당선인으로 1952년 12월 방한하는 아이젠하워를 직접 만나 물어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아이젠하워의 오랜 친구를 만났다.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젠하워를 위해 발 벗고 뛰었던 그는 내게 아이젠하워가 군인 출신 대통령이므로 군사 명령을 내리는 것이 민간인 대통령보다도 심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욱 힘들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귀띔해줬다.
‘내가 아이젠하워에 대해서 우려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가 군사적 마인드를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해서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기울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즉, 군국주의자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약점을 갖고 있어서, 아주 오래 결정적인 조치를 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민간인 출신이라면 두려움 없이 적시에 강력한 조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341-343쪽)
“역사적으로 우연히 그렇게 되었든, 아니면 계획적이든 간에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에서의 군사 카드놀이에서 그들의 손을 기막히게 잘 놀렸다. 우리가 가진 군사 카드들은 기동력, 질적으로 나은 공군력, 핵무기를 포함해서 질적으로 우수한 무기 등이었다. 적이 가진 강력한 에이스는 병력이었다.
그런데 우리 동맹국들은 여론에 촉각을 세우고 정치적인 고려도 해야 하는 심리적인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적의 에이스가 힘을 발휘하는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대부분의 전쟁기간 동안 우리의 최상의 카드들은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다.
첫째, 기동력은 증원 병력 부족과 적을 완전하게 소탕하는 작전을 금지하는 정책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둘째, 전략폭격은 압록강 너머의 적의 주요 기지들에 대한 타격이 허용되지 않은 이후 전혀 시도해보지 못했다. 전술비행은 목표물들에 대한 제한으로 방해받았다. 그러한 제한이 해제된 것은 중공군이 한반도 상공에 상당한 숫자의 제트기를 불러들여서 그 목표물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된 이후였다.
셋째, 중공군이 핵무기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판문점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강요받지 않고 휴전협상을 했으며, 휴전이 서명된 후 몇 시간 내에 그 조항들을 조롱하듯 무시하기 시작했다.” (355-356쪽)
“오스트리아 주둔군 사령관으로 오스트리아 처리 문제에 관해서 소련인들과 길고 지루한 협상을 해본 경험이 있는 마크 클라크(Mark Clark) 장군이 1952년 5월 극동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의 경험을 한국전쟁 휴전협상에서 잘 활용할 수 있었지만, 워싱턴 당국은 클라크의 충고를 새겨듣지 않았다.
동유럽, 중국, 티베트, 외몽고, 북한에 이어 가장 최근에는 북부 인도차이나의 공산화 과정에서 내가 체험한 사실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대처하는 방법은 워싱턴에서 표명된 견해보다도 전투 지휘관 등 현지 의견이 정확했다는 사실이 시간이 흐르면서 밝혀진다는 것이다.
미국의 여당은 대중의 표를 의식하여 강렬한 어조로 평화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얘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나름대로 이해할만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개월 전, 트루먼 대통령은 중대 성명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평화를 얻을 기회가 지금보다 더 좋을 때는 없었다’고 천명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도 때때로 미래에 대해 그런 장밋빛 환상에 빠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기술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즉, 평화와 장밋빛 미래에 관한 정치적 발언이 우리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국가적 풍조에 기여한다면, 그 진정성은 의심받아 마땅하다. 나는 미국 국민이 평화의 꽃들을 잡아 뜯으려는 위험한 쐐기풀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359-359쪽)
“1950년 10월 6일, 유엔 총회는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수 있도록 표결로 승인해주었다. 이는 한반도 전체의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기 위함이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유엔군에게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 임무는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못했다.
나는 한국전쟁 초기에 6개월 동안 한국에 체류한 이후 7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다. 게다가 홍콩, 인도차이나, 태국, 미얀마,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여행할 때마다 그 나라 국민은 내게 한반도에서 중공의 개입을 거론하며 거의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미국은 중공인들을 저지하지 못했습니까?’
동양인들의 기억 속에는 세계 최강의 국방력과 경제력을 지닌 미국이 아시아인들에 의해서 쫓겨났다는 사실이 입력되어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한반도에서의 휴전이 아시아의 자부심을 지켜준 사건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겨우 1년 전에 탄생한 중공이라는 신생국에 의해서 말이다!” (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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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판사서평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이승만을 제거하고 한반도를 적화하기 위해 중공을 등에 업고, 소련의 군비지원과 조종하에 침략전쟁을 도발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한민족의 국기인 태극기를 배신한 채 소련이 디자인해 준 인공기를 앞세우고!
(무릇 한민족이라면, 남북통일을 말하기 전에, 북한에 대해 소련이 만들어준 인공기를 폐지하고, ‘태극기’부터 통일하자고 제안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섹스 심볼 마린린 먼로를 뺨치는 관능적 육체와 미모에 최고의 지성까지 갖춘 종군여기자가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부터 미군과 동거동락하며 전선을 누비고 있었다. 그 이름은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
270명의 종군기자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마거리트 히긴스는 전쟁 초기 6개월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한강 인도교 폭파ㆍ평택과 천안전투ㆍ대전전투ㆍ낙동강전투ㆍ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ㆍ장진호전투 등을 직접 목격한 산증인이었다.
특히, 전쟁 발발 나흘 후인 1950년 6월 29일 수원 비행장에서 히긴스는 전쟁상황 시찰 차 방한 중인 맥아더 장군을 만난다. 당시 둘이 만나는 사진은 충격적이다. 30세의 히긴스는 오른손을 허리에 얹고, 70세의 맥아더는 오른손으로 히긴스의 왼팔을 가볍게 잡고 말을 건네고 있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 후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 앞에서 감히 그런 포스를 취한 사람은 없었다. 이는 맥아더가 양손을 허리에 얹고, 일본 국왕은 차렷 자세로 선 사진과 비교된다.
아무튼 맥아더는 수원 비행장에서 히긴스에게 자기 전용기에 동승을 제안하고, 히긴스는 도쿄로 가는 도중 그를 단독 인터뷰해서 ‘한국에 지상군 파병’에 관한 특종을 건진다. 이후 그녀는 6개월 동안 맥아더 장군의 특별 배려로 전선을 취재하며, 여러 특종 보도를 하고, 1951년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세계 최초의 단행본 『War in Korea』를 발간하여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War in Korea』에는 맥아더라는 이름이 다른 인명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등장할 뿐 아니라, 히긴스와 맥아더의 사이가 무척 가까웠을 것이라는
의혹을 가질 만한 부분도 있다. 심지어 히긴스와 맥아더가 이 책을 공동 집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War in Korea』에는 한국전쟁을 다룬 수많은 국내외의 저술과 차별화되는 매우 시사적이고, 객관적이며,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들이 담겨있다.
첫째, 한국전쟁에 관한 저술 중 이렇게 빨리 나온 책은 없다. 히긴스는 1951년 1월 1일 책의 서문을 썼다. 1950년 12월까지 그녀가 전쟁터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다.
둘째, 전투하는 군인이 아니라 뉴스를 전하는 종군기자가 전장을 더할 나위 없이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나름대로 아군이건 적군이건 공평한 잣대를 들이대고 한국전쟁을 보려고 시도했다.
셋째, 맥아더 장군을 비롯하여 이등병까지 미군을 폭넓게 인터뷰한 기록일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 한국 언론인, 한국군, 심지어 북한군 및 중공군 장병과의 대화도 담고 있다. 이는 한국 전쟁터의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저자들이 쏟아낸 수많은 저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넷째,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본 기록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여성으로서 차별대우를 받으며 취재했음을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차별은 이 책이 갖는 매력의 하나가 되고 있다.
다섯째, 소설보다도 더 긴장감 넘치고, 흥미진진하며, 생생한 실화라는 점이다. 나아가 섬세하고 감수성 넘치는 문학작품이다. 발간과 동시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 등 여러 개 언어로 번역된 것은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여섯째, 단순한 한국전쟁 르포를 넘어서 전쟁, 자유민주주의, 국가존립의 이유, 국가 간의 동맹, 남녀차별의 사회적 문제, 인간적 유대감, 애국의 의미, 삶과 죽음에 관한 교과서 아닌 교과서라는 점이다.
코러스 출판사는 2009년 『자유를 위한 희생』이란 제목으로 『War in Korea』의 한글 번역판을 출간했다.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의 제1부는 『자유를 위한 희생』의 초판 발행 14년 후인 올해에 기존에 미흡했던 번역과 역주를 대폭 보완한 것이다.
한편, 『War in Korea』는 한국전쟁 초기 6개월(1950년 6∼12월) 동안의 전장 르포다. 이는 3년 1개월 동안의 전쟁 중에서 6분의 1도 되지 않는 기간이어서 한국전쟁을 전부 아우르기에는 많이 모자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단편적이고 분량은 많지 않지만, 히긴스 기자가 한국전쟁의 휴전에 관해서 기록한 매우 소중한 자료를 발견했다.
그 귀중한 자료를 소개하기 전에 히긴스가 1951년 1월 1일 『War in Korea』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후부터 한국전쟁 휴전(1953년 7월 27일) 후인 1954년까지 7차례나 한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히긴스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폴란드·체코 등 동유럽 국가의 국민이 자유를 소비에트 공산 체제에서 질식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한 증인이었다.
히긴스는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 비에 젖은 서울 거리를 군용차로 달리는데, 짐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채 피란하는 수백 명의 여인이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것을 보고,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된다.
“제발, 우리가 저 사람들을 낙담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또한 히긴스는 자신의 이 소망을 더 굳게 만드는 광경을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수복 과정 중 명동성당에서 목격하게 된다.
“성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십자가는 제단에서 떼어졌으며, 모든 종교적인 상징들은 건물에서 제거되어 있었다. 그 대신 사방의 벽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을 그린 대형 포스터들이 우리를 비웃듯이 내려다보았고, 미군을 죄 없는 한국 부녀자와 어린이를 살해하는 인면수심의 괴물로 풍자한 포스터들도 벽에 붙어있었다. 성당은 공산당 본부로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히긴스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동유럽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지겹게 보았던 스탈린과 그 꼭두각시들의 초상화를 서울 명동성당에서 다시 목격하고는 스탈린의 세계 적화야욕을 한국에서 기필코 분쇄하지 않으면 미국이 위태롭게 된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참고로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과 소련군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나누어 점령했다. 그런데 스탈린은 이를 악용해서 겉으로는 해방과 평화를 표방하고, 실제로는 한반도 적화에 착수했다. 곧 북한 전역에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가 걸리고, 북한 공산화와 남조선 적화를 위한 병영화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의 인적·물적인 약탈도 심각했지만, 북한에서 태극기와 애국가를 폐지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약탈한 것은 가장 악랄한 만행이었다. 사실 해방 이후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태극기와 애국가를 공유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지시로 북한은 1948년 7월 8일 태극기를 폐지하고, 7월 24일부터 소련이 디자인한 인공기를 시범 게양한 후, 9월 9일 정권 수립 때 인공기와 새로운 국가(國歌)를 채택함으로써 민족을 배신하고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이처럼 동유럽에서의 경험보다도 훨씬 더 애처로운 한국인과 한국의 참상(慘狀)을 목격한 히긴스는 어느 종군기자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용기와 사명감으로 무장한 채 전선을 누비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또한 종군기자로서의 임무를 끝내고도 한국인을 낙담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실현을 위해 나름대로 헌신했다.
히긴스의 소망이란 미국을 위시한 유엔이 한국인의 자유를 말살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도발한 스탈린과 그 꼭두각시인 모택동과 김일성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서 한반도에 자유 통일국가가 건설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이는 맥아더 장군의 소망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종군기자로 활약 후에도 일곱 차례나 한국을 방문하여 전황과 휴전 협상을 확인하고, 최고위급 저명인사들을 만났다.
히긴스가 만난 인사는 나이순으로 맥아더 장군, 트루먼 대통령, 아이젠하워 장군, 밴 플리트 대장, 리지웨이 대장, 클라크 대장 등 한국전쟁과 휴전에 관해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미국의 최고위 인사는 물론, 영국군 고위 장교, 심지어는 중공군 소령도 포함되었다.
히긴스는 그들과의 인터뷰를 1955년 『NEWS IS A SINGULAR THING』이라는 저서에 실었다. 『War in Korea』에 없는 내용과 휴전에 관한 소회가 담긴 히긴스의 이 기록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므로, 인물 별로 7개의 장으로 나눠서 『한국에 가혹했던 휴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자의 주석(註釋)과 함께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의 제2부에 실었다.
출처: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 출판사 KO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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