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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추천도서(23.3~24.2)/2023-6

6월의 추천도서 (3748)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1. 저자

 

저자 : 구로카와 유지 (黑川祐次)


1944년 일본 아이치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 교양학부를 졸업하고, 「코트디부아르의 분쟁과 일본의 대응」으로 니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외무성에 들어가 재在캐나다 몬트리올 총영사, 주駐우크라이나 대사와 몰도바 대사를 겸무했다. 중의원 외무조사실장, 주코트디부아르 대사를 지냈으며, 주베냉·부르키나 파소·니제르·토고 대사를 겸임했고, 니혼대학 국제관계학부 교수 등을 역임했다. 2004년 12월에 실시한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당시, 일본 감시단 단장을 역임했고, 현재 우크라이나 연구회(국제우크라이나학회 일본지부)를 이끌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국제화가 일본의 공공정책에 끼치는 영향: 세계에서 일본 정부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하는가』(2008) 등이 있다.

 

출처:본문중에서

 

2. 목차

 

머리말

제1장 스키타이: 기마와 황금의 민족
스키타이의 등장 | 스키타이인의 건국 전설 | 건국 전설 이설異說 | 유목민 | 능란 한 기마술을 지닌 용감한 전사 | 동물 의장意匠과 황금에 대한 편애 | 그리스 세계와의 연관성 | 스키타이의 멸망

제2장 키예프 루스: 유럽의 대국
키예프 루스는 누구의 것인가 | 슬라브인의 등장 | 하자르한국 | 키예프 루스의 건국 | 볼로디미르 성공聖公과 야로슬라프 현공賢公 | 기독교로의 개종 | 모노마흐 공의 정훈 | 몽골의 정복 |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 | 키예프 루스의 사회와 문화

제3장 리투아니아-폴란드의 시대
암흑과 공백의 3세기? | 리투아니아의 확장 | 폴란드의 진출 |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 | 리투아니아-폴란드 지배하에 놓인 우크라이나 | 유대인의 낙원 | 우니아트의 탄생 | 모스크바 대공국과 크림한국의 대두 | 우크라이나의 어원

제4장 코사크의 영광과 좌절
코사크의 출현 | 정치적 세력으로의 성장 | 조직과 전투 방법 | 국민성과 생활 | 선구자 사하이다치니 | 흐멜니츠키의 봉기 | 헤트만 국가의 형성 | 모스크바의 보호 아래 | 흐멜니츠키의 최후 | ‘황폐’의 시대 | 헤트만 마제파 | 폴타바 전투 | 최후의 헤트만 | 러시아로의 병합 | 우안 우크라이나 | 신新러시아현

제5장 러시아ㆍ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두 제국이 지배하는 우크라이나 | 러시아 제국하의 우크라이나 | 발자크의 저택 | 데카브리스트의 난과 카미안카 | 크림전쟁 | 국민 시인 타라스 셰브첸코 | 내셔널리즘의 고양과 정당의 성립 | 오스트리아 제국하의 우크라이나 | 신대륙으로의 이민 | 곡창지대와 항구 도시 오데사 | 공업화 | 우크라이나 출생의 예술가와 학자

제6장 중앙 라다: 짧은 독립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왜 유지되지 못했는가 |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 일본인의 키예프 방문기 | 볼셰비키의 등장 | 독일군의 꼭두각시 | 서우크라이나의 독립 | 디렉토리아 정부와 내란 | 최후의 승리자, 볼셰비키 | 재고: 독립운동은 왜 실패했는가

제7장 소련의 시대
4개국으로 갈라진 우크라이나 | 우크라이나화 정책 | 스탈린의 권력 장악 | 농업 집단화와 대기근 | 스탈린의 숙청 | 폴란드 지배하의 서우크라이나 | 일본 군부와 우크라이나 독립파의 접촉 | 제2차 세계대전 | 얄타회담 | 일본인 억류자 | 전후 처리 | UPA의 파르티잔 활동 | 흐루쇼프 시대 | 브레즈네프 시대

제8장 350년 동안 기다린 독립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 독립 달성 | 우크라이나의 장래성 | 우크라이나와 일본

우크라이나 역사 연표
참고문헌

 

출처:본문중에서

 

3. 책속으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인지의 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단순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논리는 이렇다. 모스크바를 포함한 당시 키예프 루스 공국의 동북 지방은 민족도, 언어도 달랐고 16세기가 돼서야 핀어 대신 슬라브어가 사용되었을 정도다.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비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이지, 키예프 루스 공국의 후계자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가혹한 전제중앙집권 체제인 러시아·소련의 체제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므로 별개의 국가다.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사회·문화는 몽골에 의한 키예프의 파괴 이후에도 1세기에 걸쳐 현재 서우크라이나 지역에 번성한 할리치나·볼린 공국으로 계승되었다._57쪽

14세기 중반 할리치나-볼린 공국이 멸망한 후 17세기 중반 코사크가 우크라이나의 중심 세력이 되기까지 약 300년 동안 우크라이나 땅에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정치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기간에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다. 과연 이 시기는 우크라이나에게 완전한 암흑의 시대이자 공백의 3세기였을까?
키예프 루스 공국 시대에는 거의 전역에 걸쳐 단일 루스 민족을 이루었지만 이 시기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 요인 중 하나로 과거의 키예프 루스 공국이 이 시대에는 모스크바 대공국,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분할되어 장기간 고정된 것을 들 수 있다. 키예프 루스 공국 말기부터 이미 분화가 시작되었다고 추측되는 언어도 이 시기에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로 각각 독립된 언어가 형성되었다. ‘우크라이나’라는 지명이 만들어지고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우크라이나답다고 할 수 있는 코사크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기는 냉엄한 3세기였던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정체성 형성을 위해 더없이 중요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_105~106쪽

키예프가 쇠퇴하는 동안 우크라이나 동북쪽에서는 공국 중에서 모스크바 공국이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1480년 모스크바 공국이 킵차크 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2세기에 걸친 ‘타타르의 멍에’는 끝났다. 제2의 로마라 할 수 있는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에 모스크바는 자신들이야말로 ‘제3의 로마’이자 기독교 세계의 맹주가 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이반 3세는 ‘전全 루스의 군주’로 칭하고 예전 키예프 루스 공국이었던 땅을 두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15~16세기에 모스크바 대공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예전 키예프 루스의 땅을 둘러싸고 장기간에 걸쳐 싸웠고, 모스크바는 서서히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도려내갔다.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체르니히우, 스몰렌스크, 폴로츠크 지방을 잃게 된다. 이반 4세는 최초로 ‘차르’로 대관했다._128~129쪽

19세기가 되어 러시아 제국이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지배 아래 두게 된 즈음에는 ‘우크라이나’가 현재의 우크라이나 땅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의 땅을 공식적으로 나타낼 때 ‘소러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9세기의 우크라이나 민족 시인 셰우첸코는 ‘소러시아’를 굴욕적이고 식민지적인 예속의 단어로 여겨 배제하고 ‘우크라이나’를 코사크 영광의 역사와 나라의 독립에 연결지어 사용했다._137쪽

그중에서도 러시아가 차지한 비중이 가장 컸는데, 우크라이나에서는 우안 지방, 볼린의 대부분을 획득했다. 오스트리아는 할리치나, 부코비나를 차지했다. 14세기에 시작된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지배가 4세기를 거쳐 일단락된다. 이로써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은 러시아로, 서우크라이나의 일부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정치상으로 완전히 지도에서 사라졌다._201쪽

1876년에는 이른바 ‘엠스 지령’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어 서적의 수입 전면 금지, 강연에서 우크라이나어 사용 금지, 우크라이나어 신문의 발행 금지, 초등학교에서 우크라이나어로 교육 금지, 학교 도서관에서 우크라이나어 서적 추방, 우크라이나 관련 단체의 폐쇄, 우크라이나 운동 활동가의 추방 등 상당히 철저한 우크라이나 민족 탄압이 이루어진다._229~230쪽

현재 미국에는 150만 명, 캐나다에는 100만 명의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의 세력이 폴란드계나 그리스계만큼 강하진 않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을 지지했고 대전 중에 발생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시기에는 세계의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 시기에는 소련과 싸우는 우크라이나인 빨치산을 구조하는 활동을 펼쳤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독립 후 어딘지 모르게 우크라이나의 편에 서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의 존재라고 한다._239쪽

곡물, 설탕, 석탄, 금속 등의 산업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있어 불가결한 존재이며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서 분리하는 것은 왕정파든 공산주의자든 러시아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초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세력을 중앙 라다에 침투시켜 내부부터 점령하려고 했으나 1917년 12월 시점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의 세력이 전체의 10퍼센트 정도였기 때문에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잡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자 볼셰비키는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단독으로 우크라이나를 수중에 넣으려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이를 위해 하르키우에 ‘우크라이나-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하고 흡수처로 삼았다._274~275쪽

 

출처:본문중에서

 

4. 출판사서평

 

“우크라이나의 발견, 우크라이나의 복권”
1991년 독립까지 러시아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국가
유럽의 대국이 될 잠재력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읽어내다!

·동서 유럽 힘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우크라이나
·동슬라브 종가였던 이곳은 어떻게 나라를 잃고 되찾았나
·유럽의 ‘빵 바구니’였다가 극심한 기근을 겪기까지
·고대에서 현대까지 현장감 있게 담아낸 우크라이나 통사

전前 우크라이나 대사이자 니혼대학 국제관계학 교수를 지낸 저자가 ‘우크라이나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정리해낸 책,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큰글자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대공국으로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복잡하고 긴 역사를 풀어 쓰고, 근대 들어 러시아와 유럽의 틈바구니 속에서 강국들의 침략을 받은 대고난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타민족의 지배와 그로부터의 독립을 반복하면서 지금과 같은 최대 인구의 국가로 번창할 수 있었는지 그 핵심적인 계기들을 밝히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첫 출발은 루스 카간국으로, 러시아(루스)라는 이름도 원래 여기서 가져다 쓴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2세기까지 모든 견직물을 ‘루스제製’라고 불렀다. 그만큼 이 나라는 농업과 상업, 무역의 중심지였다.
저자는 중장기적으로 우크라이나가 큰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다. 우크라이나의 면적은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고 인구는 5000만 명으로 프랑스에 필적한다. 철광석은 유럽 최대 규모의 산지를 자랑한다. 농업은 세계의 흑토지대의 30퍼센트를 차지해 언젠가 ‘유럽의 곡창’의 지위를 회복할 것이다.
두 번째는 지정학적인 중요성이다. 유럽에서 우크라이나만큼 여러 민족이 거쳐간 곳은 없다. 우크라이나는 서유럽과 러시아, 아시아를 잇는 통로였다. 그런 까닭에 우크라이나는 세계 지도를 다시 쓴 대북방전쟁, 나폴레옹전쟁, 크림전쟁, 두 차례 세계대전의 전장이 되었고 많은 세력이 이 나라를 노렸다. 즉 우크라이나의 향방에 따라 동서 힘의 균형은 달라졌다. 이것은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 하고,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나라가 없는 나라의 역사

대국으로서 우크라이나는 인구수가 12세기 말경 이미 700만~80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인구가 800만 명이었다).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일 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수준도 높아 구소련의 첨단 기술 중 SS-19, SS-21 등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우크라이나에서 제작됐다. 또 고골, 호로비츠, 니진스키, 말레비치와 같은 문화예술계의 대가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단 하나의 주제를 꼽자면 ‘나라가 없었다’는 점이다. 역사가 수브텔니는 우크라이나사의 핵심이 국가의 틀 없이 민족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에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유럽의 세력 균형 속에서 우크라이나 ‘땅’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사를 풀어간다.
이 책은 두텁지 않지만 고대에서 현대 우크라이나의 독립까지 일목요연하게, 중요한 국제관계와 내분의 양상을 모두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체류했던 외교관으로서 독립국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면서 러시아와 미국·유럽 간의 관계를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찰해 큰 도움이 된다. 국내에 이렇게 종합적인 우크라이나 통사는 출간된 적이 없어 최근 러시아와의 극도의 긴장관계를 보이고 있는 진정한 이유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땅을 둘러싼 유럽의 힘겨루기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15세기만 해도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 있는 비슬라브 부족체의 연합체일 뿐이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쪽에서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근간이 된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직계는 바로 자신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역사가 오마셰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 인구 90퍼센트가 거주하는 지역을 지배했던 할리치나-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1340년대에 볼린과 할리치나는 각각 리투아니아, 폴란드에 병합됨으로써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는 소멸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세 민족 즉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로 분화됐고 언어도 제각기 사용했다. 다만 이 시기에 ‘가장 우크라이나답다’고 할 수 있는 코사크(준군사적 자치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땅은 여러 나라가 노리는 먹잇감이 되었다. 먼저 리투아니아가 한때 볼린, 체르니히우, 키예프 지방, 드네프르강 동안까지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특이했던 것은 언어와 문화 모두 리투아니아인들이 우크라이나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다음으로 촉수를 뻗은 것은 폴란드였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자기네 문화를 강제로 심으려 한 점에서 완전히 달랐고, 이는 훗날까지 우크라이나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 지역에서 정치적 힘은 종교와 관계가 깊었다. 키예프 루스 시대에 루스 땅에는 정교가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교는 두 방향에서 문제가 생겼다. 첫째, 우크라이나 땅이 정치적으로 약해지자 정교의 중심이 키예프를 벗어났고, 모스크바 공국이 융성함에 따라 ‘키예프 부주교좌’를 그곳으로 옮겨갔다. 둘째, 폴란드의 가톨릭이 강성해지자 루스 귀족들이 정교를 떠나 폴란드에 동화돼간 점이다. 그러자 정교와 루스의 언어는 어느덧 하층계급의 것으로 전락했다.
늘 득세하는 것은 러시아였다. 모스크바 공국은 1480년 킵차크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제3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모스크바는 루스 땅을 둘러싸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맞붙으면서 서서히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1654년 페레야슬라프 보호 협정으로, 이 협정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없다. 러시아사에서 이것은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반면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이 협정이 당시 지도자 흐멜니츠키가 동맹들과 맺은 보호 약속 중 하나일 뿐이라고 본다. 흐멜니츠키는 모스크바의 고압적인 태도에 환멸을 느껴 스웨덴 등과 동맹하려 했지만, 그 전에 사망해버렸다.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검증해볼 때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해석이 맞는다고 본다. 우크라이나는 자치를 지키고자 모스크바의 보호를 요청한 것일 뿐이었다. 다만 사후 맥락에서 이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병합되도록 한, 파멸의 첫걸음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모스크바는 이 협정 덕에 제국의 길을 밟아간다.

세계대전이 유린한 나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수많은 국가가 탐을 냈던 땅이다. 18세기 말 폴란드가 분할되고 튀르크가 흑해 북안에서 물러난 뒤 일차대전까지 120년간 우크라이나 영토는 80퍼센트가 러시아 제국, 20퍼센트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된다. 일차대전이 터지자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만큼 심하게 유린당한 땅도 없었다. 전쟁 후에도 사방에서 침투하는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동쪽은 볼셰비키 적군, 서쪽은 폴란드군, 동남쪽 돈강 방면은 반혁명의 백군, 서남쪽 드네스트르강 방면은 루마니아군, 남부 오데사 방면은 프랑스군이 간섭하고 있었다. 이처럼 1919년과 1920년의 우크라이나는 근대 유럽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무질서한 내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22년 소연방이 성립되면서 우크라이나는 70여 년간 연방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런 와중에 1929년 빈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이 결성돼 무력 투쟁을 벌인다. 폴란드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한 이 시도는 그러나 서광도 못 본 채 이차대전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차대전에서 우크라이나는 인구의 6분의 1인 530만 명을 잃었다. 또 이 시기 소련 전체의 물질적 손해 중 40퍼센트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폴란드 각각이 입은 것보다 더 큰 규모였다.
이후 거의 모든 우크라이나인의 거주 지역은 소연방 체제하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으로 합쳐졌다. 이것은 키예프 루스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역사상 첫 통합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의 독립

1990년 3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의회인 ‘최고회의(라다)’의 선거가 이뤄졌다. 소련에서는 각 공화국을 어떻게든 연방의 틀 안에 묶어두고자 고르바초프가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독립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쿠데타 사건이었다. 쿠데타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옐친의 용감한 저항으로 맥없이 실패한다. 이로써 주도권은 고르바초프에서 옐친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누가 봐도 소련은 지속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쿠데타 실패의 여세를 몰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거의 만장일치로 독립 선언을 채택했고, 훗날 이날은 독립기념일이 된다. 폴란드,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즉각 승인했다. 많은 우크라이나 이민자를 끌어안고 있던 캐나다도 신속히 승인했다. 미국은 12월 24일 승인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은 20세기 들어 벌써 여섯 번째였다. 1918년 1월 키예프에서 중앙 라다의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그해 11월 리비우에서 ‘서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1919년 1월 키예프에서 디렉토리아 정부와 서우크라이나 정부가 합병한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1939년 3월 후스트에서의 ‘카르파토 우크라이나 공화국’, 1941년 6월 리비우에서 OUN의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에 이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독립 선언은 다 오래 못 가거나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반면 이번 독립은 통치능력을 가진 정부가 있고 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는 거의 전역을 포함하며 국제적으로도 승인된 후에 이뤄진, 영속의 개연성을 지닌 독립이었다.

우크라이나 속 유대인의 역사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유대인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중세에 유대인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도시의 상인, 수공업자가 된 후 농촌에 진출하면서 귀족의 장원 관리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은 농민이 거둬들인 수익을 영주의 주머니에 넣어주는 역할을 했고, 이는 훗날 이 지역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저자는 책에서 유대인의 폴란드·우크라이나 이주에 대해 상세히 다루는데, 그 이유는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로 훗날 러시아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손에 넣으면서 그 땅의 유대인도 끌어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가노비치와 같은 유대인이 우크라이나 태생인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또한 유대인 음악가 오이스트라흐, 밀슈타인, 길렐스, 작가 바벨 등도 이 나라 출신이다.
19세기 말에는 러시아 제국 내에 520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는데 이 중 200만 명이 우크라이나에 살았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도시민이어서 우크라이나 도시 인구의 53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렇다고 부자는 아니었지만, 가난한 우크라이나인 농민들에게는 유대인이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로 비쳐 자신들을 착취하는 인종으로 적대시되기도 했다.
이차대전 때 우크라이나는 독일의 점령 아래 놓인 적이 있다. 이때 나치 독일의 식량과 노동력 공급원이 됐는데, 이 시기 독일은 우크라이나에서 85만~9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라는 단어와 민족 자존심

‘우크라이나’라는 단어 자체는 우크라이나인의 자존심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여태껏 러시아사를 바탕으로 한 학설에서 우크라이나는 ‘변경邊境지대’를 뜻해왔다. 하지만 변경이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봤을 때 그런 것일 뿐 현재는 ‘우크라이나’에 변경이란 뜻은 없고 ‘땅’이나 ‘나라’를 의미하는 단어였다는 설이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키예프 연대기』와 『할리치나-볼린 연대기』가 있다. 설령 변경이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파생됐다 해도 모스크바 혹은 훗날 러시아 제국의 입장에서 본 변경의 의미는 아니었다. 12~13세기에는 모스크바 지방이 오히려 더 변경에 속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우크라이나’는 비로소 특정한 땅을 가리키게 된다. 즉 코사크의 대두와 함께 드네프르강 양안으로 펼쳐지는 코사크 지대를 일컫게 된 것이다.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이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자 ‘우크라이나’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땅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라 불렀다.
우크라이나는 영어로 Ukraine이고 현재의 국명도 관사 없이 Ukraine으로 쓴다. 관사를 붙여 the Ukraine이 되면 보통명사인 ‘변경지대’에 정관사를 붙여 쉽게 고유명사화한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러시아의 변경지대로 얕보는 어감이 들어서인지 우크라이나 정부와 민족주의자들은 이 표기를 꺼린다. 참고로 우크라이나와 유럽, 미국의 학자가 저술한 우크라이나사는 ‘History of Ukraine’인 데 반해 러시아 관점에서 쓰인 우크라이나사는 ‘History of the Ukraine’로 표기돼 있다.
러시아 제국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어가 러시아어 방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따라서 진실하고 고상한 것은 러시아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출판물도 흥미로운 소재는 러시아어로, 지루한 소재는 우크라이나어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1989년에는 ‘우크라이나 언어법’이 제정되었고 우크라이나어가 국어로 채택됐다.

 

출처: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출판사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