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8년 추천 도서(18.3~19.2)

4월의 추천도서(1880)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 로제 폴 드루아


1. 책 소개


철학은 언제나 걷는다
철학적 사유는 하나의 걷는 방식이다
균형을 잡고 땅 위를, 말 속을, 생각 속을 이동하는 법이다

최초의 인간은 누구일까? 누군가는 아담이라 말할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루시(최초의 인류 화석)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그들을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주는 끈은 무엇일까? 최초의 인간과 현재의 인간은 생김새도 완전히 다를 테고 생각이나 말도 통할 리 없다. 같은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른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딱 한 가지는 둘 사이의 공통점을 특정할 수 있다. 직립보행.

인간을 대표하는 특징은 ‘서서 걷는 것’이다. 네 발로 몸을 지탱하고 땅을 바라보던 인간이 몸을 일으켜 세워 정면을 바라보고 손의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변화는 시작되었다. 직립보행을 함으로써 뇌 용량은 커지고 손은 섬세한 작업을 가능하게끔 진화했다. 이것은 다른 영장류와 인간이 해부학적으로 구별되는 가장 큰 차별점이다. 저자 로제 폴 드루아는 걷기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부분에 주목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생명체도 인간처럼 걷지 못한다. 저자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가 걷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걸음걸이 속에 생각의 단초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걷기의 메커니즘과 생각의 메커니즘을 고찰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유사성과 연관성을 확인한다. 나아가 엠페도클레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그리스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 27명의 사상가들의 철학을 두루 살피고 그들의 걷는 법을 통해 사유의 과정을 그려낸다.

출처 : 교보문고


2. 저자


저자 로제 폴 드루아는 철학자이자 작가이며 〈르 몽드〉, 〈르 푸앵〉, 〈레 제코〉지 등에 칼럼을 쓰는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한 후,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을 지냈고 파리정치대학 등에서 철학을 강의했다. 마흔여 편의 저서가 있으며, 그중 여러 권이 베스트셀러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32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으로는 《일상에서 철학하기》,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 《처음 시작하는 철학》, 《사물들과 철학하기》,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 등이 있다.

출처 : 교보문고


3. 목차


전주곡_ 서서 나아가기 ㆍ9 

첫 번째 산책 
고대의 도보자들과 함께 
1. 엠페도클레스의 불가사의한 샌들 ㆍ33 
2. 프로타고라스의 왕복 운동 ㆍ39 
3. 포로들을 걷게 하는 플라톤 ㆍ44 
4. ‘소요자’로 불렸던 아리스토텔레스 ㆍ49 
5. 스승이 넘어져도 무심한 피론 ㆍ54 
6. 지팡이를 짚고 걷는 디오게네스 ㆍ58 
7. 세기를 넘나들며 거닌 세네카 ㆍ62 
8. 인도까지 맨발로 걸은 티야나의 아폴로니오스 ㆍ67 

두 번째 산책 
동양의 도보자들과 함께 
9. 중도를 걷는 붓다 ㆍ77 
10. 노자가 걷는 게 아니라, 노자와 함께 세상이 걷는다 ㆍ81 
11. 만물의 바른 걸음을 찾는 공자 ㆍ85 
12. 힐렐과 한 발로 선 사람 ㆍ88 
13. 걷기의 절대자, 샹카라 ㆍ92 
14. 수직으로 걷는 밀라레파 ㆍ95 

간주곡_ 걷기와 철학적 사유 사이 ㆍ99 

세 번째 산책 
체계적인 도보자들과 함께, 자유로운 산책자들과 함께 
15. 무용한 걸음을 없앤 오컴의 윌리엄 ㆍ119 
16. ‘뛰고 도약하는’ 몽테뉴 ㆍ124 
17. 똑바로 걷는 데카르트 ㆍ129 
18. 남몰래 절뚝인 디드로 ㆍ135 
19. 산책을 재창조한 루소 ㆍ142 
20. 1789년, 지각한 칸트 ㆍ148 
21. ‘저절로 걷는 길’을 만든 헤겔 ㆍ153 

네 번째 산책 
현대의 신들린 사람들과 함께 
22. 티베트까지 걸은 헝가리인 ㆍ165 
23. 역사가 걷는 것을 본 마르크스 ㆍ171 
24. 야생으로 걸어간 소로 ㆍ176 
25. 길 속에 숨은 키르케고르 ㆍ181 
26. 니체가 걸으며 식별하는 것 ㆍ186 
27. 말과 말 사이, 비트겐슈타인의 길 ㆍ193 

후주곡_ “나는 철학자로 걷는다”는 의미 ㆍ199 
참고도서 ㆍ212

출처 : 본문 중에서


4. 책 속으로


11쪽 
인도를 성큼성큼 걷고 도로를 건너는 건 외투와 모자가 아니다. 그들이 사람이라는 건 여러분도 느끼고, 감지하고, 대번에 안다. 그건 로봇도, 자동인형도 아니고 인간의 모습을 닮은 존재도 아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그걸 알까? 어떻게 확신할까? 그들이 걷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걷는데, 우리는 그걸 잊고 응시하는 법을 잊었다. 너무 익숙한 탓에 더는 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거니는 방식은 참으로 독특해서 어떤 기계도 완벽하게 모방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어떤 로봇도 완벽하게 구현해내지 못한 것이 바로 인간 고유의 사소한 동작들이다. 바로 저 아래에서 걸으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그 몸들은 한 발 앞으로 다른 발을 내밀고, 다시 이 발 앞으로 저 발을 내딛는다. 당연하다. 그런데 그저 당연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대단히 잘해내고 있다. 

25쪽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철학자들이 산책하며 생각하고 말하는 장면은 수없이 많다. 그들은 성찰하는 말을, 서서 이동하는 몸의 활동과 공통된 활동으로 삼는다. 사실 그들은 분석과 성찰의 진전을, 논증의 행보를,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는 논거와 반박의 진척을, 육체적 걷기의 비틀거림 혹은 배회와 분리하지 않는다. 이 철학자들은 “말하며 걷는다” 혹은 “걸으며 말한다”. 어떻게 말해도 좋다. 말이나 글로 된 그들의 성찰은 걷기의 진전 방식을 채택한다. 
걷는 철학자들의 초상을 그리고, 철학 속에서 걷는 장면을 분석해보면 단지 어떤 사상가가 어떤 방식으로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지, 그가 자신의 신체적?지적 행보를 어떻게 미묘하게 결합하는지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철학자들이 걷는 걸 보면, 그들이 엉덩이를 흔들며 배회하는 걸 살피면 종종 그들이 철학하는 태도의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고 확신한다. 모든 의미에서 ‘그들이 걷는 방식’을 어렴풋하게나마 보게 된다고 확신한다. 

52쪽 
설명은 무겁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다리의 지지점이 변화하는 메커니즘을, 균형 상실과 만회를 통한, 추락 시작과 바로서기를 통한 몸의 전진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걷기의 구성 요소와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걷기를 가능하게 하는 신체 조건들을 탐색하는 이 사람은 언어를, 단어와 생각의 관계를, 타당한 추론의 조건을 연구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정한 탁월함이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걷는지 자문하면서 걷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문하면서 생각한다. 걷기와 말과 생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탐색한다. 

133쪽 
맴돌지도 말고 멈춰 서지도 말고 가능한 한 같은 방향으로 똑바로 걸을 것. 데카르트는 더 나은 해결책이 없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이처럼 매번 분야는 달라도 문제는 걷는 것이다. 그것도 똑바로. 자신의 걸음을 확신하며 추락을 피하고 위험을 비켜 가며. 나는 다시 한 번 이것이 단순한 은유가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하찮은 비교도 아니다. 데카르트에게는 동일한 움직임이 몸과 이해와 의지의 전진을 선동한다. 그가 이 말을 어디에서도 확실하게 하지 않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텍스트들에서는 거의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제1철학에 관한 성찰》의 첫 번째 성찰에서 그는 주저 없이 걷기를 ‘영혼의 속성’으로 삼는다.


188쪽 
발로 생각하는 사람들, 땅을 걸으며 동시에 영혼을 걷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성찰하기 위해 움직일 필요가, 생리적인 욕구가 있다. 수많은 고대 철학자들처럼, 걷는 동안 떠오른 생각을 적어두기 위해 지팡이 손잡이에 잉크병을 넣어 두었다는 토머스 홉스처럼. 도서관의 쥐가 아니라 대로의 사상가들이었던 몽테뉴, 루소, 소로, 그 밖에 많은 이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저 하나의 범주일까? 취향이나 기질의 문제일까? 
니체는 분명히 대답한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신체기관과 생리학의 문제다. 그렇다. 무거운 몸이 있고, 민첩한 몸이 있다. 그렇다. 그로부터 무거운 생각이, 또는 경쾌한 직관이 나온다. 그렇다. 움직이지 않는 내장에서 분비되는 생각들을 경계하고, 움직이는 근육에서 분출되는 생각들을 선호해야 한다. 

209쪽 
걷기의 시간은 닫히지 않았다. 많은 현대인들이 걷기가 실종될 가능성을 어느 정도 분명하게 인식하고서 다시 걷기 시작했고, 걷기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가, 과학자, 철학자, 지도자, 기자, 정치인, 엔지니어, 의사,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애호가로, 운동선수로, 혹은 화제의 인물로 걷기를 실천하고 있다. 단지 유행이나 몸매를 가꾸기 위한 소일거리가 아니다. 물론 그런 차원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무언가가 걷기를 지탱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세상을 대하는, 땅 위를 나아가는 몸의 느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속에 절대적으로 간직해야 할 뿌리내림이 있다. 
걷기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풍경과 더불어 움직이는 ‘한 몸이 되게’ 해주고, 우리 존재 방식의 척도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결코 걷기를 그만두지 않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혹은 확실히 아는 것은 단 몇 마디 말로 표현된다. 두 발 동물의 지구력 안에서 생각하고 나아가는 능력이 펼쳐진다는 것.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걷기가 최근에 그토록 많은 연구를 낳았을 것이다. 

출처 : 교보문고


5. 출판사 서평


철학은 언제나 걷는다 
철학적 사유는 하나의 걷는 방식이다 
균형을 잡고 땅 위를, 말 속을, 생각 속을 이동하는 법이다 

최초의 인간은 누구일까? 누군가는 아담이라 말할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루시(최초의 인류 화석)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그들을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주는 끈은 무엇일까? 최초의 인간과 현재의 인간은 생김새도 완전히 다를 테고 생각이나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른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둘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직립보행. 
인간을 대표하는 특징은 ‘서서 걷는 것’이다. 네 발로 몸을 지탱하고 땅을 바라보던 존재가 몸을 일으켜 세워 정면을 바라보고 손의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변화는 시작되었다. 직립보행을 함으로써 뇌 용량은 커지고 손은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게끔 진화했다. 이것은 다른 영장류와 인간이 해부학적으로 구별되는 가장 큰 차별점이다. 
프랑스 국제철학학교와 국립과학연구센터에서 교수와 연구원으로 활동했던 철학자이자 〈르 몽드〉, <르 푸앵> 등의 잡지에 정기적으로 철학과 관련된 칼럼을 기고한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저자 로제 폴 드루아는 걷기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부분에 주목하면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가 걷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걸음걸이 속에 생각의 단초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엠페도클레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그리스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사상가 27명의 철학을 두루 살피고 그 과정에서 걷기의 메커니즘과 생각의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그리고 걷기와 우리 사유의 유사성과 연관성을 확인한다. 저자는 걷기가 그 자체로 인간 존재 방식의 고유한 척도이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생각을 키워온 생각법이었음을 보여줌으로써 생각의 근육을 키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걸어보라 권한다. 
넘어질 뻔해야 
앞으로 나아간다 
너무 익숙해서 대부분 잘 알아채지 못하지만, 걷기는 불가사의한 운동이다. 일견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매우 복잡한 과정이 숨어 있다. 걷기 위해서는 우선 두 발로 선 자세에서 한쪽 다리를 들어 앞으로 던지듯 내밀어야 한다. 그러면 몸은 균형을 잃고 앞으로 추락한다. 추락하는 중 뒷다리를 끌어다가 내민 발 앞으로 옮겨야만 추락을 만회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다. 그렇게 다리를 움직이면서 상체와 팔로는 무게중심을 잡는다. 물론 섬세한 근육의 움직임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추락과 만회의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우리는 걷는다. 이 복잡한 과정을 정확한 타이밍에 수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넘어져 얼굴이 깨지는 대참사를 겪게 된다. 
생각도 걷기와 비슷하다. 걷기는 물리적 활동이고 생각은 정신적 활동이지만 이 둘은 쌍둥이이며, 거울처럼 서로를 비춘다. 생각도 거의 넘어지다가 다시 일어서면서 존재한다. 다시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기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우리 사유들에 대한 비판과 합리적인 검토는 그것들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반박과 비판적 분석은 우리가 명백하고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을 필연적으로 불안정하게 흔든다. 그런데 사유는 자기방어를 하고, 안정을 회복하고, 조금 더 먼 곳에서 새로운 지지대를 찾는다. 그러고 나면 또다시 새로운 반박이 이어지는 식이다. 
이처럼 걷기와 생각 속에 작동하는 불균형과 재균형, 또다시 불균형으로 이어지는 운동을 통해 지금까지 인간은 철학을 진화시켜왔다. 

두 발로 사유했던 
거인들의 짧은 역사1 ? 플라톤, 노자, 루소 
철학은 걷기처럼 명백하다고 간주되던 사실들을 흔들면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나아가 모든 믿음과 명백한 사실, 신념들을 건드린다. 이렇게 충격을 가하는 일은 예로부터 철학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 생각의 거인들은 걷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파고들었다. 
서양철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는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동굴의 비유’다. 플라톤은 《국가》를 쓸 무렵, 동굴에 꼼짝 못 하고 묶여 있는 포로를 상상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영화관에 앉아 있는 관객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관 밖에 나간 적이 없는, 그래서 스크린에 비친 영상이 모두 현실이라고 믿는 관객이다. 이 포로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지각하는 그대로가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모두가 자신의 감각을 확신한다. 문제 제기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동굴 밖, 현실로 나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걸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고대 중국의 노자는 자신이 걷지 않고 세상을 걷게 만든다. 그는 정확히 바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므로 걷는 것은 그가 탄 당나귀이지 노자 자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노자는 일정한 방식으로 걷는다. 가만히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그는 동물이나 바람, 우주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이 절대적 수동성 속에서 그는 실재적이고 궁극적인 힘, 만물의 움직이는 내적 힘을 발견한다. 따라서 걷는 건 세상이지 그가 아니다. 그럼에도 자기 발로 걷는 것보다 더 잘 나아간다. 
루소는 고유한 즐거움과 개별적인 미학을 지닌, 그 자체로 완결되는 활동으로 산책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까지 사람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할 목적으로 걸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으니 걸을 수밖에 없었다.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들떠서 걷든 아니면 마지못해 걷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도착이었다. 그러나 루소 이후로는 유용성보다 여정과 즐거움이 중요해졌다. 이후로 그에게 자극받은 낭만주의자들이 산책을 예술로, 하나의 존재 방식으로, 거의 삶의 이유로 만들었다. 단순히 어딘가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유와 즐거움을 발견하기 위한 걷기가 탄생한 것이다. 이로써 얼마나 많은 영감과 생각이 탄생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두 발로 사유했던 
거인들의 짧은 역사2 ?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칸트는 매일 정해진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오전 4시 45분에 일어나 시계처럼 정확히 일과를 마치고 산책로를 걸었다. 권력과 행정의 중심지인 성을 지나 부르주아들이 살고 있는 구시가지를 거쳐 서민들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부둣가를 지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향했다. 그는 산책을 통해 온갖 부류의 사람들, 부르주아 계층 또는 서민들을 만나고 그들을 매일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주민들은 그의 산책하는 모습을 보며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 어느 날, 기계가 고장 났다. 급히 신문을 사러 가느라 여정을 바꾼 것이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보편적 선언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는 역사의 걸음이 개인적인 여정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헤겔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거나 수기노트를 펼쳐놓고 앉아서 수업을 하는 정적인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칸트가 ‘숭고미’를 언급할 정도로 장엄한 풍광의 알프스를 대하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철학자다. 그러나 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생각과 역사, 사회의 걸음을 고민했다. 그가 보기에도 모든 것이 걷고 움직이며 변신하기 때문이다. 그의 ‘변증법’은 세상의 자율적 걷기다. 만물, 그중에서도 정신이 구현되는 인간의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현실의 내적 균열을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나 그 재산을 몽땅 형제들에게 줘버리고 ‘이 세계를 벗어나 걷는 것’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평생 구도자처럼 말과 말 사이를 걸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현실은 언어 밖에 있음에도 말로써 그걸 묘사하기 때문에 진정한 철학에 다가설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철학을 끝내기 위해서는 ‘말 사이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밖에도 걷기와 철학의 상관관계는 여러 철학자들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자들의 굳은 생각을 흔드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숫자와 기하학의 도형들에 대한 믿음까지 해체했다. 니체는 덕성이 전혀 도덕적이지 않다고 의심했고, 진실 또한 객관적 사실이 전혀 아니라고 의심했다. 모두 걷기를 통해 고정된 생각을 흔들고 다시 재정립하며 자신만의 생각을 철학으로 밀고 나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마다 고유한 걸음걸이가 있는 것처럼, 이들의 철학적 행보도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두 걷기와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생각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움직이는 근육에서 
분출하는 생각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진리와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보다 나은 것과 선한 것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생각을 보다 확고하게 만들어 더는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멈춰 설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이제껏 걸어온 것 아닐까? 철학자들은 모든 균형 깨기 시도에도, 남아 있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다. 그들은 줄곧 부수거나 파괴하려 해도 온전하게 남을 ‘철학자의 돌’을 꿈꿨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이런 모색의 과정에서 생긴 걸음들이, 생각의 발전 과정만이 있을 뿐. 저들의 여러 갈래 걸음들 속에 우리 인류의 지혜가 발자국으로 꾹꾹 찍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날랜 몸을 만들어야 한다. 무거운 몸이 있고, 민첩한 몸이 있다. 그로부터 무거운 생각이, 또는 경쾌한 직관이 나온다.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 내장에서 분비되는 생각들을 경계하고, 움직이는 근육에서 분출되는 생각들을 선호해야” 한다. 이런 주장에서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몸과 영혼을 구분하지 말라는 것. 몸과 정신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살아 있는 유기체는 모든 생각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한 발짝 한 발짝 밟으며 하나씩 소화해간다. 그렇게 소화하듯 생각하고, 걸으면서 소화시켜야 한다. 저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세계와 호흡하며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보길 권한다. 야외에서 걷고 뛰며, 타고 올라 춤추며 즐겁게 나아가라고 권유하며 함께 걷자 손 내민다. 

출처 :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