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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추천 도서(19.3~20.2)

2월의 추천도서(2545) 바로크, 바로크적인

1. 책소개

 

“바로크 양식의 외양은 금빛 찬란한 황금빛의 화려함과 우아함으로 빛난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중세를 막 벗어난 근대인들의 극심한 혼란과 시대의 우울 또한 담겨 있다. 르네상스라는 극단적인 세계관의 변화, 폭포 같은 새로움과 인식의 모순, 그리고 우주의 중심에서 밀려난 짙은 고독은 시대의 불안을 드러내는 바로크의 증상을 불러왔다. 바로크의 역동성, 오묘함, 장대함, 그러면서도 혼란함, 모호함의 형질들은 그러한 고뇌와 모순으로부터 싹튼 문화적 현상체이다. 하지만 그처럼 뒤틀리고 이격된 틈 속에서 싹튼 바로크는 오늘의 문화적 다양성을 꽃피워 냈다.” -‘들어가며’ 중에서

출처: 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한명식

저자 한명식은 1968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프랑스 리옹시립응용예술학교에서 공간디자인을 전공하였다. 동대학원에서 프랑스 장식가학위를 취득하고, LG화학에서 디자이너로 6년간 근무했다. 현재 대구한의대학교 건축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건축을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는 작품으로 5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건축공간을 설계하였다. 특히 바로크 미학의 생산적 측면을 재조명하는 20여 편의 연구논문은 17세기 서양에 국한된 시간적 공간적 범위를 확장시켜 본질적인 차원에서 바로크의 가치를 공유하며, 이를 통해 모방과 성과에 집착하는 오늘의 삶을 성찰, 개선하기 위한 목적에 기초한다. 17세기 종교개혁으로 실추된 가톨릭의 위상이 바로크를 통하여 회복된 것처럼, 투명하고 깡마른 우리의 모습도 바로크를 통해 살찔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다. 저서로는 『예술을 읽는 9가지 시선』 등이 있다.

출처: 교보문고

 

3. 목차

 

들어가며
프롤로그

1. 아름다운 이유
2. 테네브리즘
3.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4. 잠재된 현재
5. 감각을 넘어서
6. 부재하는 이미지
7. 영혼의 기화장치
8. 가톨릭의 마케팅
9. 몸과 영혼의 합일
10. 자기증식의 공명
11. 바로크적인 욕망
12. 시선의 이중성
13. 은폐
14. 아우라의 조건
15. 무(無)의 형상
16. 심연의 장(場)
17. 바로크적인 구조
18. 부정성의 여운
19. 나타남 또는 사라짐
20. 영화적 양감(量感)
21. 현전에 대한 갈망
22. 상대적 통일성
23. 흐르는 시간
24. 영원한 현재
25. 안과 밖, 밖과 안
26. 유일하고, 또한 상대적인 무엇
27. 세상의 얼개
28. 존재의 낱알
29. 감각은 실재일까
30. 인간이란 무엇인가
31. 모나드
32. 예정된 조화
33. 라이프니츠의 중국
34. 변화의 순리
35. 상대적인 감각
36. 어둠과 침묵의 아우라
37. 몰아적 조응
38.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조화
39. 감각 속에 잠긴 형상
40. 움직이는 미
41. 출렁이는 패턴
42. 시대에 드리워진 어둠의 이유
43. 허무주의적 의지
44. 영혼의 구멍, 광기
45. 주름진 존재들
46. 지금 여기!
47. 권력의 도구
48. 모순과 이격
49. 실재와 가상의 이중성
50. 계속저음과 호모포닉

출처: 본문 중에서

 

4. 책속으로

 

인류가 문화라는 무형적인 산물을 공유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바로크는, 즉 바로크적인 경향의 흐름은 중단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17세기의 바로크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서양사회에 있었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17세기 유럽의 문화가 바로크로 개괄되는 이유는, 반종교개혁이라는 시대적인 과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쏟아놓은 수많은 물량 때문이다. 중세시대, 찬란하고도 막강한 영향력으로 군림했던 가톨릭의 세력이 르네상스라는 대변혁으로 불어 닥친 종교개혁의 저류를 방어하기에 바로크만큼 적절한 대안은 없었다. 그 때문에 17세기를 가로지르는 모든 문화적 산물들이 우리에게는 바로크적인 것들로 수렴된다. -17쪽

예술의 형식, 무엇보다 그 속성이란, 굴곡을 이루며 흘러간다. 심화되거나 완화되는 반복의 파동으로 이어지는 굴곡으로 점층된다. 완고함이 자유로움의 진보를 부추기고 그것을 또 다른 완고함의 보수가 덮는다. 굴곡과 파동은 그처럼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예술이 시간적 개념의 현상이 아니라 삶과 관련된 정신적 현상일 수 있다는 추정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강고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유연함, 이로 인한 나태, 또한 여기에 반발하는 이성의 각성과 필요적 정연함과 이에 맞서는 또 다른 종류의 유연함. 이런 것들은 협곡과도 같이 우리의 세계에서 되풀이되고, 그 영향은 구체적인 삶에까지도 그대로 스며들며 흡수된다. 한 자락의 그러한 파동의 반복이 앞으로도 계속될 그것들과 관계되는 이유로, 각각의 시대에서 파생된 다양한 의지들이 계속 겹쳐지거나 이어지며, 그 시대를 적응시키며, 예술의 세계에 그러한 사실들을 기록, 저장하고 축적하며 또한 꿰어나간다. -39쪽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몇 점 있다. 이 그림들을 잘 들여다보면 동일한 화가가 그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법의 차이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공간 속에서 직접 비교해 볼 수 있는 두 점의 프레스코화, 서구 문화의 가장 인상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아담의 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그것이다. 우선 천장에 그려져 있는 ‘아담의 창조’에 보면 전형적인 르네상스풍의 화법이라 할 수 있는 선의 기법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30년 후에 완성한 ‘최후의 심판’은 누가 보더라도 바로크적인 화풍의 기법이 역력하다. 우선 ‘천지창조’에 주목해 보면 그림 속 내용들의 형상은 전형적인 르네상스 화풍의 양감답게 인물들의 모양이 하나하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으로 넘쳐난다. 연대기 순으로 표현된 중앙의 천장화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홉 장면이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세 점씩 세 묶음으로 나뉘어져, 첫째 그룹은 ‘천지창조’, 둘째는 아담과 이브가 창조된 뒤 타락하여 ‘낙원에서 추방’되는 장면, 마지막에는 ‘노아의 이야기’로 나열된다. 이중에서 특히 ‘천지창조’는 조물주와의 접촉으로 아담에게 생명이 부여되는 찰나의 표현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각각의 장면들이 가지고 있는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일목요연하다.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윤곽은 마치 하나하나의 조각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입체적이고도 독립적이다. 화면 속 각 요소들이 내뿜는 재현의 정합성, 다시 말해, 확연한 독립성의 이유는 화면 속의 각 요소가 가지고 있는 강렬한 색과 형태들의 선적인 요인에 있다. -52쪽

사카이 다케시 교수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도들의 북유럽 전도는, 요컨대, 숲과의 투쟁이었다. 그 숲속에서 중세인의 황량한 삶을 수호하는 밀림 속의 지모신인 숲속 대지의 어머니를 성모마리아로 대체시킨 것이다. 비록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지만, 숲속 삶에는 아득한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나름의 토속 신앙이 있었다. 이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신앙의 형태로, 혹은 문화적 양식으로 이어졌다. 불교, 유교, 기독교가 유입되었어도 샤머니즘 형태의 토속 신앙이 남아 있는 한국처럼, 당시의 기독교는 교세의 확장과 현장의 수용을 위해서 토속 신앙과 문화를 일부 타협점으로 끌고 갔다. 이런 문화적 절충이 북유럽 전반에 걸쳐서 고딕 건축의 형상으로 토착화되고 숲의 형상으로 구현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은 토착화된 지역 각각의 문화적 형질을 담고 있다. -65쪽

중세의 미학은 물질적인 아름다움이 중요치 않다. 오로지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미야말로 신의 아름다움을 그릴 수 있는 요건이 된다고 믿는 원칙을 고수한다. 가장 진실되고 가장 완전한 초세속적인 미에 비해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은 무의미할 따름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절대 진리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된다. 왜냐하면 시각적 이미지라는 것은 제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지라도 대상을 부분적으로 밖에 재현해 낼 수 없으며, 다음으로 그 대상을 재현해 내는 주체에 따라 재현 대상을 각기 다르게 표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시각적으로 재현해 낸 것은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절대적 존재라고 그려낸 자의적 존재일 뿐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절대자를 왜곡하는 행위이다. 또한 그러한 존재는 인간이 제 멋대로 만들어 놓은 절대자의 모습이며, 따라서 잘못된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77쪽

르네상스는 양식사적인 측면에서 선명하고 뚜렷하며, 완전함의 미학으로 개괄된다. 내용의 투명하고 있는 그대로의 전달과 인식을 가능케 한다. 르네상스의 고전성은 그만큼 매끈하게 다듬어진 명징함으로 저항 없는 정보의 흐름을 이끌어낸다. 투명한 긍정성과 최적화된 현재를 예술의 선상 위에 나열시킨다. 마찬가지로 회화적 미장센을 제거하고, 해석의 깊이와 의미가 사라진 담백한 현상을 우리의 눈에 직접 나타내준다. 그래서 어떠한 모호함도, 불확실함도 없는 순전하고 자명한 하나의 현실을 2차원의 화면으로 그려낸다. 획일적이고 평탄한 관람 방식 자체, 마치 포르노처럼, 이미지와 눈이 일대일로 대면함으로써 사물이 가진 고유한 정체성과 개별성을 억제시킨다. 이른바 맹목적이고 직접적인 관람. 보이는 대로의 바라봄이다. 극도로 일체화된 감각을 유발시켜 사정에 이르게 하려는 자위행위와 비슷하다는 빌헬름 훔볼트의 주장처럼, 르네상스는 투명하고도 무결한 타자적 공허에 집중한다. 지극히 순종적인 이해방식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95쪽

하나의 이미지에는 사물들이 잠들어 있다. 그것들은 건드리지 않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무정형의 형상이다. 사물은 이미지의 내륙에 견고하게 달라붙어 그 어떤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 정태적 산물이다. 이 때문에 이미지는 사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과도 무관심한 채로, 마치 응고된 액체처럼 사물을 배경 속에 가둔다. 하지만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라지는 순간, 즉 눈을 감는 순간, 이미지가 품고 있던 사물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사물을 품고 있는 이미지 자체도 마찬가지다. 깨어난 이미지는 스스로 자유로우며, 무중력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그리하여, 품고 있던 사물들을 유영시키고 심지어는 이미지 밖으로 발산해 낸다. 걷잡을 수 없이 무질서하지만 일관된 확산을 실행시킨다. -100쪽

지금 우리의 삶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모든 사적인 것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다. 직접적인 것들이 세계를 완전하게 장악해 버리고, 무엇이든 당장 제시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목적을 위한 과정과 그 언저리의 호흡들은 생뚱맞고 청승맞은 것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직접적인 이미지의 폭우 속을 우리는 우산도 없이 걷고 있는 셈이다. 모든 삶을 둘러싸는 칼 같은 이미지의 정보들은 텔레비전과 같은 현혹적인 미디어를 통해서 상업적인 맹목성으로 우리의 ‘지금 여기’의 껍데기를 까버리고, 굴복시키고, 그 위에 투명한 정보의 폭격을 가한다. 투명함은 원칙적으로 은폐를 통한 아름다움의 묘미를 밀어낸다. 덮개가 투명해지면 사물은 민낯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여자에게 자신의 민낯이 경악이듯이, 투명함은 피부가 없는 살덩어리일 따름이다. 따라서 투명한 정보란 본질적으로 일체의 묘미를 거부한다고 철학자이자 문화학자인 한병철 교수가 적고 있듯이, 정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며, 비밀 속으로 물러나는 지식과는 다른 무엇이다. 그냥 폭로이며, 벌거벗은 포르노그래피일 뿐이다. -106쪽
                                                                                     출처: 본문 중에서

 

5. 출판사서평

 

바로크는 나의 ‘지금 여기’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서구적 기준으로 가꾸어져 있다. 하지만 그 기준의 뿌리는 17세기 바로크, 즉 서구적 고전성에 접붙여진 동양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서구의 절대적 고전성으로 완성된 르네상스의 과학혁명, 특히 항해술의 발전은 중국의 철학을 흡수했으며, 이러한 변화와 극심한 새로움은 중세를 벗어난 시대의 우울, 인식의 모순, 우주의 중심에서 밀려난 짙은 고독과 시대의 불안을 드러내는 바로크의 증상을 불러왔다. 바로크 예술의 역동성, 심연함, 그러면서도 혼란함, 모호함의 형질들은 그러한 고뇌로부터 싹튼 문화적 현상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처럼 뒤틀리고 이격된 틈 속에서 싹튼 바로크는 오늘까지로 이어지는 문화적 다양성을 꽃피워 냈으며, 세계를 구성하는 인식의 기준으로 승화되었다.
바로크는 심연과 어둠의 미학이다. 그리고 바로크적인 어둠의 심연은 내 앞에 세워져 있는 거울처럼, ‘나의 모든 존재’를 느끼며, ‘나 이상의 것’을 발견시키며, ‘지금 여기의 나’를 돌보도록 안내해 준다.

“바로크 양식의 외양은 금빛 찬란한 황금빛의 화려함과 우아함으로 빛난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중세를 막 벗어난 근대인들의 극심한 혼란과 시대의 우울 또한 담겨 있다. 르네상스라는 극단적인 세계관의 변화, 폭포 같은 새로움과 인식의 모순, 그리고 우주의 중심에서 밀려난 짙은 고독은 시대의 불안을 드러내는 바로크의 증상을 불러왔다. 바로크의 역동성, 오묘함, 장대함, 그러면서도 혼란함, 모호함의 형질들은 그러한 고뇌와 모순으로부터 싹튼 문화적 현상체이다. 하지만 그처럼 뒤틀리고 이격된 틈 속에서 싹튼 바로크는 오늘의 문화적 다양성을 꽃피워 냈다.” -‘들어가며’ 중에서
                                                                                        출처: 연암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