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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추천 도서(19.3~20.2)

12월의 추천도서(2495) 장강일기

1. 추천의 글

 

장강푸른 물결 위에 실린 한 여인의 이야기

-송건호 (전 한겨레신문사장)

 

이번 김자동 형의 자당께서 걸어오신 파란만장한 지난 날이 기 록되어 책으로 나오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기쁜 마음에서 인사말을 드리고자 한다.

김형과 나는 친구 사이다. 1954년 경의 일이니, 이미 30년이 지 난 이야기가 되겠는데, 그때 김형과 나는조선일보외신부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대학교를 다녔으니 동창인 셈이지만, 내가 알기로 김형이 나보다 한 두 살 아래인 것과 김형의 성장과정이 특이하다는 점이 나와 다르다.

김형의 조부인 동농 김가진 선생에 대해서는 따로 말을 만들기가 송구스럽고또한 아버지 김의한 선생을 보더라도 젊어서부터 항일의 대열에 참가하여 한독당 간부로 중국에서나 귀국 후나 백범의 민족노선을 일관해서 지킨 분이니 그분의 자제 김형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두말이 필요없겠다. (중략)

 

임정 내부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없지 않았다고 들었다. 귀국 후 중국에 망명했었다고 큰소리 친 인사 중에는 임정과는 별 관계없별로 뾰족하게 한 일도 없이 그럭저럭 지내다가 일본이 망하게 될 무렵에야 부랴부랴 임정에 관여한 사람이 있다고도 들었다. 결국 이런 인사들은 귀국 후의 처신에서 그 정체가 밝혀지고 있지만, 이미 이 기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이 기록이 단순히 지난 날 중국에서의 사사로운 생활만을 그리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밖에서 본 임정이 아닌, 안에서 본 임정의 참모습과 거기에 관련된 인사들의 면모가 잘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사학을 전공하는 학자, 특히 중국의 임정과 8 15후의한국 정치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크게 도움이 되리라 본다.

영영 묻혀 버릴 뻔했던 역사적 사실들이 김형 자당의 생존시에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러한 귀중한 기록이 세상에 남게 된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기뻐 하며이 책이 이 나라의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란.

출처 : [장강일기] 

 

2. 책을 내면서

 

못난 줄 알건만 털어 놓고 하는 말

-정 정 화

 

반 평생 동안 나는 많은 영웅 열사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제대로 시기를 타고나야 영웅도 영웅 값어치를 하고열사도 열사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그 동안 배워 알았다. 내가 반생(半生)을 받들었던 어른 백범도 그랬고, 석오 이동녕(李東奉)선현두 그랬다. 어디 그분들 뿐이랴.

이제 세상에 안 계신 그분들을 회상하며, 나는 더욱 값진 인생의 가치를 깨닫는다. 자연스레 왔다가 자연스레 가는 것. 공수래 공수거 (空手來 空手)라 하면 너무 허망하여 인생이 자칫 헛되기 쉽고사람으로 태어나서 이왕이면 큰일 한번 정도는 해보고 죽어야…… 어쩌고 하면 그만 인생살이가 경망스러워지기 십상이다.

욕심이 없되 허망하지 않고뜻이 있되 결코 나대지 않는 자연의 모습처럼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자연처럼 가는 것이 진정한 영웅과 참된 열사의 길이요 뜻이었거늘하물며 나같은 범부졸부가 뭐 남길 게 있다고 붓을 들고 나섰는지 나 자신이 생각해도 무척이나 후회스럽고 다시 물렸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중략)

 

영웅도 시기에 맞추어야 영웅 소리를 듣는다. 나마 내가 없는 자격에 며칠 저녁의 읽을거리라도 엮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타고난 시대가 험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내 몸 속에 투쟁가나 혁명가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니지, 그렇기에 더욱 나는 내 과거의 행적에 대해 뉘우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보고 듣고 겪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 바람은 이 글이 특히 젊은이들에게 읽혀졌으면 하는 것이다. 바로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내게 엄정한 선생님이며 다정한 선배님이기도 했던 백범의 말을 끝에 옮기면서 이 책을 쓰게 된 내 심정을 대신한다. 나라는 내 나라요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도 없는 것이다. …… 나는 내가 못난 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이 하나,

족이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온 것이다.

출처 : [장강일기] 

 

3. 목차

 

장강 푸른 물결 위에 실린 한 여인의 이야기 송건호 ----- 3

못난 줄 알건만 털어놓고 하는 말 _ 정정화 ----- 7

다시 어머니에 대하여 _ 김자동 ----- 12

북으로 가는 열차------- 17

압록강을 건너다 ------ 49

체 포 _______ 69

1920년대의 상해 ----- 87

상해 탈출 ------ 109

불타는 중국 대륙 —— 129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 —— 147

화탄계의 푸른 물결 —— 173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 189

중경의 임시정부 사람들 ----- 205

대륙을 적신 피와 눈물 ---- 223

일본의 항복 _____235

조국으로 가는 길 _____253

기 쁨과 슬픔의 땅 ---- 265

민족은 분열되고 _____283

북에서 온 사람 _____295

감옥생활 _____311

새벽에 꾸리는 이삿짐 _____319

어머니에 대하여 _ 김자동 __327

정정화 연보 ___ 343

찾아보기 ____347

출처 : 본문 중에서

 

4. 책속으로

 

북으로 가는 야간열차

한 움큼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느닷없이 뺨을 후려쳤다. 목덜미를 타고 내린 한 자락 바람은 어깨죽지며 겨드랑이를 싸늘하게 파고 들었다.

19201월 초순의 서울역.

빼앗긴 땅빼앗긴 나라의 얼어붙은 한겨울 밤은 의주행 열차 앞에 서 있는 젊은 아낙네의 달아오른 열기로 데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방망이질하는 여인의 가슴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차는 어쩌면 저토록 한마디의 말도 없이 엎드려 침묵을 지키는 것일까? 참혹과 고난이 기다리는 땅으로 간다는 묵시의 경고일까? 아니면 빨리 갈 것을 서두르는 재촉의 몸짓일까? 어쩌면 내 결심을 시험해 보는 마지 막 순간의 엄숙한 고요일지도 모른다.

 

상해.

목적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봤다.

시아버님과 성엄.

 

만날 사람찾아갈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봤다.

무사히 갈 수 있을까? 뒤에 두고 떠나는 곳남기고 가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이 모험의 정착지와 재회할 사람들을 새삼스레 확인해 본 것은 이미 내 결심의 확고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탈출일 수도 있었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탈출.

동행인 정필화(鄭粥和)의 재촉으로 북으로 기어오를 철마에 몸을 실었다. 친정 팔촌 오라버니뻘 되는 그가 상해까지 나를 안내해 주기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마침내 열차는 움츠리고 있던 몸을 요란스레 풀었다. 순간 열차는 한번 앞뒤로 세차게 요동쳤고 내 손이 무의식중에 허리께로 간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전대가 잘 간수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창틀에 팔을 괴어 올리자, 열차는 그 신호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천천히 움직 이기 시작했다.

허름한 서울역 역사를 느릿느릿 빠져나가는 열차의 속도와 함께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내게 서서히 다가드는 순간이었다. 열차는 차디찬 선로를 쇠바퀴로 문지르고 비비면서 북쪽으로 달렸다. 수색, 화전, 능곡을 거쳐 서울을 빠져나갈 때까지 바깥쪽에 가득찬 칠흑의 장막이 차 안에 있는 내 모습을 또렷하게 받아 내는 차창만을 응시하고 있었고고양(高陽)의 일산역을 지날 때쯤에서야 새삼스레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신고 있는 나 자신을 문득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길은 멀고먼 길이다. 고난의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다.

열차는 미친 듯이 북으로 내달았다. 한시라도 빨리 서울에서 멀어지려는 앙탈인 둣싶었다. 그러면서도 선로 위를 달리는 열차의 굉음이 질서정연하게 귓전을 때릴 때마다 묻어두었던 지난간 일들이 내 작은 몸 구석구석에서 되살아나 서로 다투며 머리 속을 뭉개고 있었다. (중략) p.17-18

 

중경 생활

1938년 초에 들어섰던 기나긴 피난길도 이제 기강에 와서는 종착지에 도달한 듯싶었다. 중국정부와 우리 임시정부는 더이상 일본군에게 쫓기지 않을 것이며사실 사천성 중경을 떠난다면 이제는 더 갈 곳도 없는 형편이었다. 강소성에서 출발하여 안휘 호남 광동 귀주성을 거쳐 사천성에 이른 장장 5천 킬로미터의 피난길은 중공군이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쫓겨난 만리장정(里長征)과 견주어질 만한 것이었고, 사실 우리끼리도 이 피난 행각을 만리장정 이 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제는 기강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고끝을 보아야 했. 중일전쟁은 거의 만 2년간 계속되고 있었으며일본군의 멈출줄 모르던 진격의 기세도 둔화되기 시작함에 따라 중일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우리가 기강에 도착한 직후, 일본군은 동만주(東滿洲)에서 몽고 및 소련군과 충돌하였다. 노몬한 전투라는 이 무력충돌에서 일본은 장고봉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큰 타격을 입었고그 결과 소련에 대한 일본의 두려움은 한층 더하게 되었다.

당시 남경에는 일본의 괴뢰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친일세력이 숨어서 버티고 있었다. 중일전쟁 전에 중국 국민당 내에서 중국을 추축 진영의 방공협정에 가담시키려 했던 친일세력의 주동자 왕조명이 바로 그 배후 인물이었다. 그는 19398월 치병 (治病)을 핑계로 홍콩에 들러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이른바 국민당 제6회 대회를 개최한 그는 이듬해 3월 남경에 일본의 괴뢰정부를 수립했던 것이다.

왕조명은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에서 병사하였으며그의 처진 벽군(陳寒君)은 전쟁이 끝난 후 한간(漢奸 : 역적을 가리키는 말)으로 처형 당했다.1939년의 유럽은 암흑의 시기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세력은 누그러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고국제질서는 급변했다. 결국 19398월에 독일과 소련은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은데 이어 9월 말에는 소 우호조약까지 체결하여 양국간에 독일의 폴란드 분할 점령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이로써 소련도 제국주의 대열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유럽과 소련 사이의 이러한 새로운 관계 설정은 즉각적으로 중국대륙에 영향을 미쳤다. 중일전쟁의 발발 이후 계속되던 중국의 중앙군에 대한 소련의 원조가 중단되었던 것이다. 우리 임시정부에도 그 여파는 컸다. 소련은 레닌시대에 임시정부에 원조를 한 유일한 열강이었는데, 이제는 일본과 함께 추축세력을 형성한 독일과 우호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제 중국정부와 우리 임정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국 대륙 내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이였다. 일본은 이미 중국 대륙의 해안선을 거의 다 장악했으며중국에서 가장 발전된 연해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넓은 곳이다. 일본이 중국 땅의 대부분을 점령했다고는 하나그것은 중국 내 주요 간선도로를 장악하는데 그쳤고, 점령지역 곳곳의 중국인의 항일 유격 전은 오히려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은 중국과 일본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중국 내부의 갈등이 중국과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악화되고 있었다. 국공관계가 전쟁 초기보다 더욱 악화된 것이다. 일본군과 싸워야 할 중앙군이 신사군이나 팔로군을 공격하는 일이 곳곳에서 속출하였다. 그러니 중국군 사이에서는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분간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중략) p.168-169)

 

 

무엇을 남길까

 

아범의 말로야 어머님의 투쟁기라고 하지만, 막상 내가 지내온 날들의 이야기를 적고 보니 싱겁기 짝이 없다. 작년까지만 해도 웬만한 일들은 속속들이 다 기억이 났었는데, 올해 들어서 갑자기 몸이고 정신이고 예전같지가 않으니 나이는 속일 수가 없는가 보. 그래도 그나마 머리 속에 박혀 있고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길래 없는 글 재주며 부족한 소견으로 원고지를 메웠다.

물론 아범 이 옆에 붙어앉아 거 들지 않았더 라면 당초에 될 일이 아니었고이것저것 자료를 한 보따리씩 정리해 주고 간혹 미심쩍은 것들이 있으면 연락이 닿는대로 당사자들이나 자손들을 찾아가 확인해서 내게 일러 준 것도 아범의 정성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해서 채 반이 되지 못했을 때 백내장 수술 탓인지 정신이 혼미해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홀 밤낮을 꼬박 누워 지낸적도 있다. 아범 이 내가 불러 주는 대로 받아 적으면서 자기가 보기에는 어떠했다느니이런 일도 있었다느니 하며 지난 일들을 끄집어낼 때는, 주위 선생님들께 칭찬받던 어릴 적 아범의 모습을 빼다 박아놓은 것같다.

이번 이사가 끝나면 아무래도 병원을 찾아야 할까 보다. 아프고 고장난 것을 낫게 하고 고치자고 찾아갔던 병원인데, 황색 카드 탓인지 무료 시술 탓인지 백내장 수술을 한답시고 그만 눈 한쪽을 아예 못쓰게 만들어 놨으니 다시는 그 황색 카드 들고 보훈 대상자입네 하면서 병원 문고리를 잡지는 않겠다고 수십번을 벼르긴 했지, 뭐가 잘못돼서 이렇게 됐는지 속시원하게 말이라도 들어 봤으면 싶다. 그랬다가 혹시라도 망령난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아닐지.

이사가 끝나면 우리집 식구 하나가 준다. 손녀가 시집을 가게 됐으니 어쩌면 손주 사위 한 사람이 더 는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범 이 이제는 장인 어른소리를 듣게 되었다. 첫딸 시집 보내기가 무척 섭섭할 것이다. 더구나 집안 형편이 조금 핀 다음에 보냈으면 할 텐데 딸 자식을 마냥 잡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알몸뚱이로 보내는 것만 아니라면 때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제야 셋방살이를 청산한다. 아범도 애를 많이 썼고어멈도 고생이 무척 많았다. 이삿짐을 싸느라고 법석을 피면서도 모두들 즐거운 낯이다. 떠나면서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

해방된 조국을 향해 상해 부두를 떠날 때를 빼고 나면 중원 대륙 수만리를 떠돌면서 웃는 낯으로 발길을 떼어 본 기억이 드물다. 이사가 끝나면 주위 사람들에게 한번쯤 연락해서 새 집 주소라도 알려야겠다. 이미 갈 사람은 다 가고 이제 세상에 몇 되지 않는 옛 동지들인데 연락마저 끊고 지내기란 못할 일이다.

아범이 성엄의 일지와 사진들,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을 따로 정성들여 싸놓았다. 내가 내 손으로 들고 갈 것들이다. 성엄의 일지 안에는 시아버님을 비롯해서 임정에 몸 담았던 혁명투사들의 이름이 낱낱이 적혀 있다. 내가 본국을 드나들던 때의 기록도 빼놓지 않았. 그 일지만큼은 내가 내 손으로 들고 갈 것이다.

손자와 손녀도 짐 꾸리는 데 손을 모으는지 건넌방이 더 수선스럽다. 비록 셋방이었지만 집안의 흔적이 묻어나는 짐들을 차곡차곡 꾸리는 게 참 보기좋다. 나도 거들어야겠다. 이 아침에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싸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와 손녀에게 내 손길을 주어야겠다. 조국의 타오르는 아침을 맞게 될 그들에. (p.323-325)

출처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