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소개
출처:본문중에서
2. 저자
저자 : 김혜진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어비』 『너라는 생활』, 짧은 소설집 『완벽한 케이크의 맛』, 중편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 장편소설 『중앙역』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경청』 등이 있다. 중앙장편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이호철통일로문학상 특별상, 대산문학상, 2021·2022 젊은작가상,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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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목차
미애
20세기 아이
목화맨션
이남터미널
산무동 320-1번지
자전거와 세계
사랑하는 미래
축복을 비는 마음
해설 마음과 구조·이소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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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책속으로
모든 게 지나치게 정답 같은 질문들과 대답들. 옳은 것이 분명한 이야기들. 좋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가치들. 당연히 해야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 어쩌면 자신도, 해민도 살면서 그런 것들을 한 번쯤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그건 희망의 모습과 비슷했다.
삶에 기대를 품는 것이 번번이 자신을 망친다는 결론에 이른 뒤로 미애는 가능한 한 희망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삶은 언제나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만 했고, 그래서 희망을 부풀리는 능력이 불필요하게 발달한 거라고, 자칫하다간 눈덩이처럼 커진 희망 아래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수시로 경고하는 것만은 잊지 않으려고 했다. 「미애」
엄마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 끝나가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다. 더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처럼 침묵을 지킨다. 할아버지도, 언니도.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어른들도 하나같이 말하는 법을 잃은 사람들 같다.
세미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곳은 지나치게 조용하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그래서 결국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린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곳에 남은 건 하나 마나 한 말이거나, 하지 않거나 듣지 않으면 더 좋은 말뿐이다. 이곳엔 진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진짜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20세기 아이」
만옥이 거듭 사양하는데도 순미는 기어이 그것을 만옥의 손에 쥐여주었다. 인절미가 담긴 비닐봉지가 따뜻했다. 만옥은 봉지를 받아 들고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그곳을 나왔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동안 어쩌자고 서로의 사정을 이렇게 속속들이 알아버렸을까 생각했고, 그게 뭐든 차라리 몰랐으면 나았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지난 시간 동안 저 낡은 집이 자신에게 선사한 좋은 일이란 고작 이런 것이고, 이제 이것마저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이 집을 팔면서 자신이 각오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된 셈이었다. 「목화맨션」
누구를 용서한다고요? 뭘 용서하는데요?
그녀가 물었고 남자가 답했다.
홍 사장님요. 제가 다 용서했다고요.
홍 사장이 왜 용서를 받아요?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어요?
그녀는 알고 싶었다. 허름한 주택들에 걸었던 기대를 일찍 철회하지 못했던 게 그의 잘못이었는지, 호재니 기회니 하는 말에 번번이 이끌렸던 게 그의 잘못이었는지, 그것이 이 남자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는 종류의 일인지도. 그러나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입 밖으로 꺼내고 나면 모든 비극적인 결말이 자신을 향할 것 같았다. 「이남터미널」
멀리 집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녀를 채근하던 조바심이 기대감으로 바뀐다. 그 순간, 그녀의 집은 잿빛 담벼락 너머에 자리한 수많은 주택 중 하나가 아니다. 오랜 세월, 권태와 지루함을 견디며 낡아가는 그렇고 그런 주택도 아니다. 그 집엔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순수한 애정과 진실한 마음이 머물러 있다. 이 순간, 그녀의 집은 특별하고 유일한 장소다. 매일 새로운 서사가 탄생하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움트는 공간이다. 「사랑하는 미래」
경옥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집을 청소할 땐 마음이 너무 불행해지지 않으냐고 물었다. 받는 돈은 똑같은데 몇 배나 더 일해야 하는 상황이 억울하지 않으냐는 거였다.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하는 거죠, 뭐.
인선이 답했고 경옥이 물었다.
축복요? 무슨 축복요?
깨끗하게 청소해드리는 만큼 좋은 일 많이 생기시라고 빌어주는 거죠.
경옥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인선을 돌아보았다. 인선의 얼굴에 엷게 웃음이 떠오르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야 경옥이 중얼거렸다.
에이, 설마. 진짜 아니죠?
왜 아니에요? 진짜지. 진짜예요.
진심으로요? 축복을요? 말도 안 돼.
진짜라니. 축복을 비는 마음이라니. 인선은 대답 대신 소리 내어 웃었다. 때마침 경쾌한 팝송이 끝나고 다른 곡이 흘러나왔다. 나의 꿈 나의 모든 것 어여쁜 꽃 한 송이 모진 바람 불어와서 내 꿈을 데려갔네,로 시작하는 인선이 좋아하는 노래였다. 인선은 창을 내리고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창틈으로 신선한 바람이 새어 들었다. 더는 한기가 느껴지지 않고, 이가 덜덜 떨리지도 않는, 정말 봄이라고 할 만한 공기였다. 「축복을 비는 마음」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말과 침묵 사이의 우연과 오해
그 빈틈을 채우는 상상의 가능성
첫번째 소설집 『어비』(2016)에서 “지금으로서는 여기까지밖에 말할 수 없다”(문학평론가 노태훈)는 입장을 견지하던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끊임없이 발화하는 인물들을 선보인다. 한편, 두번째 소설집 『너라는 생활』(2020)에서 끈질기게 2인칭 ‘너’를 호명하던 시선을 확장해 수많은 3인칭 ‘그’들을 작품 속으로 데려온다. 정확하게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실감하는 동시에, 바로 그 점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그리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말하고 또 듣기로 결심한 것처럼.
이를테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20세기 아이」에서 재개발 동네로 이사 간 ‘세미’는 늘 심드렁한 가족들에게도, 중고 거래를 위해 만난 낯선 외국인 아줌마에게도, 집을 보러 온 부동산 고객에게도 해맑게 말을 건다. 세미에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리고 해야 할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목화맨션」의 주인공 ‘만옥’과 ‘순미’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이지만, 서로 끼니를 챙기고 이웃으로서 도움을 건네며 살갑게 지낸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워지자 만옥은 순미에게 가능한 한 빨리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한다. 순미는 그런 만옥에게 계약 기간까지 살겠다며 따져 묻는다. 두 사람이 함께한 8년여의 세월은 그 말들 앞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침묵도 일종의 발화라면,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사람이 있다. 「산무동 320-1번지」의 ‘호수 엄마’는 여러 채의 건물을 소유한 장 선생 대신 세입자들을 관리한다. 그녀는 시시콜콜한 사정을 듣고 싶지 않은 장 선생의 마음을 세입자들에게 전하지 않는다. 대신, 월세를 독촉한 후 집에 가던 발길을 되돌려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한 재민 엄마에게 조의금을 건넨다. 끝내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축복을 비는 마음」에서 청소 업체 고용인과 고용주로 만난 ‘인선’과 ‘양 사장’의 관계는 별다른 마찰 없이 자연스레 끝난다. 인선은 괜한 트집을 잡아 일당을 깎는 양 사장의 치사한 대처보다 변명이나 사과를 내놓아야 할 순간,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태도에 실망감을 느낀다.
이처럼 작품 속 인물들이 일방적으로 쏟아낸 말들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흩어지며, 꼭 전해야 하는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말이야 말하는 사람 마음이”고 “듣는 건 듣는 사람 자유”(「자전거와 세계」)인 어려움 속에서도, 인물들은 “내 말 이해했어요? 무슨 뜻인지 알아요?” 하고 묻는다. “너무나 멀고 어떻게 해도 붙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데에 전력을 다한다. 재차 실패하면서도 또다시 소통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우리는 말과 침묵 사이에서 탄생하는 우연과 오해를 거듭하는 사이, 진정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이해력보다 상상력이 더 필요하다”(「사랑하는 미래」)는 사실에 다가서게 된다.
섣부른 이해보단 솔직한 오해를
집에 관한 이야기이자 집을 둘러싼 마음들의 이야기
등장인물이 놓인 다양한 처지는 전세 사기 대란, 기혼 유자녀 여성의 우울증, 청년 ‘니트족’의 증가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하나 애써 외면해온 문제를 연상케 한다. 개개인의 슬픔과 고통이 사회적 현상과 맥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 소설집의 미학은 통계학적 수치와 뉴스 보도 너머의 진실을 알려준다는 데 있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집주인’ ‘세입자’ ‘고용주’ ‘고용인’이라는 간단한 칭호를 붙이거나, ‘엄마’ ‘애인’ ‘친구’라는 통념상의 역할을 부여하는 대신, 그들이 한 사람으로서 겪는 내밀한 어려움에 주목한다. “어쩌자고 서로의 사정을 이렇게 속속들이 알아버렸을까”(「목화맨션」) 싶지만, 서로의 입장과 사정이 얽히고설키며 발생하는 역학 관계에 주목한다.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소는 ‘부동산’의 형태로 집약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며, 주택을 의미하는 하우스house와 가정을 의미하는 홈home 사이를 오가는 ‘집’의 역동성을 설명한다. 이 모든 층위를 통틀어 ‘과정으로서의 집home as process’ 개념을 제시하고, 이와 더불어 외부의 마찰과 압력에 따라 변하는 마음을 ‘과정으로서의 마음’이라 명명한다. 김혜진의 소설에서 마음의 변화를 보이는 건 늘 외부와 접촉하는 인물이다. 「산무동 320-1번지」에서 골머리 썩고 싶지 않아 세입자 관리를 일임한 ‘장 선생’이나 「미애」에서 아파트 철문을 굳게 닫고 안온한 삶을 유지하는 ‘선우’에겐 마음이 변할 만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마음의 변화가 늘 선한 쪽으로 향할 리는 없겠지만,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선 충돌을 감행해야 한다.
철저히 예측 가능한 범주 안에서 일상을 보내던 주인이 마크를 만난 후 “텅 비고 적막한 공간” 대신 “짐작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미래에 속한” 장소를 얻은 것처럼, “뭔가를 더 알게 되는 게 불편”하여 눈과 귀를 닫고 살던 인선이 경옥의 낯선 말을 듣고서야 바로 그런 말을 “자신이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현재에 구속된 우리가 미래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꺼이 충돌을 감행하는 것이다. 혹은 적어도 마찰을 차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해함보다 유해함이, 차단보다 충돌이 우리에게 훨씬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라는 걸 믿어보는 것이다.
_이소, 해설 「마음과 구조」에서
작가는 “이 책에 실린 소설은 모두 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집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집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마음들에 대한 이야기”(‘작가의 말’)라고 밝힌다. 대부분의 인물은 상대의 고통 앞에서 이해나 공감을 표하기보단, 누가 더 불행한지 겨루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처지를 변호하고 항변하기 바쁘다. 그럼에도 현실에선 좀처럼 발언권을 얻지 못하는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내뱉는 장면은 어떤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것은 김혜진의 소설들이 줄곧 말해온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한 오해가 섣부른 이해보다 효과적이란 사실을 시사한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너’에 대해 말하는 일이기도 하며, 이는 곧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이다. 결국 우리는 한 시절 머물렀던 ‘과정으로서의 집’들을 거치며 ‘과정으로서의 마음’을 체득하게 되고, 그리하여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사랑하는 미래」).
티끌만 한 가능성을 움켜쥐는 절박함
가능할 리 없다는 의심 속에 피어나는 진실한 소망
여덟 편의 이야기는 남루한 현실 속에서 기어코 희망의 조각을 건져 올린다. ‘미애’는 독서 모임 엄마들과 어울리며 평범하게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떠올리고(「미애」), ‘세미’는 길바닥 어딘가 중고로 팔 만한 물건이 있기를 희망한다(「20세기 아이」). ‘만옥’은 남편의 병이 호전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목화맨션」), ‘남우 사모님’은 부동산 임장을 다니며 좋은 기회가 찾아오리란 희망을 놓지 않는다(「이남터미널」). ‘현지’는 한때 친했던 ‘정민’과 다시 화해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며(「자전거와 세계」), ‘주인’은 사랑하는 애인을 보러 가는 길에 희망적인 확신에 사로잡힌다(「사랑하는 미래」). 이런 크고 작은 희망을 빌미 삼아, 그들이 얻는 것은 약속된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버티는 힘이다. 잠깐 떠올랐다 사라지는 신기루일지언정 누군가에겐 지금을 살게 하는 아름다운 불빛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에 어른들의 눈을 피해 어딘가로 사라진 아이들이 두 번 등장하는 점이다. 「미애」에서 미애의 딸 ‘해민’과 선우의 딸 ‘세아’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보러 간다. 「20세기 아이」의 ‘세미’는 물난리 후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자신이 사는 집을 보러 온 아줌마의 딸 ‘지우 언니’를 은목다리로 데려간다. 아이들은 재개발 동네와 깨끗한 동네를 가르는 다리 앞에서, “다리 건너면 21세기, 여긴 20세기”(「20세기 아이」)라고 말할 만큼 어른들의 시선을 체화하고 있지만, 무엇이 더 좋고 나쁜지에 대한 경계는 희미하다. 소설은 어른들이 한눈판 30분 남짓의 시간 동안, 아이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녹지 않은 희망 또는 여전히 남아 있는 희망의 모습이었을까. 우리의 삶에 언젠가 ‘미래’와 ‘축복’이 주어질 수 있을까. 김혜진이 정공법으로 던진 질문이 이제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다.
출처: 「축복을 비는 마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2023년 추천도서(23.3~24.2) > 2023-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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