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책소개
실학의 정신부터 한강의 노벨문학상까지
K컬처의 화려한 비상을 가능케 한 단단한 뿌리를 찾아서
문단의 거목 구중서가 전하는 문화와 역사의 기록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따뜻하고 든든한 지혜
전세계가 한국 문화를 주목하고 있다. K팝과 K드라마가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쾌거가 더해지며 K컬처는 명실상부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폭발적인 문화적 에너지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올해로 구순(九旬)을 맞은 한국 문단의 거목, 문학평론가 구중서가 펴낸 산문집 『문화의 힘, 사람의 길』(창비 2025)은 그 근원을 탐색하는 묵직하고도 흥미진진한 여정이다.
1963년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래 60여년간 평론가, 시인, 화가로 활동하며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이론적 토대를 닦아온 저자는, 단순히 서재에 앉아 이론을 개진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 문화와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발로 디디고 손으로 만지며 기록한 생생한 답사기이자 체험록이다. 삼국시대 역사적 격전지 기벌포, 학자들의 고장이자 분단 소설의 현장인 임진강, 제주4·3의 아픔이 서린 제주 중산간 지대, 『삼국지』의 영웅들이 활약했던 장강 삼협, 그리고 분단된 땅에 있는 평양 등까지. 저자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역사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독자들은 마치 저자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듯한 현장감 속에서 우리 문화의 깊은 뿌리와 저력을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된다.
출처:본문중에서
2. 저자
저자: 구중서
1936년 경기 광주 출생. 1963년 비평활동을 시작한 이래 문학평론가, 화가, 시조시인으로 활동했으며 수원대 국문과 교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문학사론』 『분단시대의 문학』 『한국문학과 역사의식』 『자연과 리얼리즘』 『문학과 현대사 상』 『한국 천주교문학사』 『모자라듯』(시조 선집) 등이 있다. 요산문학상, 구상문학상 특별상, 유심작품상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출처:본문중에서
3. 목차
책머리에
제1부
문화의 힘으로 살아가는 나라
한곳으로 가는 다른 길들
대륙을 가로질러
평양에서 맞은 개천절
제2부
하늘과 땅 사이
지금 여기의 문학으로
문화의 허리띠 임진강
실학의 고장 너른 고을
일본에서 퇴계는 제2의 왕인
한국의 시조와 세계문학
제3부
1960년대 명동의 문학사
휴전 70년의 한국문학
적군 묘지의 시
촛불의 광장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일
신경림 시인을 보내며
제4부
처용과 베어울프
문학과 현대사상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제3세계 문학이 지향하는 것
작별 없는 한강의 소설
제5부
시대의 그늘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그러나 그 희생의 현장을 소재로 한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다른 차원의 정신적 가치가 형성된다. 총격에 의한 집단희생 지역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남동생이 있고, 피가 흐르게 깨문 손가락을 동생의 입에 넣어주는 누나가 있다. 누나의 손가락 피를 동생이 빨아 먹는다. 이 감각에서 누나는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벅찬 행복을 느낀다. 누구를 탓할 겨를도 없는, 이 순간의 절대적인 행복론이 있다. 이 행복의 정신적 가치는 굳이 복음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간적 문화의 영역이다. 근원적 존재론과 보편적 가치 인식도 문화의 명제이다. 인간적이고 시민적인 문화를 숨 쉬며 세계의 마당에서 다 함께 만나야 한다.
―「책머리에」 부분
2000년대 초 어느 봄날에 나는 문우 몇명과 함께 개성에 가보았다. 그곳 성균관으로 건너가는 돌다리가 선죽교였다. 다리 한쪽 끝 둔중한 석재에 붉은빛이 있었다. 북쪽의 안내원이 말했다. “이 돌 위의 붉은빛이 정몽주 선생이 흘린 피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석질에 원래 있는 철분의 빛이 아니겠느냐고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유로이 생각하십시오.” 전설은 민중이 그리워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나는 그 붉은 돌이 포은 정몽주의 피에 젖어 있다고 보고 싶었다.
―「문화의 힘으로 살아가는 나라」 부분
이날 개천절 행사에는 남한의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도 참석했다. 행사 뒤풀이 예술축전 마당에서는 남북의 동포들이 한데 어우러져 신명나는 춤판도 벌였다. 두레패의 농악 장단은 그곳에서도 완전히 전통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남쪽 동포들이 탄 관광버스가 떠날 때 강동군 지역 주민들이 하나같이 정성 어린 환송을 했다. 두 손을 높이 들어 흔들며 “또 만납시다!”를 연호한다. 차 안에서 우리도 손을 흔들며 가슴이 벅차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평양에서 맞은 개천절」 부분
16세기에 지식인들이 모여 시를 짓다 밤에 촛불을 들고 장안 거리를 걸어가던 나라. 이 촛불 행렬 속의 시인이 죽창을 들고 의로운 전장을 찾아가던 나라. 그 시대에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던 힘의 근거는 무엇인가? 진리를 즐기며 민중을 위하는 문화, 그것이었다. 역사 안에서 그 문화의 의미는 시대를 넘어 길이 이어질 것이다. 어떤 시대라도 앞과 뒤가 없이 단층만으로 존재하지는 못한다. 한 시대 안에서도 현실의 전형적인 현장이 없으면 의미가 공허해진다.
16세기 담양 정자문화권을 살피는 것은 21세기 오늘의 한국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역사적 역동성을 그때 그곳으로부터 오늘 우리가 얻을 수 있다. 8년간 천리 산길을 달려 철학 편지를 나른 심부름꾼의 짚신값을 오늘 우리는 어디로 보내줄 수 있을까.
―「하늘과 땅 사이」 부분
금문다방과 극장 시공관, 유네스코 건물 앞쪽에 있는 술집 은성과 서점 문예서림 등은 가난했던 명동 시절이었지만 문인들의 꿈과 낭만의 거점들이었다. 금문다방 맞은편 좁은 골목 안에 있던 판 잣집 주점, 속칭 쌍과부집 또한 송원기원과 금문다방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연쇄점이었다. 주점의 유리문을 반쯤 열고 기둥에 기대 서서 박봉우 시인은 담배를 한대 피워 문다. 그리고 씩 웃으며 주점 안의 문우들에게 한마디 한다. “조국과 민족을 모르는 놈들이 무슨 시인이냐!” 이 외침이 불편한 객기로 들리지 않는 것은 그가 얼굴 에 웃음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은성 주점에 들러 「부용산」 노래를 한가락 뽑기도 한다. 그리고 문예서림에 들러서 한권의 책을 뽑아들고 너무 오래 서서 읽고 있다. 이 모습을 본 문예서림 사장은 “박 시인, 그 책 그냥 가지고 가시오” 한다. 팔지 않고 그냥 주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난한 박봉우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시를 쓰고 있었던가.
―「1960년대 명동의 문학사」 부분
내가 쇠창살 쪽으로 서서 간수 순경을 불렀다. 이 주전자의 물을 다 쏟아버리고, 소주 두병을 사 신문지로 싸서 숨겨 가지고 와서 주전자에 부어달라고 했다. 나는 김수환 추기경이 전한 영치금 봉투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만원짜리 몇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간수는 누구 목을 떼려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했다. 나는 우리가 글을 쓰는 사람들인데 무슨 죄인이 아닌 걸 알지 않느냐고 했다. 요행으로 이날 밤의 음주 작전은 성공이 되었다. 술을 마시며 신경림 시인이 말했다. 광주에서 죄 없는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죽었는데, 문학을 한다는 우리가 감옥에라도 한번 간다는 것은 수지맞은 행운이다. 우리 셋은 당연히 동감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서대문교도소 미결감으로 이송되는데, 갇히는 사람이 많아 수갑이 부족하다. 사람은 셋인데 수갑이 둘뿐이라 함께 묶기가 어색한 광경이 되었다. 이시영 시인이 면회를 왔었는데 이 희한한 장면을 시로 써 화제가 되었다.
―「시대의 그늘」 부분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4·19혁명에서 촛불의 광장, 그리고 한강의 소설까지
생생하게 펼쳐지는 문화·역사 답사기
제1부는 한국 문화의 원류를 찾아 떠나는 지적이고도 감성적인 여정이다. 어린 시절 겪은 체험과 함석헌의 역사관, 칸트의 철학 등을 교차시키며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내면의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임을 역설한다. 특히 분단된 땅의 평양이나 옛 백제의 기벌포 등을 직접 답사한 기록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자긍심을 생생하게 일깨운다. 나아가 중국의 장강 삼협과 삼유동 등 『삼국지』의 무대를 직접 누비며 동아시아 문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 문화의 위치를 조망하는 거시적인 시선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지적 자극을 선사한다. 제2부에서는 실학의 고장 경기 광주를 중심으로 이익, 안정복, 정약용 등의 삶과 사상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백성을 하늘로 섬기는 민본주의와 실사구시 정신이 어떻게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한국의 근대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졌는지, 퇴계 이황이 일본 메이지유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도 흥미롭다. 또한 한국 시조의 정형미를 일본의 하이쿠 및 세계문학의 보편성과 연결하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어떻게 가장 세계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제3부는 현대 한국문학사의 가장 뜨거웠던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1960년대 명동의 다방과 주점을 오가며 김수영, 박인환, 천상병, 신동엽 등 당대 문인들과 나누었던 가난하지만 치열했던 문학적 열정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또한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촛불혁명에 이르는 역사의 변곡점마다 문학이 어떻게 침묵하지 않고 ‘참여’와 ‘실천’으로 시대를 밝혔는지 생생하게 증언한다. 저자가 직접 겪은 필화 사건과 투옥 경험 등은 한국문학이 걸어온 가시밭길과 영광의 순간들을 오롯이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제4부에서는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보편적 흐름 속에서 조망하며 그 위상을 재확인한다. 신라 향가 「처용가」의 관용 정신과 영국 서사시 「베어울프」의 정복 서사를 비교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허무주의를 비판하며 제3세계 문학으로서 한국문학이 지닌 생명력을 역설한다. 특히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에 대한 산문은 이 책의 백미다. 저자는 5·18과 4·3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작별하지 않는 형제애의 행복론’으로 승화시킨 작품 세계를 분석하며, 이것이야말로 한국 리얼리즘 문학이 도달한 ‘총체성 속의 소통’임을 설파한다.
제5부는 저자가 동시대를 호흡하며 깊은 인연을 맺었던 우리 시대의 거인인 김수환 추기경, 김대중 전 대통령, 조오현 스님과의 따뜻한 일화를 담고 있다. 유신독재 시절 잡지 『창조』를 통해 인연을 맺은 김수환 추기경의 고뇌와 인간적인 배려, 민주화운동의 동지로서 곁에서 지켜본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과 지성, 그리고 문단의 마당발로서 베푸는 삶을 줄곧 실천하며 문인들을 후원했던 조오현 스님과의 추억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살아 있는 이면이다. 권력이나 이념이 아닌 오직 ‘사람’을 향한 사랑과 실천만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준 이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그리움을 남긴다.
서로의 마음을 잇고 시대를 밝히는
‘현역’ 지성인의 굳건한 문장들
『문화의 힘, 사람의 길』은 90년이라는 긴 세월을 ‘현역’으로 살아온 지성인이 온몸으로 밀고 나간 사유의 궤적이자 한국 현대문화사의 정수다. 실학의 정신에서 출발하여 60년대 명동의 낭만과 저항, 엄혹했던 독재 시절의 투쟁, 그리고 촛불혁명과 노벨문학상을 아우르는 이 방대한 기록은 단순한 회고를 아득히 넘어선다. 평생을 바쳐 탐구해온 문화의 힘과 사람에 대한 믿음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묵직한 울림으로 전한다.
K컬처가 전세계를 매혹시키며 화려하게 비상하는 지금, 그 아래 자리한 단단하고 깊은 뿌리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막대하다. 또한 급변하는 사회와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길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현대인들에게, 저자의 깊은 통찰과 따뜻한 시선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아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역사의 격랑을 헤치며 뚜벅뚜벅 걸어온 한 거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자신만의 ‘사람의 길’을 발견하고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어른이 건네는 가장 따뜻하고 지혜로운 길잡이다.
출처: 「 문화의 힘, 사람의 길 」 출판사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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