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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추천 도서(21.3~22.2)/2022-1

1월의 추천도서 (3228) 태종처럼 승부하라

1. 책소개

 

골육상쟁을 마다않은 철혈군주는 잊어라
정치적 리얼리스트 이방원의 맨얼굴

 

태종 이방원하면 어떤 것이 먼저 떠오르는가. 대부분 패도覇道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형제의 희생을 강제한 두 차례 왕자의 난이며 사돈, 처가를 멸문시킨 권력욕을 상기하면 당연하다. 한데 정치학자가 쓴 이 책은 태종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해석으로 인간 이방원을 조명하는가 하면 한비자, 마키아벨리, 주자 등의 틀을 가져와 이방원의 ‘정치’를 분석한 덕분이다. 그런 만큼 궁중암투 수준을 벗어난,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충분한 것은 물론 태종의 치세를 제대로 이해하여 바람직한 정치 지도자상을 다시 생각하게끔 해주는 의미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태종~성종으로 이어지는 ‘군주 평전 시리즈’의 첫 권이다. 당연히 권력투쟁만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손실답험법, 노비중분법, 신문고 등 직소제도 등 제도개혁, 정도전에 이어 추진한 ‘소중화주의’ 외교정책 등 ‘정치’도 꼼꼼히 살핀다. 또한 태종의 이데올로그 권근, 뛰어난 이재吏才로 태종을 보필한 하륜 등 주변 인물사도 녹여내 읽는 재미를 더한다. 한마디로 일반 독자에게는 역사 읽는 재미를, 정치인을 꿈꾸는 이들에겐 어떤 의미에서든 ‘교훈’을 주는 책이다.

 

출처: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박홍규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 분야는 한국 및 동양 정치사상이고 저서로는 《山崎闇齋の政治理念》, 《삼봉 정도전: 생애와 사상》이, 역서로는 《일본 정치사상사: 17~19세기》, 《마루야마 마사오: 리버럴리스트의 초상》 등이 있다.

근년에 한일 역사화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한국과 일본, 역사 화해는 가능한가》(공저), 《한중일 역사인식 무엇이 문제인가》(공역)를 출간했고, 〈한일 역사화해의 전개 과정: ‘책임론적 화해’에서 ‘포용론적 화해’로〉, 〈‘책임론적 화해’를 넘어서: ‘한일화해 3.0’을 위한 사상적 토대〉를 발표했다. 

출처:교보문고

 

3. 목차

 

프롤로그
태종 연보

1부 권력을 쟁취하다[잠저기: 1367~1400]
1장 변방 무장의 아들로 태어나다
근거지는 함경도|무장 이성계의 화려한 등장|아버지가 바란 문사의 길
2장 혁명가 이방원
새 왕조 개창의 변곡점, 위화도 회군|혁명의 시간을 맞이하다|세 명의 사상가에게 묻다
3장 시련의 시간
건국 이후의 반전|명분도 놓치고 세도 꺾이고
4장 무인정변의 지침서, 《한비자》
또다시 폭력|정도전 대 이방원|《한비자》의 흔적

2부 야누의 정치를 구사하다[집권 전반기: 1401~1410]
5장 정변이 초래한 이중구조
한비자적 상황 관리|태종의 이데올로그, 권근|유교적 군주의 길
6장 유교국가의 기틀을 만들다
하륜, 권력을 향한 정치적 여정|조선왕조의 하드웨어를 구축하다|유교적 정치 운영의 제도적 기반
7장 한비자의 술치를 구사하다
한비자의 양권의 정치술|사돈 이거이, 첫 번째 가지치기|처남 민무구ㆍ민무질 형제를 처단하다
8장 중화공동체 전략을 추진하다
정도전, 국가 전략을 세우다|태종, 정도전 노선을 계승하다|소중화의 위상을 확보하다

3부 유교적 군주로 거듭나다[집권 후반기: 1410~1418]
9장 수성의 시대를 열다
소멸된 정변 구조|유신의 교화를 선언하다|이색 비명 사건이 터지다
10장 성군을 꿈꾸다
태평성대가 도래하다|태종이 변하다|성군의 모습으로
11장 공론정치를 실행하다
공론정치란 무엇인가?|다시 시행되는 저화법|노비 문제를 종결짓다, 노비중분법
12장 술치의 잔재, 아픈 상처들
‘일탈’하는 양녕|이양우, 사지에서 살아나다|민무회ㆍ민무휼, 불충에 빠지다

4부 권위를 창출하다[상왕기: 1418~1422]
13장 세자를 교체하고 전위하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파국으로 향하다|왕위를 승계하다
14장 상왕정치 체제를 구축하다
병권은 내가 가진다|상왕정치의 장치들|나이 어린 세종을 훈육하다
15장 소중화 조선, 대마도를 정벌하다
정벌의 목적은 무엇일까?|조선의 국가 전략과 대 일본 정책|소중화 질서를 구축하다
16장 정치적 영광을 실현하다
권력정치의 유산을 정리하다|태상왕의 존호를 받다|수문태평의 시대를 열다

에필로그
저자 후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이방원은 1367년(공민왕 16) 이성계의 본거지인 동북면 함주 귀주동(함흥시)에서 태어났다(32쪽).

1382년 16세에 진사과에 급제했다. 한 마을에 사는 길재와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해, 이듬해 문과에서 7등으로 급제한다. 같은 동기의 급제자보다 매우 이른 나이였다(36쪽).

진사시에 합격한 1382년에 16세 이방원은 결혼했다. 그의 처가 민제의 민씨 일족은 대체로 문반직을 역임해 문반 사대부 가문으로 위상을 점하고 있었다. …… 민씨 부인은 장인과 처남인 민씨 형제들을 이방원의 정치적 후원세력으로 만드는 데 가교 역할을 했으며, 그들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37쪽).

회군 당시 전리정랑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던 22세의 이방원은 개경에 남아있었다. …… 아버지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해 개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그는 퇴궐하면서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포천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때 친모 한씨는 경기도 포천 재벽동의 한 농장에 있었고 계모 강씨는 같은 포천의 철현에 있는 농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 이방원은 두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이씨 집안의 오랜 군사적 근거지가 있는 동북면의 함흥 쪽을 향해 출발했다(44쪽).

1392년 3월 17일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명나라 황제를 만나고 귀국하는 세자를 황주에서 맞이한 뒤 해주로 가서 사냥을 하던 중이었다. …… 정몽주는 간관 김진양 등을 불러 이성계 무리들을 탄핵할 것을 사주했다. ……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친모의 상중에 있던 이방원은 4월 2일 이성계를 찾아가 설득해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 결국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고 이성계에게 청했다(50쪽).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서라도 정몽주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결심한 이방원은 …… 4월 4일 이방원은 심복인 조영규, 조영무, 고여, 이부 등 45명을 보내 선죽교를 건너던 정몽주를 철퇴로 쳐서 무참하게 살해했다(51쪽).

정몽주를 격살한 이방원은 신속하게 조준, 남은 등 유배에 처해진 이성계파 인물들을 불러들이도록 조치했고, 공양왕을 압박해 정몽주를 따르는 인물들을 조정에서 몰아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7월 17일 마침내 이방원이 주도해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53쪽).

이방원의 정몽주 살해에는 과격한 폭력적 방법이 구사되었지만 공공선의 관점에서 용인될 만한 여지가 있다. 이방원은 새로운 왕조의 설립이라는 시대의 요구(네체시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 이방원은 도덕적 비난을 무릅쓰더라도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망해가는 고려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61쪽).

왕자들에 대한 봉군 조치가 취해진 다음 날인 8월 8일 이방원을 동북면으로 보내 이성계의 4대 선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묘지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묘지 이름을 짓게 했다. 물론 동북면 절제사에게 맡겨진 당연한 임무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상황은 이방원이 바라는 방향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68쪽).

8월 20일 공신 배극렴ㆍ조준ㆍ정도전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적을 기준으로 정하기를 주장했다. 나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장자가 우선 대상이 되고, 공적을 기준으로 한다면 개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자가 선정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장남 이방우는 이미 사망했으니 차남 이방과이거나, 비록 행위 자체에는 도덕적인 문제가 있으나 건국의 공으로 본다면 이방원이 세자로 선정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개국공신들은 의견을 모았다(70쪽).

8월 26일 태조의 병이 위중해지자 …… 저녁 8시경 이방원은 셋째 형인 이방의와 넷째 형인 이방간, 상당군 이백경과 함께 대궐을 빠져나와 집으로 말을 달렸고 대기하고 있던 사병을 이끌고 정변에 나섰다. 이때 이방원을 따르는 자는 처남인 민무구ㆍ민무질 형제를 비롯해 이거이ㆍ조영무ㆍ신극례ㆍ서익ㆍ문빈ㆍ심귀령 등 측근들과, 사병 혁파를 피해 숨겨둔 기병 10명, 보병 9명, 그리고 몽둥이를 든 하인 10명 등 총 29명이었다. 여기에 정릉 경비를 위해 파견 나온 안산군수 이숙번의 군사가 합류했다(84쪽).

그 결과 세자와 정도전 등이 죽고, 10일 후 태조 이성계는 체념한 상태에서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이렇게 이성계와 정도전의 나라는 끝났다. …… 이방원은 정몽주를 격살하고 고려를 무너뜨렸듯이, 이번에는 정도전을 참살하고 이성계와 정도전의 나라를 끝장냈다. 이 두 사건에서 그가 구사한 방식은 동일했다. 그는 냉혹하게 폭력을 사용해 처참하게 정적을 살해하고 정국을 반전시켰다(86쪽).

태조와의 부자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정성을 다했으며(친친親親의 시행), 공신들과의 삽혈동맹(굳은 약속의 표시로 동물의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거나 입에 바르던 일), 정몽주와 길재의 복권, 신관료의 충원(세 가지는 존현尊賢의 시행) 등을 통해 의합체제의 복원을 기도했다. 나아가 유교적 프로그램에 입각한 정치ㆍ사회의 제도화에 매진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인정仁政의 실현을 추구했다. 표면적으로 태종은 유교적 군주였다(110쪽).

이방원의 정변 행위는 계합적 시각을 현실화시켰다. 권력은 누구의 전유물도 아닌 강자가 쟁취, 장악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방원은 행위를 통해 보여주었다. …… 실제로 얼마 후 이방간에 의한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고, 태종 2년에는 조사의의 난이 일어났다. 따라서 태종으로서는 유교적 국가 정체성의 회복ㆍ유지에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초래한 한비자적 상황을 관리ㆍ극복해야만 하는 이중구조에 처하게 되었다. 이중구조 속에서 정국을 운영하는 태종은 두 얼굴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한편에서 바라보면 유교적 군주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다른 편에서 바라보면 한비자적 군주의 얼굴이 보였다(111쪽).

태종 2년 11월 5일 안변부사 조사의가 그의 아들 전 장군 조홍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조사의의 난’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거병의 이유를 실록은 아주 짧게 말한다. “조사의는 곧 현비顯妃 강씨의 족속인데 강씨를 위해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었다.” …… 자신의 거병은 반역이 아니고, 불의에 짓밟힌 정의를 복원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무인정변은 정당성이 없고, 무인정변으로 왕위를 차지한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17쪽).

태종 1년 2월 12일 태종은 공신들과 함께 신명께 제사하고 굳게 맹세하며 우호를 맺었다. 그들은 맹세를 통해 의합적 군신관계로 굳게 결속할 것을 다짐했다. 맹약을 깨고 배신하는 경우 받아야 할 징벌까지도 거론하며 영원히 지킬 것을 맹세했다. 이렇게 유교적 군신으로 새롭게 관계를 설정하는 한편 그들이 따라야 할 모델로서 길재ㆍ정몽주ㆍ김약항과 같은 전조에 충성을 바친 신하들을 불러오고자 했다. 태종의 목적은 분명했다. 자신의 신하들이 이들과 같은 충신이 되어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의합체제가 복원되기를 기대했다(132쪽).

태조 7년 8월 26일 이방원은 정변을 일으키고, 하륜은 반역에 참여한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 하륜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도달한 하륜은 사람들이 병사를 이끌고 와 협조하도록 독려했다(143쪽).

태종 초기의 통치 기구는 정치의 의정부, 재정의 사평부, 군사의 승추부로 이루어진 3부 구조가 되었다. 정치의 문하부, 재정의 삼사, 군사의 중추원이 함께 참여해 국정 현안을 논의하던 도평의사사가 해체되고 3부 구조로 개편되었다는 것은 신하들의 권한이 약화되고 국왕의 권한이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149쪽).

태종 1년 개국 이래 처음으로 동ㆍ서 양계의 토지를 양전해 1만여 결의 수세지를 추가로 확보했다. 태종 5년부터 6년까지는 양계를 제외한 6도에 대한 토지 측량을 대대적으로 실시해 당시까지 왜구로 인해 양전하지 못한 연해의 진황전과 개간전 등 30여 만 결을 추가로 확보했다. 나아가 태종 11년부터 13년에 걸쳐 평안도ㆍ함경도의 양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했고, 태종 13년에 제주도의 토지를 양전했다. 이렇게 해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한 양전ㆍ개량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 고려 말의 80여 만 결에 비해 40여 만 결이 증대되어 120여 만결에 달하는 성과를 이루었다(156쪽).

태종 7년부터 집권 말기까지 태종은 경연에서 한 번도 강독하지 않고 태종 18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태종의 경연 횟수는 집권 18년 동안 기록상으로 보면 15회 정도에 불과하다. 경연에서 가장 친근하던 강독관은 김과였는데 그와 강독한 책은 《대학연의》, 《상서》, 《십팔사략》, 《중용》 등 4종뿐이었다(162쪽).

태종의 왕권 강화는 자의적ㆍ전제적 권력 추구와는 거리가 있었다. 만약 태종이 그럴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아마도 사찰기관이나 첩보기구를 강화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황제들은 환관과 같은 친위조직이나 강력한 첩보조직, 그리고 대량숙청을 통해 황제권을 강화한 바 있다. ……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제도화한 자문ㆍ보좌 기구와 6조의 기능 확대는 왕의 절대적 권력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닌, 강화된 왕권으로 권신세력을 억제함으로써 의정부와 권신들로 대표되는 소수의 중신들에게만 열려 있던 정치적 논의 공간에 다양한 소장파 관료들과 사대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166쪽).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내면을 파고든 인물 평가
이방원의 정체성을 파악한 견해가 탁견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변방 무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즐긴 ‘무인’이면서 고려 우왕 때인 16세에 진사과에 7등으로 합격한 유자儒者이기도 했다(37쪽). 이런 사실에 주목하면 태종 치세 후반기를 다시 보게 된다. 이뿐 아니다. 힘으로 얻은 왕좌는 또 다른 누군가가 같은 정변을 연출할 수 있다. 태종으로서는 유교적 국가 정체성의 유지에 노력하면서 한비자적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이중구조에 처했다(111쪽). 이는 유교적 인정仁政과 과감한 정치적 숙청이 병존한 태종 치세를 이해하는 열쇠로 작용한다.

냉혹한 승부사 결단의 정치가
이방원은 1392년 정몽주를 격살한다. 1398년엔 무인정변을 일으켜 정도전 등을 죽이고, 세자인 이복동생 방석을 몰아낸다. 모두 부친 이성계의 뜻을 어긴 행위였다. 권력의지를 드러낸 결단이었지만 새로운 왕조의 설립이라는 시대의 요구(네체시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승부사라 할 수 있다(61쪽). 그런가 하면 누이(경신공주)의 시부이자 개국공신인 이거이, 처남이자 정치적 후원세력이던 민무구ㆍ무질 형제, 세종의 장인이자 떠오르던 실세 심온 등 외척을 가차 없이 쳐내 왕조의 권력 기반을 정비하는 정치력을 행사한다.

현실에 바탕한 ‘빅 픽처’를 그리다
왕권을 튼튼히 한 태종은 집권 후반기 들어 이상적 유교국가를 꿈꾼다. 1410년 ‘유신의 교화(維新之化)’를 추구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하고는 ‘공론정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교국가를 지향한다. 대사면을 취하고(296쪽), 논란과 실패를 거듭한 저화법의 회복을 두고도 자신의 독단이나 측근과의 비밀스런 논의가 아니라 신료들과의 공개적 논의를 통해 추진하는 등이 좋은 예다. 1418년 3남 충녕에게 전위하고도 “군국의 중요한 일은 친히 청단하겠다”며 상왕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10년 동안 유지하려 한 것(454쪽) 역시 태종의 ‘빅 픽처’에 든다 하겠다.

색다른 시각 놓쳤던 사실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을 태종, 나아가서는 역사를 읽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정치학자의 저술이기에 가능한 측면이라 하겠는데, 의합義合과 계합計合, 술치術治와 양권揚權, 네체시타와 비르투, ‘성군 프로젝트’ 등 학술 용어, 신조어가 책 곳곳에 등장해 설명을 돕는 것이 그렇다. 여기에 위화도 회군 당시 이방원이 경기도 포천으로 달려가 모친 등 가족을 이끌고 함흥 쪽으로 도피하려 했다든가 양녕을 세자위에서 내친 후 당초 세종이 아니라 양녕의 아들을 후계로 삼으려 논의한 사실, 세종 대 치적으로 꼽히는 대마도 정벌이 실은 태상왕이던 이방원의 주도로 이뤄진 사실 등 그리 알려지지 않을 사실들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묘미다.

이 책은 태종~성종으로 이어지는 ‘군주 평전 시리즈’의 첫 권이다. 당연히 권력투쟁만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손실답험법, 노비중분법, 신문고 등 직소제도 등 제도개혁, 정도전에 이어 추진한 ‘소중화주의’ 외교정책 등 ‘정치’도 꼼꼼히 살핀다. 또한 태종의 이데올로그 권근, 뛰어난 이재吏才로 태종을 보필한 하륜 등 주변 인물사도 녹여내 읽는 재미를 더한다. 한마디로 일반 독자에게는 역사 읽는 재미를, 정치인을 꿈꾸는 이들에겐 어떤 의미에서든 ‘교훈’을 주는 책이다.

 

출처: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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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처럼 승부하라:권력의 화신에서 공론정치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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