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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추천도서(24.3~25.2)/2024-09

9월의 추천도서 (4209) 무상을 넘어서

 

 

1. 책소개

 

평생을 법조계에 몸담아 온 청렴결백하고 소외된 이들의 동반자였던 김홍섭 판사의 수상집이 출간됐다. 그가 떠난 지 3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의 모범과 신조가 이 책을 통해 생생히 살아나 교훈과 감동을 준다. 이 책은 김홍섭 판사가 생전에 발표한 바 있는 유고들을 모아 한권으로 엮은 것이다. 

진리를 찾아 정신의 안정을 얻기까지 산사를 편답하면서 얻은 사색, 법조인으로서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갈파한 글과 종교인으로서 오직 진리 앞에서만 고개를 숙이는 경건한 마음으로 일관된 고고한 인생관이 담긴 글들이 실려 있다. 신자들은 그의 철저한 신앙의 자세를 배울 수 있고 비신자들은 그가 진리 를 찾기까지의 편토역정을 읽게 되면 무언가 생각할 자료를 얻게 될 것 이다.

 

출처:본문중에서

 

 

 

 

2. 저자

 

저자 : 김효섭

 

1915년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느 일본 법조인 가정에 사환으로 들어갔다. 피눈물나는 노력과 어깨 너머로 배운 공부를 바탕으로 1940년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해방 이듬해에는 서울 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부장판사, 광주고등법원자, 서울고등법원장 등을 역임했다. 화려한 이력에 비해 그의 청렴결백함은 가족들을 힘겹게 했고, 그 자신을 늘 가난한 사람이 되게 했다. 성프란치스코처럼 가난조차 사랑했던 그는 사형수들의 형이요 아버지로서 그들을 마지막까지 동반했으며 소외된 이들의 위로가 되고자 노력했다.

 

뛰어난 감수성으로 시를 써 1945년에『무명』이라는 시집을 출판했으며 작고하기 몇 해 전인 1960년에『무상을 넘어서』라는 수상집을 출간했다. 30년이 지난 오늘도 그의 모범과 신조가 책을 통해 생생히 살아나고 있다.​

 

출처:본문중에서

 

 

 

3. 책속으로

 

 공은 자라나실 때부터 물질의 혜택을 받지 못하셨고, 노동을 하며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치시고 …  일생을 통하여 공이 정당한 보수 이외엔 한 푼도 받은 일이 없는 청렴한 인사라는 것을, 천하 사람이 다 증명하고 있습니다. (P. 521)

 

 검소한 생활에 자기 생일 잔치를 거부하는 그 … 그는 검소하고 언제나 겸손하였다. 양복을 지어 입는 일은 없고 시장에서 중고품을 사 입었으며, 외투는 미군 모포지에 물감을 들여서 입었고, 비닐신이나 검정 고무신으로 출퇴근하는 수가 많았다. (P. 527)

 

 “불행히 세계관이 달라서 여러분과 나는 자리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 머리를 푹 숙인 채 한참 동안 묵념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면 어느 편이 죄인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불행히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 점 이해하여주시기 바랍니다.” … 교도소로 찾아가서 사형수를 위로하는 것은 공의 일과이었고 몸 붙일 곳 없는 가족들을 돌보는 것은 예사였다. (P. 532)

 

출처:본문중에서

 

 

 

 

4. 출판사서평

 

*미디어리뷰 

 

1. (바오로딸 독자 리뷰)

 

2008년 8월 9일에 쓴 글김홍섭 판사는 대법관을 지낸 법관으로, 프로테스탄트와 불교를 섭렵하고 가톨릭에 귀의한 가톨릭 사상가입니다. 성인에 가까운 법조인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이상적인 법관이기도 했고요.그 분의 수상집 <무상을 넘어서>에서는 약력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김홍섭 판사는 1922년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느 일본 법조인 가정에 사환으로 들어갔다. 피눈물나는 노력과 어깨 너머로 배운 공부를 바탕으로 1940년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해방 이듬해에는 서울 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부장판사, 광주고등법원장, 서울고등법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화려한 경력에 비해 그의 청렴결백함은 가족들을 힘겹게 했고, 그 자신을 늘 가난한 사람이 되게 했다.

 

성프란치스코처럼 가난조차 사랑했던 그는 사형수들의 형이요 아버지로서 그들을 마지막까지 동반했으며 소외된 이들의 위로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는 뛰어난 감수성으로 시를 써 1954년에는 <무명>이라는 시집을 출판했으며 그가 작고하기 몇 해 전인 1960년에는 <무상을 넘어서>라는 수상집을 출간했다. 1965년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를 아는 친지들뿐만 아니라 그를 아버지처럼 여겼던 장기수와 사형수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법관으로서의 김홍섭 판사는 실정법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비판에서 출발한 자연법 사상에 충실하여, 법보다는 인간의 기본적 인권과 양심을 중시했고, 민족보다는 인류의 공동체적 운명을 앞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것에 기초한 재판 철학을 옹호하였고요. 또한 가톨릭 신자로서 실천 신앙을 중시하여 청빈과 검소, 근신과 수계를 생활화하려 애썼고, 틈틈이 지방으로 전교 여행을 다니면서 순교자의 정신을 본받고 그들을 기리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져 1972년에는 율곡문화원(栗谷文化院)에서 율곡 법률문화상을 추서하였고, 1985년 한국종교학회 20주기 기념 심포지엄에서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재평가하였으며, 같은 해 《정경문화 (政經文化)》지에서는 그를 ‘해방 후 한국 인물 40인’의 한 사람으로 뽑았습니다. 김판사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결과된 재판이 60점짜리였는지 50점 미만의 것이었는지는, 자신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임상의 경험이 깊어져 가는 의사는 차츰 진단과 투약에 겁을 먹게 된다 하거니와, 이것은 聽訟 斷罪(청송 단죄 : 송사를 듣고 판결함)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그래서 김판사는 <겁>을 생활에서 실천했고, 그것을 그는 <부족>이라 했습니다. 그는 <사실인정에 관련하여 인간학의 부족>을, <법률적용에 관련하여 면학의 부족>을 인정했습니다.이러한 시각을 가졌던 판사를 우리 가톨릭이 가졌고그가 가톨릭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위대한 평신도이자 사상가였다는 것만으로도 천주교인인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김판사가 선종했을 때, 최민순 시인신부는 이렇게 추모했습니다."산하는 붉고 흐려그늘과 물이 아쉬운 땅목숨보다 돈이 귀하고법보다 폭력이 센 나라떠드는 이 많아도 일하는 이 드물어도의를 잃은 백성이어둠 속에 자지러지는데아 빛이여고고한 등대꺼져버린 불빛이여."전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위원장 주광일(사무엘) 변호사는김홍섭(바오로) 판사 선종 40주년인 2005년 3월 16일에 이렇게 추모했습니다."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이 생각나고, 가정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그리워집니다. 요즈음 세상살이가 하도 끝도 없이 어수선하고 우리가 몸담은 법조계 또한 국민들 존경과 신뢰를 받기는커녕 어떨 때는 국민한테 불신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경우까지 비일비재해진 것 같습니다.그럴 때마다 우리는 구도자 모습으로 법관의 길을 걸으시던 고 김홍섭 바오로 선생을 추모합니다." 김판사가 주님의 품에 안긴지 40년이 지난 지금도,그 분을 그리워하는 세인들의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그 분이 꿈꾸던 세상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세계이며, 만들어야 할 나라라는 것이 느껴집니다.가톨릭의 이상을 품고그런 생각을 몸으로 실천한 성스러운 분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김판사의 수상집 <무상을 넘어서>를 펼치세요.

 

 

 

2. (예스24 독자 리뷰)

 

김홍섭이라는 이름은 성당에서 학생회 활동을 시작하던 중학생 시절에 들어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당시의 평판을 지금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차원이 다를 정도의 깊은 신앙심을 보여 다른 이들에게 가톨릭 평신도로서의 모범을 보인 사람, 청렴 결백한 청백리의 모습을 보인 사람, 자신이 사형을 선고한 사형수에게 법의 한계를 밝히고 그들을 안아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점들은 충분히 공감하고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때에도 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터라 그가 사형을 선고한 후 사형수에게 신앙을 전파하고 포용한 점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내 생각과 다르게 정해진 제도를 따르는 입장이라는 모순된 상황에 먼저 순응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만 그에 대해 들어 알게 된 당시에는 그랬다. 그리고 본당 신부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이 책-모양새는 다르지만-을 빌려 읽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100%는 아니지만 책을 빌려서 읽지 않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을 빌렸던 기억은 또렷하다. 1년 여 전의 어느 순간 갑자기 그의 이름과 책 이름이 떠올랐고 재고가 있음을 확인하고 바로 구입했다.

 

책에 대해 쓰기 전에 먼저 김홍섭이라는 인물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누구나 들어서 아는 인물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김홍섭은 1915년에 태어나서 1965년에 만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다어린 시절에는 적어도 풍족하게 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며 보통학교 졸업 후 상점의 점원으로 일했다. 19살 때 링컨의 전기를 읽고 법률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전주에 있던 일본인 변호사 밑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1940, 25살의 나이에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광복 후 서울 지방검찰청 검사가 되었다가 다음 해에 판사가 된다. (변호사 시험 합격 후 광복될 때까지의 행적은 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다) 1953년에 가톨릭 신자로 영세를 받았으며?가톨릭 신자가 되기 전에 개신교와 불교 쪽에 차례로 관심을 두고 관련 공부도 했던 것 같다? 이후 사망하기 전까지 대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고 사망 시점에는 서울 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첫 문단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권세를 부릴만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청렴한 삶을 살았고 당시의 한국의 법들이 안고 있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가톨릭 신앙을 널리 전파하려고 애를 썼다책을 보면 산행을 즐겼음도 알 수 있다.

 

책은 김홍섭 판사가 남긴 수필과 시조를 비롯한 여러 시 및 일기메모 등을 수록하고 있으며 그의 사후 각계 인사들이 남긴 추모 글이 같이 실려있다그 자신이 남긴 여러 가지 생각과 옆에서 그를 바라보던 이들의 생각을 통해 김홍섭이라는 인물을 조망해볼 수 있게 된다.

 그가 쓴 수필에는 말 그대로 수필도 있고 수감된 죄인들에게 보내는 교리 설명도 있고 희곡 형태의 성서 설명도 있다대부분 독학으로 습득한 지식과 사고의 폭이 커서 그의 그릇의 크기를 재기가 어려울 정도이다시 쪽은 수필만큼 와 닿지는 않았고 일기/메모 등을 보면 그의 꼼꼼한 성격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그가 쓴 글을 통해 김홍섭이란 인물을 느낄 수 있지만 그를 추모하는 글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더 뚜렷이 알 수 있게 된다.

 

책에는 광복 이후인 1946년부터의 글이 실려 있는데 글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글을 썼던 당시의 원문을 그대로 수록해서 인데 특히 한자어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문장을 대할 때에는 뜻을 해득하지 못하고 넘어가기가 부지기수였다웬만큼 한자를 아는 편인데도 이런데 한자에 약한 이들이라면 아마 외국 서적을 대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등장하는 한시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고-주석이 없다- 해석도 없는 경우도 있으니 원문을 해치지 않는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독자를 위한 조치로서는 부족하다 그래도 한자가 섞이지 않았거나 덜 섞인 문장에서는 그의 정감 넘치고 아름다운 심정을 느낄 수 있다그런 글들은 결코 어렵지 않으며 정갈하고 단아하며 분명하다김홍섭의 따뜻한 성정이나 반듯하면서도 소박한 생활 태도가 글 곳곳에서 드러난다.가능성은 낮게 보지만 언젠가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다면 지금 시대의 문장으로 바뀌어 나오기를 기대한다그렇게 된다면 김홍섭이라는 인물을 세인들에게 더 잘 알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다. (가톨릭에서 그를 시복 대상으로 추진하면 그런 일이 생길까?) 지금의 형태로는 그를 알리기 힘들겠다.

 

출처: 無常(무상)을 넘어서출판사 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