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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추천도서(26.1-)/2026-04

4월의 추천도서 (4799)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1. 책소개

 

‘죽일 놈’ 딱지를 떼고 ‘명필’ 신화를 넘어
이완용과 함께 근대 서화계를 거닐다

왜, 지금 이완용의 붓글씨인가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데 토를 달 이는 없다. 그러니 그의 붓글씨를 두고 책 한 권을 저술한 것이 새삼스러울 수는 있겠다. 지은이 주변에서 “잘못하면 다쳐”라는 만류까지 나왔다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를 두고 지은이는 “채봉채비采葑采菲 무이하체無以下體”라는 《시경》의 한 구절로 답한다. ‘무를 캐는 이유는 뿌리에만 있지 않다’는 뜻으로, 설사 땅속의 뿌리는 썩었을지라도 무청을 잘라 시래기를 만들면 훌륭한 찬거리가 되듯 뭐든 활용하기 나름이란 의미다. 당대 한국의 예술계의 흐름을 짚어보고, 서예가 어떤 문화적 의미를 띠었는지 살피는 데는 이완용이란 확대경이 나름 쓸모 있으리라는 것이 이 책의 집필 의도이다.

 

출처: 본문중에서

 

 

 

2. 저자

 

저자: 강민경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나오고, 같은 학교 사학과에서 박사 과정(고려시대사 전공)을 수료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정본화사업팀 연구보조원을 거쳐 2018년부터 2021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고고 역사부에서, 2022년부터 2025년까지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 근무했다. 2026년부터 국립 중앙박물관 미래전략담당관실에서 일하고 있다. 첫 책인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2024) 외에도 〈고려시대의 신라 출자의식과 그 사회적 성격〉(2019), 〈金澤榮의 1909년 歸國과 安中植 筆 〈碧樹居士亭圖〉〉(2021), 〈〈채인범 묘지명〉의 복원과 그 의의〉(2022),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鑄字監董諸臣題名錄 懸板]〉의 역사적 가치-장영실을 비롯한 조선 초기 인물의 인적 사항을 중심으로〉(2023) 등 몇 편의 논문을 썼으며, 학부 시절 《그림으로 읽는 고려도경》(2013)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출처: 본문중에서

 

 

 

 

3. 목차

 

머리말

들어가기 전에: 매국노 일당 씨의 하루

1. 이완용은 과연 명필이라서 ‘명필’인가
⚫ 역적이자 명필, 일당 이완용
⚫ 친일파이자 매국노, 지울 수 없고 지워서도 안 될 낙인이지만
⚫ 이완용 명필론의 허와 실
⚫ 그때 그 시절의‘ 붓글씨’란
⚫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 일본 승려 하쿠인 에가쿠
⚫ 서書 테크니션
【칼럼 ① | 그는 이런 도장을 찍었다】

2. 독립문獨立門 편액, 과연 누구 솜씨인가
⚫ 독립문에 자유종이 걸리기까지
⚫ “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 또 하나의 후보, 김가진
⚫ 제3의 가능성은 없을까
⚫ 독립문, 독립문 그리고 독립문
【칼럼 ② | 안중근 글씨와 이완용 글씨를 견주어 보면】

3. 서여기인書如其人은 틀리지 않았다
⚫ 안진경 글씨를 따랐지만
⚫ 조선미술전람회 서부書部 심사위원
⚫ 그의 글씨를 본받은 사람들
⚫ 작품으로 쓸 문구를 미리 써 두다
⚫ 신문에 실린 이완용 휘호
【칼럼 ③ | 그 글씨와 그림 얼마면 됩니까】

4. 일기 속 이완용의 서화書畫 인연
⚫ 대한제국 내각 용지에 쓴 이완용 일기
⚫ 일본에서 온 시문 요청
⚫ 그림 구경하러 다닌 매국노들
⚫ 덕수궁에서 열린 서화회 풍경
⚫ 베이징의 김태석
⚫ 경성의 도쿠토미 소호
【칼럼 ④ | 사람을 가려 사귀지 않았던 근대 지식인】

5. 근대가 새롭게 보급한 전前근대
⚫ 이완용의 서재에 있던 《상미자료》
⚫ 도록의 등장과 보급
⚫ 시골 선비의 책상에 놓인 왕희지 친필
⚫ 스스로 법첩을 만든 김규진
⚫ 고금서화古今書畫는 박물관과 전람회에서
⚫ 화랑 그리고 경매장
⚫ 서점 한쪽에 고서화를 쌓아 두고
【칼럼 ⑤ | 이완용 후작의 거실 풍경】

나오며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처: 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에 살던 가난한 선비 이호석李鎬奭(1822~187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완용. 만약 당대의 세도가이자 흥선대원군(1820~1898)의 사돈이었던 이호준李鎬俊(1821~1901)의 양자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잔반殘班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온 그는…과거에 급제하고,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익힌 뒤 참찬관과 대리공사로 미국에 다녀왔으며, 독립협회 창립과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 같은 굵직한 사건의 주역이 되어 끝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다.(28쪽)

글씨를 받기 위해 사방에서 보낸 비단과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 다이쇼 덴노大正天皇(재위 1912~1925)가 그의 붓글씨 솜씨를 보고 싶어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를 통해 이완용에게 글씨를 보내라고 요구할 정도였다.(37쪽)

이완용의 글씨를 가지거나 그의 글씨로 된 현판을 걸 수 있었다는 건 당시 상당한 위세를 보
증하는 징표이기도 했을 터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완용 글씨가 좋더라는 평이 생긴 게 아닐까. 물론 이는 일본인과 친일적 지식인의 세평이었겠지만, 그러한 인기가 도리어 이완용이 명필이라는 신화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40쪽)

사대부라고 하는 상위 계층에게는 시·서·화가 정신 수양과 교유를 위한 ‘교양필수’였고 감상의 대상이었다. ‘서여기인書如其人’, 곧 “글씨가 그 사람이다”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붓글씨를 보며 그걸 쓴 이의 인품과 자질을 헤아리곤 했다. 그러니 ‘명필’이라는 칭호엔 단순히 글씨를 잘 쓴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46쪽)

일제강점기 초 조선에서는 붓글씨를 그림과 함께 ‘미술’의 범주 안에 포함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초기 미술단체인 경성서화미술원, 서화미술회, 서화협회 모두 ‘서화’를 내세우고 있으며, 1922년 시작된 공식 미술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일본 문전과 구분되는 ‘서부書部’를 두었다…붓글씨를 ‘미술’ 의 범주에 넣어 이해하려는 분위기는, 전통적 관점을 유지하던 근대 한국 미술가 1세대가 대부분 죽거나 노쇠해진 1930년대까지 유지된다. 이완용이 죽고 난 뒤인 1932년 11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서·사군자부書·四君子部는 사라진다.(50쪽)

철저하게 글씨만 놓고 보더라도, 이완용의 글씨가 ‘좋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묻는다면 약간 갸웃거려진다. 앞서 이완용이 〈평상심시도〉 를 즐겨 썼다고 했는데, 남아 있는 〈평상심시도〉를 보면 바탕이 크건 작건 글자 배치나 획의 움직임이 거의 같다. 독창성이 별로 없는 셈이 다.…먹이 덜 묻어 거칠게 보여야 마땅한 비백이 있음에도 거칠다기보다는 부드럽게 흘러가 버리는 느낌이 강하다.(68쪽)

1924년 7월,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내동리 명물〉이라는 꼭지에…독립문 편액 글씨를 쓴 가 다름 아닌 이완용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그 위에 새겨 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83쪽)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에는 그가 〈독립문〉 편액을 썼다는 얘기가 전혀 없다.…일제는 1917년 독립문 기초를 보수했고 1928년 4,100원을 들여 독립문을 수리했으며 1936년 ‘고적’으로 지정할 만큼 의미를 부여했다. 일제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세웠던 독립문을 이처럼 별로 꺼리지 않았다면, 이완용이 독립문 편액을 썼다는 사실을 굳이 숨길 이유가 있었을까. 이완용이 다른 편액 쓴 이야기를 연보에 날짜별로 적어 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독립문〉 편액을 썼다면 《일당기사》를 편찬한 김명수가 밝히지 않았을까.(85쪽)

김가진이…〈독립문〉 편액을 썼다는 주장은, 그의 며느리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다시피 했던 독립운동가 정정화鄭靖和(1900~1991)가 처음 제기했다.(89쪽)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자면, 안중근 의사는 승리자고, 이완용은 패배자죠.” 이후 2023년 12월 한 경매에 나온 안중근 글씨 한 폭은 19억 5,000만 원에 낙찰되지만, 2024년 12월 다른 경매에 나온 이완용 글씨 한 폭은 30만 원에 새 주인을 만난다. 수수료를 제외하고라도 6,500배 차이가 벌어진 셈이다.(108쪽)

어떤 일본인은 이완용의 작품 뒷면에 ‘토산土産(みやげ)’이라 적어 놓을 정도였다. 조선을 방문한 기념 선물로 여겨질 만큼 당시 이완용 글씨의 수요가 많았음을 짐작케 한다.(120쪽)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1922년 처음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의 서부書部 심사에 무려 4회나 참여한다.…‘조선 귀족 영수領袖 후작 각하’시니 일종의 명예직으로 조선총독부가 추천해 밀어넣었을 가능성도 있다.(122쪽)

옥인동 이완용의 집 근처에는 서양화가 행인杏仁 이승만李承萬(1903~1975)이 살았는데, 이완용이 순사를 거느리고 동네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이승만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일본 유학을 주선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완용이 서양화에도 나름 조예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126쪽)

김은호는《 서화백년》에서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거론하고 있다. “나와 무호無號, 정재靜齋, 이병희李丙熙 등은 한동안 효자동의 일당 집에 다니면서 붓글씨를 배웠다.”(127쪽)

《일당서초유집》은 이완용이 직접 필사해 만든 책으로,…이완용이 존경해 마지 않았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시 수십 수를 필두로 《논어》나 《공자가어孔子家語》 같은 중국 고전에서 발췌한 문장, 두보杜甫나 원호문元好問 같은 중국 시인의 시, 우리나라 문인의 시문 등이 잡다하게 필사되어 있다.(135쪽)

그는 1912년 1월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와 고위군인, 중추 원의 조선인 임원들이 모여 만든 친목단체 이문회以文會의 창립발기인이자 2대 회장이었다. 이문회는…시문 특히 한시 창작에 집중하는 한편 식민통치를 보완하는 담론도 생산하는 조선총독부 산하 관변 사교 집단이었다.(136쪽)

이완용이 누구인가. 강제병합 조약에 서명하고서도 대한제국 총리대신 퇴직금 1,458원 33전과 합병 처리 잔무 수당 60원을 받아 챙기고, 1925년 조선인 부자 순위 2위에 이르는 부호였음에도 자기 재산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교육비 납세를 거부했던 ‘현금왕’이었다.(142쪽)

‘위문대’…원래 19세기 말 미국-스페인 전쟁 때 미국 부인들이 만들어 전선에 보낸 데서 시작되었다는데, 이 땅에서는 애국부인회라는 일본 단체가 러일전쟁 때 일본 군대에 보냈던 게 시초라고 한다. 1908년 의병 토벌을 위해 대한제국에 건너온 일본군을 위문하고자 대대적으로 위문대를 모집했고…이완용이 거기에 ‘꽂혀서’ 위문대 제작은 물론이고 직접 글씨까지 적어서 넣어 보내 준다는 것이다.(145쪽)

3월 2일 목요일(음력 2월 22일), 그늘진 날이었다.
성내城內 서화가 여러 사람이 서화미술원書畫美術院을 만들고 서화를 진열하여 공람케 하고 겸하여 내게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오후 2시에 원院에 갔는데, 여러 화사와 필객筆客 모두 이 시대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때 가서 본 사람들은 평재平齋 박제순, 우정雨亭 고영희, 낭전琅田 조중응, 박기양朴箕陽(1856~1932) 대감, 김종한 대감이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왔다.(169쪽)

서화미술원, 다른 말로 ‘경성서화미술원’이라고도 하는 이 단체는, 난초 그림으로 이름났던 서화가 옥경산인 윤영기(1835~?)가 세웠다.…당시 이름깨나 날리던 서화가들을 규합해서 1911년 3월, 북부 두석동豆錫洞(지금의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근처)에 미술인 단체이자 교육기관이며 서화 판매점이기도 했던 경성서화미술원을 설립했다.(171쪽)

서화미술회가 이완용이 회장에 오른 지 1년 만인 1913년 6월 1일 남산정(지금의 서울 중구 남산동) 국취루에서 교수진·학생 작품, 찬조 출품한 서화와 고미술품 110여 점을 전시하고 “총독부 관인과 귀족 제씨와 사회 유지 제언”을 초청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완용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74쪽)

안중식과 이도영이 찾아와 “서화미술원의 일”을 의논한 대상이 이완용이다. 이완용은 글씨로 자부한 서가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귀족이었고 경성서화미술원의 후원자였다.…40여 년 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1886~1965)은 서화미술회와 서화협회 재정 운용에 이완용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갔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176쪽)

1920년대 경성 시내 공평동에서는 여자 고등보통학교 이상 재학 중인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규수서화연구회가 조직되어 있었다.…현채와 오일영, 그리고 이완용이 당시 규수서화연구회의 고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름을 ‘창신서화연구회創新書畫硏究會’로 바꾼 이 규수서화연구회는 1923년 밀양, 부산, 전주 등지를 다니며 전람회와 휘호회를 개최해 지역 사회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한다.(177쪽)

죽기 일곱 달 전인 1925년 7월 작성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간찰에서 이완용은 당시 독립군의 3대 맹장으로 꼽히며 광복군 총영 총영장, 정의부 군사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오동진 (1889~1944)을 회유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신의주나 안둥현으로 가서 오동진을 만나겠다고까지 말하며, 그 밑작업을 위해 이석권이라는 이를 보내니 협조를 당부하고 있다.(193쪽)

1911년 이완용이 만났던 일본인 중 거물급으로는 뒷날 일본 총리대신을 지내는 하라 다카시原敬(1856~1921), 최근 일본 1,000엔권 지폐 모델이 된 의학자 기타자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郞(1853~1931) 등을 들 수 있다.(195쪽)

도쿠토미 이이치로, ‘소봉蘇峯 선생’이 일본에 잠시 돌아가게 되자 취운정(지금 서울 종로구 가회동 한화그룹 회장 자택 자리)에 들어선 당시 관료들의 사교 장소 ‘한성구락원’에서 송별 오찬을 열었고, 이완용이 거기 참석해 한나절 놀고 왔다는 것이다. 그 오찬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저마다 송별시를 지어 자필로 적고 도쿠토미에게 헌정했는데, 그 면면을 보면 당시 서울 장안의 내로라하는 명사, 다른 말로 친일파들이 총출동했음을 알 수 있다.(198쪽)

이완용은 3·1운동을 ‘망동’이라 칭하며 조선 민중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무려 세 차례나 작성했다.(203쪽)

1938년에는 한국 최초의 원색 화집으로 일컬어지는 《오지호吳芝湖·김주경金周經 이인화집》이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나왔다. 오지호(1905~1982)와 김주경(1901~1981)은 이 책을 낸 후 굶고 다녔다 한다.(225쪽)

사진과 측량 같은 기술에도 손을 대고 직접 화랑을 경영하면서…‘근대 서화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았던 김규진, 그도 이완용과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다. 조선미술전람회 서부 심사를 같이했음은 물론이고, 김규진의 그림에 이완용이 화제를 쓴 것도 더러 전해진다.(234쪽)

1907년 11월 당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그의 서형庶兄인 궁내부 대신 이윤용이 궁내부 차관 겸 제실재산정리국장 고미야 미호마쓰를 만났다. 둘은 고미야에게 “새 황제께옵서 이 궁전(창덕궁)으로 옮겨 오시어, 새로운 생활에 취미를 느끼게 하도록 모든 시설과 설비를 하기 바란다”라고 부탁했다. 이에 고미야는 아이디어를 냈다. 동물원과 식물원, 그리고 박물관의 창설이었다.(239쪽)

화랑도 없지는 않았다.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이전인 1900년 무렵에도 서울에서 상인 정두환鄭斗煥이 열었던 서화포書畵鋪, 1906년 수암 김유탁이 서울 대안동에 설립한 수암서화관守巖書畵館, 1908년에 매하梅下 최영년崔永年(1856~1935)이 조석진과 같이 설립한 한성서화관漢城書畵館 등이 있었다.(246쪽)

1913년에는 김규진이…‘고금서화관’을 개설했다. 여기서…서화작품과 고서화, 현판, 서화 재료를 진열하고 판매했으며, 주문을 받아 작품을 표구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묘비 같은 석물을 만드는 공장을 세우기까지 했다.(247쪽)

1906년부터 고려청자를 위주로 몇 차례 경매가 열렸고 이후 삼팔경매소三八競賣所라는 것이 생겨 조선과 중국 골동품을 주로 팔다가 1919년 무렵 없어졌다. 그러나 1919년이면 이미 조선 전역에 고미술품 경매소가 20곳이나 되었다.(249쪽)

《해동역대명가필보》를 발간한 백두용이 경영했던 한남서림은 고서 전문 서점이었다. 훗날 전형필이 이 한남서림을 인수해 《훈민정음》을 비롯한 국보급 고서를 여럿 입수하게 되지만, 그 이전에도 한남서림은 옛책과 함께 서화를 매매하고 있었다.(251쪽)

 

출처: 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명필 신화’의 허실을 규명하다
일당 이완용은 당대에 명필로 소문났다. 글씨를 받기 위해 사방에서 보낸 비단과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어떤 일본인은 이완용의 작품 뒷면에 ‘토산土産(みやげ)’이라 적어 놓을 만큼 조선을 방문한 기념 선물로 여겨졌단다. 심지어 일본 다이쇼 천황이 그의 붓글씨를 보고 싶어 조선총독을 통해 이완용에게 글씨를 보내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은이는 그런 평가에 회의적이다. “좀 썼다”에 그친 오세창의 평을 들면서 이완용이 즐겨 썼다는 〈평상심시도〉를 꼼꼼히 분석해 예쁘게 썼을지는 몰라도 절박함이나 독창성이 없다고 평한다. 대신 이완용의 위세에 비춰 그의 글씨를 갖거나 그의 글씨로 된 현판을 걸 수 있다는 건 당시 상당한 위세를 보증하는 징표이기도 했기에 자연스레 이완용 글씨가 좋더라는 평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독립문’ 편액 작성설을 파고 들다
역사 연구자로서 지은이의 진면목은 이완용이 ‘독립문’의 편액 獨立門을 썼다는 설을 파고드는 부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 이야기가 1924년 《동아일보》에 처음 실렸다고 전제하고 이완용이 독립협회 창립 발기인이자 위원장이었다는 점에서 나름 근거가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처조카가 쓴 전기 《일당기사》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 독립운동가 김가진이 독립문 편액을 썼다는 이설異說에 대해서는 그의 며느리의 증언 등 정황 증거 외에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는 엄정한 자세를 취한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완용과 김가진이 각각 쓴 《천자문》에서 獨立門을 집자(集字)해 그 필획을 꼼꼼히 비교 분석한다. 그런 후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으면서 ‘그래픽체 설’이란 제3의 가능성까지 소개한다.

서화계에 드리운 ‘그늘’을 아울러 살피다
책은 이완용의 붓글씨를 살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인 단체라고 할 수 있는 경성서화미술원, 서화미술회, 서화협회의 창설에 깊이 간여했고, 회장과 고문을 맡는 등 근대 서화계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했음도 상세히 서술한다. 그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1922년 처음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의 서부書部 심사에 무려 4회나 참여했다든가 이당 김은호, 이병도 박사의 형 이병희 등이 이완용에게 글씨를 배웠다는 사실이 그런 예이다. 뿐만 아니다. 그의 제안으로 1909년 창경궁에 제실박물관이 설립되었고, 삼팔경매소란 곳에서 1906년부터 고려청자 위주로 경매가 열렸다든가 갤러리의 원형이라 할 김규진의 ‘고금서화관’이 1913년 문을 연 사실 등 당대 문화계의 흐름이나 이모저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서의 품위와 교양서의 재미
책은 비록 지은이의 개인적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사서로서의 품위를 갖췄다. 이완용의 둘째 아들이 엮은 이완용의 친필 일기 《일당선고일기》, 이완용이 소장했던 도록 《상미자료》 등 귀한 자료는 물론 이완용이 일본군에 보내는 위문대를 제작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은 《매일신보》 등 언론까지 활용한 덕분이다. 여기 더해 이완용이 1925년 조선인 부자 순위 2위에 이르는 부호였음에도 자기 재산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교육비 납세를 거부했던 ‘현금왕’이었다든가 죽기 일곱 달 전에도 독립군 3대 맹장으로 꼽히던 오동진을 회유하려 했다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도 여럿 실렸다. 이완용에게 명필이란 평판이 어떻게 붙여지고 확대 재생산되는지, 그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거기 더해 다양한 사료를 토대로 밝혀낸 근대 예술계의 여러 모습을 새로운 시각으로 만날 수 있다는 돋보이는 책이다.

사료 발굴, 《일당선고일기》
2024년 7월 무렵, 저자가 국립중앙도서관 누리집에서 ‘이완용’이란 단어를 검색해보다가 우연히 찾게 된 자료, 《일당선고일기一堂先考日記》! 이완용이 대한제국 내각에서 쓰던 공문서 용지를 가져다가, 1911년 1월부터 6월까지, 반년간 자신의 행적을 친필로 기록한 일기였다. 나라 팔아먹는 문서에 도장을 찍은 그 이듬해, 이완용의 삶은 어땠을까?
1911년 3월 2일 목요일(음력 2월 22일), 음산한 날이었다.
성내城內 서화가 제인諸人이 서화미술원을 만들고 서화를 진열하여 공람供覽케 하고 겸하여 내게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오후 2시에 원院에 갔는데, 여러 화사畵師와 필객筆客 모두 당세의 이름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때에 가서 본 사람들은 평재 박제순(1858-1916), 우정 고영희(1849-1916), 낭전 조중응(1860-1919), 박기양(1856-1932) 대감, 김종한(1844-1932) 대감이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 《일당선고일기》 중에서


당대 조선의 예술계를 주름잡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서화미술원’에, 역시 당대 조선의 정치계를 주름잡던 이들과 함께 가서 글씨와 그림을 감상하던 일당 대감 이완용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그려진다. 이를 비롯해 《일당선고일기》에는 이완용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그러나 《일당선고일기》는 그동안 존재조차도 학계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제강점기 초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새로운 사료史料를 비로소 세상에 소개하는 셈이다.

 

출처: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