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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추천 도서(21.3~22.2)/2021-3

3월의 추천도서(2946) 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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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닷컴(Korea.com)]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 대한민국 1세대 과학자 정근모 박사가 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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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소개

 

최빈국에서 세계의 희망이 된 대한민국 초일류 과학기술입국의 기적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최연소 물리학 박사로 한국 최초 핵융합 연구를 시작한 제1세대 과학자.
카이스트를 세워 과학자를 키워내고, 산업화를 위해 달려가는 조국에 한 알의 밀알이 된 그의 삶은
그대로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역사가 되었다.

경기중·고 수석 입학,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석 합격, 만 23세 최연소 물리학 박사, 소년 교수, 한국인 최초 핵융합 연구 등 줄곧 ‘천재’란 수식어가 따라붙은 정근모 박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 대신 가난했던 조국으로 돌아와 과학 인재 양성을 위해 카이스트를 설립하고, 한국형 표준 원전을 설계하고, 두 차례 과기처 장관을 역임하며 과학기술입국 대한민국의 과학사를 써 내려갔다.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의 희망이 된 대한민국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길을 함께한 1세대 과학자들의 헌신이 생생하게 소개된다.

 

출처: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정근모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설립의 산파역을 한 대한민국 1세대 과학자이자, 한국형 표준 원전을 제안하고 초기 설계 사업을 주관한 원자력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6.25 전쟁 중에 치러진 제1회 국가고시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며 경기중학교에 입학, 경기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입학 검정고시에 수석 합격하여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만 23세에 응용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아 최연소 박사 기록을 세웠고,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에서 한국인 최초로 핵융합 연구를 수행하였다. 1966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핵공학과 연구교수를 거쳐, 뉴욕공과대학교 전기물리학과 부교수 겸 플라스마 연구소장을 역임했다. 1969년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국제개발처(USAID)에 카이스트 설립을 최초로 제안하여 600만 달러의 차관을 받아 카이스트 설립을 주도하였고, 카이스트 초대부원장 겸 교수로 부임했다. 카이스트 과학기술사회연구실을 설립하고 캐나다 국제개발연구센터의 지원을 받아 과학기술입국의 정책수단 연구를 수행하여 1980년대와 90년대의 대한민국 과학기술입국 정책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차례(12대, 15대) 역임하며 우수연구센터(SRC/ERC), 고등과학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및 국가핵융합연구소를 만들었으며 항공우주 종합개발 계획을 수립·추진하였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의장, 대한민국 국민으로는 제1호 미국공학한림원 회원 및 미국원자력학회 펠로우 및 이사로 선임되었고, 세계원자력한림원 회장 및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을 맡아 온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의 산증인이다. 호서대학교, 명지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고, 한국해비타트(사랑의 집짓기 운동 연합회) 초대이사장으로 20년간 조직을 맡아 국내외로 무주택 가정을 위한 집을 지으며 봉사와 나눔의 삶도 살아왔다. 이 책을 통해 최빈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출처:교보문고

 

3. 목차

 

추천사_한민구(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추천사_신성철(KAIST 총장)
추천사_박형주(아주대학교 총장)
저자 서문

Chap 1. 가난한 나라의 과학자, 한 알의 밀알 되기로
흑백사진 속 원자로 기공식, 에너지 기술 확보 염원의 시작
미국의 한국 원조 프로그램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서울대 행정대학원 신설
행정대학원에서 처음 경험한 미국식 학문과 교육 제도
원자력원 초대원장 된 독립운동가 김법린, 나의 ‘인생 멘토’가 되다
중국 최초 노벨상 수상자는 중국 대신 미국을 선택했다
가난한 나라 과학자는 인생 걸고 조국 잘살게 해야
미국 과학자 되지 말고 한국 과학기술의 문익점 돼라
1960년, 새로 개관한 김포공항 청사에서 많은 이의 격려받으며 미국으로

Chap 2. 각 나라 우수 인재 모이는 미국에서 본격적인 과학자의 길로
전 세계 우수 학생 모인 미국 대학, 책 20권 나눠주고 “한 학기 뒤 시험”
잠 안 자며 공부한다는 소문에 수면제 들고 찾아온 지도교수
소련의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티니크 1호’에 충격받은 미국
미시간주립대 해너 총장과의 특별한 인연
23세에 사우스플로리다대 조교수로 부임하자 ‘소년 교수’라고 주목
프린스턴대 핵융합연구소 구인광고 본 순간 “바로 이거다”
세계 최고의 핵융합 시설 ‘스텔라레이터’ 실험팀에 들어가다
원폭의 아버지 오펜하이머가 이끌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목요 학술세미나
무선통신을 산업으로 키운 마르코니, 숱한 문명의 이기와 거대한 관련 산업 만들다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와의 교류

Chap 3. 무엇을 배우고 돌아가 조국 발전에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가
MIT에서 ‘플라스마 난류’를 연구하다
MIT에서 날 키워준 로즈 교수, 방한 3개월 뒤 세상 떠나
강대국 미국이 과학기술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법
인재를 찾고 키우고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미국 과학기술계
뉴욕공과대학 웨버 교수, 독일군 U보트 잡는 탐지기 개발
‘과학기술이 곧 국력’이라는 국민 동의가 이루어진 미국
미국 기밀 프로젝트 맡은 뉴욕공과대학, 레이건의 ‘스타워즈’ 중심지로
뉴욕공과대학 나의 첫 박사 제자는 동갑내기 대만계, 당수 10단

Chap 4. 카이스트 설립, 두뇌 유출 방지라는 목적을 이루다
물자 지원 대신 인재 육성 나선 미국, 박정희에게 ‘과학대학원’ 제안
한국과학원(현 KAIST) 설립을 교육 예산이 아닌 경제개발 특별예산으로 추진
국민 소득 257달러의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과학기술 입국’의 꿈
한국과학원 설립 타당성 조사 위해 미국 과학기술계 최고의 인물들 파견
과학기술처 관료들은 밤낮없이 뛰고, 미국은 한국과학원에 600만 달러를 원조
터만 단장이 한국과학원 설립을 위한 최종 보고서 작성을 의뢰하다
한국과학원 초대원장으로 이상수 박사, 초대부원장으로는 내가 임명
“450만 달러로는 부족해, 600만 달러로 늘려” 원조 증액 지시한 해너 처장
세계 과학기술 정책의 흐름을 주도하는 ‘대통령 과학고문 제도’
20년 지나 KAIS와 KIST 통합 과정에서 KAIST로
한국과학원 병역특례 주저하던 박정희 대통령, 과학기술처 설득에 OK
장관 바뀌자 한국과학원 초대원장 전격 교체, 이해 못 할 인사 발령
과학기술처는 내가 맡은 부원장 자리 없애고, 코넬대는 초빙교수 제안
한국과학원 첫 입학시험 평균 5대 1의 경쟁률 보이며 본격적인 가동

Chap 5.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한강의 기적’ 이끌던 시기
“미국의 과학기술 정책은 누가 주도하고 있습니까?”
‘공포의 균형’으로 핵전쟁 막으려던 닉슨, 롱 교수에 SOS
코넬대 연구 마치고 귀국, 한국과학원의 첫 연구소 STS연구실 열다
‘왕관의 보석 같은 성과’ 호평받은 10개 개도국 개발 프로젝트
백색전화가 집 한 채 값이던 1970년대, 인도에 가서 무릎을 탁 치다
강기동 박사가 74년 세운 ‘한국반도체’, 글로벌 삼성의 밀알 되다
땅굴 탐지레이더 만든 나정웅, 탱크주의 배순훈, 한국과학원 스타 교수들
컴퓨터가 뭔지도 잘 모르던 70년대, 한국인 전공자 찾아 삼만리
카이스트 학생들 졸업도 하기 전 경쟁적인 취업 제안받고 산업 현장으로

Chap 6. 가난한 나라의 살 길은 오직 기술 자립뿐
열 살 아들의 불치병 선고, 가족에게 소홀했다는 죄책감만
아들에게 내 신장 줬지만, 설상가상 C형 간염까지 전염시켜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 충격, 안전장치 개발로 과학적 대응
“귀국해서 기술 자립 위해 힘써주게” 김재익 수석 전화에 목이 멨다
우리나라 원전산업을 종속형에서 자주형으로
한국전력기술에 한국 첫 사내 대학원, 인재 끌어모은 ‘신의 한 수’
아웅산 테러, 희생자 명단에 나라 이끌던 최고 관료와 외교관들
중국 누르고 따낸 원자력 국제회의, 미국과 막후 협상이 결정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지역 주민 9만 명 이주
고등기술원 만든 김우중 “나라 위한 것, 대우 이름 넣지 마시오”

Chap 7. 과학기술처 장관 두 번 맡다
한국 첫 위성 ‘우리별’ 아버지 최순달로부터 한국과학재단 바통 넘겨받다
우수연구센터 지원 막히자 조순 부총리가 ‘특별예산’ 내줘
1989년 IAEA 총회의장 놓고 경합, 한국인 최초 국제기구의 수장으로 선출
노태우 대통령의 한밤 전화, “과학기술처 장관 맡아 저를 도와주세요”
‘IR52 장영실상’ 힌트 준 사람은 전두환 정부 때 쫓겨난 과학자
‘안면도 핵처리시설’에 성난 민심, 정부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YS, 칼국수 오찬에 불러 장관 제의, 고사했지만 임명 강행
장관 수명 1년, 이벤트는 차관에 맡기고 고등과학원과 우수연구센터에 올인
활성단층의 저주,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없던 일로
‘한국 표준형 원자로’ 첫 상업 운전, 장관 두 번 한 보람 느껴
섭씨 1억 도 ‘인공태양’ 만들어, 7개국 연합 프로젝트 이끌다
YS 지시로 IAEA 사무총장 도전, ‘보이지 않는 손’에 막혀 좌절

Chap 8. 미국한림원에 휘날린 태극기와 해비타트 운동
몸 둘 곳 없는 이들 위한 집짓기, 해비타트 운동으로 또 다른 삶
호서대 총장직을 맡은 중에도 이어간 해비타트 운동
수술 받은 아들 “왜 천사 세 분이 와 계시죠?”, 두 달 뒤 먼저 하늘로
지미 카터와 함께 해비타트 운동 전국 순회
21세기 시작하며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명지대 총장직 함께 수행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 아시아인 두 번째 세계에너지협의회 회장 선임
UAE 원전 수주 계약 소식 전해진 순간, 한전 지하 상황실에서 환호의 눈물
대한민국 1호 미국한림원 회원이 되다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가난했던 한국에서 유학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물리학을 공부하러 가게 됐으니 자부심도 컸다. 머릿속이 뭔가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런 나를 앞에 앉힌 김 원장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군! 곧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군. 그런데 내가 깊이 부탁할 일이 있네.”
이렇게 말문을 뗀 김 원장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당부를 했다. 그는 중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를 언급하며 내게 질문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중국인 과학자 두 명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지 않았는가. 그 과학자들은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미국에 남아 과학 연구를 계속했다지. 그러면 그 사람들이 받은 노벨상은 중국의 것인가, 미국의 것인가?”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미국 유학을 떠날 내게 중국인 노벨상 수상자 이야기를 꺼낸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중략)
“자네는 미국 가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에 미국 과학자가 되지 말고 귀국하도록 하게. 돌아와서 할 일이 있네. 자네 세대는 빈약한 국내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자네 후배들까지 그렇게 되면 되겠나?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희생해야 거목이 될 수 있네. 자네는 한국의 미래 과학기술 기반을 위해 희생하게.”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동안 나 잘되라는 덕담은 숱하게 들었지만 남을 위해 희생하라는 이야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선진국은 일찍이 지도자와 국민 모두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오랫동안 인재를 키워 왔다. 나라가 잘살려면 과학기술이라는 ‘비료’가 필수라는 김 원장의 혜안은 지금까지도 빛날 뿐 아니라 내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Chap 1. 가난한 나라의 과학자, 한 알의 밀알 되기로〉 중에서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인 프린스턴 플라스마 물리연구소에서 낸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다. 젊고 유능한 연구자를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핵융합은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학문 분야였다. 핵분열이나 핵융합은 가공할 무기체계인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이다. 하지만 이를 잘 활용하면 값싼 청정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발전 기술이 된다. (중략)
나는 프린스턴 플라스마 물리연구소(PPPL)라는 최고의 연구소에서 핵융합을 연구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과학기술자들의 사기와 연구 효율을 높이려면 제대로 된 연구와 평가 시스템이 필수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됐다. (중략)
나는 실험 물리학자가 아닌 이론 물리학자로 PPPL에 왔지만 일단 합류한 이상 세계 최고의 장비로 실험해 보겠다고 나섰다. 라이먼 스피처 소장과 토마스 스틱스 실험부장은 나의 이런 열정을 받아들여 스텔라레이터 실험팀에 넣어 주었다. 한국인 최초로 핵융합 실험 연구자가 된 것이다. 이는 20여 년 뒤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일하면서 ‘한국의 태양(K-STAR)’으로 불리는 핵융합 시설의 국내 건설을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자신 있게 건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미국 과학기술계는 연공서열이나 출신을 따지지 않고 젊은 과학기술자에게 기회를 주었다.
-〈Chap 2. 각 나라 우수 인재 모이는 미국에서 본격적인 과학자의 길로〉 중에서

나는 하버드대학교 행정대학원의 과학기술 정책과정에 다니면서 썼던 〈후진국에서의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라는 논문을 찾아 들고 워싱턴의 미국국제개발처(USAID) 처장실을 찾았다. 오랜만에 옛 제자를 만나 반가워하던 해너 박사는 이 논문을 보고 무척 만족해했다. 그는 “논문을 USAID 사업을 위한 사업계획서로 고쳐 써서 달라”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논문을 바탕으로 〈한국에 응용과학 및 공학 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안건〉이라는 사업 제안서를 만들어 USAID에 넘겼다. 해너처장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새로운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을 권고하는 편지와 함께 이 제안서를 보냈다. 한국이 사업 추진을 결정하면 USAID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중략)
1970년 3월, 나는 김기형 과학기술처 초대장관의 초청으로 일시 귀국했다. 귀국의 기쁨도 잠시, 제안서와 관련해 당정 협의회에 보고할 브리핑 자료를 당장 만들어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 지도부, 장관들을 상대로 하는 브리핑이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썼던 논문의 내용대로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은 인재의 해외 유출을 막고 과학기술 인력을 꾸준히 양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역설했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과학기술 발전이 필수이며, 이를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중략)
이렇게 이루어진 한국과학원(현 카이스트) 설립은 1970년 1인당 국민소득 257달러의 대한민국에서 ‘과학기술 입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과학기술 입국은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국민,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관료, 그리고 과학기술인의 염원과 의지가 합쳐진 것이라 믿는다.
-〈Chap 3. 무엇을 배우고 돌아가 조국 발전에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가〉 중에서

나는 1982년 7월 2일 당시 여의도 한국전력 건물에서 사장 취임식을 하고 사명을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KOPEC)’로 바꾸고 한국전력 일거리를 맡게 됐다. (중략)
나는 한국전력기술에서 원자력발전의 기술 자립과 설계 표준화를 추진했다. 미국과학재단에서 1979년 수행했던 스리마일섬(TMI)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원인 분석과 대응 정책을 연구하면서 원전 안전을 위해서는 건설과 운전을 포함한 설계 표준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 같은 기술 후발국이 원전과 같은 고등기술을 안전하게 사용하고 기술 자립화를 이루려면 ‘설계 표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게 됐다. 모두가 시기상조라고 말렸지만 나는 과감하게 나섰다. 지금 하지 않으면 더욱 오랫동안 기술 종속국에 머물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나를 행동으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전 세계에서 기술력과 안전성을 인정받는 한국형 표준 원전은 이렇게 첫걸음을 뗐다. 우리나라 원전산업을 종속형에서 자주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과감한 발상이었다.
-〈Chap 6. 가난한 나라의 살 길은 오직 기술 자립뿐〉 중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총회의장국과 이사회의장국이 각자 맡은 의결 활동을 하고 사무총장이 실무를 총괄하는 구조다. 1989년 총회의장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맡을 순서였다. 총회는 만장일치로 나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IAEA 이사회 소속 각국의 적극적인 후원과 사무국 간부들의 호의적 분위기 조성으로 만장일치로 IAEA 의장에 당선된 것에 대해 국내 언론은 크게 보도하였다. 더욱이 그 당시 분할되지 않았던 소련이나 동독 대사의 적극적인 추천 발언은 의외였다. 내가 외교관 출신이 아니고 과학기술자로서 국제 원자력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무국 후원자로서의 이사 역할을 다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Chap 7. 과학기술처 장관 두 번 맡다〉 중에서

내가 1990년 처음 과학기술처 장관을 맡으면서 배운 깨달음의 하나가 ‘장관 수명은 평균 1년’이라는 것이다. 인사·정책 결정과 실무 집행을 속전속결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1994년 12월 24일 ‘재수생 장관’이 된 후 첫 간부회의에서 나는 “장관으로서 꼭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에만 전념하려고 하니 행사성 업무는 가급적 차관과 차관보가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고 실무자들과 함께 추진하려던 업무 가운데 첫째는 고등과학원(KIAS) 설립이었다.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처럼 기초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고등과학원을 서울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옛 교정에 1996년 10월 세웠다. 가난 탈출을 위한 경제개발을 이끄는 과학기술을 넘어 이제 ‘노벨상에 도전하는 기초과학의 전당’을 만들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둘째는 한국 과학기술자들에게 ‘미래 무한 청정 에너지원’인 핵융합을 연구할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다. 이는 1995년 12월 ‘국가 핵융합 연구개발 기본계획’을 확정하고 이듬해 1월 핵융합연구개발사업단을 발족하면서 시작됐다. 2007년 9월 ‘인공태양’으로 불리는 차세대 초전도 핵융합 연구장치인 케이스타(K-STAR)가 완공되고 국가핵융합연구소가 설립돼 본격적인 연구를 펼치고 있다. 현재 프랑스 남부 카다라슈에 짓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건설을 한국 과학기술자들이 이끄는 것은 이런 투자가 밑거름이 되었다.
셋째는 항공우주 종합계획 수립이다. 이를 통해 우리 손으로 우주정거장을 만들고 첨단 과학기술 연구를 수행할 뿐 아니라 유도탄 방어망을 구축해 북한 핵무기나 미사일을 쓸모없는 쇳덩어리로 전락시키고 싶었다. 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의장 시절부터 북한의 핵무장 계획을 퇴치하려면 핵무기를 무력화하거나 사용할 수 없도록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과학기술을 활용해 평화를 지키는 일이다.
-〈Chap 7. 과학기술처 장관 두 번 맡다〉 중에서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가난한 조국에서 과학입국의 꿈을 실현할 전초기지 KAIST 설립과 표준원전설계로 희망을 쏘아 올리다
‘어떻게 하면 우수 인재를 해외에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전후 가난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과학 불모지인 조국을 떠나 해외 유학을 선택한 우수 인재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KAIST(한국과학기술원)가 세워졌고, KAIST는 현재 우리가 모두 아는 대로 대한민국 산업의 핵심 인재를 키우는 대표적 학교가 되었다. KAIST가 없었다면 삼성전자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입국의 전초기지였다. 이 KAIST 설립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23세에 해외 최연소 물리학 박사가 되어 천재 과학자로 이름을 드날렸던 정근모 박사이다. 그는 세계 최고인 미국 유수의 연구기관을 마다하고 조국 발전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귀국을 선택한 1세대 과학자였다.
최고 인재들만 모이는 경기고교, 서울대학교에서 최연소 수석입학과 조기졸업으로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 그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수석합격하자 일간지가 이 사실을 기사로 다루었고, 이를 본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미국 유학의 기회를 주었다. 그는 프린스턴, MIT, 하버드대학교 행정대학원, 뉴욕공대 등 세계적인 명문대학 곳곳을 다니며 선진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정책을 배워 나갔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과학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발전’이라는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 조국에서 과학자를 키우는 일이라 생각하고, 과학기술 인재 영입과 후배 과학자 양성을 위해 KAIST 설립을 주도한다. 그는 하버드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수학할 때 쓴 ‘개발도상국의 인재 유출 방지를 위한 방안’에 대한 논문을 들고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방문하여 한국의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을 위한 원조를 약속받아 카이스트 설립의 산파 역할을 했다. 이렇게 세워진 KAIST는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오늘날의 과학기술 입국으로 만든 대표 과학기술 고등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고, 지금은 세계의 희망이 된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산업발전, 경제성장에 필요한 인재양성이라는 과제를 넉넉히 해냈다.
한국형 표준 원전 개발의 토대를 마련한 것도 저자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세계적인 핵융합연구소인 프린스턴 플라스마 물리연구소에 들어가 한국인 최초로 핵융합 연구를 한 정근모 박사는 한국의 전력난을 해소할 미래의 에너지원으로 원자력발전에 주목했고, 이후 한국전력기술 사장, 과학기술처 장관 등에 재임할 당시 ‘한국의 태양’으로 불리는 인공태양 사업을 추진하고, 원전산업과 핵융합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무엇보다 정근모 박사는 원전을 우리의 기술과 손으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형 표준 원전 기술의 설계를 주도했다. 추진 당시 우려가 많았지만, 대한민국은 결국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원전 수출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 최빈국에서 과학기술입국의 기적을 만들어낸 1세대 과학자들의 헌신과 열정의 기록을 책으로 남기며
‘과학기술이 국가의 동력’이라는 선진국의 지침대로 정근모 박사는 뛰어난 과학기술자가 되었지만, 나아가 그것이 진정한 동력이 되려면 적절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행정가로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가 추진한 일들은 줄곧 탁월한 성과를 냈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번 역임하고, 주요 기업의 수장을 맡고, 대학 총장을 역임하는 동안 행정가로서의 타고난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고등기술연구원(IAE), 고등과학원(KIAS), ‘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KINGS) 등의 교육기관과 연구기관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을 이어갔고, 우수연구센터(SRC/ERC) 사업, IR52 장영실상 제정 등을 추진하며 과학기술자들이 장기간, 그리고 집단지성을 통해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의장으로 한국인 최초 국제기구의 수장이 되고, 스웨덴공학한림원을 거쳐 대한민국 1호 미국공학한림원 회원이 된 것은 정근모 박사가 과학자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과학기술을 토대로 한 경제발전에 평생을 헌신한 공로를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것이다. 조국이 세계 최강 과학기술 입국이 되기까지 애써온 1세대 과학자로서 정근모 박사의 삶은 그대로 우리나라가 만들어온 과학기술 역사의 기록이 되었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조국의 미래를 꿈꾸며 열악한 환경에서 함께 했던 초기 과학자들의 열정과 헌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백색전화가 집 한 채 값이던 1970년대에 전자식 교환기 시스템을 개발하여 통신 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정근모 박사의 역설을 바로 정책 실현에 옮긴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글로벌 삼성의 밀알이 된 한국반도체의 설립자 강기동 박사, 기업가로서 고등기술원과 같은 인재 양성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김우중 회장,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KAIST 교수진, 과학기술처 관료들 등 많은 사람의 노력이 어떻게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정근모 박사는 1세대 과학자들의 발자취를 꼭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정신과 열정이 깊이 뿌리내려야 대한민국이 더 든든히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일보에 칼럼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82회 연재했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이 책이 출간되었다. 온 생을 쏟아부었던 1세대 과학자들의 ‘과학기술입국’의 의지와 그들이 만들어 낸 위대한 역사가 우리의 아주 오랜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들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함이다. 작은 밀알이 모이고 모여 쏘아올렸던 대한민국의 희망을 이제 젊은 세대들에게 숙제로 남기면서. 

 

출처: 코리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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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닷컴(Korea.com)]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 대한민국 1세대 과학자 정근모 박사가 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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