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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추천도서(24.3~/2024-03

3월의 추천도서 (4036) 알고 보면 반할 매화

 

1. 책소개

 

한겨울에 매화를 피우는 법부터
매화를 아내로 맞은 이들의 이야기까지
조선 선비들의 매화 문화사

 

매화를 좋아하시나요?
눈 속에서 피어난 ‘설중매’, 화병에 꽂아 개화를 앞당긴 ‘병매’,
밀랍으로 만든 ‘윤회매’, 꽃이 피면 한바탕 잔치를 열던 ‘매화음’,
매화를 벗으로, 아내로 삼아 부른 ‘매화군’과 ‘매화부인’,
그리고, 조선의 5대 명품 매화까지


조선시대 꽃과 나무의 문화사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매화다. 사군자의 맨 첫 자리를 차지할뿐더러, 엄동설한을 뚫고 꽃을 피우는 것이 여느 꽃들과는 차원이 다르며, 그렇게 피어난 꽃은 특유의 매력적인 향을 뿜었다. 매화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에게 사랑받아 온 이유다. 선비들의 매화 사랑은 다양한 글로도 표현되었는데, 이 책은 조선시대 문사(文士)들이 시와 산문을 통해 남긴, 매화를 사랑하고 즐겼던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매화를 키우는 다양한 방법부터 벗들을 불러 한겨울에 피운 매화꽃을 함께 감상하는 매화음, 매화를 벗으로 삼은 이, 또는 그것도 모자라 아내로 삼은 마니아들, 그리고 조선의 5대 명품 매화까지, 조선 선비들의 매화 문화사가 운치 있는 매화 그림들과 함께 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

 

출처:본문중에서

 

 

 

 

2. 저자

 

저자 : 이종묵 (李鍾黙)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있다가 서울대학교로 옮겨 재직하고 있다. 선비의 운치 있는 삶을 좋아하여 옛글을 읽고 스스로 즐거워 가끔 글을 쓴다. 『우리 한시를 읽다』, 『한시 마중』, 『조선의 문화공간』, 『부부』, 『양화소록 - 선비 꽃과 나무를 벗하다』, 『돌아앉으면 생각이 바뀐다』, 『조선시대 경강의 별서』 등의 저술이 있다.

 

출처:본문중에서

 

 

 

 

3. 목차

 

서(序)

제1부 매화를 키우는 일

설중매를 위하여
화병에 꽂은 매화
난로회와 매화음
늦게 피는 매화를 위한 변명
매화의 적

제2부 매화를 사랑한 사람들

매화와의 문답
시로 매화의 주인을 다투다
매화와 미인
화정부인의 일생
벗들 사이를 오간 매화 첩

제3부 조선의 명품 매화

단속사의 정당매
사명대사의 정릉매
이정귀의 관동 월사매
대명매와 대명홍
삼매당과 사매당

주(註)
수록 글의 원 출처

 

출처:본문중에서

 

 

 

 

4. 출판사서평

 

“이름난 매화를 직접 찾아가 눈으로 꽃을 보고 코로 향을 맡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더욱 사랑하는 것은 옛글 속의 매화니, 결국 내 가슴속의 매화인 셈이다. 옛글을 통해 내 가슴속에 피어 있는 매화를 보이고자 한다.”
- 저자의 「서(序)」 중에서

설중매

책은 설중매(雪中梅) 이야기로 시작된다. 매화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설중매다. 한겨울에 꽃을 피우는 매화는 맑고 매운 절개를 지닌 선비를 닮았다. 16세기 영남의 선비 하항은 기질이 맑아 한 점 세속의 티끌조차 묻어 있지 않다 하여 벗들이 그를 설중매라 불렀다는데, 그만큼 옛 선비들은 설중매를 좋아했고 또 스스로 설중매이고 싶어 했다.

장유는 「만휴당십육영 중 세밑에 피는 강가의 매화」라는 시에서 “누가 알았으랴, 남방의 기후 특별하여서 / 세밑에 남쪽 가지에서 꽃소식 재촉할 줄.”이라고 읊었는데, 만휴당(晚休堂)은 전라도 나주에 있었기에 굳이 방 안에 두고 인공을 가하지 않아도 노지에서 매화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선비들은 한겨울에 매화꽃을 즐기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1652년 무렵 승지 박장원은 뿌리와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매화나무 가지 서너 개를 화분에 옮겨 심고 침실에 두었다가, 끓인 물을 하루에 한두 차례 며칠 부어 주어 결국 세모에 꽃망울을 틔웠다고 한다.

효종의 딸 숙안공주의 손자인 홍태유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한 뒤 여주의 이호(梨湖)로 물러나 살면서 매화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데, 매화를 화분에 옮겨 심고 방 안에 두면서 온도를 조절하여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꽃을 피웠다. 그는 아예 꽃을 관리하는 하인 화노(花奴)까지 두었다고 한다. 납매(臘梅)는 이런 정성으로 피운 세밑의 매화를 가리킨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설중매를 즐기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소개된다. 또한 깨끗함을 생명으로 하는 매화의 운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매화 화분을 넣어 두는 작은 감실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를 매합(梅閤)이라고 한다. 매합에 푸른 명주 천으로 휘장을 씌우고, 명주로 만든 매합 안에 매화와 짝을 이루는 달을 그려 넣기도 하는 등, 조선 선비들의 매화 사랑은 매합이 점차 화려해지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윤회매

선비들의 매화 사랑은 밀랍으로 매화를 만드는 일로 발전했다. 이 방법의 극치는 이덕무의 글에서 확인된다. 그는 벌이 꽃가루를 채취하여 꿀을 만들고, 꿀에서 밀랍이 생기며, 밀랍으로 매화를 만든다는 데서 착안하여 이를 윤회매(輪回梅)라 불렀고, 윤회매 만드는 상세한 방법과 벗들과 윤회매의 운치를 기록한 시문을 모아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이라는 소책자를 만들기도 했다.

박지원이 곤궁하여 윤회매 만드는 방법을 묻기에 이덕무가 직접 시범해 보였는데, 「윤회매십전」에는 박지원이 고마운 뜻으로 보낸 아래와 같은 편지 내용이 적혀 있다.

“화병에 꽃 열한 송이를 꽂은 것을 팔아서 돈 스무 닢을 받았는데, 형수에게 열 닢 드리고 아내에게 세 닢 주고, 작은 딸에게 한 닢 주고, 형님 방에 땔나무 값으로 두 닢 보내고, 내 방에도 두 닢 보내고, 담배 사는 데에 한 닢을 쓰고 나니, 묘하게 한 닢이 남았소. 이렇게 보내 올리니 웃으면서 받아 주면 좋겠소.”

매화음

18세기 무렵 한양에서는 난로회(煖爐會)와 매화음(梅花飮)이 크게 유행했다. 난로회는 화로에 숯불을 피워 놓고 번철을 올린 다음 쇠고기에 계란과 파, 마늘, 후추 등 갖은양념을 더하여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 풍습이고, 매화음은 운치 있는 문인들이 화분에 매화를 옮겨 심고 방 안의 감실에 넣어 잘 관리하여 눈 속에 꽃을 피운 후 벗들을 불러 즐기는 것이다. 별 품위 없어 보이는 난로회가 매화음과 어우러지면 그 운치가 달라졌다.

곤궁했던 화가 김홍도가 그림을 팔아 얻은 3천 전을 가지고, 평소 사고 싶었던 매화를 2천 전에 사고 800전으로 술을 사서 친구들과 매화음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조희룡의 『호산외기(壺山外記)』에 전하니, 당시 매화음이 크게 유행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인상은 매화 구경을 하면서 난로회를 갖는 풍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한겨울 피어야 할 매화가 뜨거운 화로의 불기운 때문에 10월에 벌써 꽃을 피우는데, 비릿한 고기 굽는 연기를 덮어써야 하니, 맑은 절조의 매화로서는 난로회가 참기 어려운 굴욕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고기 대신 맑은 차를 마시며 매화를 완상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덕무는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서 세상에서 가장 운치 있는 풍경을 다음과 같이 들었는데, 매화 구경으로는 가히 최고의 경지일 것이다.

“세속에서 초탈한 선생이 있어 깊은 산중 눈 속의 집에서 등불을 밝히고, 붉은 먹을 갈아 『주역』에 권점(圈點)을 치노라면, 오래된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향 연기가 하늘하늘 하늘로 오르면서 오색찬란한 공[毬] 모양을 짓는다. 오른편에는 일제히 꽃봉오리를 터뜨린 매화가 보이고 왼편에는 솔바람과 회화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보글보글 차 끓는 소리가 들린다.”

매화를 사랑한 이들

꽃을 사랑한 조선의 선비 유박은 꽃을 벗으로 불렀다. 집에 온갖 꽃들을 심고 백화암(百花菴)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화암수록(花菴隨錄)』이라는 책을 지었다. 그는 매화를 두고 “강과 산의 정신이요, 태곳적 면목이라.” 했고, 겨울에 피는 납매를 기이한 벗 ‘기우(奇友)’라 하고, 봄에 피는 춘매(春梅)를 예스러운 벗 ‘고우(古友)’라 했다.

동아시아의 문인들은 자신의 덕을 표상하는 꽃을 사랑하고 꽃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벗이나 손님으로 삼았다. 항주(杭州)의 서호(西湖)에 은거한 송의 임포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서,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는 ‘매처학자(梅妻鶴子)’의 고사는 유명하다. 또한 황정견은 “산반화는 아우요 매화는 형이네.”라 하여 매화를 형으로 삼았는데, 그로부터 매형(梅兄)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대나무 벗 매화 형이라는 뜻의 ‘죽우매형(竹友梅兄)’, 혹은 대나무 아우 매화 형이라는 뜻의 ‘죽제매형(竹弟梅兄)’ 등의 말이 생겨났다.

조선에는 매화를 사람인 양 설정하여 대화를 주고받듯 시를 짓는 전통이 유행했는데, 특히 이황은 매화문답시라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 널리 퍼뜨렸다. 그는 매화를 매형(梅兄)이라 불렀고, 세상을 뜨기 며칠 전 설사를 하게 되자 “매형에게 불결하니 마음이 절로 편치 못하구나.”라 하면서 매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게 하고는 며칠 후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한 다음 눈을 감았다는 고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황이 처음 매화와 대화를 시도한 것은 벼슬에 들고 나는 출처(出處) 때문이었다. 1566년 2월 조정에서 이황을 공조판서로 부르자 이황은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린 후 경상도 예천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심사를 매화에게 “고고한 매화는 고산이라야 맞는 법 / 무슨 일로 이 관아의 정원으로 옮겨 왔나? / 절로 명예 때문에 필시 그르치게 되리니 / 내 늙어 명예에 시달린다고 놀리지 말게.”라고 토로했다. 매처학자의 처사 임포가 사랑한 꽃 매화는 고산(孤山)에 있어야 맞는데 벼슬아치들이 득실거리는 관아에 온 것처럼, 자신도 벼슬 때문에 고향을 떠나게 된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그러자 매화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관아의 뜰에서 고산을 그리워하는데 / 그대는 객지에서 구름과 개울을 꿈꾸는구나. / 한 번 웃으며 만난 것 하늘이 빌려준 기회라 / 굳이 선학과 함께 사립문 지킬 것 있겠나?”(이황, 「매화를 대신하여 답하다」) 매화의 답은 엉뚱하다. 이황이 매화를 사랑하면 그뿐이지 굳이 임포처럼 고산을 고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예 벼슬 문제는 말도 꺼내지 않았으니, 이황은 매화의 고고한 절조를 지킬 뿐 벼슬길에 나아갈 마음이 없다는 뜻을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조문명과 홍중성이 시로 매화의 주인을 다툰 일화, 정약용의 매조도에 담긴 아내에 대한 그리움, 매화를 아내로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럿 실려 있다.

조선의 명품 매화

저자가 이 책 마지막 장에서 언급하는 ‘조선의 명품 매화’는 모두 다섯 가지로, ‘단속사의 정당매’, ‘사명대사의 정릉매’, ‘이정귀의 관동 월사매’, ‘대명매와 대명홍’, ‘삼매당과 사매당’이다.

정당매(政堂梅)는 강희안의 조부 강회백이 젊은 시절 벼슬에 오르기 전에 단속사에 심은 매화로, 그 가지가 구불구불하여 만 가지 형상이며, 푸른 이끼가 비늘처럼 주글주글 뒤덮고 있어 명품 매화의 반열에 올랐다.

정릉매(靖陵梅)는 일본에 간 사명대사 유정이 중국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여 봉은사에 심고 즐긴 것으로, 그 후 이신성이 이 매화를 정릉으로 옮겨 심어 유명해졌다. 정릉매가 세상에 이름을 얻은 것은 세상에 희귀한 ‘도심매(倒心梅)’, 즉 꽃이 거꾸로 드리워지는 특수한 종류였기 때문이다.

관동 월사매(月沙梅)는 월사 이정귀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어사(御史) 웅화와 내기 바둑을 두어 얻게 된 홍매(紅梅)로, 우리나라에서 홍매화가 중엽이 아닌 단엽인 것은 이 한 그루뿐이어서 유명해졌다. 원래 명 신종이 감상하던 것인데, 웅화가 신종의 명으로 시를 지어 바쳐 그 상으로 이 홍매를 하사받은 것이었다.

이정귀의 월사매는 만력매(萬曆梅)라고도 불렸는데, 만력매의 후손이 19세기에 다시 대명매(大明梅)로 일컬어졌다. 이정귀 생전에 이 매화가 번성하다가 그가 죽고 명이 망한 후에 말라 버렸는데, 그 후손의 지극정성으로 200여 년이 지난 1891년 드디어 소생하여 꽃을 피웠다는 기이한 일이 있었고, 당시 기호 지역의 사족들이 다투어 이 일을 시로 지었다고 한다.

‘삼매당과 사매당’은 충청도 회덕의 삼매당 주인 박계립, 『삼매당유고(三梅堂遺稿)』를 남긴 정일, 함평의 사매당 주인 윤삼거 등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알고 보면 반할 매화출판사 태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