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지 사항 및 소식

2015 세계 책의 날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
 스페인이 낳은 최대의 소설가·극작가·시인. 소설《돈키호테 Don Quixote》의 작자이다. 마드리드 부근 알칼라 데 에나레스 출생. 가난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족과 함께 각지를 전전하였으며,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이름이 문헌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568년 인문학자 로페스 데 오요소라는 사람의 사숙(私塾)에서 잠시 공부한 것 외에는 학교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은 적이 없다. 오요소가 출판한 펠리페 2세의 왕비를 추도하는 시문집에서이며, 여기에 그가 <소중하게 숨겨 놓은 나의 사랑하는 제자> 라고 한 세르반테스의 시가 3편 실려 있다. 22세 때 이탈리아로 건너가 추기경 G.아크와비바의 시중을 들었으며, 71년에는 나폴리로 가서 동생 로드리고가 있는 부대에 들어가 군인이 되었다. 이듬해 레판토 해전에 참가하여 가슴과 팔에 부상을 입었는데 그는 이 부상으로 왼쪽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요양한 후에 다시 군대로  돌아가 동생과 함께 나바리논해전튀니스공략 등에 참가하고 팔레르모와 나폴리에 주둔하고 있던 중 75년 국왕의 이복동생이며 해군 총 사령관인 돈 후앙 아우스트리아제독의 감사장과 시칠리아 부왕의 추천장을 가지고 에스파냐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도중에 그가 탄 배가 투르크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알제리로 끌려가 그곳에서 1580년까지 5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 도망치려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은 몸값을 지불하고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에스파냐에 돌아온 뒤 그는 문필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87년까지 20~30 편의 작품을 썼는데,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알제리의 생활》과 《라 느만시아》 2권뿐이다. 이 무렵에 쓴 작품으로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양치기에 관한 이야기 《라 갈라테아 La Ga-Latea(1585)》이다. 1584년에는 18살 연하의 카타리나라는 부유한 농가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 이듬해에 처녀작 《라 갈라테아》를 출판하였다. 그녀의 지참금으로 잠시 안정된 생활을 하였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을 부양하게 되어, 87년 세비야로 가서 무적함대의 세금수금원이 되었다. 이 일을 하고 있을 때 주교령에서 지나치게 징발하여 교회에서 파문당하 일도 있었다. 또한 그라나다에서 세리로 있을 때에도 공금을 맡겨 둔 은행가의 실종에 휘말려 감옥에 들어갔으며 결국에는 관직에서도 쫓겨났다. 그는 이 시기에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한 《돈키호테(제1부, 1605)》를 출판하였다. 이 작품은 출판과 함께 큰 호평을 받아 판(版)을 거듭했지만 판권을 싼값으로 팔아 넘겼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그 후에도 여전히 어려웠다. 출판직후에 어느 변사 사건과 관련된 혐의를 받아 한때 가족과 함께 구속된 적도 있었다. 주로 금전문제로 여러 가지 의혹을 받으면서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의 그의 문학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12편의 중단편소설을 실은 《모범소설집(1613)》의 출판을 시작으로 당시의 시인들을 비평한 장편시 《파르나소산 여행(1614)》과 《신작희곡 8종과 막간희극 8종(1615)》을 잇따라 출판했다. 그리고 1615년에는 《돈 키호테(1615)》2부를 출판한  뒤에,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에스파냐어로 씌어진 가장 훌륭한 또는 가장 형편없는 창작이라는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고난(1617)》을 끝내고 죽기 전에   매우 감동적인 헌사를 썼다. 16년 4월 23일 세익스피어와 같은 날 마드리드에서 운명하였다.

돈 키호테 (EI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 (1권 1605~ 2권 1615)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 작(作).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 대작가. 세르반테스 필생의 대작으로 스페인 문학의 최고봉일 뿐  아니라 세계 문학사상 가장 큰 대작임을 세계가 인정하는 불세출의 대작가이다.

【성립】
 자세한 제명은 《재지(才知) 넘치는 기사 돈 키호테 델 라 만차》이다. 전편은 1605년 1월 마드리드의 판 테 쿠에스타 인쇄소에서 인쇄되어 프란시스코 데 로블레스 서점에서 발매되었다. 내용은 52장으로 나뉘어, 제1장에서 8장까지를 제1부,   제9장에서 14장까지를 제2부, 제15장에서 27장까지를 제3부, 제28장에서 52장까지를 제4부로 하였다. 후편은 그보다 10년 후인 1615년에 전편과 같은 인쇄소와 서점에서 출판 발매되었다. 그러나 제명《재지 넘치는 기사 돈 키호테 델 라 만차》 (EI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와, 「향사」(hidalgo)가 「기사」(caballero)로 바뀐 점이 다르고 전편처럼 제1부, 제2부라는 식으로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74장으로 나뉘어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쓴 목적을 서문속에 나오는 친구의 말을 빌어 「이 저작은, 기사 이야기가  세상이나 대중 사이에 지니고 있는 권위와 세력을 타도하려는 것 이외의 목적은 없으므로……」라고 서술하고 있다. 작자는 처음에 그 무렵 민중 사이에서 읽히고 있던 기사이야기의 패러디를 짤막하게 쓸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전편의  제1부, 제2부라는 구분의 불균형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처음에는 작자 자신도 돈키호테의 분신이라 할 산초 판사조차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전편 제7장의 제2회에 산초 판사가 등장했을 때 돈키호테는 비로소 참다운 돈키호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감흥이 이는대로, 명확한 플랜도 없이 써내려가는 동안에, 처음 의도했던 것은 잊어버리고 돈 키호테를 따르는 산초 판사의   성격을 창조한다는 새로운 주제에 열중하게 되어 마침내는 인생 전체를 포괄하는, 프랑스의 티보데가 「인류의 서」라고 부를 만하 대작이 되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19세기의 뛰어난 스페인 문학사가 메넨데스이팔라요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르반테스의 이 작품은 기사 이야기의 대조물(안티테제 Antithese↔these)도, 산문적인 윤기 없는 부정도 아니다. 오히려 그 순화이며 완성이었다. 하나의 이상을 소멸시킨다기보다 그것을 변용하고 고척시키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다. 기사도에 포함되어 있던 일체의 시적이고 이상적이며 또한 인간적인 것은 이 새로운 작품 속에 더욱 높은 의의를 가지고 담겨져 있다. 기사도 정신이라기보다 그 퇴화에 있어서 가공적이며, 부도덕하고 허위적인 것은, 르네상스인 중에서도 가장 건강하고 균형이 잡힌 이 작자의 고전적인 조용함과, 시니시즘 앞에서 마치 환영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돈 키호테》는 기사 이야기의 마지막이고 결정적이며, 완성된 작품이 된 것이다. 막연한 기적인 주제를 빛나는 초점에 맞추고, 동시에 흔한 인생의 사전들을 서사시의 높이에까지 고척시킴으로써 근대사실소설의 최초이고 또 아무도 이것을 능가하지 못한 모델을 이룩한 것이다.
【내용】
 스페인의 라 만차의 마을에 사는 아론소 키하다라는 시골 향사가 밤낮으로 기사 이야기만을 읽던 중에 머리가 돌아 스스로 기사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 세상의 부정을 고치고 고생하는 자를 도우려고 편역의 여행길에 오른다. 이름도 돈 키호테 델 라 만차라고 개명, 조부 전래의 남루한 갑주를 몸에 걸치고, 노마 로시난테에 올라탄다. 이 정의를 사랑하고 이상을 위해서는 자신의 위험도 돌보지 않고 오직 이상만을 추구하는 고매한 광인 돈키호테와, 어떠한 경우에도 현실을 잊지 않으며 욕심 많고 겁쟁이이며 교활하고, 그러면서 주인에 대해서는 매우  충실하고 때로는 놀라운 현명함도 발휘하는, 한 마디로 말해서 전형적인 스페인의 농민 종자 산초 판사의 주종이, 돈키호테의 몽상과 이 세상의 산문적인 현실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때마다 야기되는 우스꽝스럽고 동시에 본인들에게는 비통한 실패를 연출한다는 것이 전편의 취향으로 되어 있다. 전편은 일화의 연속으로, 그 사이에 학문·정치·철학 등에 관한 논의가 끼어든다. 특히 전편에서는 <무분별한 호사가> <포도 이야기>, 그밖에 반드시 본서의 줄거리와는 관계없는 듯한 단편과 에피소드등이 들어가 잇다.
【평가】
 소설 구성의 면에서 보면 세르반테스의 시대까지 나타난 「악한소설」 「목인소설」 「기사담」, 그 밖의 이탈리아풍의 소설 등 온갖 문학양식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으나, 동시에 이야말로 문학의 새로운 형식, 즉 이전에 운문이 차지하고 있던 왕좌를 빼앗아 문학의 왕좌를 점하기에 이른 근대소설의 출발이었다. 또한 《돈 키호테》의 출판 이래 350년 동안에 소설은 한층 밀도를 더하여 수많은  천재적 작가들이 머리를 짜내어 새로운 의지와 취향을 창안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가 마음내키는대로 갈겨 쓴 《돈키호테》 속에 이미 그 모든 요소가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매우 이상스런 일이다. 「후편」이 「전편」만 못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였으나 이 점에서 세르반테스는 완전한 예외에 속한다. 왜냐하면 본서의 「후편」은 문체도 세련되고 소설로서의 형태도 잘 정돈되어 있고, 사상도 더욱 깊고, 돈키호테와 산초 2인의 성격 묘사도 밀도를 더하고, 윤곽도 한층 명확해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정치론 등의 줄거리를 벗어나는 논의가 끼어들지만 이미 독립된 단편소설이라는 구성은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세르반테스가 이 후편의 제 59장을 쓰고 있던 1614년, 타라고나시에서 알론소 페르난데스 데 아벨랴네다(Alonso Fecnandez de Avellaneda)라는 필명으로 위작인 《돈 키호테 후편》이 출판되었다. 이 아벨랴네다가 누구의 익명인지는 지금까지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타인 작품의 후편을 마음대로 쓴다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별로 비난받을 만한 짓이 아니어서 흔히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반테스는 이 아벨랴네다의 위작     「후편」의 출현을 알자 그때까지 사라고사의 마상 시합에 보낼 예정이던 돈키호테를 갑자기 바루세로나로 보내기로 하고, 제 59장 이하의 완결을 서두르기도 하여, 작품 속에서 누군지 알 수 없는 이 적수에 대하여 울분을 풀기도 하였다. 세르반테스를 불쾌하게 한 것은 자기가 모르는 사나이의 「후편」이 출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위작 「돈키호테」 후편의 서문에 씌어진 악의에 찬  야유에, 사람 좋은 정직자 세르반테스도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 아벨랴네다의 《돈 키호테》도 결코 쓸모없는 작품은 아니다. 르 사쥐처럼 세르반테스의 후편보다 훌륭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의 그 고결하고 기품 있는 인품도, 산초 판사의 조잡하고 현실적이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매력도, 아벨랴네다의 주인공들은 갖추고 있지 않다. 바로 여기에 천재와 보통 작가와의 넘지 못할 경계가 있는 것이다. 다만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가짜《돈키호테》의 출현이 세르반테스를 불쾌히 만든 덕분에 진짜 《돈키호테》의 후편이 완성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벨랴네다에게 감사하여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세르반테스의 후편은 혹 미완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후편의 헌제의 마지막 날짜는 1615년 10월 말로 되어 있는데, 그로부터 반년도 넘지 않은 1616년 4월 23일에 세르반테스는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전·후편을 통한 결점도 많이 있다. 작품을 써 나감에 따라 작자의   자상도 성장해 갔으므로 전체의 구성이 긴밀감을 결하고, 줄거리도 더러 불명확한 데가 산견된다. 가장 큰 흠은 산만하다는 점인데, 조금만 손질하면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세상 그 자체와 같이 모순에 찬   산만이라는 점에서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중에서도 뛰어나게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두 성격의 묘사이다. 세르반테스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성격 묘사의 비법 같은 것을 체득하고 있던 드문 작자의 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성격을 부조해 간다. 독자는 자기의 친구를 알고 있듯이 혹은 그 이상으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알게 된다. 기사의 고매한 이상은 산초의 실제적이며 비속한 물질주의와 대조적이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하여 각각 인간성의 양면을 나타내고 있다. 두 사람이 무두 순수한 스페인인이며 동시에 그 보편적인 인간성은 국가와 인종·연명·성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친근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이것은 전편에 넘쳐 흐르는 유모어에 적지 않게 힘입고 있는 것인데, 그보다도 가장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점은 인간의 취약성이나 세상의 슬픔·괴로움을 깊이 알고 있는 작자 세르반테스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감일 것이다.    《돈키호테》가 후세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상술할 것까지도 없으나 다만 19세기 이후의 근대 사실소설의 거장들로 발작, 스탕달, 프로벨이 모두 세르반테스를  스승으로 삼고 《돈키호테》를 애독했으며, 거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점만을 덧붙여 둔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연보

1547년 9월 29일 마드리드 동북부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에서    로드리고 (Rodrigo Cervantes) 집안의 7남매 중 넷째로 출생.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는 떠돌이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바야돌리드, 코르도바, 세비야 등 스페인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닌다.
1564년 세비야로 이사한 뒤 당시 대표적인 극작가였던 로페 데 루에다(Lope de Rueda)의 연극을 보고 감명 받아 극작가의 길을 꿈꾼다.
1566년 가족 모두 마드리드로 상경해 정착한다. 에라스무스 사상의 추종자였던 후안 로페스 데 오요스(Juan López de Hoyos)가 교장으로 있는 인문 학교에 등록하여 사상적인 영향을 받는다. 펠리페 2세의 왕비 도냐 이사벨(Doña Isabel)이 서거하자 추모시를 쓰면서 서서히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1569년 안토니오 데 시구라(Antonio de Sigura)와의 결투 중에 부상을 입힌   사건이 비화되어 사법당국에 의해 수배된다. 게다가 체포된 뒤에는 오른손을 절단하고 10년간 유배를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로마로 도피하여 먼 친척 뻘인 아쿠아비바(Acquaviva) 추기경의 비서가 된다. 로마의 문화와 문학을 접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진 작가는 그 후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 보병부대에 자원 입대한다.
1571년 교황청과 베네치아 공화국 그리고 스페인의 연합함대가 터키함대와 레판토(Lepanto) 해협에서 일전을 벌인다.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충돌이었으며 세계 3대 해전의 하나로 꼽히는 이 전투에 세르반테스도 참가하여 세 발의 총탄을 맞고 평생 왼쪽 팔을 못쓰게 된다. 이후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는다. 이후로도 군에 남아 이태리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풍부한 문화를 접한다.
1575년 군복무를 마치고 배를 타고 귀국하다가 알제리에 근거를 둔 터키 해적들에게 포로가 된다. 레판토 해전의 무훈으로 스페인 사령관 돈후안의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발각되어 요주의 인물이 되며 몸값이 올라간다. 이후 5년간 비참한 노예생활을 견디어낸다.
1580년 노예생활 중 네 차례나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가족들과   삼위일체 수도회의 노력으로 몸값을 치르고 석방되어 귀국한다.
1583년 유부녀인 아나 프랑카 데 로하스(Ana Franca de Rojas)와 연애하여,  이사벨(Isabel)이라는 딸을 얻는다. 이사벨은 세르반테스의 유일한 후손이었다.
1584년 19세의 처녀인 카탈리나 데 살라사르(Catalina de Salazar)와 결혼한다.
1585년 처녀작으로 목가소설인 󰡔라 갈라테아󰡕 (La Galatea)를 출판한다. 또한 극작품인 「누만시아」 (Numancia)와 「알제리에서의 대우」 (El trato de Argel)를 쓴다.
1587년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을 처가에 두고 혼자 세비야에 와서 당시 영국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무적함대(La Armada Invencible)의 보급관으로  취직한다.
1590년 스페인 함대 보급관으로 계속 일하면서 국왕에게 편지를 써서 아메리카 대륙의 일자리를 청원하지만 거절당한다.
1592년 보급관 재직 시에 허가 없이 밀을 내다 팔았다는 이유로 투옥되지만   소명하여 곧 석방된다.
1594-1597년 그라나다 지방의 세무공무원이 되지만 당시 경제공황의 여파로  거래하고 있던 은행이 파산하자 책임을 지고 다시 투옥된다. 세비야 감옥에서 몇 달을 보내는 동안 󰡔돈키호테󰡕가 구상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이후에도 세무공무원으로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스페인 사람들의 모든 속성을 관찰하여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1603년 바야돌리드에 가족과 함께 정착한다. 아내와 두 처제, 처제의 딸 그리고 자신의 딸 이사벨 등 가족이 모두 여자들이었다.
1605년 󰡔돈키호테󰡕 (El ingenioso hidalgo de Don Quijote de la Mancha) 1부가 출판된다. 판매에 큰 성공을 거두지만 작가는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지  못한다.
1613년 12편의 중편소설이 담긴 󰡔모범소설집󰡕 (Novelas ejemplares)이 출판된다.
1614년 시집인 󰡔파르나소로의 여행󰡕 (Viaje del Parnaso)을 출판한다. 아베야네다(Avellaneda)에 의해 위작(僞作) 󰡔돈키호테󰡕 2부가 출판된다.
1615년 위작이 나타난 것을 보고 서둘러 󰡔돈키호테󰡕 속편 작업을 끝내 출판한다. 또한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entremeses)을 펴낸다. 그러나 당시  연극계를 주름잡던 라이벌,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의 위세에 눌려 무대에 올려지지는 못한다.
1616년 병에 걸렸으나 병석에서도 계속 글을 썼으며 유작이 된 비잔틴 소설,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 (Los trabajos de Persiles y Sigismunda)를 탈고한다. 며칠 뒤인 4월 22일 운명한다 (셰익스피어와 사망일이 같다는 얘기는 잘못이다. 당시 영국은 쥴리우스력을 사용하였고, 스페인은 그레고리오력을 사용하였으므로, 실제 사망일은 한 달 이상의 차이가 있다).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peare  1564~1616)
 영국 시인·극작가. 세계 연극사상 최대의 극작가이며 영국 문학사를 장식하는 대시인이다. 18세기 이래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학이라는 독립된 학문이 발전하였고 모든 비평원리의 선례로 이용되며, 극단에서는 셰익스피어의 극이 배우의 등용문으로 되어 있다.
[성장]
 영국 르네상스의 정점인 엘리자베스 1세때 영국의 중부지방에 있는 워릭셔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피혁가공업과 농산물·모직물의  중개업을 하였고, 어머니는 근처의 부농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가 1568년 읍장으로 선출되어 유복한 시민의 장남으로서 유년시절을 행복하게 보내며 마을의 문법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13세 때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하여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한 듯하다. 18세 때 8살 연상인 A.해서웨이와 결혼하여, 다음해 장녀   수재나를 낳고, 2년 후 쌍둥이 남매 햄닛과 주디스를 낳았다. 셰익스피어의 소년시절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록이 없고 연극과의 연관도 분명하지 않으며, 런던으로 나온 이유나 연대도 자세하지 않다. 런던시절 배우로서의 생활은 1580년대 말 무렵부터인 것 같다. 92년에는 신진연극인으로서의 평판이 높았다는 기록이 있다.
[습작시대]
 셰익스피어의 극작 활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1590년 무렵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선배작가의 희곡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조수로서의 작업에 불과했지만, 점차 그의 작품이라 할 만한 희곡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3부작 역사극 《헨리 6세 (1590~92)》를 그의 처녀작이라 볼 수 있다. 그 속편에 해당하는 역사극 《리처드 3세 (1593)》는 엘리자베스 1세 때 영국에 많은 영향을 준 요크가와 랭커스터가의 싸움인  장미전쟁(1455~85년의 영국 내란)의 최종단계를 그린 것으로, 주인공 리처드   3세를 창조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의 작품을   번안한 《실수의 희극(1593)》과 익살극 《말괄량이 길들이기(1594)》, 당시  인기 있던 유혈비극의 로마사극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1593)》등이 초기   작품이다. 대부분 습작이며 선배의 모방이었으나 대작가로서의 잠재력을 엿볼 수 있다.
[극단의 재편성]
 1592년부터 3년에 걸쳐 런던에 유행한 페스트 때문에 극장은 폐쇄되었고, 셰익스피어는 그동안 2편의 서사시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 《루크리스의 겁탈(1594)》을 사우샘프턴 백작에게 바쳐 그로부터 인정받았다. 94년 궁내부대신의 비호를 받는 극단이 생기자 그는 간부단원으로 참가하였다. 극장 폐쇄의 결과  라고도 할 수 있는 런던극단의 대규모 재편성은 셰익스피어와 같은 신진작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평생 이 극단을 위해서 희곡을 쓰게 되었는데, 최초의 작품들은 운명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시인 기질이며 자가도취적인  국왕이 수많은 수난을 겪고 비극의 주인공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역사극 《리처드 2세》, 아테네 교외에서 밤의 숲을 무대로 환상의 세계를 그린 낭만적인 희극 《한 여름 밤의 꿈》 등이다. 모두 95년 무렵의 작품이며 서정성과 인간 관찰의 예리함이 나타나 있다.
[폴스태프의 창조]
 작품 가운데 인간에 대한 통찰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1590년대 후반   역사극과 희극이다. 역사극의 대표작은 2부작 《헨리 4세(1598)》이다. 리처드 2세한테서 왕위를 빼앗음으로써 성립한 헨리 4세 치하의 음모와 혼란의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무뢰한의 방탕생활을 하는 늙은 기사 폴스태프는 햄릿과 함께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성격 중에서 가장 흥미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핼   왕자와 함께 벌이는 난행은 도덕적으로는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그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18세기 이래 셰익스피어 성격론의 중심이 되어 왔다. 또 이 시기 대표적 희극 가운데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1597)》은 감미로운 연애희극 속에 욕심 많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등장시켜, 사회통념에 따라 악인의   운명을 겪게 하면서도 소수 피압박민족의 슬픔과 분노를 강하게 호소하여, 인간에 대한 온정과 공정한 사회관찰의 시각을 보여준다.
[명성의 확립]
 궁내부 극단은 순조롭게 발전하여 영국 제1의 극단이 되었고, 셰익스피어의   명성도 확립되었다. 1596년에는 장남을 잃는 불행이 있었지만 그해 가을에는  아버지를 위해 문장착용권을 취득했고, 97년 고향인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대저택 뉴플레이스를 구입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성공하였다. 또 99년 템스강  남쪽 연안에 <글로브극장>을 건설하고 자신이 속해 있던 극단의 상설극장으로 삼았다. 이 무렵 셰익스피어의 창작력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뜻대로 하세요(1599)》는 아덴숲을 무대로, 궁정에서 쫓겨난 배경이 되어 점은 남녀의 연애를 낭만적으로 그린 걸작희극이다. 우울증에 걸린 제이퀴즈를 등장시켜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세계에도 그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궁정에서 상연할 목적으로 쓴 희극 《십이야》는 1600년 무렵의 작품으로, 셰익스피어 최고의 희극으로  평판이 높다. 작품 전체가 낭만적인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서정적 분위기와 익살·재담·해학 등 희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4대 비극의 탄생]
 《십이야》를 전후해서 셰익스피어는 로마의 역사에서 소재를 얻어 비극《줄리어스 시저(1599)》를 썼는데, 이때부터 몇 년간을 셰익스피어의 <비극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햄릿(1601)》《오셀로(1604)》《리어왕(1605)》《맥베스(1606)》등 이른바 4대 비극은 이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각각 소재도 다르고 다루는 방법도 다양해서 4대 비극에 대해서 반드시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모두 진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대의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인간의 장대하고 비극적인 세계를 제시하고, 죽음과의 관련에서 인간적인 가치탐구를 시도하여 세계 연극사상 최고의 비극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셰익스피어는 비극뿐만 아니라 《끝이 좋으면 모두 좋아(1602)》와 《자에는 자로(1604)》 등의 희극도 썼다. 모두 결말이 희극적이지만, 줄거리를 억지로 끌고간 부자연스러움과 작품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며, 도덕성에도 혼미함이 보여 <문제 희극>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 마지막 비극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1607)》이고, 거의 같은 시기에 집필된 망은을 주제로 한 《아테네의 타이몬(1607)》은 비극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로맨스극의 유행]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1세를 맞이하자, 궁내부 극단은 국왕의 비호를 받게 되어 국왕극단으로 개칭하였는데, 이때부터 영국의 연극에도 변화가 생겨 관객의 기호가 변해갔다. 대작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이는 격렬한 감정의 극에서 가정비극, 풍자희극, 감상적인 희비극, 또는 퇴폐적인   비극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국왕극단은 1608년 종래의 글로브극장과는 건축양식이 다르고 입장료도 비싸며 비교적 부유한 관객층을 대상으로 한 불랙플레이어스극장을 산하에 두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이때부터  새로운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로맨스극이라고 하는 희비극으로, 《겨울  이야기(1610)》와 셰익스피어 마지막 단독작인 《템피스트(1611)》가 그 대표작이다. 일가의 헤어짐에서 시작하여 재회와 화해로 끝나는 주제는 셰익스피어가 시류에만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고의 운문예술]
 셰익스피어의 전 희곡 37편 중 거의 반이 생전에 출판되었다. 또 창작연대   미상의《소네트집》도 1609년에 간행되어 영국 소네트의 정수로 평가되고 있다. 희곡진집은 그가 죽은 지 23년 뒤에 이전의 동료배우였던 존  헤밍과 헨리 콘델의 편집으로 간행되었는데, 흔히 <첫 폴리오>라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말년의 몇 년간은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냈으며, 52세의 나이로 죽었다. 죽은 날이 4월 23일이고 태어난 날도 4월 23일 전후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이 날이 셰익스피어 기념일로 되어있다. 그의 예술은 연극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 내면세계의 극한을 추구하였고 시적 표현으로 가득찬 최고의 운문을 보여주었다.

 

셰익스피어 이야기 (Tales from Shakespeare)
 영국 수필가 C.램과 그의 누이 메어리의 공동 작품. 1806년 발간되었다. 청소년들로 하여금 고전을 가까이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에서 셰익스피어의 극작품 중 20편을 골라 메어리가 희극을, 램이 비극을 청소년도서로 다시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복잡하게 구성된 원작을 간추리고 원작의 정신을 요약하여  주고 받는 말을 그대로 살리려 한 의도가 성공하여 청소년문학의 고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수록된 작품은《템피스트》《한 여름 밤의 꿈》《겨울 이야기》 《뜻대로 하세요》《베로나의 두 신사》《베니스의 상인》《리어왕》《맥베스》 《말괄량이 길들이기》《십이야》《로미오와 줄리엣》《햄릿》《오셀로》《헛소동》 《심벨린》《끝이 좋으면 모두 좋아》《실수의 희극》《보복》《아테네의 타이몬》《페리클레스》 이다. 

베니스의 상인 (The Merchant of Venice)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 1564~1616) 작.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극. 1595년 7월 22일 출판조합에 등록했으나 차라리 출판금지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고, 1,600년 10월 28일 다시 등록, 그해에 가서야 출판되었다. 1623년에 나온 최초의 전집판(First Folio)에 수록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창작은 1596~97년으로 추정되고 1600년 이전부터 상연되어 온 것이 확실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인육을 저당 잡힌다는 테마는 피오렌티노(Ser Giovanni Fiorentino)의 《바보자식》(Il Pecorone)에서 취재하고 상자고르기는 로빈슨(Richard Robinson)이 영역한《게스타 노마노룸》(Gesta Romanorum)에서 힌트를 얻은 듯하다. 또 크리스토퍼 말로의 비극  《말타도의 유태인》(The Jew of Malta, ca. 1590)의 영향도 인정된다.
【내용】
 사건은 베니스(베네챠)에서 일어난다. 바사니오는 아버지를 여읜 부호의 딸   포샤에게 청혼을 하려고 벨몬토에 가기 위해서, 3천 다카트의 돈을 친구인 안토니오한테 빌리려 한다. 그러나 안토니오의 전 재산은 지금 장사차 떠난 선단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서 향해중인 상선단을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리려 한다 샤일록은 만약 안토니오가 돈을 못 갚게 될  경우 그의 살코기 1파운드를 잘라내기로 하고 돈을 빌려 준다. 돈을 마련한 바사니오는 친구 그라시아노와 함께 벨몬토로 간다. 포샤는 모여든 구혼자들에게   금과 은·납으로 된 상자 3개를 내놓ㅍ고 그 중에서 자기의 초상화가 든 상자를 찾아낸 사람의 아내가 되겠다고 말한다. 다른 사라들은 겉모양에만 마음이 끌려 실패하지만 바사니오는 납으로 된 상자를 골라잡아 성공한다. 같이 간 그라시아노도 포샤의 몸종인 넬리사의 사랑을 얻는다. 이때 로렌조란 청년은 샤일록의 딸 제시카와 함께 사랑의 도피행을 하여 이곳에 온다. 한편, 안토니오의 상선단이 산파한 소식이 베니스에 전해져서, 바사니오에게 구면해 준 3천 다카트를 못갚게 되어 샤일록한테 살을 잘리게 돈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바사니오와 그라시아노는 친구의 위협을 구하고자 달려온다. 포샤와 넬리사는 법학자와 서기로 변장하여 두사람의 뒤를 쫓는다. 마침내 문제는 법정에까지 번져가, 증서를 내밀고 샤일록이 계약대로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잘라가겠다고 내댈 때, 포샤가 법관으로 변장하고 나와서 살 1파운드 속에 피는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다는 일종의   궤변으로 샤일록을 논박, 도리어 궁지에 몰린 샤일록이 그리스도교인을 죽이려 했다는 죄로 재산이 몰수될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그리스토교에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사형만은 면한다. 포샤와 넬리사는 각기 남편한테서 오늘 한 일에 대한 감사의 표지로 지난날 자기들이 준 반지를 요구하고, 벨몬드에 돌아온 후 그것을 얘깃거기로 삼는다.
【비판】
 종교적인 편견도 강했지만, 유태인이 경제적으로 실력을 저축한 것이 반유태적 감정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으며, 특히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에서는 반태유적 감정이 강했다. 그 한 예로, 1594년 엘리자베드여왕의 대의로 있던 로데리고  로페스란 유태인이 별다른 증거가 없는데도 여왕을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해서 사형에 처해진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그런 시대였으므로 욕심 많은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재판에서 지는 장면에 관중들은 박수를 쳤을 것이고, 희극속에 나오는 인물로서는 조금도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샤일록이 비극적인 인물로 취급받게 된 것은 19세기 초엽에 배우 에드몬드 킹의 해석이 있은 다음부터다. 일세의 재녀인 포샤, 순정의 여인 제시카 등 여성에게 매력적인 성격이 많고,  상자고르기 따위 좀 유치한 플로트도 있으나, 셰익스피어의 희극 중 가장 포퓰라한 인기를 얻고 있어서 자주 상연되고 있다. 판본은 Globe판(1864), Quiller-Couch and Dover Wilson 공편인 New Cambridge 판(1926) J.R.Brown 편 New Arden 판(1955) 등이 있다. (국역) 전재남 외

 

윌리엄 셰익스피어 연표
1564 영국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홀리 트리니티교회에서 세례를 받음
1582 A.해서웨이와 결혼
1583 장녀 수재나 출생
1585 장남 햄닛과 차녀 주디스 출생. 곧 런던으로 옮김
1591《헨리 6세 (제2부)》 《헨리 6세 (제3부)》
1592《헨리 6세 (제1부)》
1593《실수의 희극》《베로나의 두 신사》《리처드 3세》.서사시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사우샘프턴 백작에게 바침.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1954 궁내부 소속의 극단을 결성할 때 간부로서 참가. 《말괄량이 길들이기》
     《사랑의 헛수고》
1595《로미오와 줄리엣》《리처드 2세》《한 여름 밤의 꿈》
1596 장남 햄닛 죽음. 《존왕》
1597 고향의 호화저택 뉴플레이스 구입.《베니스의 상인》《윈저의 유쾌한 아낙네》
1598《헨리 4세 (제1·2부)》 《헛소동》
1599 궁내부를 본거지로 한 글로브극장 건설.
     《뜻대로 하세요》《헨리 5세》 《줄리어스 시저》
1600《십이야》
1604 아버지 존 사망. 《햄릿》
1602《끝이 좋으면 모두 좋아》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1603 엘리자베스 1세 죽고 제임스 1세 즉위. 궁내부 소속 극단이 왕의 보호
      아래 국왕극단으로 개칭
1604《자에는 자로》 《오셀로》
1605《리어왕》
1606《맥베스》
1607 장녀 수재나가 의사인 존 홀과 결혼.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아테네의 타이몬》 《코리오레이너스》
1608 어머니 메리 사망. 《페리클레스》
1609 국왕극단은 글로브극장 외에 블랙플레이어스극장도 사용. 《심벨린》
     《소네트집》 산행
1610《겨울 이야기》
1611《템피스트》
1613《헨리 8세 (존 플레처와 합작)》 글로브극장 불에 타 없어짐 (다음해 재건)
1616 4월 23일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