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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추천 도서(18.3~19.2)

2월의 추천도서(2170) 남명집 - 조식


1. 책 소개


퇴계 이황과 함께 한국사상사의 두 축을 이루는 남명 조식!

남명 조식 선생은 16세기 성리학이 꽃피던 시기, 형이상학적인 문제에만 몰두해 이론적인 논쟁만을 일삼는 풍조를 우려해 실천적인 학문을 역설한 영남 사림의 거두이다. 이 책은 『남명집』의 여러 판본 가운데 이른바 경진판 계통의 마지막 판본인 ’을유후판’을 저본으로 하였고, 을유후판에 없는 선생의 시문은 ’보유’라는 별도의 장을 마련해 문체별로 모아놓았다. 이 책은 선생이 손수 지은 시문을 수집해 번역함으로써 선생의 시문을 총정리하고, 교감본도 함께 실어 일반 독자들도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 : 교보문


2. 저자



남명 조식


1501년(연산군 7년) 경상좌도(慶尙左道) 예안현(지금의 경북 안동) 온계리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나고, 경상우도(慶尙右道)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 토동에서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년)이 태어났다. 16세기 학파 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장수를 했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이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이 동인 정파는 다시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립되었다.


16세기는 사회적으로 성장한 사림과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 사화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시기다. 한 세기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한 훈구파와 사회 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격돌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정치판의 물갈이라는 절실한 시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신파인 사림과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격돌은 언제나 사림이 피를 흘리는 사화로 결말이 났고, 그러한 상황은 연속되었다. 칼자루는 언제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였던 훈구파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진 사림인 조광조가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위한 대개혁을 추진했지만 학문적 미성숙성과 과격성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데, 이때도 정권의 승자는 중종반정의 훈구 세력이었다. 훈구파의 전횡에 질려서 신진 사림에 힘을 실어 주려 했던 왕도 두 세력의 대격돌 앞에서는 결국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사림이 미래라면 훈구파는 현실이었다. 왕이 추구하는 미래가 사림에게 있다 하더라도 왕은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훈구파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권이 훈구파에게 넘어가면 사림은 귀향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게 된다. 향촌 사회에서 때를 기다리던 사림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은 중종 후반기에 이르러서이다.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遺逸)로 인정받아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 가서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인 그 당시에 퇴계는 그 길을 걸었지만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명 조식 [南冥 曺植] - 경(敬)으로서 나를 밝히고 의(義)로서 나를 던진 선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현암사)


출처 : 교보문


3. 목차



서문/허권수

천왕봉처럼 우뚝한 남명의 정신세계/최석기

일러두기 

1. 국역 남명집 

본집(本集)

시(詩)

-오언절구(五言絶句)

-육언절구(六言絶句)

-오언사운(五言四韻)

-칠언절구(七言絶句)

-칠언사운(七言四韻)

-고풍(古風)

-칠언장편(七言長篇)

부(賦)

명(銘)

서(書)

기(記)

발(跋)

묘지(墓誌)

소(疏)

논(論)

잡저(雜著)

보유(補遺)

시(詩)

-오언(五言)

-칠언(七言)

명(銘)

서(書)

기(記)

묘지(墓誌)

소(疏)

잡저(雜著)

2. 교감 남명집 

일러두기 

本集

墓誌

雜著

補遺

후기

남명 조식 선생의 연보

찾아보기


출처 : 본문 중에서


4. 출판사 서평



경의(경의) 사상을 기반으로 실천적 지식을 궁구하다


올해로 탄생 500주년을 맞이하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72)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대학자이자, 실천적 학문사상을 기반으로 많은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남명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는 퇴계 이황에 비해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며, 이는 남명 스스로가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과 정인홍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던 북인파가 인조반정 이후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학맥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선생이 남긴 저술은 크게 시문집과 <학기류편>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시문집은 남명이 직접 지은 시(詩)와 문(文)을 모아 편찬한 것이고, <학기유편>은 선생이 독서하는 과정에서 학문하는 데 절실한 문구를 뽑아 기록해둔 것을 문인 정인홍이 유별로 모아 편판한 일종의 독서기이다.


남명사상의 집약, <학기류편>과 <남명집>


<학기류편>은 나명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후대에 크게 변질되지 않았지만, <남명집>은 그에 비해 후대로 내려올수록 심하게 변개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은 경우도 상당 부분 있다. 이처럼 <남명집>이 수차례에 걸쳐 그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된 이유는 대체로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인홍 관계 문자의 삭제와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난 내용이거나 선생의 학덕에 해가 될 만한 문자를 고치는 차원에서 그러했으리라 추정된다.


남명의 사상을 가장 쉽게 접해볼 수 잇는 것은 <학기류편>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기류편>에는 학문하는 자세에 대한 방법과 그 실천적 방향 등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글들이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추구했던 학문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고, 아울러 그것을 통해 남명의 사상이 당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성리학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경서인 사서의 경우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 사상이 파생될 수 있는데, 남명은 '아래로 인사를 먼저 배우고, 그 다음 천리에 통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 자구 해석에 치중하거나 공리공론을 펴는 고답적 관념론을 배격하였다. 즉 격물궁리의 가치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의리의 강명에 두고 실천적 사상으로서의 학문의 중요성에 그 목적을 두었다.


출처 :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