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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추천 도서(20.3~21.2)

12월의 추천도서(2835) 왕비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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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소개

 

조선시대 최고 전문가 신병주 교수, 왕과 참모에 이어 이제는 왕비다!
왕권과 신권을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살얼음판 같은 왕실에서 자신의 것을 지켜야 했던 왕비,

그 키워드로 들여다본 조선의 역사

왕비가 되는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남편이 세자인 시절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세자가 왕이 되면 왕비가 되는 것이었다. 세자빈으로 들어오는 경우 대개 10세를 전후한 나이에 삼간택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정작 이 코스를 거쳐 왕비가 된 인물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박씨,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 김씨, 경종의 왕비 선의왕후 어씨 등 6명 정도에 불과했다. 조선에 27명의 왕이 재위했는데, 이처럼 정통 코스를 거친 왕비가 소수에 불과한 이유는 무엇일까?
왕비의 인생은 화려하다기보다 살얼음판 같았다.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에서 그리고 가문과 왕실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 속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했다. 계유정난, 단종의 폐위, 두 차례의 반정 등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변수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장자가 아닌 차남이나 손자의 즉위, 여기에 더하여 후궁 소생의 왕들이 즉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의 세자빈과 같이 세자가 교체되는 바람에 대군 부인으로 강등된 사례도 있고, 인수대비로 널리 알려진 성종의 어머니는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자빈의 지위를 잃기도 했다.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는 남편의 의문의 죽음으로 세자빈 지위를 박탈당한 것은 물론 사약까지 받았다. 혜경궁 홍씨 역시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세자빈의 지위를 잃었다. 세자빈이 되어도 왕비가 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는 세자빈, 왕비, 그리고 아들 숙종이 왕이 되면서 대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세자빈에서 왕비까지 가는 길도 순탄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비 집안에 대한 정치적 견제도 심했다. 태종이 원경왕후의 처남들을 처형한 사례나 태종이 왕비의 부친인 심온을 처형한 사례와 같이 왕비가 된 순간 가족들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정변으로 폐위되는 경우도 많았다.
세종의 집권으로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정순왕후는 폐비가 된 후, 현재의 창신동 인근에서 옷감에 물들이는 작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폐위된 지 230여 년 만인 숙종 때에 복권되기는 했지만, 20대 이후의 전 생애를 일반인으로 살아갔던 정순왕후의 삶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폐위로 폐비가 된 폐비 신씨와 폐비 유씨의 삶도 남편의 몰락과 함께 참담함을 거듭했다.
결국 왕비는 시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세자 생산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운명을 감내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의 정치력을 관철시킨 왕비도 있었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고 정희왕후는 남편 세조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지만 훗날 성종을 대신해 수렴첨정(미성년의 왕이 즉위하였을 때 대왕대비 혹은 왕대비가 왕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던 제도)을 했다. 이후 성격은 다르지만 문정왕후, 인순왕후의 수렴첨정이 이어진다.
그동안 ‘왕’과 ‘참모’라는 키워드로 조선시대를 다루었다면 이제는 ‘왕비’라는 키워드로 조선시대를 들여다보자. 같은 조선도 왕비라는 키워드로 살펴본다면 또 다른 측면이 보인다. 왕비로 조선을 봤을 때 공주, 대군, 폐세자 등 《왕으로 산다는 것》과 《참모로 산다는 것》에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나온다. 그동안 야록, 설화 등 신변잡기적 내용으로 접했을 법한 이야기를 조선시대 최고 전문가 신병주 교수가 들려주는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한 팩트로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드라마, 영화 등 사극의 대부분이 궁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사소한 배경과 인물 관계도, 명칭까지 이 〈왕비로 산다는 것〉 을 읽으면 이해가 쉽다. 크고 작은 작품 속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관계도가 일목요연하게 재정리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정설과 팩트에 근거하여 왕비를 다룸으로써 그녀들의 실제를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출처: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신병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으며, 역사를 쉽게 전달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KBS 〈역사저널 그날〉, KBS라디오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을 진행했으며,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조선시대의 전염병과 리더십’, ‘연산군과 광해군’ 편에 출연했다. 현재 KBS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문화재청 궁능활용 심의위원, 외교부 의전정책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참모로 산다는 것》, 《조선 산책》, 《왕으로 산다는 것》, 《책으로 읽는 조선의 역사》, 《조선과 만나는 법》, 《조선평전》,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등이 있다.

 

출처:교보문고

 

3. 목차

 

들어가는 말: 극한 직업, 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은?

1부 새 왕조의 혼란 속 왕비들
1장 왕비로 살지 못한 첫 국모, 신의왕후 한씨
2장 총애와 정치 보복 사이, 신덕왕후 강씨
3장 최고령 왕비 최초의 대비, 정안왕후 김씨
4장 정치적 동반자 원경왕후 민씨, 팽을 당하다
5장 소헌왕후 심씨, 친정의 몰락을 극복한 왕비
6장 압승술을 쓰다 쫓겨난 휘빈 김씨
7장 골칫덩어리 며느리, 순빈 봉씨
쉬어가는 페이지: 태종(이방원)과 세조(수양대군)의 평행 이론

2부 비운의 왕비와 여걸의 등장
8장 현덕왕후 권씨, 단종 출산 이틀 만에 승하하다
9장 정순왕후 송씨, 짧았던 왕비 생활 뒤 긴 시련
10장 최초의 수렴청정 여걸형 왕비, 정희왕후 윤씨
11장 사후에 왕비가 된 세자빈, 장순왕후 한씨
12장 왕실의 넘버 3대비, 안순왕후 한씨
13장 공혜왕후 한씨, 한명회의 딸 또 왕비가 되다
14장 왕의 어머니로서의 강한 존재감, 소혜왕후 한씨
쉬어가는 페이지: 절의와 광기의 지식인, 김시습

3부 연속되는 폐비와 반정의 시대
15장 폐비 윤씨, 폐위된 후 사약으로 마감한 생애
16장 성종의 후궁에서 왕비로, 정현왕후 윤씨
17장 연산군의 왕비라는 이유로, 폐비 신씨
18장 7일간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
19장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한 왕비, 장경왕후 윤씨
20장 문정왕후 윤씨, 수렴청정의 주역이 되다
21장 가장 짧게 재위한 왕비, 인성왕후 박씨
22장 뜻하지 않게 오른 왕비의 길, 인순왕후 심씨
쉬어가는 페이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비판한 조식의 상소문

4부 왜란과 호란, 혼란기의 왕비들
23장 늘 조연에 그쳤던 왕비, 의인왕후 박씨
24장 사후 13년간만 왕비의 자리에 있던 공성왕후 김씨
25장 19세의 나이에 51세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 김씨
26장 광해군과 함께 쫓겨난 왕비, 폐비 유씨
27장 아들 인조에 의해 추숭된 왕비, 인헌왕후 구씨
28장 반정으로 왕비가 된 인열왕후 한씨
쉬어가는 페이지: 광해군 주도하에 창건된 경희궁

5부 당쟁과 명분의 수단이 된 왕비들
29장 장렬왕후 조씨, 그녀를 위한 상복 논쟁인가?
30장 시아버지에게 사약을 받은 소현세자빈 강씨
31장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비가 된 인선왕후 장씨
32장 세자빈, 왕비, 대비까지 명성왕후 김씨
33장 천연두로 죽음에 이른 왕비, 인경왕후 김씨
34장 사극의 단골 주인공, 인현왕후 민씨
35장 당쟁이 치열했던 시기, 왕비가 된 인원왕후 김씨
쉬어가는 페이지: 《사씨남정기》, 당쟁의 시대를 풍자한 소설

6부 노론과 소론 사이 지켜야 했던 자리
36장 세자빈으로 생을 마감한 왕비, 단의왕후 심씨
37장 노론 주도 속 불안한 자리, 선의왕후 어씨
38장 53년을 영조와 함께 한 정성왕후 서씨
39장 이른 나이에 왕실 최고 어른이 된 정순왕후 김씨
40장 10세 나이고 승하한 효장세자의 세자빈, 효순왕후 조씨
41장 사도세자의 세자빈이자《한중록》의 저자, 헌경왕후 홍씨
42장 역대급 품성의 소유자, 효의왕후 김씨
쉬어가는 페이지: 유배 기간을 학문과 예술로 승화시킨 정약용과 김정희

7부 근대의 격동기, 마지막 궁중의 모습
43장 왕비인가, 안동 김씨의 대변자인가? 순원왕후 김씨
44장 신정왕후 조씨, 고종을 왕으로 만들다
45장 가장 어린 나이에 승하한 왕비, 효현왕후 김씨
46장 격랑 속 조용히 궁궐을 지킨 효정왕후 홍씨
47장 조선의 마지막 대비, 철인왕후 김씨
48장 근대의 격동기를 살아간, 명성황후 민씨
49장 온건개화파 민영익의 동생, 순명황후 민씨
50장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정황후 윤씨
쉬어가는 페이지: 마지막 옹주, 덕혜옹주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왕비의 정치적 역할이 가장 두드러진 경우는 수렴청정이다. 물론 수렴청정은 왕비가 왕실의 어머니인 대비나 할머니인 대왕대비 때 행사할 수 있는 정치 형태였다. 수렴청정은 발을 드리우고 정치를 한다는 뜻이다. 발을 치는 것은 유교적 문화의 소산이다. 대비가 왕과 왕실의 보호를 위해 정치에 참여하지만, 여성인 만큼 내외법에 따라 발을 쳐서 남성인 신료들과의 직접 대면을 막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정치 참여는 중국 송나라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에서도 이를 참고하여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여성의 정치적 활동이 금지된 조선 왕조에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손자나 아들인 왕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찬탈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반대로 모성과 부덕을 기반으로 어린 왕을 정적들로부터 보호하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말: 극한직업, 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은?」 중에서

정도전의 기세가 등등했을 때 방원은 사병을 폐하고 무기들을 모두 불에 태워버렸지만, 민씨는 몰래 병장기를 준비하여 변고에 대응하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훗날 1398년 8월 1차 왕자의 난 때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왕자의 난 당일에도 민씨는 몸이 불편한 태조 곁에서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로 불러내서 정도전을 공격하는 데 일조한다. 그녀의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과 함께 친정으로 빼돌렸던 무기와 사병을 빼내 방원이 정도전과 남은을 기습하게 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것이었다.1400년 방간과 박포가 주동이 되어 일어난 2차 왕자의 난 때도 “골육을 서로 해치는 것은 불의가 심한 일이다. 내가 무슨 일로 응전하겠는가?”라고 방원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한 겹으로 지은 옷)를 더하고, 대의(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큰 도리)에 의거하여 권하며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는 《정종실록》의 기록처럼 민씨는 남편이 정치적 고비를 겪을 때마다 당찬 여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치적 동반자 원경왕후 민씨, 팽을 당하다」 중에서

1418년 세종이 왕으로 즉위한 순간부터 그녀에게는 시련이 닥쳐오기 시작했다. 상왕인 태종은 왕권 강화에 주력했고 이 과정에서 왕비의 친정인 심씨 가문은 크게 화를 입었다. 태종은 심온을 역모 혐의로 처형했고 심온의 부인과 자식들은 관노비로 삼게 했다. 화의 여파는 왕비에게까지 미쳤다. 유정현, 박은 등은 “그 아버지가 죄가 있으니, 그 딸이 마땅히 왕비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하며 폐비까지 건의했다. 다행히 상왕 태종은 “그 아버지가 죄를 지었어도 딸이 후비가 된 일은 옛날에도 또한 있었으며, 하물며 형률에도 연좌한다는 명문이 없으므로, 내가 이미 공비에게 밥을 먹기를 권하였고, 또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니, 경 등은 마땅히 이 뜻을 알라”면서 소헌왕후가 왕비의 자리를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자신이 왕비가 된 순간에 맞이한 친정아버지의 죽음과 친정어머니의 노비 전락은 그녀의 마음을 무척이나 상하게 했을 것이다. 태종의 조치가 워낙 강경하여 남편인 세종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왕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슴에서 울분을 삭이는 일뿐이었다.--- 「소헌왕후 심씨, 친정의 몰락을 극복한 왕비」 중에서

단종이 노산군이 되면서 정순왕후 역시 부인으로 강등되었고, 동대문 밖에서 거처하며 채 외롭고 고달픈 삶을 이어 갔다. 현재의 종로구 창신동에는 ‘자지동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 밑에 샘물의 흔적이 보인다. ‘자지동천’은 ‘자줏빛 풀이 넘치는 샘물’이란 뜻으로, 흰 옷감을 이곳에 넣으면 자줏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옷감을 물들이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정순왕후는 18세 때인 1457년 단종과 사별한 후 숱한 시련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64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중종 때인 1521년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세종 때 출생한 그녀는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등 무려 8명의 왕과 함께 한세상을 보낸 셈이다. 그녀의 무덤은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 집안 종중의 산이 있는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에 대군부인의 묘로 조성되었다.
--- 「정순왕후 송씨, 짧았던 왕비 생활 뒤 긴 시련」 중에서

윤씨의 투기에 대해 어머니까지 적극 나서자 성종은 윤씨의 출궁을 결심했다. 성종이 후궁을 찾은 것에 반발해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두 사람의 파국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며느리의 과격한 행동을 참다못해 인수대비는 마침내 성종에게 윤씨를 폐위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1479년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비가 사가로 쫓겨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가 크게 노하여 왕의 노여움을 돋우어 외정에서 대신에게 보이니 윤필상 등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견을 아뢰어 윤비를 폐하여 사제로 내치도록 하였다”는 《소문쇄록》의 기록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폐출을 주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왕비의 폐출이라는 초유의 사건 직후인 1480년에는 어을우동 스캔들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어을우동은 성리학 이념의 정착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인물로 찍혀 결국은 교형(목을 옭아매어 죽이는 형벌)으로 생을 마감했다. 처형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으나 성종의 의지는 단호했다. 어을우동과 폐비 윤씨 사건이 터지기 전인 1475년 소혜왕후는 《내훈》을 집필한 바 있다. 성리학 이념을 정착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모범적으로 성리학 규범을 준수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 「왕의 어머니로서의 강한 존재감, 소혜왕후 한씨」 중에서

1494년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독재 군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서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엄씨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정씨에게 자루를 뒤집어 씌우고 그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에게 매질을 가하게 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이어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마저 죽이고 손에 장검을 든 채 자순왕대비(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침전 밖에서 인수대비에게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며 큰 소리로 연달아 외쳤다. 이때 “왕비 신씨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처럼 대비들에게도 마음대로 하는 연산군을 그나마 제어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관계는 말년까지 비교적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 「연산군의 왕비라는 이유로, 폐비 신씨」 중에서

그녀의 운명을 바꾼 가장 큰 사건은 바로 1506년 9월 2일에 일어난 중종반정이었다. 반정 주체 세력은 연산군을 대신할 왕으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지목하고 진성대군의 집을 찾았다. 연산군의 폭정이 지속되면서 자신도 정치적 희생물이 될 것을 염려한 진성대군은 선뜻 문 밖을 나서지 못했다. 이때 위기 속에서 지혜를 발휘한 여인이 단경왕후였다.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판단하자는 것이었다. 《연려실기술》에는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반정하던 날 먼저 군사를 보내어 사제(중종이 있던 집)를 에워쌌는데, 대개 해칠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임금이 놀라 자결하려고 하자 부인 신씨가 말하기를 ‘군사의 말 머리가 이 궁을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말 꼬리가 궁을 향하고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으면 반드시 공자를 호위하려는 뜻이니,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소매를 붙잡고 굳이 말리며 사람을 보내 살피게 하였더니 말 머리가 과연 밖을 향해 있었다”는 기록에서 위기의 상황에서 남편을 구한 왕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애정이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경왕후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왕비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으로서 최측근 세력이었다는 점이 반정 세력에게는 큰 걸림돌로 다가왔다.

--- 「7일간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 중에서

영창대군의 죽음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인물은 인목왕후였다. 광해군과 법적으로는 모자 사이였지만 이제 두 사람은 원수나 다름없게 되었다. 어색하게 지속되던 모자 관계는 1615년 추운 겨울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서궁(현재의 덕수궁)에 모셔놓고 혼자만 창덕궁으로 돌아오면서 갈등으로 치닫는다. 1623년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의 죄상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인목왕후의 서궁 유폐가 시작된 것이다. 1615년 광해군은 교서를 반포해 흉측한 글을 유포시킨 인목왕후의 죄상을 알리고 이에 연루된 나인들을 처형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인목왕후가 서궁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음은 궁녀의 기록으로 보이는 《계축일기》에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또한 《인조실록》에는 “상(인조)이 처음 대궐에 들어가 즉시 김자점과 이시방을 보내 왕대비(인목왕후)에게 반정한 뜻을 계달하자, 대비가 하교하기를 ‘10년 동안의 유폐 중에 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중에 승지와 사관도 없이 이처럼 직접 계문하는가?’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서궁에서 대비로서의 대우를 전혀받지 못한 인목왕후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영창대군의 증살 이후 서궁에 유폐된 인목왕후 김씨」 중에서

1637년 삼전도에서 약속했던 항복의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인질의 신분이 되어 심양으로 향했다. 1637년 4월 10일 소현세자는 심양에 도착하여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나그네를 치거나 묵게 하는 집)인 동관에 머물렀다. 5월 7일 황제가 세자를 위해 새로 지은 관소인 신관, 즉 심양관으로 옮겼고세자는 이곳에서 8년을 머물렀다. 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비롯하여 배종신(수행신하), 수행원 및 부속 인원까지 포함하면 심양관의 상주 인원은 500명이 넘었다. 세자는 이곳에서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을 모집하여 땅을 경작했고 무역 활동을 하기도 했다. 강빈도 적극적으로 세자를 도왔다. 그러나 《인조실록》에는 “관소(각 고을에 설치하여 외국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숙소)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으므로, 왕(인조)이 그 사실을 듣고 불만스러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의 심양 생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강했다. 심양에서 보낸 8년간의 인질 생활은 소현세자와 세자빈의 의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청나라를 과거의 야만국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치, 문화의 강국임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국제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갔다.
--- 「시아버지에게 사약을 받은 소현세자빈 강씨」 중에서

다행히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다음 날인 21일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갚아야 할 만한 은혜와 의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를 사도세자라 한다”고 하며 사도세자를 바로 복권시켰다. 이로써 헌경왕후는 나간 지 9일 만인 22일에 다시 궁궐로 들어올 수 있었다. 궁궐로 돌아온 헌경왕후는 영조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세손을 보호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헌경왕후는 재입궁 후 3개월이 지난 8월에야 영조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헌경왕후는 “세손을 경희궁으로 데려가서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영조는 주로 경희궁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영조와 세손이 경희궁에 함께 거처하기를 청한 것이다. 헌경왕후는 자신의 남편을 죽인 시아버지에 대한 섭섭함보다는 오히려 그 처분을 이해한다면서 아들을 할아버지에게 맡긴 것이다. 영조는 헌경왕후가 상중에 거처했던 경춘전 남쪽의 작은 집에 가효당이라는 당호를 내리면서 그녀의 진심에 감격했다.--- 「정조의 어머니이자 《한중록》의 저자, 헌경왕후 홍씨」 중에서

1858년 8세의 나이로 부친이 사망하자 한양 안국동의 감고당으로 갔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친정으로 인현왕후가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던 시기에도 살았던 곳이다. 감고당은 대대로 여흥 민씨 가문의 인물들이 살았고, 한양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던 명성황후는 가문의 배려로 이곳에 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감고당은 1960년대까지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1995년부터 추진된 여주시의 명성황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2001년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 복원되었다. 안국동에서 8년 정도의 생활을 하던 1866년, 명성황후의 운명을 바꾸는 간택령이 내려졌다. 1863년 즉위한 고종의 왕비 간택령이 내려진 것이다. 당시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은 처가의 고녀(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있는, 상중에 있는 여자가 자기를 일컫는 말)인 명성황후에게 관심을 보였다.--- 「근대의 격동기를 살아간, 명성황후 민씨」 중에서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요동치는 정국에 자신을 맡기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쟁취하기도 했던 왕비들의 파란만장한 삶
왕비를 중심으로 들여다본 조선의 역사, 잘 알고 있는 사건도 새롭게 느껴진다!


왕비가 되는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남편의 세자 시절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세자가 왕이 되면 왕비가 되는 것이었다. 세자빈이 되기 위해서는 삼간택의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그때 나이 고작 10세 전후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작 이 코스를 거쳐 왕비가 된 인물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박씨,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 김씨, 경종의 왕비 선의왕후 어씨 등 6명 정도였다. 조선에 27명의 왕이 재위했는데, 이처럼 정통 과정을 거친 왕비가 소수에 불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구성 속에도 답이 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50명의 인물 중 공식적인 왕비는 43명이다. 나머지 7명은 연산군과 광해군을 따라 폐비가 된 폐비 신씨와 폐비 유씨,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로 추숭되었다가 그가 폐위되면서 13년 만에 왕비의 자리에서 내려온 공성왕후, 왕비가 되기 전에 폐출된 문종의 두 세자빈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 사약을 받은 조선의 첫 왕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비가 되지 못한 소현세자빈 강씨다. 이처럼 왕비들은 가문과 왕실의 권력 사이에서, 왕실을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신변의 변화를 겪으며 고군분투해야 했다.

‘1부 새 왕조의 혼란 속 왕비들’에서는 집안의 든든한 후원으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데 힘이 되어주었던 신덕왕후를 시작으로 건국 이후 자리를 잡아가는 조선에서 하나의 역할을 했던 왕비들을 다룬다. 원경왕후는 태종 이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만든 정치적 동반자였다. 즉위 후 처가의 권력이 부담으로 다가오자 태종은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을 처형하는 등 원경왕후 가문을 철저히 탄압한다. 강인한 성격의 원경왕후였지만 이후 죽을 때까지 형식적으로만 왕비의 자리를 유지한다.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따르는 세력들이 많아 신권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왕권 강화에 주력했던 태종에 의해 심온은 사사되고 이 일로 소헌왕후의 가문은 몰락하는 비극을 맞는다. 소헌왕후는 가문의 몰락이라는 아픔을 조용한 내조로 극복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지켜나갔다. 한편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에게 며느리 간택 문제는 큰 골칫거리였다. 폐출될 수밖에 없었던 문종의 두 세자빈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까지 다루었다.

‘2부 비운의 왕비와 여걸의 등장’에서는 먼저 세조의 집권으로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폐비가 된 정순왕후의 비극적인 삶을 다루었다. 정순왕후는 폐위된 지 230년 만에 복권되기는 했지만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20대 이후를 생계를 위해 옷감에 물들이는 일을 하며 일반인으로서 삶을 이어갔다.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한 세조 뒤에는 여걸형 왕비의 대표적 유형이었던 정희왕후가 있었다.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날 그에게 갑옷을 입혀주는 대찬 모습을 보였던 정희왕후는 훗날 성종을 대신해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다. 정희왕후의 며느리이자 인수대비로 알려져 있는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는 당시 글을 잘 읽고 쓸 줄 알았던 신여성이었다. 소혜왕후는 《내훈》이라는 한글로 된 최초의 여성 교육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성리학 이념 정착이 중요했던 조선시대 초기라는 배경은 1479년 윤씨가 폐위되고 사사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후 폭군 연산군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낳게 된다

‘3부 연속되는 폐비와 반정의 시대’는 성종의 왕비로서 적장자 아들까지 낳았지만 화려한 지위에서 결국은 나락까지 떨어진 폐비 윤씨로 시작한다. 그리고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 연속적으로 폐위를 당하는 신씨와 단경왕후로 이어진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왕비라는 이유로 폐위되었지만 어진 덕이 있어 폭군 옆에서 그나마 이성적으로 내조했던 왕비로 기록되어 있다. 폐비 신씨의 조카이자 중중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된 단경왕후는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7일 만에 폐위된다. 반정이 일어나던 위기 속에서 지혜를 발휘하며 중종을 지켜낸 조강지처였지만 정치적 희생물이 된 것이다. 폐위 이후에도 중종과 단경왕후가 서로를 그리워했다는 일화는 여럿 전해진다. 단경왕후가 폐위된 후 그 자리에 오른 장경왕후가 25세에 승하하고 중종의 다음 왕비가 된 인물은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 대신 수렴청정을 하며 그 시대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한다. 그리고 사망 때까지 20년간 동생 윤원형, 정난정 등과 함께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외척정치를 이어갔다.

‘4부 왜란과 호란, 혼란기의 왕비들’은 임진왜란 시대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에서 시작한다. 후사를 얻지 못해 늘 조연에 그쳤던 의인왕후는 자식이 없었지만 다른 왕실 소생을 매우 아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녀가 가장 아꼈던 인물은 광해군으로 피난생활까지 함께하며 굳건한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이자 즉위 후에도 광해군이 가장 경계했던 적자 영창대군의 어머니다. 광해군은 끝내 영창대군을 증살시키고 이후 인목왕후를 서궁에 유폐한다. 광해군 시대 핍박의 상징이기도 했던 인목왕후는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의 예우를 받으며 대비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회복한다. 연산군의 왕비였던 폐비 신씨와 마찬가지로 광해군의 왕비였던 폐비 유씨 또한 공식적으로는 조선의 왕비로 기록되지 않는다. 광해군 폐위 직후 유배지에서는 폐세자의 탈출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탈출에 실패하면서 폐세자는 사사되고 폐세자빈 박씨는 목을 매어 죽고 페비 유씨는 그 충격으로 생을 마감한다. 왕비 개인에게는 비극적인 가족사였다.

‘5부 당쟁과 명분의 수단이 된 왕비들’는 예의 해석을 두고 한 논쟁이었지만 결국은 서인과 남인의 권력 다툼이었던 예송논쟁의 중심 장렬왕후에서 시작한다. 장렬왕후는 15세의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겨우 26세에 대비의 자리에 오른다. 효종, 현종, 숙종까지 3대에 걸쳐 대비로 산 그녀였기에 상복 문제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의문투성이 소현세자의 사망 이후 시아버지 인조에게 사약을 받은 비운의 세자빈 소현세자빈 강씨와 사극의 단골 주인공 인현왕후도 다루었다. 인현왕후의 가문은 당시 서인 세력의 핵심이었다. 숙종 시대는 남인과 서인의 정치적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붕당정치가 가장 격화되던 시기였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한 사건과 다시 인현왕후가 복위된 사건은 이 세력다툼과 무관하지 않았다.

‘6부 노론과 소론 사이 지켜야 했던 자리’에서는 53년을 영조와 함께했던 영조의 조강지처 정성왕후와 15세의 나이에 66세의 영조의 계비가 된 정순왕후를 다루었다. 나이답지 않은 현숙함으로 왕비로 간택된 정순왕후 김씨(단종의 왕비는 정순왕후 송씨)는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사도세자의 충격적인 죽음에 관여하기도 하고 정조의 급서 이후 어린 순조 대신 수렴청정을 하며 경색 정국을 이끌어간다. 혜경궁 홍씨로 알려져 있는 헌경왕후는 《한중록》의 저자이자 사도세자의 세자빈이다. 헌경왕후는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실 어른들의 사랑을 가득 받으며 세자빈이 되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얽힌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아들 정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헌경왕후는 자신의 남편을 죽인 시아버지 영조를 원망하는 대신 아들 정조를 위해 그를 이해하려는 현명한 태도를 취한다.

‘7부 근대의 격동기, 마지막 궁중의 모습’에서는 세도정치기와 일제강점기로 정리되는 무력했던 조선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왕비들을 다루었다.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는 세자 시절 순조의 스승이었던 김조순의 딸이었다. 김조순은 19세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전성기를 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과 자신이 직접 헌종의 후계자로 지명한 철종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강화해갔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12세의 명복(고종)이 왕이 되는 데 일조한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척결이라는 공통의 목표로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후 조선의 왕비 중 최장수로 83세에 승하한다. 조선이 왕비 중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 하면 명성황후일 것이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사사건건 맞서가며 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결국 일본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비운의 왕비였다.

그동안 ‘왕’과 ‘참모’라는 키워드로 조선시대를 다루었다면 이제는 ‘왕비’라는 키워드로 조선시대를 들여다보자. 같은 조선시대이지만 왕비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왕으로 산다는 것》과 《참모로 산다는 것》에 등장하지 않았던 또 다른 측면이 보인다. 야록, 설화 등 신변잡기적 내용으로 접했을 법한 이야기를 조선시대 최고 전문가 신병주 교수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한 팩트로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드라마, 영화 등 사극의 대부분이 궁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사소한 배경과 인물 관계도, 명칭까지 이 《왕비로 산다는 것》을 읽으면 이해가 쉽다. 크고 작은 작품 속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관계도가 일목요연하게 재정리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정설과 팩트에 근거하여 왕비를 다룸으로써 그녀들의 실제를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출처:매일경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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