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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추천 도서(21.3~22.2)/2021-12

12월의 추천도서 (3220)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1. 책소개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유성호의 대화
“나는 문학으로 역사를 성찰하고 역사를 문학으로 조명한다”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은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유성호가 치열한 민족의식의 언어로 풀어낸 대화록이다. 이 책은 임헌영의 유년 시절부터 두 번의 수감생활을 거쳐 민족문제연구소장을 역임하고 있는 현재의 생애까지를 집약한 자전적 기록이기도 하다. 임헌영은 우리 문학사와 민족사에 큰 획을 그었으며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문학평론가다. 그는 『친일인명사전』(2009) 출간에 앞장서며 근현대사의 반성적 자료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문인간첩단 사건과 남민전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어두운 시대를 앞장서서 걸어간 현대사가 그대로 드러난다.
유성호가 대담을 이끌어가며 조명한 임헌영의 생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한줄기 빛과 같다. 광기와 야만의 세월을 살아낸 임헌영은 살아 있는 역사이자 역동적인 정치적 산물로서 문학작품을 바라본다. 그가 읽고 섭렵한 문학작품들에 대한 기억은 그 시대를 증언해주는 기록이다. 한평생 문학의 길을 걸어온 그가 말하는 문학은 역사 그 자체다. 낙관과 비관이 공존하는 우리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명한 두 평론가의 대화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문학과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출처: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임헌영 (任軒永)

1941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66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1972부터 1974년까지 중앙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74년 긴급조치 시기에 문학인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월간 『다리』, 월간 『독서』, 『한길문학』, 『한국문학평론』 등 여러 잡지의 편집주간으로 일했으며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했다. 1998년 복권되어,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장과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한국현대문학사상사』를 비롯해 『임헌영의 유럽문학 기행』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등 2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출처:교보문고

 

3. 목차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으로 초대하며·임헌영

1 카산드라의 비극
2 이러려고 나라를 되찾았나!
3 아버지와 형의 흔적을 찾아서
4 머리 둘 곳 없는 청춘이여!
5 5·16 쿠데타 학번의 대학생활
6 한국 문단 반세기 훑어보기
7 권력에 길들여지는 언론: 『경향신문』 시절
8 박정희 군부독재 시기의 월간 『다리』
9 유신시기의 지식인들
10 고문과 간첩 조작의 기술자들
11 민족정신사를 담아내는 한국문학 정전 만들기
12 제국주의와 민족해방운동
13 국가폭력, 당신을 위한 나라는 존재하는가
14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기
15 오늘의 사상, 한길사와 더불어
16 생활글쓰기 운동과 『한국산문』
17 제2의 반민특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18 불확실시대의 평화를 위하여

치열한 민족의식의 언어로 풀어낸 대화록·유성호
찾아보기

 

출처:본문중에서

 

4. 출판사서평

 

역사 격랑 속에서 꽃피워낸 문학의 길 “문학은 아주 먼 곳을 그리워하는 연정 같은 것”


임헌영은 아주 독특한 이력을 지닌 문학평론가다. 그는 80년의 세월 동안 식민지 시대, 해방과 분단, 독재와 항쟁을 끝없이 경험하며 역사의 격랑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다섯 살 때 8·15 해방을 겪은 그는 먼 친척인 규순 아재가 입영 영장을 받아 온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던 일을 회상한다. 가족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재가 떠나는 당일 “해방이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어린 임헌영은 김순남 작곡가의 「해방의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불렀다. 그러나 그해 9월부터 미국이 한국 방송과 신문 등 여러 매체에 관여하면서 한반도를 빠르게 장악하기 시작했다. 8·15 이후 남북을 막론하고 가장 시급했던 민족사적인 당면과제는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이었지만 우리는 해방을 미국에게 도둑맞고 만 것이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반민법 제정에 앞장서던 이승만이 미군 조기 철수를 주장하던 국회의원을 제거하기 위해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했다. 결국 그해 6월 26일에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다. 그다음 해 보도연맹 관련자 검거령이 내려 그의 작은아버지가 감옥에 갇혔고 아버지는 동생을 구출하려고 갔다가 도리어 옥에 갇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임헌영은 폭풍우 같은 역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마감했다. 그의 많은 가족들이 역사와 함께 저물어갔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해방의 노래를 따라 부를 때부터 그는 역사의 무게를 몸소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안동사범학교에 입학하던 1956년 5월 15일에 제3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둥이자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는 반(反)이승만 투쟁을 위해 범야권 단일화를 구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신익희는 선거를 앞두고 5월 5일 심장마비로 서거했고 이로써 민족적인 양식을 지닌 야당은 막을 내렸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헌영은 학우들과 정치 상황에 대해 토론하며 문학의 길을 꽃피워나갔다. 그는 임대서점에서 하루에 책을 한두 권씩 매일 빌려보았다. 대중소설, 추리소설, 전기문학을 읽다가 순수문학과 세계문학에 발을 들여 가장 친한 친구와 늘 다양한 주제로 논쟁하곤 했다. 사범학교 졸업 후에는 어머니의 권유로 모교인 조문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4월혁명을 겪은 후 1961년 1월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중앙대학교에 입학한 임헌영은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소개된 그림 행상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다. 미군이 오후 5시에 일과를 끝내고 술집으로 갈 때쯤 막사를 돌며 스카프, 버클, 라이터 등에 애인 얼굴을 새긴 초상화를 보여주며 영업을 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미군부대에 출입이 어려워지자 그는 아르바이트를 접고 학업에 매달려 대학원에 진학했다.

불확실시대의 평화를 위하여 “촛불 하나라도 켜는 것이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낫다”


임헌영은 대학원생이던 1966년 『현대문학』에 조연현 추천으로 평론가로 등단했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1968년 『소년경향』에 들어갔는데 적자로 폐간되어 『주간경향』에서 대중문화 관련 기사를 썼다. 그러던 중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이름을 알린 김상현 의원이 설립한 출판사 범우사에서 1970년대 사회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 잡지 『다리』지를 창간했다.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후보의 홍보 활동을 원천봉쇄하려는 독제체제의 음모 아래 『다리』지 필화 사건이 발생했다. 발행인 윤재식, 주간 윤형두, 필자 임중빈이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의 재판을 맡은 목요상 판사는 “고위층에서 이 사건에 관심이 많다”는 압박을 받았지만 세 구속자를 모두 직권보석으로 석방했다. 임헌영은 필화 사건 이후 1971년 『경향신문』에서 『다리』지로 옮겨가 많은 지식인에게 경종을 울리는 글을 실었다.
『다리』지가 폐간되고 중앙대 강사로 일하면서 임헌영은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인 61인 개헌지지성명’에 서명한 일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서명이 언론에 발표되자 1·8 긴급조치가 선포되었고 그는 몸집이 거대한 남자들에게 붙잡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온갖 학대와 폭력을 당하고 밤에는 잠 한숨 자지 못하는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그가 재일동포 교양 월간지 『한양』지에 글을 쓰고 원고료를 받았으며 발행인과 함께 식사한 것을 문제 삼았다.
임헌영은 교도소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유미주의 소설을 탐독했다. 그는 고통을 통해 문학예술의 심오한 세계와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한양』지와 관련이 깊은 문인들이 증인으로 증언해주고 나서야 풀려났지만 죄가 있어서 간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했다. 뿐만 아니라 그 사건으로 모든 직책과 사회 활동을 박탈당해 출소했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식으로 복권된 건 57세가 된 1998년이었고, 사건이 발생하고 44년이 지난 후인 2018년 8월에 비로소 무죄를 선고받았다.
임헌영은 숨 막히는 유신 치하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섰다. 1975년 ‘2·28 고문정치 종식을 위한 국회의원 선언’을 김상현 의원이 주동했을 때는 동교동 김대중 사저에서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뉴서울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972년 10월 17일 국회가 해산된 후 수사기관에 끌려가서 당했던 온갖 고문 사실이 낱낱이 담긴 ‘고문정치의 종식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언론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당한 고문 사례를 끔찍할 정도로 자세히 다뤄 큰 파장이 일었다.
해방 후의 흐름은 주류문화와 대항문화, 친일문화와 민족문화, 식민주의 잔재 청산의 움직임이 길항하고 갈등하며 싸워온 역사였다. 임헌영은 이러한 1970년대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그는 출옥 후 번역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태극출판사에서 민족정신사를 아우를 수 있는 『한국문학대전집』을 기획했다. 정치인, 인문사회과학자들과 독립운동가들도 과감히 포함하는 ‘민족사상대전집’을 묶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월간 독서』에 1978년 7월부터 1년간 주간을 맡으면서 ‘이달의 좋은 책’을 선정해 독자들에게 질 좋은 양서를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근현대문학의 정본을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범우사에서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을 기획했다.
임헌영은 유신독재 후반기에 남민전 사건으로 또 한 번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약칭으로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를 하부조직으로 두고 있었다. 그는 그 하부조직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다. 유신치하에서는 민주화운동을 하면 극심한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지하조직에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남민전 사건에 앞서 제1, 2차 인혁당 사건이 벌어졌다. 박정희가 무모하게 한일협정을 체결하려는 데 대해 범국민적 저항이 일어나자 이를 빨갱이 짓으로 조작한 것이다.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을 검거해 중앙정보부에서 엄청난 고문을 가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한국 사법사상 가장 억울한 희생자들이 되었으며 온갖 고문을 당해 몸이 성한 곳이 없어 내의가 피투성이가 된 채 가족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10월 9일 한글날, 구자춘 내무부장관이 특별기자회견에서 건국 후 반국가활동 단일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74명이 가담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 위원회’ 사건 총책 이재문을 위시한 20명을 경찰이 검거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임헌영을 포함한 나머지 54명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져 그는 관계 기관에 자진 출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집 앞에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붙잡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형사들은 온갖 증거물을 압수해 그를 협박했는데, 의논만 하고 실천하지 않은 일들도 있어 숱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임헌영의 아내 고경숙도 구금되어 대학교 행정직으로 일하던 곳의 사표를 강요받았다.
그는 2심이 끝나는 9월까지 서울구치소에 있었다. 다음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독방 신세를 청산하고 일반수들과 합방해 경제사범들 방에 배정되었다. 그는 이후 광주와 대구 교도소를 전전하면서그곳에서 홍남순, 송기숙, 박석무, 김남주, 서승 등 귀중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1983년 8·15에 특별사면을 받아 풀려나면서 인생의 한 고비를 넘겼다.

“나는 증인으로 남으련다. 나의 증언을 요구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더라도”


임헌영은 1985년 10월 초 민주화운동을 더 알차게 추진하려면 근현대사를 다룰 연구소가 절실하다는 대화를 박원순과 나누다가 연구소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역사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는 비역사학자들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근현대사에 더 본격적으로 다가서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연구소를 차렸다. 그가 제일 먼저 추진했던 것은 자문위원단 구성이었다. 그는 전공을 가리지 않고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이 있는 모든 분야의 중견학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참여를 호소했다. 박원순도 사람다운 세상은 우선 ‘역사 청산’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하며 동참했다.강조하며 연구소를 도맡아 운영했다. 천희상의 역할로 연구소 개소 두 달 만에 해방 3년사와 일제강점기사, 곧이어 문학사 연구팀이 막을 올렸다. 임헌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역사의 대중화를 위한 학술강연을 추진했다. 대중강연의 성격에 심포지엄의 요소를 가미한 행사로, 참석자들이 자발적으로 ‘바른역사모임’을 만들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연구소 소속 상근자들 간의 응집력을 기르기 위해 송년의 밤이나 신년하례를 거창하게 치렀다. 함께 요리를 하고 대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그가 또 하나 고집했던 것은 수련회였다. 매년 여름 1박 2일의 수련회를 가서 특강을 실시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역사비평』을 창간하기에 이르렀다. 서중석 교수의 추진과 원혜영 선생의 희생적인 후원을 시작으로 『역사비평』을 창간(1987)한 것은 사학계의 일대 혁명이었다. 『역사비평』은 역사의 표준을 제시했고, 나아가 금기시되었던 사관과 자료를 접하게 해준 해방구 같은 역할을 했다. 조선로동당 문제의 최고 전문가 김남식이 참여했던 모임을 누군가가 밀고해 해방 3년사 팀은 어느 날 갑자기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임헌영은 한길사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80년대 후반 학술문화운동을 이끈 한길사는 역사강좌와 역사기행을 개최했는데 임헌영은 이 자리에 참석해 비판적 지식인들과 함께 심포지엄을 벌였다. 그는 1990년에 발행한 잡지 『한길문학』의 편집위원을 맡아 기존의 문예지보다 한걸음 앞선 진보적 색채를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특히 오장환의 장시 『전쟁』을 발굴해 게재한 것은 쾌거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생생한 검열상이 그대로 보관된 원고를 고서점에서 매입했는데 이 검열원고에는 ‘김성근’이라는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조사해보니 8·15 후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김성근’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다.
그 후 임헌영은 대학입시 논술 학원 강사로 일하며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에서 ‘생활글수필쓰기’ 강좌를 개설했다. 주부들이 접근하기 쉬운 ‘생활글’이라는 단어를 창안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도록 독려했다. 그의 강의에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나중에는 대기번호를 받아 줄을 서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는 현대문화센터 모든 지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고 중앙대와 동국대에서도 강의를 이어갔다. 그의 강의를 듣고 수필가로 등단한 사람이 400명이나 될 정도로 그는 강의에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 2005년에는 한국산문작가협회에세이포럼 문학회를 중심으로 월간 『한국산문』을 창간해 수필잡지의 역사를 새로 써나갔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파동으로 임헌영은 현대문화센터 강의를 접게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낸 다큐 「백년전쟁」이 화근이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민족문제연구소에 더욱 헌신하며 지냈다. 그는 연구소 역사의 3분의 2 정도 되는 세월을 함께했다. 1991년 2월 27일(강화도조약 체결일)에 4명이 개소한 연구소는 현재 상근자 40여 명에 1만 2,000여 후원회원이 함께 학술연구와 실천운동을 병행하는 단체로 성장했다. 연구소는 2021년 2월 27일에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연구소는 그간 여러 업적을 이루어냈는데 가장 독보적인 활약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이었다. 1997년 IMF로 연구소가 큰 타격을 입자 전국교수들의 서명을 얻어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선언을 했고 2001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편찬위원회가 열리면 항상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친일파의 개념과 범주에서부터 이의신청의 수용 여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토론했다. 수록자 선정은 개인적인 호불호가 아닌 역사적인 시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든 관계자들이 압박을 극복하고 펴낸 『친일인명사전』의 공정성과 객관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사전에는 당시 2,000만 인구 중 4,000명 정도가 실려서 친일 협력자는 일제 하 전 민족의 0.02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를 계기로 온갖 매체와 국민들이 친일파 청산의 절실성과 당위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연구소는 여러 분쟁을 피해가지 못했으나 장지연, 박정희 등의 후손이 제기한 소송에서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승소했다.
임헌영이 이 대화록에서 강조한 역사는 인간과 문학과 정치가 얽힌 경험이다. 그것을 전달하는 그의 언어는 친절하고 따뜻하다. 그는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돌려 말하거나 피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우리에게 온전히 들려준다. 변하지 않을 문학과 역사의 복원을 위해 임헌영은 현재까지도 헌신하고 있다. 우리의 문학과 역사는 그가 꽃피워낸 열매들을 자양분 삼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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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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