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0년 추천 도서(20.3~21.2)

10월의 추천도서(2773) 침묵과 한숨

1. 책소개

거장 옌롄커가 자신의 글쓰기와 문학에 대해 말하다
가장 깊은 곳의 어둠까지 끌어내 쓴 빛나는 산문

『침묵과 한숨』은 중국 문학의 거장 옌롄커가 중국, 문학, 글쓰기에 대해 총체적으로 자기 생각을 밝힌 에세이집이다. 제목에 ‘침묵’이라는 단어가 있듯, 정치권력 아래서 그는 오랜 세월 검열을 당하며 두려움에 휩싸인 채 작품활동을 해왔다. 중국 네티즌들은 1989년 6월 4일의 톈안먼 사태를 입에 담지 못한 채 ‘5·35’ 혹은 ‘6월의 네 번째 날’이라고 지칭한다. 그렇지만 작가들조차 ‘1989년 6월 4일’이라고 기술할 자유를 쟁취하지 못한 것은 이미 글쓰기의 독립성이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옌롄커는 “권력이 나의 독립성을 물어뜯어 한입 베어 물거나 다리를 부러뜨림으로써 불구가 되게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은 그런 불구의 독립성을 부양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난 2013년 3월과 4월에 잠자리가 말 등을 타고 넘듯이 가볍고 민첩하게 미국 버클리대 밴쿠버캠퍼스에 이어 노스캐롤라이나대와 듀크대, 예일대, 하버드대를 거쳐 뉴욕대와 스워스모어대, 럿거스주립대까지 돌면서 강연을 했다. 중국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침묵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항상 배불리 먹고 늘어지게 잠만 자는 개와 다르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로 그들은 점점 생각도 할 줄 모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숱한 세월을 견뎌온 옌롄커는 이제 이 책에서 말문을 터뜨리면서 “자신이 개돼지와는 다른 존재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며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출처:교보문고

2. 저자

저자 : 옌롄커

중국 허난성에서 태어났고, 허난대학 정치교육과를 거쳐 해방군예술대학 문학과를 졸업했다. 1978년부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해 제1, 2회 루쉰문학상과 제3회 라오서문학상, 프란츠카프카문학상, 홍루몽상 최고상을 비롯한 20여 개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문단의 지지와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성취한 ‘가장 폭발력 있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에서는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미국과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롯한 세계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옌롄커는 자신의 고향 땅에 대한 기억으로 소설을 써냈는데, 『일광유년日光流年』 『물처럼 단단하게堅硬如水』 『딩씨 마을의 꿈丁莊夢』 『풍아송風雅頌』 『사서四書』 『작렬지炸裂志』 등이 모두 대지에 대한 비판과 배반이었다. 『물처럼 단단하게』는 ‘혁명’과 ‘성적인 주제’ 면에서 모두 금기를 범한 책으로 간주돼 쟁론을 비껴가지 못했고 『레닌의 키스受活』를 발표함으로써 작가는 군복을 벗어야 했다. 군인의 신분을 벗어나면서 옌롄커는 해방을 느끼며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를 썼는데, 또다시 중국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비판과 금지 대상이 되었다. 중국 현실 세계에 대한 도피와 풍자가 담긴 『사서』와 『작렬지』 역시 금서가 되었다.
옌롄커 자신은 『딩씨 마을의 꿈』이 “인성의 따뜻한 온정으로 가득한 정신의 여행”이었다고 하며, “쓰는 과정에서 최대한도로 스스로 현실과 역사에 대해 너그럽고 포용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금서 목록에 올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는 자기검열을 수없이 해 스스로를 “인격적 결함과 연약성의 실천 도감”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옌롄커는 자신이 “어둠을 가장 잘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산문집 『침묵과 한숨』에 그가 목격한 중국 현실과 문학의 어둠을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썼다. 불안, 두려움, 초조함이 평생 그의 뒤를 따라다녔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중국의 현실을 봤고, 이를 작품으로 쓸 수 있었다. 이 산문집은 그가 경험한 중국과 문학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출처:교보문고

3. 목차

서문_말을 하고 싶었다

1장 어둠을 느끼도록 하늘과 삶이 지명한 사람
2장 국가의 기억상실과 문학의 기억
3장 ‘다른 중국’의 비천함과 문학
4장 미국 문학이라는 ‘거친 아이’
5장 금서와 쟁론에 대한 몇 가지 견해
6장 나의 문학적 반성문
7장 중국에서의 글쓰기의 특수성
8장 두려움과 배반은 평생 나와 동행할 것이다
9장 고도의 권력 집중과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하늘 아래서
10장 존엄 없이 살아가기와 장엄한 글쓰기
11장 한 마을의 중국과 문학
12장 나의 이상은 ‘내가 생각하는’ 소설을 써내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_마음껏 외칠 수 있기를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나는 중국의 노인들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집단으로 자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 노동의 피로와 도덕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내면의 걱정과 운명에 대한 불안, 현실 세계에 대한 마지막 절망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현실에 직면할 때, 인간과 살아 있음과 현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흩어지지 않는 어둠이 거대한 안개처럼 나의 가슴과 생활, 글쓰기에 가득 차는 것을 느낀다. 나는 가장 개인적인 방식으로 이런 세계를 감지하고 글을 쓸 뿐이다. 내게는 창문을 열고 세계의 빛을 바라볼 능력이 없다. 혼란하고 부조리한 현실과 역사에서 질서와 인간 존재의 힘을 느낄 수도 없다. 나는 항상 혼란한 어둠에 둘러싸여 있어 어둠 속에서 세계의 밝음과 인간의 미약한 존재와 미래를 느낄 뿐이다. 심지어 나는 어두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만 어두운 작가라고 빛의 미움을 받아 사방으로 밀려나는 글쓰기의 유령이라고 할 수 있다._25쪽

그리하여 나의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도피에서 배반으로’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 가장 독립적인 인격 같은 쪽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글쓰기의 ‘반도叛徒’가 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반도’의 지향과 형성은 소설의 내용과 이야기, 인물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술 자체의 여러 요소가 된다. 예컨대 서술 방식과 언어, 수사, 구조의 기교와 문학에서의 문학과 세계관이 되어 한 걸음 한 걸음 고삐에서 벗어난 말처럼 먼 곳을 향해 달려간다. 더욱더 오해되고 오독되는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예컨대 『사서』와 방금 탈고한 『작렬지』는 중국의 현실 세계에 대한 도피이자 배반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피와 배반으로 직접적인 개입과 진실을 완성한다. 그리고 소설의 예술 사유에 있어서도 이 두 작품은 도피이자 배반으로서 중국 소설의 서사에 있어서 새로운 질서를 완성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지 중국 소설 고유의 집단적이고 정부 기관을 포함해 독자와 비평가 모두에게 인정받거나 수용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_226쪽

더 이상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농담과 말다툼, 한가한 잡담, 그리고 쌀과 땔감, 기름과 소금에 대한 감정과 집착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삶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추구와 정신적 황폐함에 대한 담담함과 자연스러움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나 자신이 이미 진정한 그 땅의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저 글쓰기를 위해 그 땅에서 소재를 찾고 이야기와 인물 형상을 찾고, 스토리와 디테일을 만나기 위해 가끔씩 고향의 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번 고향에 돌아갈 때마다 나는 항상 우리 형과 얼굴을 마주하고도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반나절을 함께 앉아 있어서 주고받는 말이 없다. 고향 집에 돌아가면 여전히 어머니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만 어머니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시면서 던지는 수십 년 전의 수레바퀴 같은 말과 시골의 생로병사에 관한 이야기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 누나들과도 한자리에 앉아서 조카들의 생활과 사업, 일과 농사에 관해 얘기를 주고받는 일이 아주 드물어진 것 같다. 이는 진실이지만 대단히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이 고향의 그 땅에 대해 곤혹감을 느끼고 있고 감정을 잃어가고 있으며 일상과 세속의 생활에 대한 인내심을 잃고 있는 반면, 세상사에 대한 번뇌와 인성에 대한 무감각과 마비는 더 가중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_255쪽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국가도 기이하고 사람들도 기이한 중국
그 어둠 속에서 글쓰기의 유령이 된 작가
그는 문학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사물의 기억을 연장하려 애쓴다
그 무수한 기억의 하류들이 이 산문집에 담겨 있다

초조와 불안이 글쓰기가 되다

이 책은 중국 문학의 거장 옌롄커가 중국, 문학, 글쓰기에 대해 총체적으로 자기 생각을 밝힌 에세이집이다. 제목에 ‘침묵’이라는 단어가 있듯, 정치권력 아래서 그는 오랜 세월 검열을 당하며 혹시 발밑에 뱀이 있지 않나, 하늘 위에는 매가 날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작품활동을 해왔다.
글을 고치는 자의 마음밭은 ‘초조’와 ‘불안’이 지배하는 검은빛이었다. 식사할 때면 옌롄커는 펜과 젓가락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었지만, 글을 쓸 때는 초조와 불안이 종이 위의 삶인지 아니면 그의 정신생활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글쓰기가 내 생명의 일부가 된 것처럼 두려움도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한다. 양보와 타협이 어느새 글쓰기의 규칙처럼 되어버린 그에게 출판하려고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인격 가운데 일부를 하나하나 파내야 하는” 작업이었다.
작가들이 정부로부터 검열당하고 그에 따라 출판 금지되거나 끊임없이 수정, 도피 작업을 하면서 중국인들 대부분은 집단 기억상실에 걸리게 되었다. 중국 네티즌들은 1989년 6월 4일의 톈안먼 사태를 입에 담지 못한 채 ‘5·35’ 혹은 ‘6월의 네 번째 날’이라고 지칭한다. 그렇지만 작가들조차 ‘1989년 6월 4일’이라고 기술할 자유를 쟁취하지 못한 것은 이미 글쓰기의 독립성이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의 연약성으로 인해 자아가 점점 축소되는 것은 (루쉰의 소설에서) 아Q가 마음속으로만 욕을 내뱉으며 이를 사회와 적에 대한 반항과 반격으로 여겼던 것과 다르지 않다. 옌롄커는 “권력이 나의 독립성을 물어뜯어 한입 베어 물거나 다리를 부러뜨림으로써 불구가 되게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은 그런 불구의 독립성을 부양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난 2013년 3월과 4월에 잠자리가 말 등을 타고 넘듯이 가볍고 민첩하게 미국 버클리대 밴쿠버캠퍼스에 이어 노스캐롤라이나대와 듀크대, 예일대, 하버드대를 거쳐 뉴욕대와 스워스모어대, 럿거스주립대까지 돌면서 강연을 했다. 말발굽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입은 쉴 틈이 없었다. 인위적으로 쌓아놓은 제방이 마침내 무너져 거센 물결이 다시 산천과 강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옌롄커가 평소 중국에서는 말하고 싶어도 감히 말할 수 없었던,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중국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침묵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항상 배불리 먹고 늘어지게 잠만 자는 개와 다르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로 그들은 점점 생각도 할 줄 모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숱한 세월을 견뎌온 옌롄커는 이제 이 책에서 말문을 터뜨리면서 “자신이 개돼지와는 다른 존재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며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두울수록 더 빛나는 문학

1960년 ‘3년 자연재해’(1960~1962)를 겪은 옌롄커의 유년 시절은 3000만 명이 굶어 죽은 일 때문에 온통 굶주림의 기억으로 덧칠되어 있다. 아직 몇 살 되지 않았던 그때 옌롄커는 어머니를 따라 쓰레기를 버리러 시골마을 울타리 쪽으로 갔는데, 흩어져 있는 꽃송이 모양의 관음토觀音土와 알갱이 모양의 황토를 가리키며 어머니가 말했다. “얘야, 잘 기억해둬라. 굶어 곧 죽을 것 같을 때 관음토와 느릅나무 껍질은 먹어도 되지만 황토와 다른 나무껍질은 절대 먹어선 안 된다. 그랬다가는 당장 죽거든.” 어머니의 뒷모습은 마른 낙엽 같았고, 옌롄커는 먹을 수 있다는 그 점토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먹을 것을 달라고 어머니한테 보챌 때마다 어머니는 ‘시련’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옌롄커는 이때 굶주림이 생사의 사슬처럼 자신의 목을 휘감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사슬에 목이 졸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자기 목숨이 “원반던지기 선수처럼 단번에 광야의 무덤 옆으로 던져버”려질지도 모른다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부터 옌롄커는 숙명적으로 어둠을 잘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 중국의 성장 속에서 왜곡, 변질, 부패, 부조리, 무질서를 읽어낸다. 인류가 수천 년의 시간을 들여 수립한 감정적·도덕적 질서, 그리고 인간 존엄의 척도가 그 광활하고 오래된 땅 위에서 해체되고 붕괴되고 소실되는 것을 본다. 법률의 준엄한 제도가 중국에서는 어린애들의 고무줄놀이로 전락한다. 그런 현실에서 작가가 민주와 자유를 논하려면 너무나 힘에 부치고 거센 권력의 바람에 맞서 옷깃을 여미면 팔꿈치가 드러날 정도로 운신의 폭이 좁다. 필부필부들은 음식과 생존, 곤경에 대한 걱정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무리지어 있는 작가들은 더 불안하고 초조하다.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이 민족의 초조감이 작가에게는 가장 빛나는 곳의 음영이 된다.
옌롄커는 사람들이 따스하다고 말할 때 냉기를 느끼고 사람들이 빛을 말할 때 어둠을 본다. 사람들이 행복감에 젖어 춤출 때, 그는 누군가 그들의 발밑에서 오라에 묶이고 걸려 넘어지며 구속되는 모습을 본다. 옌롄커의 글쓰기는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켜던 맹인처럼 어둠 속을 걸으면서 그 유한한 불빛으로 어둠을 비춰 사람들로 하여금 최대한 어둠을 보고서 그 어둠을 피하도록 만든다. 확실한 목표와 목적을 가져 그들의 존재가 빛나도록 하는 데 글쓰기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좋아하는 작품과 그저 그런 작품

옌롄커의 책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다. 자신의 문학 인생을 정리하는 이 책에서 저자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이 책이 내 창작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하나의 선명한 흔적은 될지언정 훌륭한 소설은 아니라는 자평이다. 같은 선상에서 『샤를뤄』 역시 군사문학과 사실주의 문학으로서의 의미만 가질 뿐이며, 만약 의미를 더 확대하자면 그 작품은 소멸해버릴 것이라고 평가한다.
한편 옌롄커는 독자들에게 『물처럼 단단하게』가 읽힐 기회가 꼭 있기를 바란다. 또한 『딩씨 마을의 꿈』과 『사서』를 많이 읽어주기를 기대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현실 생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싶어 『딩씨 마을의 꿈』을 쓰면서 최대한도로 현실과 역사에 대해 너그럽고 포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후 다른 작품들을 발표하자 옌롄커의 지인들은 물었다. “자네가 『연월일』과 『골수』 『일광유년』을 쓰던 시기의 창작은 정말 훌륭했네. 왜 계속 그런 작품을 쓰지 못하는 건가?” 그는 무기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마을을 지나면, 이미 그 가게는 없지.” 즉 중국은 더 이상 그때 그 시대나 현실에 놓여 있지 않아 작가의 심리나 현실도 그 시대의 절정의 글쓰기로 이끌지 못한다.
사실 옌롄커에게 항상 따라붙는 꼬리표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금서도 가장 많은 작가’라는 것이다. 검열자들은 『물처럼 단단하게』를 읽고 ‘혁명적인 면과 선정적인 면’에서 다 한계를 넘었다고 판단했다. 작가가 직접 베이징에 가서 연줄과 인맥을 동원해봤지만 이 책은 금서가 되고 말았다. 『샤를뤄』가 비판을 받아 유통이 금지되었을 때 옌롄커는 반년 가까이 침대 위에 올라가 검토서(반성문)를 써야 했다. 한 장 한 장 반복해서 검토서를 썼지만 한 번도 통과되지 못했다. 당시 옌롄커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짓는 삶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다. 『레닌의 키스』가 출간됐을 때 주변에서는 다들 ‘대단한 소설’이라고 말했지만 직업군인이었던 작가는 이 작품 때문에 군대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발표와 동시에 금서가 되었다. 그런데 부드럽고 포용적인 태도로 쓴 『딩씨 마을의 꿈』조차 금서가 됐다. 검열이 작가에게 사회적 낙인까지 씌우자 옌롄커는 글쓰기가 무덤이자 전쟁터가 된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럼에도 옌롄커는 ‘금서가 가장 많은 작가’로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쟁론의 대상’이기보다 그냥 한 명의 작가로 기억되길 바란다. 최종적으로 작가가 쓴 작품의 의미를 평가하는 기준은 인간과 인류의 감정 및 사물의 기억을 연장했는지의 여부가 된다. 문학작품이 연장한 기억은 인류에게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그 의미는 작가들과 현재의 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강줄기와 시간, 미래를 결정하며, 여기에는 무수한 기억의 하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연월일』에서 땅이 구운 것처럼 쩍쩍 갈라지는 상황 속에서 옥수수 종자 하나를 살리려는 농민의 분투는 씨앗 하나, 잎 한 줄기, 빗물 한 방울에 담긴 생명의 원리와 한계를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며, 그것이 인류의 역사와 삶을 어떻게 내팽개치고 보듬는지 보여준다.

땅의 문학, 땔감과 소금에 대한 집착에서 점점 멀어지는

많은 작가에게 그렇듯이 옌롄커에게 고향땅은 그의 작품의 끊임없는 원천이 되었다. 『일광유년』 『물처럼 단단하게』 『딩씨 마을의 꿈』 『풍아송』 『사서』 『작렬지』 등을 쓰는 과정이 모두 대지에 대한 비판과 배반, 혹은 땅의 문화에 대한 비판과 배반이었다. 그는 루쉰처럼 향토에 대한 원망과 어둠을 많이 계승한 작가로서 대지에 대한 온정보다는 그로부터 발견하게 된 어둠을 작품의 근간으로 삼았다.
한번은 고향의 한 독자가 옌롄커의 소설을 읽고는 작품 속 인물이 촌장의 아들임에 틀림없다고 떠벌리기 시작했고 이에 촌장은 크게 화가 났다. 설을 맞아 고향에 내려간 옌롄커는 술과 담배를 들고 촌장을 찾아가 침대 맡에 시립한 채 사과하면서 소설에 쓴 내용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전혀 관계없는 허구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촌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방 안은 질식할 것 같은 공기로 가득 찼다. 옌롄커는 결국 촌장에게 앞으로 고향 마을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안 좋은 일은 절대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고향을 떠난 지 이미 30여 년이 지난 지금 매년 몇 번씩 그 땅에 돌아가 머물다 오지만, 그곳 사람들과는 갈수록 주고받는 말이 줄어든다. 공통의 언어와 사유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 땅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가족과 친지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형과 얼굴을 마주보고는 며칠 동안 옌롄커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고향 집에 가면 여전히 어머니와 한방에서 잠을 자지만 어머니가 몸을 뒤척이면서 던지는 수십 년 전의 수레바퀴 같은 이야기에 더는 귀가 귀울여지지 않는다.
옌롄커에게 그들의 대화는 심적 괴로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더 이상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농담과 말다툼, 한가한 잡담, 그리고 쌀과 땔감, 기름과 소금에 대한 감정과 집착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삶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추구와 정신적 황폐함에 대한 담담함과 자연스러움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일상과 세속의 생활에 대한 인내심을 잃는 자신을 두려워하지만, 그러면서도 작가는 글쓰기를 위해 소재를 찾고 이야기와 인물 형상을 찾으며, 스토리와 디테일을 만나기 위해 가끔씩 고향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한순간도 중국 현실과 역사에 대한 대치와 관심을 포기하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 * *
이외에도 이 책은 미국 문학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 있는 분석, 러시아 문학과 중국 문학의 차이, 글쓰기는 어떤 상황에서 암흑을 뚫고 진실로 나아가다가 좌절되고 마침내 더 상승된 단계에 이르는지를 풍부하게 풀어놓고 있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삶이 투영되면서도 삶에 머물지 않고 60년간 목격하고 시도해온 글쓰기와 관련된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출처: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