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추천도서 (3784) 굿(gut, exorcism)
1. 책소개
“소나기라도 내리려는 것인가, 바람기마저 가을하다”
생生의 병리를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한국 소설의 정수
시대를 관통하는 문제적 작가 전상국 열두번째 소설집 출간
사실 소설 쓰기야말로 삶의 방식 중 가장 야비하고 던적스러운 광기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불쑥 치밀 때가 많았다. 그러할 때 나는 아무런 미련이 없이 문학을 버리곤 했다. [……] 그러나 손가락을 자른 도박꾼이 다시 도박장으로 돌아오듯 나는 어느새 글쓰기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한국일보』 2002년 7월 25일 자
전상국의 열두번째 소설집 『굿』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올해는 1963년 등단한 그가 작가 활동을 한 지 꼭 60년이 되는 해다. 전상국은 『우상의 눈물』 『아베의 가족』 『우리들의 날개』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며 한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문단 안팎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명실상부 한국 대표 작가의 길을 걸어왔다.
이번 신작은 2011년 『남이섬』 이후 소설집으로는 12년 만의 출간인 만큼 의미가 깊다. 초반에 실린 세 단편소설 「춘천 아리랑」 「봄봄하다」 「가을하다」는 김유정과 황순원을 기리며 쓴 오마주 작품이다. 이 천진하고 고즈넉한 이야기 뒤편에는 전쟁 이후 남겨진 상처, 부재의 자리가 주는 내면의 고통,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서사들이 담겨 있다. 특히 마지막에 배치된 중단편작 「굿」은 ‘한국전쟁의 악령’이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으며 전쟁의 뼈아픈 기억은 곧 잊지 말아야 할 역사임을 상기시킨다. 그는 무게감 있는 소재들을 긴장감 넘치게 풀어내며 해원(解冤)의 굿판으로 인도한다.
출처:본문중에서
2. 저자
저자 : 전상국
1940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춘천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거쳐 1985년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및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바람난 마을』 『하늘 아래 그 자리』 『우상의 눈물』 『아베의 가족』 『우리들의 날개』 『형벌의 집』 『외등』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사이코』 『온 생애의 한 순간』 『남이섬』, 장편소설 『늪에서는 바람이』 『불타는 산』 『길』 『유정의 사랑』 등이 있으며,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등 산문집 10여 권이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동인문학상, 김유정문학상, 한국문학상, 후광문학상, 이상문학상 특별상, 현대불교문학상, 경희문학상, 이병주국제문학상 등을 수상, 황조근정훈장과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작가의 말
모두를 내려놓아야 할 나이에 잔불 살리듯 공을 들인 아홉 편의 중·단편소설을 모아 생애 마지막 소설집을 묶는다.
앞쪽 세 편의 짧은 소설은 영원한 청년 작가 김유정과 내 인생의 큰 바위 얼굴 황순원 선생님에 대한 오마주로, 그들을 기리는 일에 나름의 열정을 다했다는 자부쯤으로 읽히지 않을까 싶다.
「오래된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와 「집을 떠나 집에 가다」 등 두 편의 작품은 기존의 관심거리였던 그 정체나 현상이 괴이쩍은 실종 혹은 죽음에 대한 실존성 더듬기와 맥 을 같이한다.
중편 「굿」과 그 앞에 묶인 세 편의 단편은 1963년 등단작 「동행」을 비롯한 분단 관련 작품들이 그러하듯 현재진행형인 한국전쟁의 악령, 오늘까지도 불신과 증오의 천형을 사는 사람들의 절규, 그 울분을 모티프로 한 이야기들이다.
글 쓰는 일이 즐거웠다. 전업 작가의 길을 걷지 못한 그 열 없음을 감추기라도 하듯 글 쓰는 일에 미쳤을 터이다. 그것은 남들과 다른 시각에서 나만의 문법으로 세상을 재단해 독자 의 몫을 남긴다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능청과 긴장의 소설 미학, 그 창의의 마음 떨림 같은 것. 특히 한껏 가려 쓰는 이 낱말들이 서사의 진정성은 물론 작품의 완성도와 무관치 않다는 장인 정신, 곧 우리말 우리글 사랑의 그 신명이 내 글쓰기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 신명의 흔적을 뒤적이는 독자들의 얼굴에 떠오를 웃음을 기대한다.
2023년 6월
춘천 금병산 자락에서
전상국
출처:본문중에서
3. 목차
춘천 아리랑-동백꽃 오마주
봄봄하다-봄·봄오마주
가을하다-소나기오마주
오래된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집을 떠나 집에 가다
어디에도 없고 어딘가에 있는
저녁노을
조롱골 우리 집 여인들
굿
해설 | 서스펜스의 해원(解冤)
작가의 말
출처: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허지만 난 그때 데련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웂었다. 왜냐면 낯짝엔 웂는 점이 내 응데이에 아주 크다랗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 아부지가 내 이름을 점순이라구 지었다구 한다. 그래야 담에 아들을 낳을 수 있다구 했지만서두 우리 집 대문 새끼줄엔 여태꺼정 빨간 고추는 한 번두 안 걸렸다. 아이고, 얘기가 딴 데루 흘러가구 말았다. 데련님이 국시 언제 먹을 거냔 말에 내 주둥이에서 쏙 튀어나온 고눔에 고 말.
나 시집 안 갈 테야유! 「봄봄하다-「봄·봄」 오마주」」
떠나기 위해 버린다. 떠나서 돌아오지 않기 위해 모두 버린다. 문서 세단기가 씹을 수 있는 만큼의 두께로 일기장을 파쇄한다. 본디의 모습 없애기, 그것이 버리는 것이다. 윙-트드드드드드…… 종이에 갇혀 있던 생각들이 전혀 다른 흔적으로 갈린다. 탈것을 타지 못한 그 지랄 같은 열패를 조각조각 자른다. 버려지지 않고 어느 구석엔가 끼어 있는 있는 그네의 흔적을 버린다. 사랑, 알아서 불행. 유치찬란한 내 아포리즘을 버린다. 보고 싶은 것은 욕심, 그리움은 본능. 그 본능으로 산속을 헤매던 모습이 담긴 CD가 산산이 부서진다. 「오래된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아버지가 죽이고 싶은 적이 모두 내 적이 된 것이지요. 누가 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닐, 우리 어머닐, 내 동생을 죽였는지, 우리 아버지가 저 꼴로 죽은 건 누구 때문이냐, 그 원술 갚고 싶었다 그겁니다. 찾아서 다 죽이고 싶었지요. 세상천지 모두 적이고 어디에도 내 편이 하나도 없었다 그 얘깁니다. 혼자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집어 던지곤 했지요.” 「저녁노을」
증조부가 그 나무 곁에 집을 짓고 산 뒤 삼대째 조롱골에 혈혈단신으로 살고 있다는 집주인 노인의 말이다. 원래 이 지점에 암자가 하나 있었고 그 암자에 살던 보살이 수타사 앞마당 고목 느티나무 아래 씨가 떨어져 자란 어린 묘목을 하나 뽑아다가 심은 것이 이렇게 자랐다고 했다. 한때는 조롱골 아랫말 사람들이 그 느티나무 아래에서 산신제를 지냈을 정도로 아직도 마을 수호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예가 그렇게 좋수?”
나무 아래 오래 머무는 정을 향한 집주인의 물음에 정이 대답했다.
“너무 좋아요.”
“그리 좋으면 이 땅 사서 새 집 짓구 사시우.” 「조롱골 우리 집 여인들」
이쯤 되면 67년 전 죽은 최용호가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 아니, 최용호를 사칭하고 다니는 그 사람이 했다는 말을 믿기로 한다. 그러나 꿈인가, 혼란스럽다. 뒤죽박죽인,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그 일들이, 수시로 나를 괴롭혀온 불면의 그 악몽이 최용호란 사람의 출현과 함께 다시 도질 조짐이다. 쓰쓰단 단쓰쓰, 정대수 일등병이 벗겨진 신발 뒤축을 세우지 못한 채 주저앉는다. 총소리가 들린다. 가을 하늘 위로 아득히 총소리가 울린다. 나는 눈을 뜬 채 꿈을 꾼다. 「굿」
출처: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비극이라는 현실의 안팎으로 펼쳐지는 삶의 끝과 시작
물음과 여운에 입각한 부재의 형식은 결코 간명한 결론이나 의미화로 수렴되지 아니하는 문제를 독자들로 하여금 온몸으로 끌어안고 고민하게 만드는 위력을 지녔다. 그렇게 전상국 소설이 도입하고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결정 불가능성에 한없이 계류되고 그리하여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 된다. (조형래 문학평론가)
표제작 「굿」은 “죽은 사람이 살아왔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분명 오래전 둔짓골에서 마을 사람들의 쇠스랑에 찔려 죽은” “전 부귀리 인민위원회 위원장” 최용호라고 주장하는 인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마을 사람들은 그를 ‘한청단’ 출신이라며 피한다. 부귀리에서 자라 부귀학교 교장이 된 ‘나’는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유년 시절 기억 속 ‘정대수’가 떠오른다. 전쟁 중 비교적 고립되어 있던 부귀리 산속에서 국군 통신병이었던 그와 모스부호놀이를 했던 장면이었다. ‘나’는 그가 인민군에게 잡혀가는 악몽에 매일같이 시달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정대수’가 납북됐으리라 여겼지만 자칭 ‘최종호’는 그가 죽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인민위원회였던 자신 때문에 그 원혼이 “구천에서 떠돌았다”고 덧붙인다. 이후 동생 ‘정배’와의 통화에서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 국정원이 간첩을 잡아가지 않는 시대라 해도 어떻게 마을에 빨갱이가 나타날 수 있느냐는 우문에 ‘나’는 현답을 내놓는다. “이제 전쟁이 끝날 때도 됐다, 그런 거 아닐까?”
이 작품은 좌나 우로 나뉘는 정치적 이념 없이, 그저 남과 북으로 쪼개져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억울하게 죽어간 피해자들의 울분과 회환을 감싸 안는다. 부귀리 사람들의 아픈 기억을 억지로 꺼내러 온 듯한 수상한 인물 최용호도 “복수를 위해 귀향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피해자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관한 해원(解冤)의 제의를 주관하”(조형래 문학평론가)러 온 것이다. 결국 최용호의 증언을 토대로 전쟁 당시 돌아가신 선친들의 묘를 이장하는 행사가 거행된다. 이때 치러지는 의식이 ‘굿’이다. ‘굿’은 또한 땅이 움푹하게 파인 구덩이, 즉 묫자리와 영어 형용사 ‘good’을 함축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의미를 정교하게 녹여낸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게 될 감정은 이것이다. “통일이 된 거 가터. [……] 아이고 됴타.”
부재의 흔적이 남긴 상처와 고통을
예측 바깥으로 전복시키는 힘
아무튼 난 춘배 걔 상판때기만 쳐다봐두 되우 좋다. 근데 증말 이상한 건 춘배만 보면 그리 절로 흥이 솟으면서도 괜히 맘 한구석이 짠하다는 거다. 그건 울 아부지가 나 시집갈 때 됐단 얘길 할 때마다 「춘천 아리랑」 그 서러운 한 대목을 흥얼거리게 되는 거와도 같다. (「춘천 아리랑-「동백꽃」 오마주」」)
한편 이 책에서 작가는 김유정과 황순원의 대표작인 「동백꽃」 「봄봄」 「소나기」 결말 이후를 이어 쓰며 “각각의 소설이 남기고 있는 부재의 자국에 관한 경외 어린 천착의 방식”(조형래 문학평론가)을 보여준다. 「춘천 아리랑-「동백꽃」 오마주」는 ‘춘배’ 앞에서 보란 듯이 닭싸움을 붙이던 ‘점순’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노란 동백꽃 덤불에서 [……] 울 어머니가 날 불렀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춘배하고 밸 맞췄을” 것이라며 「동백꽃」 이후를 자연스럽게 그려나간다. 그러나 ‘점순’은 부모님에 의해 곧 시집을 가야 하고, 작심한 듯 춘배에게 마지막으로 마음을 표한다. “우리 도망갈래?” 「봄봄하다-「봄·봄」 오마주」에서는 원작 속 점순네 데릴사위인 ‘나’에게 ‘칠보’라는 이름이 생긴다. 데릴사위라며 머슴처럼 부리기만 하고 정작 점순과 혼사시킬 생각은 없는 아버지처럼, 점순도 자꾸만 “야학당 선상님”한테 눈길이 간다. 「가을하다-「소나기」 오마주」에서는 중학생이 된 ‘현수’가 개울가에서 조약돌로 물수제비를 뜨며 “5학년 단발머리 소녀”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죽음 이후에도 늘 현수의 곁을 따르는 소녀와 나누는 대화문은 원작의 여운을 그대로 이어냈다.
「오래된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부터 이어지는 작품들은 부재에서 오는 상처와 사회 부조리,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오래된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의 주인공 ‘나’는 회사에서 주변인을 자처하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고자 한다. 극심한 멀미 탓에 탈것 없이 걷고 또 걷다 산속에 당도한다. 그곳에서 만난 오래된 굴참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부재의 대상인 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집을 떠나 집에 가다」의 ‘나’는 ‘유인수’가 가출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부인은 “집 떠난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뿐이다. ‘나’는 그 부재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산속에서 여러 사람의 환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비로소 ‘유인수’를 매개로 좇던 문제를 결론짓는다. 조형래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떠남에 대해 의미 부여하고 달관의 매듭을 짓는” 일일 터이다. 「저녁노을」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가족은 물론 팔까지 잃어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동창이 노인이 된 후 동창회에 등장한다. 「조롱골 우리 집 여인들」은 강원도 산골에 여성들이 모여 사는 “조롱골 우리 집”이라는 공간에서 출발한다. ‘로즈 박’은 ‘유선달’이라는 기자가 과거 자신의 첫사랑이 다시 나타난 것이라 믿고 “조롱골 우리 집”의 취잿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자극적인 오보를 쓰고도 당당한 ‘유선달’을 보며 여인들은 시원하게 가래침을 뱉어버린다.
각 작품 속 인물들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기억해야 하는 진실과 감정 들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고민해봐야 한다는 전언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기억하는 한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이 있으므로, 전상국이 그린 『굿』의 울림은 지금 더 유효하다.
출처: 「굿」 출판사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