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추천도서(26.1-)/2026-05

5월의 추천도서 (4828) 느리게 마이너노트로

'-') 2026. 5. 22. 10:00

 

 

1. 책소개

 

■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목소리를 길어 올려 마이너노트短調로 연주한 수필집
■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시작해
3년을 돌보며 마지막을 지킨 민중사학자를 향한 추도문까지
앞서 간 자들을 향한 애도와 비탄의 엘레지
■ 누군가의 힘껏 살아온 삶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법에 대하여
■ 돌봄의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가 자신의 삶으로써 증명해 낸 돌봄의 윤리

어느덧 여든을 바라보게 된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가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응시하며 “가슴에 사무치는 기억들”을 마이너노트短調로 연주한 수필집. “시대에 휘둘리며 달려” 왔지만 시절을 함께했던 선배와 동년배들도 하나둘씩 떠나가고, 돌아갈 곳 없는 노년의 시간 속에서 회한 가득한 인생을 돌아본다.
‘페미니스트 우에노 지즈코’의 공적인 자아에서 내려와 “웅크리고 있던” 내면의 목소리를 정성껏 길어올린 이 책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해 마지막을 지켜 주기 위해 결혼까지 감행했던 민중사학자 이로카와 다이키치에게 바치는 추도문으로 끝이 난다. 가부장제가 무엇인지 알려준 장본인이라며 힐난해 왔던 아버지가 어떤 이상을 품고 있었는지 되묻는가 하면, 앞서 걸어온 자들의 업을 되새기며 그들이 자신에게 전해준 것들에 대한 감사와 계승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를 말한다.
“책과 개만이 친구였던” 외로운 어린 시절을 지나 학생운동이 괴멸된 이후 막막하기만 했던 대학 시절을 통과한 우에노는 이제 “앞서 걸어온 여자들”로부터 넘겨받은 언어와 사상을 넘겨줘야 할 노년의 사회학자가 되어 있다. “다른 목소리로 몇 번이고 언제까지나 이어 불러야 할” 것들을 전하며 그녀는 말한다. “모쪼록 이 바통을 받아 주세요.”

 

출처: 본문중에서

 

 

 

 

2. 저자

 

 

 

 

저자: 우에노 치즈코

 

일본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교토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도쿄대에서 가르쳤다. 현재 동 대학 명예교수이자 NPO 법인 여성행동네트워크WAN 이사장으로 있다. 1994년, 『근대 가족의 성립과 종언』으로 산토리학예상을, 2011년 『돌봄의 사회학』으로 아사히상을 수상했다. 그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가부장적 사회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글들뿐만 아니라 늙음과 돌봄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글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노후에 대한 제안과 인생 상담, 도쿄대 신입생 축사 등 학문적 글쓰기에만 국한되지 않는 그녀의 글들은 대중적으로도 큰 공감과 신뢰를 얻고 있다. 국내에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여자들의 사상』, 『느낌을 팝니다』,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불혹의 페미니즘』, 『독신의 오후』 등 다수의 저서가 소개돼 있다. 이 책은 ‘후기 고령자’가 된 그녀가 공적인 자리에서는 드러내지 않던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응시하며 그간 숨겨 두었던 면모들을 ‘마이너노트로’ 연주한 수필집이다.

 

출처: 본문중에서

 

 

 

 

3. 목차

 

I 바소 콘티누오 7
아버지의 딸로서 / 배교자 / 강아지파 / 위생 관념 / 스승의 디엔에이 / 후회투성이 인생 / 쓸모에 대하여 / 버리지 못하는 이유 / 불요불급

II 인테르메조 65
초콜릿 중독 / 초밥이 먹고 싶다……! / 플라워보이 / 연극이라는 극도 / 산 타는 여자들의 어제와 오늘 / 삼림한계선 / 화장실 사정 / 텍스트 속 베네치아 / 여행은 사람에 대한 기억

III 리타르단도 131
정신적 외상 경험 / 참전을 원하는 여성을 만난다면? / 학교에 지뢰를 설치하고 왔다 / 월경의 변천사 / 사회학자와 아티스트 / 낳지 않는 이기주의? / 인지증 당사자가 본 세상 / 의사가 죽는 법 / 분노의 이유 / 되돌릴 수 없는 것들 / 용서를 주고받는다는 것

IV 녹턴 205
감정 기억은 되살아날까 / 손의 나이 / 낙상 사고 / 독신의 사귐 / 우에노지즈코 기금: ‘송은’을 위해 / 인재를 키운 인재: 야마구치 마사오[1931~2013] 추도문 / ‘남자다운’ 죽음: 니시베 스스무[1939~2018] 추도문 / 나카이 씨는 ‘신의 나라’로 갔을까?: 나카이 히사오[1934~2022] 추도문 / 전후 최고의 여성 니힐리스트: 도미오카 다에코[1935~2023] 추도문 /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모리사키 가즈에[1927~2022] 추도문 / 눈속임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함: 니시카와 유코[1937~2024] 추도문 / 여자의 자유를 위해 일상에서 싸우다: 다나카 미쓰[1943~2024] 추도문 /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끝까지 사유하다: 쓰루미 슌스케[1922~2015] 추도문 / 이로카와 씨, 고마워요: 이로카와 다이키치[1925~2021] 추도문

후기 301
옮긴이 후기 304

 

출처: 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63-64) 내가 있든 없든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수천만 명의 인간이 죽어도 지구는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절망일까, 희망일까? 내 앞에도 자연이 있고, 내 뒤에도 자연이 있으며, 나의 존재도 부재도 자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희망처럼 보인다. …… 한창때가 지난 것, 쇠퇴해 가는 것, 사라져 가는 것을 좋아한다. 쇠락은 사실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사람도, 사물도, 나라도, 도시도 태어나서 피고 지고 썩는다.
(140) 경험의 계승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정신적 외상에 대한 취약성은 ‘공감’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적인 관계는 그 취약성 자체를 치유한다.
(184) 인지증 진단에 사용되는 ‘하세가와 척도’를 고안한 인지증 치료의 일인자 하세가와 가즈오長谷川和夫 박사는 본인이 인지증에 걸려 2021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전부터 인지증 환자에게는 주간 돌봄센터가 좋다고 설파해 왔지만 정작 본인이 인지증에 걸려 주간 돌봄센터에 다니게 되자 처음에는 가고 싶지 않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그 마음은 이해된다. 나도 그렇게 말할 것 같다.
(194) 요양 보호 대상 판정을 받더라도 주간 돌봄센터 같은 데는 절대 다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어쩌면 헨미 씨와 같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한다. 늙는다는 것, 돌봄을 받는다는 것이 실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는 이런 목소리의 기저에, 이토록 분노와 비애가 서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곤 한다.
돌봄 대상이 되면 우리는 무력해진다. ‘무력하다’는 것은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노인은 어린애가 아니다. 아이처럼 순진하지도 무구하지도 않다. 아이처럼 아름답지도 않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온갖 고생과 경험이 몸에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여기까지 살아 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조금만 여의치 않아도 맥없이 무너질 만큼 불안정한 것이다. 인지증을 앓는 노인들은 자주 화를 낸다. 화를 낼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자존심이 상처받기 때문이다.
(195-96) 나는 강연의 마지막을 “안심하고 돌봄받을 수 있는 사회를!”이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요양 보험 제도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제도가 내 마음까지 구해 주지는 못한다. 뜻대로 안 되는 몸, 여의치 않은 움직임,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심스러운 삶에 이가 갈리는 그 원통함과 애처로움까진 제도가 닿지 않는다. ...... 늙음 앞에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여의치 않은 신체라는 타자를 껴안은 채, 우리는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가야 한다.
(199-200) 망자의 시간은 멈춰 있다. 그들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 죽은 아이의 사진 앞에서 늙어 가는 부모의 시간은 점점 멀어지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망자의 사진 앞에서 내 나이는 망자를 따라잡고 추월해 결국 망자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후에야 그 가치를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단샤리’ 운운하며 단출하게 산다고들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기억의 지층이 쌓여 두터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엔 즐겁고 기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 기억 속에는 잃어버린 것,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것,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넘쳐 난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들, 인생은 필연의 연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미숙함을 탓하며 후회해도 무르고 다시 시작할 순 없다. 우연에 휩쓸려서, 생각이 짧아서, 충동에 사로잡혀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왔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 수업료는 충분히 치렀다. 후기 고령자가 되었다. 동년배의 부고를 듣게 된다. 지기知己를 잃으면 그 사람과 공유하고 있던 기억 속의 내가 모조리 저세상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그렇게 나 자신이 깎여 나간다. 내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고 증언해 주는 사람을 잃으며 내 기억의 윤곽이 흐릿해져 간다.
(204) 죽을 때 후회로 남기고 싶지 않은 일…… 그것은 바로 용서할 수 있는 상대를 용서하고,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용서받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 그것은 분명 자기 인생과 화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면, 여의치 않은 관계로 끝나 버린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싶다. “몇 달 후면 죽는데 그전에 만나고 싶어서……”라고 말을 꺼내면 상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반대로, 누군가가 그런 말을 꺼낸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까? “잘 왔어”라고 말한 다음 말없이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안아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274) 나는 강연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저는 저보다 앞서 걸어온 여자들로부터 그 언어와 사상을 넘겨받았습니다. 저보다 앞선 여자들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께 넘겨야 할 시기가 제게도 찾아왔습니다. …… 바통이라는 건, 받아 줄 사람이 없으면 그 자리에 떨어지고 맙니다. 저는 이전 여자들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께 이렇게 넘겨드리고자 합니다. 제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 모쪼록 받아 주세요.
같은 노래를, 다른 목소리로, 몇 번이고, 언제까지나 이어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는, 확실히 넘겨받았으니까.

 

출처: 본문중에서

 

 

 

 

5. 출판사서평

 

■■  여든을 바라보는 페미니스트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목소리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해 명쾌한 어조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페미니스트, 비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들을 비판하며 “가족 없이도 존엄하게 살고 죽을 수 있는 사회”를 역설해 온 독신자, 돌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약자가 약자로서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를 외쳐 온 사회학자. 이 같은 ‘장조’의 공적 자아의 모습으로만 친숙한 우에노 지즈코가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단조’의 목소리를 길어올려 쓴 에세이들을 모았다.
“나고 자란 가정에서 가부장제에 대해 배웠다”며 늘 힐난해 왔던 “독불장군” 아버지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10년을 실의와 고독 속에 살다 돌아가셨다. (모두 의사가 된) 두 아들과 달리 자신에게는 차별적인 기대를 갖고 있었기에(“지코짱은 말야, 참한 새색시가 되어야지”) 사회학자가 되는 길을 반대하지 않았던 아버지. 딸은 모든 걸 ‘쓸모’로만 평가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에서 한때 “쓸모없는” 고고학자를 꿈꾸었고, 아버지의 결벽증에 대한 반발심에서 “아무거나 먹고 아무 데나 앉는 생존형 인간”이 되었으며,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의 이중성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찾은 아버지의 환자들을 보며 직업인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칠십 넘어서까지 최신 의학 잡지를 끼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던 모습에서 연구의가 되고 싶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의중을 헤아려 보기도 하며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때늦은 화해를 시도한다.
책과 개만이 친구였던 외로운 소녀는 학생운동이 괴멸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 대학 캠퍼스에서 꿈도 의욕도 없이 방황하던 대학 시절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 “재주도 능력도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절망감에 허덕이던 시절을 지나 스물세 번의 낙방 끝에 겨우 전문대 교원 자리를 얻는다. 도쿄대 교수 우에노 지즈코가 있기 이전에 단카이 세대 여성으로서 그녀가 어떻게 일본 사회를 통과하며 자신을 형성해 왔는지가 촘촘히 그려진다.

■■■  노년의 깨달음 속에서 자신과 타인의 인생에 건네는 화해의 제스처

¶ (210-11) 지는 해의 빛은 필사적이면서도 호화롭다. 절절하게 사무치는 감정은 있지만, 더 이상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다. 처음부터 혼자였다. 마지막도 혼자다. 그렇게 풍경이 가르쳐 준다. … 죽기 전에 몇 번이나 바다를 마주하고 일몰을 볼 수 있을까?
¶ (222) 들어 봤다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은 결국 타인의 고통일 뿐이었다. ‘그때 그 사람은 이런 고통을 견디고 있던 걸까’, ‘암 말기였던 그 사람은 진통제를 쓰면서 나를 만나러 와줬던 걸까’ 하며 이런저런 장면이 떠올랐다.
¶ (190) 이시쿠라 씨의 세 가지 조건은 모두 가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독신인 나는……? 괜찮다. 피로 연결되지 않아도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관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가족 같은’이라고 부를 필요조차 없다.


마침내 도착한 노년의 시간들을 우에노는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을까?
“나도 ‘후기 고령자’는 처음이라……” 하면서 써내려간 성찰의 글들은 때로는 따스하게, 때로는 냉철하게, 또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노년의 시간들을 그려낸다.
어느 날은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져 허리를 크게 다쳤다. 강의를 가던 길이라 좌약 진통제를 넣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연단에 섰다. 그렇게 ‘독신의 노후’라는 강연 주제를 시전하고 3주를 칩거하며 그녀는 그제야 깨닫는다. 사회학자로서 그간 많이 듣고 안다고 생각하며 말해온 것들이 실은 ‘타인의 고통’일 뿐이었고, 자신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몸도 마음도 여의치 않은 삶. 늙고 병들어 돌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직접 경험한 노년의 이야기들엔 “분노와 비애”가 서려 있다. 특히 헨미 요의 노년에 공감하며 써내려간 에세이는 이 책의 백미다. 전 세계를 누비던 행동파 작가 헨미 요는 뇌출혈로 반신마비가 된다. 노인요양시설에서 운영하는 주간 돌봄센터에 다니게 된 헨미 씨는(그는 소설로 아쿠타가와상을, 시로 다카미 준상을, 논픽션으로 고단샤 논픽션상을 받았다) 인지증을 앓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두뇌 트레이닝’을 받게 된다. 요양보호사가 하나씩 돌아가며 질문을 시작한다. “‘차갑다’의 반대말은 뭘까요~~” 이 같은 취급에 노여움이 치솟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헨미 요는 말한다.
“여기서 저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심신의 노화. 그것에 초조해 하는 나 자신. 그리고 속절없이 쇠약해져 가는 상황을 아직 체념할 수 없는 나 자신에 조바심이 나서, 저런 사람들과 나를 필사적으로 구분하려 했고 동시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구분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눈물이 고인다. 풍경이 흐릿하다.”
이 글을 읽고 우에노는 얼어붙는다. 요양 보호 대상 판정을 받더라도 주간 돌봄센터 같은 데는 절대 다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와 같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194-96) 돌봄 대상이 되면 무력해진다. ‘무력하다’는 것은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노인은 어린애가 아니다. 아이처럼 순진하지도 무구하지도 않다. 아이처럼 아름답지도 않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온갖 고생과 경험이 몸에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여기까지 살아 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조금만 여의치 않아도 맥없이 무너질 만큼 불안정한 것이다. … “자, 여러분, 함께해요”라고 말하는 주간 돌봄센터의 레크리에이션 같은 데 나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단체 행동을 좋아한 적 없는 내가 늙었다고 그런 걸 좋아하게 될 리 없다. 요양보호사가 귀에다 ‘할머니’라고 속삭이면 ‘나는 네 할머니가 아니야’라고 쏘아붙일 것 같다. ‘회상 요법’ 등을 명목으로 ‘당신의 인생을 들려주세요’ 하면서 말벗 자원봉사자가 찾아오면, ‘생판 모르는 당신한테 내 인생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어’ 하며 쫓아낼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그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식사도 목욕도 내 몸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노년의 현실이다.
나는 강연의 마지막을 “안심하고 돌봄받을 수 있는 사회를!”이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요양 보험 제도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제도가 내 마음까지 구해 주지는 못한다. 뜻대로 안 되는 몸, 여의치 않은 움직임,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심스러운 삶에 이가 갈리는 그 원통함과 애처로움까진 제도가 닿지 않는다.……늙음 앞에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여의치 않은 신체라는 타자를 껴안은 채, 우리는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가야 한다. ……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노년의 시간은 또한 “기억의 지층이 두터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에노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 ‘잃어버린 후에야 그 가치를 깨닫는 것들’ 그리고 무엇보다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것들’을 생각한다.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들, 인생은 필연의 연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미숙함을 탓하며 후회해도 무르고 다시 시작할 순 없다.” “생각이 짧아서, 충동에 사로잡혀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
우에노가 죽기 전에 꼭 해두고 싶은 일은 자신의 미숙함으로 인해 상처받았거나 오해 때문에 관계가 틀어져 버린 사람들과 용서를 주고받는 것이다. 부모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기 전에, 또 어긋난 인연들이 떠나버리기 전에 화해를 해두는 것은 자기 인생과 화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죽기 전에 만나고 싶다고 하면 “잘 왔어” 하면서 말없이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안아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그녀는 말한다.
우에노는 늘 강연의 끝을 동화작가 이와사키 치히로의 말을 완창하며 맺는다. “왜 옛날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한심할 정도로 어리석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실패를 거듭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조금씩 세상을 알아 왔는데, 왜 옛날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간 어른, 노년에 대한 성찰들이 깊은 울림을 전한다.


■■■■  선배와 동료들을 떠나보내며 생각한 ‘산 자’의 책무들 : 기억과 계승, 그리고 돌봄의 일

¶ (280) 모리사키 씨, 당신이 일본 근대 사상사에 남긴 거대한 발자취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것을 남자들이 ‘사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분명 여자의 언어로 자아낸 독자적인 사상입니다. 모리사키 씨, 우리보다 앞서 걸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나는,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 (294) 인터뷰 마지막 날 쓰루미 씨가 사주시는 식사를 함께한 후, 나는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이별의 예감이 들어 혼자 울었다. 쓰루미 씨는 이제 없다. 이미 노년이 되었는데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나에게, ‘언제까지나 내게 기대지 말고 자네 발로 걸어가게’라고 저세상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다.
¶ (295) 2018년 실내에서 넘어져 대퇴골이 골절된 후, 3년 반 동안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던 그를 돌본 것은 나였다. 병원도 시설도 안 가겠다, 이대로 집에서 지내고 싶다는 말에 그가 정말 좋아하던 야쓰가타케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산장에서 마지막을 지켜 주었다.

책의 마지막 4부는 선배와 동료 페미니스트들을 떠나보내며 “결코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추도문들이다. 이 구슬픈 ‘만가’輓歌는 자신이 했던 말과 글의 배후에 “잔향으로 울려 퍼지는” 선배 페미니스트들, 때마다 초콜렛을 전하던 “좋아하는 아저씨들”, 보잘 것 없던 젊은 시절 자신을 끌어 주고 밀어 주며 소중한 것들을 나눠 주었던 스승에 대한 기억들로 가득하다. 신좌파의 패배 이후 잡지 『현대사상』을 통해 일본의 ‘비제도권 학술 저널리즘’을 견인했던 야마구치 마사오, 우에노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길잡이 별 같이 여겼던 「사상의 과학」의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에서부터 다나카 미쓰, 도미오카 다에코, 모리사키 가즈에 등 “여성해방”도 “페미니즘”도 없던 시절 “여자만의 언어를 내려주었던” 1세대 페미니스들의 업을 기리는 추도문들은 그 자체로 일본의 한 시대를 풍미한 지성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같은 앞선 자들에 대한 존중과 계승의 태도는 비단 지식인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세대의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로서 우에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등 역사의 증언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의 중요성 또한 역설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품이나 사진, 기록 같은 매개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직접 듣는 일, 그렇게 “타인의 경험을 깊이 흡수함으로써” 맺어진 인간적인 관계는 취약성 자체를 치유한다.
책의 마지막은 민중사학자 이로카와 다이키치에 대한 추도사다. 여기서 우에노는 “파트너”도 “가족”도 아니지만, 대퇴골 골절로 거동이 어려워진 이로카와를 3년간 돌본 장본인이 자신이었음을 고백한다. 사회과학이 윤리적인 학문임을 가르쳐 주었던 사람, 서슴없이 천황제를 비판하던 사람, 도쿄대 출신이면서도 관의 녹을 먹지 않겠다며 도쿄대 교수 제안을 거절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일본 여성들이 용기를 얻을 거”라며 우에노에게 도쿄대 입학식 축사를 하라고 격려해 주었던 사람. 독신자도 집에서 돌봄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부르짖었던 그녀가 이런 이로카와 씨와 함께한 마지막 날들은 어떤 의미였을까? 집에서 당사자의 뜻에 따라 돌봄을 받다 떠나보냄으로써 본인이 늘 주장해 온 돌봄의 윤리를 증명해 낸 것일까?
그를 잃고 부르는 마지막 만가는 상실의 아픔을 짙게 드리우며 긴 여운을 남긴다.

 

출처: 느리게 마이너노트로 」후마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