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추천도서 (4787)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읽기

1. 책소개
종말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읽어야 하는가?
해마다 10월이 되면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발표한다. 2024년에는 한강 작가가 호명되면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등장했다. 그리고 2024년에는 우리에겐 낯선 헝가리 작가의 이름이 불렸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이미 유럽에서는 잘 알려진 헝가리 작가로, 우리나라에서는 벨라 타르 감독의 〈사탄탱고〉라는 영화로 접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영화는 7시간이 넘는 엄청난 러닝타임과 흑백으로 느리게 흐르는 영상, 암울한 정서까지, 작가가 각색한 대로 느리게 흐른다.
한림원에서는 그를 선정한 이유로 “파멸의 공포 속에서도 예술의 힘을 다시 일깨우는 강렬하고 비전적인 작품”을 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사회주의와 헝가리 사회의 몰락을 겪으며, 그 아포칼립스의 정서를 인류와 지구의 멸망까지로 확대해가며 이야기한다.
그는 멸망을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기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마침표 없이 길게 흐르는 용암 같은 활자의 진창에서 결말은 끝없이 지연된다. 낯설고도 난해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 한 줄기 희미한 희망을 느낀다. 종말은 계속 순환된다. 그 말인즉슨 종말 다음에 시작이 있다는 말이다. 멈춰 선 것만큼이나 느리게 흐르는 서사는 나름의 리듬과 호흡으로 이야기를 계속 이끌어간다. 그렇게 그들은 끝없이 종말을 겪고,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 독법이 필요한 이유
번역부터 상당한 난도를 지닌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은 난해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마침표 없이 쉼표와 겹문장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어느새 소설 속 장면 한 귀퉁이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철저하고도 세세한 묘사, 유려한 문장과 불쑥 튀어나오는 블랙코미디까지, 호흡을 타면 끝까지 몰입하고 마는 매력이 있다.
쉼표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만연체 문장은 어디서 끊어 읽을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벽돌책에 가까운 볼륨은 독자에게 진입장벽을 높인다. 서사는 “용암처럼 느리게 흐르”고, 사건은 앞으로 나아가나 싶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길을 찾았나 싶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파멸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길을 잃는다.
《사탄탱고》의 번역가이기도 한 조원규는 카프카와 니체의 허무주의 및 파멸의 서사와 헝가리의 붕괴라는 역사를 이어지는 좌표상에 놓는다. 그리고 세 가지 세계를 관통하는 감각으로 이명(耳鳴)을 꼽는다.
영화감독이자 평론가인 정성일은 영화와 소설을 겹쳐 읽는다. 소설은 너무 빠르고, 영화는 너무 늦게 나왔다고 언급한다. 탱고와 같이 여섯 스텝 앞서 무너지는 시간을 쓴 소설과 롱테이크의 미학으로 여섯 걸음 물러선 영화를 살펴본다. 소설은 끝없는 활자 속에서 순환하는 종말을 이야기할 때, 영화는 스크린 위에서 시간의 무게를 견딘다.
문학평론가 장은수는 헝가리 사회주의와 서구 문명의 붕괴를 거쳐 우주적 파멸로 확장해가는 종말을 살펴본다. 종말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다. 희망은 위로라기보다는 기만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사탄탱고》의 이리미아시, 《저항의 멜랑콜리》의 거대한 고래를 거쳐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은 끝까지 쥐고 갈 것인지 묻는다.
서평가 금정연은 교수와 천사라는 두 축으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세계를 나눈다. 관찰하고 기록하는 교수(혹은 의사)와 희생당하는 에슈티케, 벌루시커라는 천사로 나뉘고 합쳐지는 소설의 서사를 살펴본다. 소설과 같이 흘러가는 인생은 없지만,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소설을 읽는 행위가 한 인생을 사는 것과 같은 경험임을 놀랍도록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가라고 평한다.
한편 극작가이자 소설가 고영범은 《라스트 울프》를 연극적 관점에서 희곡을 읽듯이 살펴본다. 이야기가 겹치고 교차되면서 더 큰 이야기를 엮어내고, 결국 이야기는 한 지점으로 수렴된다. 이렇게 복잡하고도 유려한 글쓰기 방식이 액자 속 액자, 이야기 속 이야기를 더 명확히 그려낸다고 본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본 다섯 편의 글은 작품을 해설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다양한 독법을 소개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읽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따라가며,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사람과 분야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섯 편의 글은 너무도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멈출 수 없이 종말을 향해 가는 이 세계에서, 과연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출처: 본문중에서
2. 저자
저자: 조원규
시인, 번역가. 198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아담, 아들 얼굴〉 〈밤의 바다를 건너〉 〈난간〉 등 여섯 권의 시집을 냈으며, 독립문예지 〈베개〉의 편집·발행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강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하였으며, 게르하르트 베어의 《유럽의 신비주의》, 안겔루스 질레 지우스의 《방랑하는 천사》, 페터 한트케의 《시 없는 삶》, 크러스너 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 등을 번역했다.
저자: 정성일
영화감독, 영화평론가. 〈로드쇼〉의 편집차장, 〈키노〉의 편집장, 〈말〉의 최장수 필자를 거치며 대한민국 영화 비평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2009년 겨울 첫 번째 장편영화 〈카페 느와르〉를 찍었으며, 《나의 작가주의: 왕빙, 영화가 여기에 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필사의 탐독》 등을 썼다.
출처: 본문중에서
3. 목차
책을 펴내며 / 4
순환하는 종말 속에서_《사탄탱고》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덫 / 조원규 / 10
사탄과 함께 탱고를,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여섯 스텝 앞으로, 벨라 타르는 여섯 스텝 뒤로 / 정성일 / 34
이토록 망해버린 세계에서_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문학 세계 / 장은수 / 78
교수와 천사 / 금정연 / 112
고정된 회오리의 세계_마지막 늑대 / 고영범 / 134
출처: 본문중에서
4. 책속으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니체에서 카프카를 경유하여, 주인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알면서도 여전히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며 헛되이 움직이는 존재들을 그린다. 아니, ‘카프카의 개인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리석은 슬픔의 군상, 그들의 황폐함을 형상화한다. 카프카의 인물들이 여전히 성에 도달하려 하고 법정의 판결을 이해하려 애쓴다면, 《사탄탱고》의 인물들은 그마저도 포기한 채 무의미한 순환 속에서 춤춘다. 그들은 주인이 죽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새로운 주인(이리미아시)이 나타나기를 갈망하며, 춤을 추다 취해서 뻗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크러스너호르커이가 이를 1985년, 냉전 말기 헝가리를 배경으로 썼다는 점이다. 공산주의 체제라는 ‘주인’은 이미 정당성을 잃고 사실상 죽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카프카가 합스부르크제국 말기의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명을 포착했다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20세기 후반 동유럽의 또 다른 이명-이미 죽은 이데올로기의 메아리-를 기록한 것이다._15~16쪽
쉼표와 줄임표로 문장을 늘이면서 감각적인 사물들을 묘사해나갈 때, 그 표현의 ‘과잉’이 오히려 ‘허망함’을 부각할 때, 독자는 바로크적 주제를 깨닫는다. 17세기 바 로크 정물화에서 풍요로운 과일과 화려한 꽃이 화면을 가득 채우지만 그 한가운데에는 해골이 놓여 있었던 것처럼. 바니타스, 모든 것은 헛되다.
이처럼 소설 곳곳에서 ‘용암처럼 흘러가는 덩어리진 언어적 축적’을 헤치고 나아가며 독자는 힘겨워하지만, 그것은 타협할 수 없다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의에 부합하는 일이다._27쪽
유럽 문예사에는 허무와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매개체로 예술과 형식을 상정하는 예술 형이상학의 전통이 있다. 니체로부터 카프카를 경유하여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에 이르기까지, 하강하는 어두운 예술 형이상학의 노선을 거론할 수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문학은 이전보다 더 어둡지만, 구원하지 않으며 동행하는 예술의 가치를 익숙하게 증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함께, 여전히 예술 안에서 추락하는 쪽을 택한다._31~32쪽
나는 이 저택을 시적으로 읽는 대신 역사의 정치경제 학으로 돌려놓고 싶다. 텅 빈 저택. 귀족들이 살았던 집.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집만 남았다. 왜냐하면 귀족의 시작이 끝났기 때문이다. 귀족의 하부 토대였던 콜로누스 들은 생산력의 모순 과정을 통해 예속을 벗어났다. 하지만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나긴 투쟁. 그리고 농민들은 집단농장에서 새로운 생산양식의 삶을 시작했다. 지금 그들은 농장을 떠나서 여기에 도착해 6시 43분에 이리미아시가 한 약속, “여러분을 위해 사흘 동안 잠도 못 자고 몇 시간씩 빗속을 걸어왔어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관청 저 관청을 찾아다녔구요”라는 말에 다시 한번 속는다. 미래의 보금자리. 새로 시작하리라는 약속, 황홀한 자유의 공기, 해방의 감각. 하지만 그런 곳이 정말 지상에 남아 있을까? 집단농장의 농민들을 위해 서 누가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을까?_44~45쪽
롱테이크 촬영.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하는 촬영. 찍고 있는 동안의 영화의 시간과 장소의 물리적 시간의 일치. 첫 신을 롱테이크로 촬영했지만, 이 영화의 원칙은 아니다. 종종 벨라 타르는 카메라의 이동을 잊어버린 것처럼 세워놓기도 한다. 또한 1부 두 번째 장 경찰서 관공청에 서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보고할 때 과도할 정도로 전통적인 문법에 따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쇼트를 진행 한다(shot_reverse shot). 하지만 두 가지를 함께 말해야만 분명해질 것이다. 하나는 카메라는 둘 중 하나의 방향으로 이동한다. 수평으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수직으로 물러나거나 다가간다. 수직으로 물러날 때는 인물이 앞으로 다가오기 때문이고, 다가갈 때는 등 뒤에서 따라갈 때다. 모든 장면이 두 개의 방향만 있는 것은 아니다. 2부 네 번째 장 ‘천국의 비전인가, 환각인가’. 슈타이거발트의 술집에서 이리미아시는 이제까지 집단농장의 마을 사람 들의 성향을 한 명씩 부르고 페트리너는 그걸 받아쓴다. 그때 카메라는 빙빙 원형을 그리면서 돌기 시작한다. 2부 두 번째 장 ‘그저 일과 걱정뿐’. 관공청 사무실에서 이리 미아시와 페트리너가 ‘상스러운’ 단어들로 작성한 보고 서를 다시 타이핑하는 두 명의 관료를 찍을 때 카메라는 타이핑을 하는 책상을 중심으로 마치 행성 주변을 회전 하는 위성처럼 느리게 빙빙 원형 운동을 한다. 같은 내용은 같은 방법으로 찍을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회전한다._65~66쪽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시나리오를 쓰고 벨라 타르가 연출한 마지막 영화는 〈토리노의 말〉이다. 1889년 1월 3일 니체는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한 마부가 자신의 말에 채찍질하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말의 목에 매달려 울었다. 세계의 종말. 정신의 종말. 주변에서는 모두 〈사탄탱고〉를 본 다음 절망을 보았다고 말한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읽은 다음 환멸을 보았다고 말한다. 나는 희망을 본다. 이번에는 더 잘하겠다는 의지의 희망, 이번에는 승리하겠다는 두 번째 긍정의 내기._76~77쪽
그래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을 ‘바닥난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입을 떼었고, 희망이 (아마도 절대로) ‘있을 수 없음’을 말하면서 입을 닫았다. 이런 극단적 비관주의는 인식이자 경고이고, 새로운 삶의 스타일의 탐구이자 선언이다._83쪽
이 작품은 세상 모든 만물을 해로운 것과 유익한 것으로 나누고는 유익한 것만 남기려는 계산적 이성이 작동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경고한다. 작가가 “질서에 대한 애착”이라고 부르는 욕망의 작동, 인간의 이익만을 기준 삼아 세계의 질서를 잡으려는 서구적 이성의 뒤에는 해롭다고 판별된 생명의 사체가 쌓이고, 그 피가 우리가 딛고 선 대지를 녹여 진창을 이루는 “극악무도하고 무자비한 참학”, 그러니까 지옥이 열려 있다.
끝없는 진보와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계몽 이성이 곧 끔찍한 폭력이자, 무참한 종말을 앞당기는 촉매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이로부터 사냥하는 이성, 그러니까 근대 서구 문명의 종말을 냉정하게 선언한다. 그건 처음엔 동물을 사냥했지만, 다음엔 인간을 사냥할 것이고, 마지막엔 자신마저 사냥할 것이다. 인간 이성, 그 예측하고 계획하는 이성은 더 이상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합리적인 인간이 애쓰고 몸부림칠수록 오히려 종말의 기울기는 커질 뿐이다. 우리에겐 ‘다른 길’이, 합리적 희망보다 예술적 절망에 내기를 거는 모험이 필요하다._90~91쪽
전쟁, 기후 붕괴, 정치적 분열 등, 우리 시대의 특징은 우울과 절망이다. 단테가 지옥의 밑바닥에서 사랑의 천국을 꿈꾸었듯, 쓰라린 세상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훨씬 더 큰 힘이 필요하다. 작가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줄 수 있기를, 어떻게든 이 시기를 살아 견딜 수 있기를 바란다.”(노벨위원회)
절망 속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이는 모든 위대한 작가의 조건이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문학의 특징이다._110쪽
크러스너호르커이에 따르면, 원래 천사란 위에 계신 분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였고, 천사 자체가 곧 메시지였 다. 그러나 오늘날의 새로운 천사에게는 날개도 없고, 전할 말도 없다. 우리와 똑같이 옷을 입고 우리 사이를 걸으며,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좀 건네주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할 메시지가 없다. 따라서 거기엔 어떤 대화도, 이해도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말한다. 그들은 더 이상 천사가 아니라 희생자라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희생당하는 존재들이라고.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상상의) 청진기를 꺼내 진동판과 종 모양 부분을 우리의 가슴에 부드럽게 가져다 댔을 때 들려오는 ‘운명의 소리’를 통해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_121쪽
천사는 여전히 희생되고, 교수는 여전히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다. 하지만 4부작의 교수는 더 이상 안전한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 그는 벗어나고 싶지만 결코 벗어날 수는 없었던 세계(와 그 자신)를 함께 불태워버리는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져 있고, 벵크하임 남작은 전과 달리 이 소설을 쓴 작가 쪽으로 조금 더 가까워진 천사처럼 보인다. 이 새롭게 조정된 미묘한 거리가, 라슬로가 말한 “한 권의 책”을 향한 네 번째이자 마지막 시도의 결과라는 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_128쪽
그러니까, 액자 속의 이야기가 고조되는 한편으로 액자를 이루는 이야기 또한 바텐더를 화자의 위치로 올려놓으면서 일종의 전환을 이뤄낸다. 액자 속 여행담은 고조되지만, 액자인 슈파쉬바인 이야기에서는 여행담의 화자인 ‘그’를 끌어내려 엇갈리게 교차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줄기의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굳고, 그 자리 위로 또 다른 줄기의 용암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런 겹침과 교차의 원리는 이야기의 큰 단위에서뿐만 아니라, 문장의 진전 과정도 관통한다. 물론 이 작품은 전체가 마침표 없는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져 있으니 이 말은 하나의 쉼표에서 다음 쉼표 혹은 다른 문장부호로 이어지는-혹은 단절되는-하나의 문장 단위를 일컫는 것인데, 이런 겹침과 교차는 이야기가 무르익으면서 한 지점으로 수렴되기도 한다._149~150쪽
출처: 「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읽기 」알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