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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추천도서(1766) 헤르만 헤세의 행복 - 헤르만 헤세

'-') 2017. 12. 31. 10:00



1. 책 소개


독일의 시인,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헤르만 헤세의 행복론

제1,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어려운 시기에 헤세가 보여준 내면에 충실한 일관된 태도는 1946년 괴테 상과 노벨 문학상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듯이 매우 모범적이었다. 그는 ‘인간’과 ‘삶’의 가치를 지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 가치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긴 나머지 문학자의 사명이라 굳게 믿고, 순순히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는 것을 펜과 실천으로 주창하였다. 그는 인간적인 고뇌를 함께 번민하는 시인, 혼미의 시대에 있어서의 신앙의 탐구자, 충실한 자기 고백을 실천하는 창조자였다. 그는 인간의 내면의 모순 즉 영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그 두 혼 사이의 투쟁을 가장 깊이 번뇌하고, 그 속에 반대의 일치를 찾아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작가이다. 이러한 작가의 인간상은 ‘진실되게 살고자 염원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좋은 길동무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행복론』에 실린 작품들은 헤세의 소설에서 특징적인 수상(隨想)이나 에세이를 뽑아 역자가 제목을 붙여 한데 묶어 구성하였다.
출처 : 교보문고
2. 저자

저자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는 독일의 소설가, 시인. 
슈바르츠발트의 칼프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에 스위스에 정착하여 1923년에는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독일 낭만주의와 인도철학에 영향을 받은 작가로 기계화된 도시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의 고독, 지성과 감성 사이의 갈등, 그리고 예술가 또는 방랑자처럼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난 사람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헤세의 소설은 인간의 지적 능력과 감각적인 능력의 종합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크눌프], [데미안], [지와 사랑], [황야의 늑대], [유리알 유희] 등이 있으며 1946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 교보문고
3. 목차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7 

오 아름다운 구름이여 · 15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 20 
낚시의 즐거움 · 29 
사랑의 미학 · 36 
행복론 · 45 
성숙한 노년에 이르는 길 · 58 
소명(召命)과 자유 · 64 
동양과 서양 · 88 
헤세 연보 · 112
출처 : 본문 중에서
4. 출판사 서평

이 책을 읽는 분에게 

헤르만 헤세는 큰 행운을 타고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헤세 자신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85세의 노령을 맞이할 수 있어서, 인생의 모든 단계를 체험하고 그 체험을 나 자신의 고유한 방법으로 묘사하고 기록할 수 있는 행운을 타고난” 시인이다. 일반적으로 재능이 있으면 있는 만큼 위험에 노출되는 비율도 증가하고. 삶의 방식이 강렬하면 할수록 수명도 단축되는 것이 흔한 경우이다. 헤세도 인생에 있어서 위기도 두 차례(14세 때와 46세 때의 자살 시도)나 있었으나, 우연과 주위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재로 태어난 많은 예술인들이 자기보다도 앞서 세상을 떠난 반면, 자신은 인생의 모든 단계(행, 불행을 막론하고)를 직접 체험하는 행운아라고 여기며 살았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문학적으로 그리고 인간형성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1877년 7월 2일 독일 서남부 뷔르템베르크 주의 시골 마을 칼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네스는 에스토니아(당시는 러시아령) 태생 발트계 독일인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선교사의 길을 걸었다. 어머니 마리는 스위스계 독일인 선교사 헤르만 군데르트의 딸로 인도에서 태어났다. 헤세의 사고가 동양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세계주의)적인 것은 이와 같은 가계(家系)와 가정환경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년시절의 헤세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촉명하고 음악애호가이며, 동물 식물 등을 사랑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대단히 고집이 강하고 반항심도 강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세 자신의 「요약 이력서」에서 그는 “나는 신앙심 깊은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만이 아니고, 원래 심정이나 본성에 있어서도 프로테스탄트(반항하는 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그 가정 분위기에 반항하고 학교의 주입식 교육에 반항하며 일생 동안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이 본성을 끝까지 지키며 성장하였다. 14세에 어려운 주(州)정부 시험에 합격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걸머지고 명문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여러 학교규칙 주입식 교육 권위적인 교사 등과 자주 충돌하고 또 기숙사를 도망쳐 나오고 끝내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그 결과 채 1년도 견디지 못하고 퇴학당하게 된다. 이어서 전학하게 된 고등학교도 박차고 나온다. 

그 이후로 상점 판매원, 아버지 밑에서의 조수 생활, 기계공 등을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 때의 심정을 그는 역시 「요약 이력서」에서 “열세 살 때부터 나는 시인이 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는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고 밝히고 있다. 19세에 서점 점원이 되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헤세는 고독한 환경에서의 여가시간을 독서에 몰두하여 내면의 충실을 다졌다. 그 자각적인 수업이 결실을 맺어 26세 때에 작품 「페터 카멘친트」에 의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헤세는 마침내 시인으로서 세상에서 인증을 받고 결혼도 하고 새집에 이사도 들고 아들 딸 낳고 어느 정도 세속적인 행복을 누리게 된다. 

오랜 고생 끝에 찾아온 이 평온한 삶 속에서 초기의 걸작들이 계속 발표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고향’과 ‘유년시절’이 그 모태가 되고 있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자신의 체험과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으며,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삶을 신조로 자신의 실제적 체험을 작품화하는 일을 일생 동안 관철한 시인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어지는 듯 보인 이 평화로운 삶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의하여 산산 조각나고 만다. 스위스에 살고 있던 헤세는 전쟁에 참전하기 위하여 징병검사를 받았으나 신체검사 불합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독일 영사관을 방문하여 자원봉사를 지원한다. 포로로 잡힌 독일 병사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발행되는 문고, 신문 등의 편집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시인, 학자 등이 전쟁의 찬미자로 변하여 배타적인 애국심을 조장하는 선전에 참여하는 것을 본 헤세는 스위스 시문의 논설을 통하여 “그러지 말자, 벗들이여” 하며 반성을 촉구하였다. 

그로 인하여 헤세는 총 공세를 받게 된다. ‘배신자’ ‘매국노’ ‘병역기피자’ 등으로 비난이 쏟아지고, 그 탄핵기사가 대대적으로 독일신문에 실렸다. 

이때 어느 누구도 헤세 편에 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변호하고 격려한 사람은 훗날 서독 초대 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스와 프랑스 문호 로맹 롤랑이었다. 그 후 헤세는 전쟁봉사의 격무, 아버지의 죽음, 자식의 발병, 처의 정신병 악화 등으로 심한 신경장애를 일으켜 정신병 치료를 받게 된다.

이때 헤세는 정신분석학자 랑(J.B. Lang)을 만나게 된다. 헤세는 그에게서 장기간 치료를 받으면서, 랑의 권유로 프로이트(S. Freud)와 융(C.G. Jung) 등의 정신분석 서적을 통하여 자신의 무의식을 탐구하였다. 랑과의 대담은 곧 문학적인 결실을 보게 된다. 그 작품이 「데미안」이다. 이 작품은 전쟁 직후 혼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던 독일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데미안」은 후기 헤세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창작이었다. 

이 작품이 간행된 1919년 헤세는 병든 처와 헤어지고 자식들은 이웃에 맡기고, 베른 교외의 집을 떠나 남 스위스 테신 주(州) 루가노 호반 몽타뇰라(Montagnola)로 옮겨 간다. 이곳이 결국 시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옮겨온 뒤 수년간 생활은 어려웠으나 창조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클링조르의 마지막 여름」, 「싯다르타」 등의 작품이 계속 이어졌다. 

헤세의 결혼생활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 헤세는 그해 9월 마리아 부인과 정식으로 이혼하고 이듬해 루트 벵거와 결혼하는데 이 부인과도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1927년 이혼한다. 그리고 1931년 친구들이 몽타뇰라에 세워준 새집으로 이사하고, 루마니아 태생의 니논 돌빈과 결혼하였다. 이 세 번째 부인이 시인의 죽음까지 평생을 해로하였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어려운 시기에 헤세가 보여준 내면에 충실한 일관된 태도는 1946년 괴테 상과 노벨문학상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듯이 매우 모범적이었다. 그는 ‘인간’과 ‘삶’의 가치를 지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살아가는데 가치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긴 나머지 문학자의 사명이라 굳게 믿고, 순순히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는 것을 펜과 실천으로 주창하였다. 

그는 인간적인 고뇌를 함께 번민하는 시인, 혼미의 시대에 있어서의 신앙의 탐구자, 충실한 자기 고백을 실천하는 창조자였다. 그는 인간의 내면의 모순 즉 영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그 두 혼 사이의 투쟁을 가장 깊이 번뇌하고, 그 속에 반대의 일치를 찾아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작가이다. 이러한 작가의 인간상은 ‘진실되게 살고자 염원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좋은 길동무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헤세의 소설에서 특징적인 수상(隨想)이나 에세이를 뽑아 역자가 제목을 붙여 한데 묶은 것임을 밝힌다. 
오 아름다운 구름이여! (「페터 카멘친트」에서)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아름다워라 청춘이여」에서)
낚시의 즐거움(「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사랑의 미학(「페터 카멘친트」에서)
행복론(「행복론」에서)
성숙한 노년에 이르는 길(「노령에 대하여」에서)
소명(召命)과 자유(「유리알 유희」에서)
동양과 서양(「인도에서」에서)
― 2017년 박환덕(서울대 명예교수) 씀
출처 : 범우사